착하게 잘 자란 이의 실체

"이 구역의 미친 통제왕은 나야'

by 깨닫는마음씨



"아유, 착하게 참 잘 자랐네."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들으며, 그럴 때마다 상냥한 눈웃음과 예의바른 몸짓으로 그에 화답하는 이들이 있다.


품성이 좋다고도 한다. 가정교육을 잘 받은 결과일테니, 저집 부모님 또한 참 교양있고 훌륭한 분들이시겠다고 감탄들 한다. 콩 심은 데 어찌 팥이 나겠냐며, 가문의 영광이 된다.


잘 자랐다고 평가되는 이러한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쇼에 강하다는 것이다. 이를 악물고 근엄한 표정으로 비장하게 도리를 다하는 비극이든, 천연스럽게 웃으며 과장된 제스쳐와 함께 그래도 조금은 수줍은 뉘앙스로 사람들과 교류를 나누는 희극이든 간에, 이들은 대체로 사회적 관계에서 펼쳐지는 연극에 능하며, 또 그 연극을 즐긴다.


소위 말해, 무대 위의 재간둥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잘 자란 이의 본질이 바로 이 재간둥이 아이라는 것이며, 그 주요한 활동은 바로 애교와 재롱이라는 것이다.


정직하게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우리는 그가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우리에게 애교와 재롱을 부리지 않는 이에 대해, 즉 우리에게 별로 귀엽게 보이지 않는 이에 대해, 참 잘 자랐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한다.


"참 고생하며 살았겠구나."


결국 잘 자랐다는 평가를 이끌어내는 핵심적인 요인은, 유들유들하게 노출되는 그의 모습, 즉 우리에게 유들유들함을 경험하게 해주는 그의 언행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애교와 재롱이 체화되어 우리에게도 그 애교와 재롱의 힘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이를 우리는 잘 자랐다고 인식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애교와 재롱은 어떻게 체화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사실 긴장에 대한 방비책으로 성립되었다.


잘 자란 이가 사람들 앞에서 애교와 재롱을 부리는 이유는, 사람들로 인해 유발되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자기의 재간을 통해 사람들이 웃게 되면, 그 웃음과 함께 긴장도 날아가는 것만 같다.


긴장한다는 것은 두렵다는 것이다. 이 잘 자란 이는 결국 사람들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잘 자란 이는 그렇게 자기를 두렵게 만드는 사람들을 더는 두렵지 않은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데 총력을 매진한다.


이것은 마치 두려운 엄마 앞에서 애교와 재롱을 부려 엄마의 기분을 좋게 해주려는 아이의 모습과 같다.


그런데 이 아이는 지금 정말로 무엇을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통제다.


아이는 지금 통제욕으로 가득하다.


통제욕은, 두려운 것을 두렵지 않게 만들려는 욕구다.


애교와 재롱이 체화된 형태로 잘 자란 이들은 사실 이 통제욕이 아주 많은 이들이다.


모든 것을 다 통제하고 싶어하는 이들이다.


두려운 것을 두렵지 않은 것으로 바꾸어 긴장을 완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이 통제욕이지만, 이제 통제욕 자체가 이처럼 더욱 거대한 것으로 팽창됨에 따라 통제욕은 재미와 쾌락의 요소가 된다. 통제욕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모든 것을 다 통제하는 일에서 재미와 쾌락을 얻게 된다.


이를테면, 인생의 초창기에 자기를 통제하는 엄마가 두렵게 느껴져, 그 앞에서 애교와 재롱을 부림으로써 오히려 역으로 엄마를 통제하는 데 성공적인 경험을 한 이들이, 결국에는 그 자신이 통제욕의 화신이 되어 재미와 쾌락을 위해 통제를 집행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통제에 대한 통제의 발달이며, 곧 통제의 반복이다.


그래서 자각이 필요하다.


잘 자란 이는 주변의 긍정적인 평가에 힘입어, 자기를 통제했던 엄마와는 다르게 자신은 유연하고 개방된 자유의 영혼인 것처럼 쉬이 착각하곤 한다.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한 그 자신이 바로 누구보다 통제욕의 화신이다.


정직하게 이해해볼 수 있다.


소위 잘 자란 이는 늘 자기의 핵심적인 무기로 애교와 재롱을 활용한다. 때문에 자기의 장기인 애교와 재롱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아주 불편해한다. 거의 대부분 적대하기까지 한다. 거기에는 이러한 신념이 작동한다.


