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의 전성시대

"선비모델은 왜 악인가? 혹은 꼰대는 왜 모두를 화나게 하는가?"

by 깨닫는마음씨




오늘날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서 예찬되고 지향되는 정치인 모델은 바로 선비모델이다. 특히 586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에게서, 또 그 지지세력인 음모론자들, 연예인들, 연출가들에게서 이 선비모델은 노골적으로 추구된다.


포청천처럼 인간의 도리를 들먹이며 호통도 치고, SNS에서 고풍스러운 시조도 읊고, 더욱 뜻있고 개념있는 지사처럼 보이기 위한 연극활동도 하고, 난리도 아니다.


노자는, 사람들이 왕이란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정치가 최상의 정치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정치는 오히려 왕을 몰랐던 사람들까지도 왕을 모를 수가 없게 만든다. 정치에 관심없던 이들마저도 어떻게든 정치에 눈길을 돌리게 한다. 관심종자의 정치다.


선비모델이란 것이 애초 관심종자의 모델인 까닭이다. 그 중에서도 악이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기능하는 관심종자의 모델이다.


악이란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단순하고 유용한 정의가 있다.


'생명을 억압하는 것'


악이란 생명을 억압하는 활동이다.


때문에 살아있는 유기체의 생명작용으로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억압하는 일이 바로 생명을 억압하는 악의 활동이다.


선비모델은 이 억압의 기제로 구성된다. 마음을 잘 억압하는 이가 더욱 탁월한 선비의 자격을 충족시킨다. 즉, 마음[생명]에 대해 가장 악한 태도를 갖는 이가 가장 훌륭한 인간적 태도를 갖는 이로 칭송된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억압하는 이는, 반드시 타인의 마음도 억압하게 된다. 그래서 명백하게 악일 수밖에 없게 된다.


억압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힘을 가해 누르고, 못살게 굴며, 괴롭히는 것이다.


사람을 괴롭게 하는 모든 것이 억압이며, 곧 악이다.


그런데 선비모델은 이 괴롭힘을 예찬한다. 괴롭힘을 잘 버틸 줄 아는 것이 위대한 인간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꾹 눌러참아 인내하는 이의 모습을 보며 격조있고 품격있는 모습이라며 찬사를 보낸다. 격하게 얻어터져 얼굴이 시뻘겋게 부어올라서도 울지 않으려고 아랫턱을 꽉 다물고 있는 이를 향해 "야야, 니가 이겼어. 끝까지 참은 놈이 이기는 거야. 진정한 인간승리야."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리고 있는 셈이다.


폭력에 대한 인내를 정당화하면, 폭력도 정당화된다.


심지어 폭력에 대한 인내를 예찬하기까지 한다면, 동시에 폭력도 끝없이 예찬된다.


폭력은 생명을 억압하는 외적인 악이며, 인내는 생명을 억압하는 내적인 악이다.


선비모델에서는 이 폭력이라는 외적인 악에 대해 인내라는 내적인 악의 가치를 예찬함으로써, 결국 두 악이 동시에 예찬되는 결과를 낳는다. 악이 배가되는 악의 전성시대를 낳는다.


오늘날의 586운동권 출신 정치인들, 그리고 그 후예 정치인들의 행각이 조직폭력배의 그것과 닮아 보이는 것은 그래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선비모델은 이처럼 자신들이 만든 악의 현실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자신들에게로 끌어들이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이 얼마나 인내라고 하는 내적인 악을 잘 실현하고 있는 선비인지를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다. 때문에 선비모델은 악을 중심으로 기능하는 관심종자 모델이다.


이에 따라, 우리가 선비모델을 예찬할 때, 우리는 사실 악을 예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인생에 그 악을 적극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악에 의해 우리가 당해도 좋다고, 더욱 짜릿하게 괴롭혀 달라고 마치 피학성애자의 상태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다시 이해해볼 수 있다.


선비모델은 인내를 통해 성립된다. 인내는 마음이라고 하는 생명작용을 억압하는 내적인 악이다. 이 내적인 악은 폭력이라고 하는 외적인 악에 대한 태도로 성립된다. 즉, 폭력이 있어야 인내가 있을 수 있다. 때문에 인내의 가치를 주장하면 동시에 폭력의 가치 또한 정당하게 주장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내하는 선비모델은 이 세상에 더 많은 악을 발생시킨다. 폭력이라는 외적인 악과 인내라는 내적인 악이 동시에 우리를 안팎에서 끝없이 괴롭히게 된다.


선비모델이 왜 악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이유다.


이 선비모델의 다른 이름이 바로 꼰대다.


꼰대는 우리를 화나게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아주 많이 화가 나있는 이유는, 지금이 이 꼰대의 전성시대이기 때문이다.


선비모델을 보급하기 위해 활동해온 유능한 연출가들의 활약에 힘입어, 이 꼰대의 인물상은 미디어를 통해 놀랍도록 미화되어왔다. 이를테면, 어눌하고 허술하게 보이는 인간적 매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의를 위해서라면 소신을 굽히지 않는 잘생긴 젊은 검사 내지 변호사와 같은 인물상으로 꼰대는 아름답게 묘사된다. 물론 그 아름다움은 꼰대를 연기하는 이가 젊고 매력적인 배우라는 사실에 절대적으로 기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꼰대의 이미지 세탁이, 586운동권 정치인들에게 동조하는 미디어세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외관은 허름하나, 그 행색이 결코 가릴 수 없는 수려한 용모와, 번뜩이는 지성과, 총명한 안광을 가진 선비 중의 선비의 모습을 집요하게 묘사해온 일과도 같다.


그러나 미디어에서 어떠한 선전활동으로 세뇌를 시도하든 간에, 꼰대의 핵심적인 특징은 불가피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우리가 꼰대를 접하게 될 때, 우리는 반드시 그 특징을 체험하고야 만다.


꼰대의 핵심적 특징, 그것은 바로 화를 남들에게 전가