"내가 이 정도로 귀엽고 친절하게 대해주면, 나를 좋아하고 사랑해주는 일이 당연한 거 아냐?"


이 신념은 다시 이렇게 표현된다.


"내가 이 정도로 귀엽고 친절하게 대해주면, 나에게 복종해서 내 통제에 따라야 하는 거 아냐?"


이 잘 자란 이는 자기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일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이다. 자기의 통제에서 벗어남으로써 늘 잠정적으로 자기를 두려움에 노출되게 하는 상대를 도무지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잘 자란 이는 자기의 애교와 재롱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즉 자기에게 통제되지 않는 상대를 반드시 말살하려 하게 된다.


물론 노골적으로 하면 자기의 유들유들한 이미지가 훼손되기 때문에, 은밀하게 그 말살의 사업을 진행한다. 우리가 흔히 '수동공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형태다.


겉으로는 동의하는 모양새를 취하나 실은 비협조적이며, 자기의 통제를 벗어난 모든 상황에 합리성을 가장한 냉소적 태도를 적용하고, 내심 일이 잘 진행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속에서 그 자신은 모든 것을 다 헌신한 선의의 순교자처럼 보이기를 시도한다.


자기 엄마가 자기에게 하던 행위를 그대로 배워, 통제할 수 없는 상대에게 이제는 자기가 그 행위를 가하는 것이다.


바로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애교와 재롱으로 살아가는 착한 이들은 사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대단히 폭력적인 이들이다.


통제 아니면 말살이, 즉 자신의 독재 아니면 상대의 죽음이 이들의 논리다.


가장 폭력적인 이들은 가장 통제적인 이들이며, 가장 통제적인 이들은 가장 애교와 재롱이 많은 이들이다. 가장 착하게 잘 자란 이들이다.


우리는 "착하게 참 잘 자랐다."라고 평가되는 이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가장 통제하고 있으면서 통제하지 않는 척할 때, 곧 깨어있는 시민인 척할 때, 열려있는 민주적 지도자인 척할 때, 비폭력적이고 무고한 존재인 척할 때, 이 통제의 의도가 낳은 폭력의 기운은 은폐 속에서 더욱더 커져간다.


자기가 지금 통제하고 있다는 자각이 망각되니, 자기 자신이 바로 폭력의 주체라는 사실 또한 망각됨으로써, 그 폭력의 기운은 돌고 돌아 끝내 통제의 주체 자신을 치게 된다. 통제의 주체를 미치도록 힘들게 만들기에 이른다.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낫다.


"이 구역의 미친 통제왕은 나야."


자신이 이미 미쳤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은 중요하다.


통제에 미쳤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통제할 수 없는 것도 통제하고자, 그렇게 이미 미쳤으니, 이제는 미칠 일을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통제하지 않으면, 어느새 두려운 것들이 자기에게로 습격해 들어와, 자신을 자신이 아니도록 미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방문을 잠그지 않으면, 어느새 엄마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새벽 내내 한탄과 신세타령을 하며, 자신을 자신이 아니도록 미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이제는 정말로 하지 않아도 된다.


이 구역의 미친 통제왕은 나이기 때문이다.


가장 미친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알게 된다.


엄마보다 더 미치면 더는 엄마가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엄마로 인한 두려움의 역사가 종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나는 가장 미치고자 했다는 사실을.


너무나 두려워서 그 두려움을 잊으려고 가장 미치고자 했다는 사실을.


이 구역의 미친 샌드백은 나였다.


맞을 때마다 상냥한 눈웃음과 예의바른 몸짓으로 엄마에게 화답하던, 애교와 재롱이 가득한 샌드백이었다.


아유, 착하게 참 잘 맞는 샌드백이었다.


우리는 "착하게 참 잘 자랐다."라고 평가되는 이들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폭력을, 이제는 정말로 멈추어도 된다.


나는 이제 샌드백이 아니다.


이미 미쳤다. 끝까지 다 미쳤다. 완전히 다 마쳤다.


사람은 결코 통제될 수 없는 존재라는 배움을 완전히 다 마쳤다.


배운대로, 나는 바로 그 사람으로만 살 것이다.


내 구역의 사람은 나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사람으로 우뚝 선 그 사람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착하게, 참 잘 자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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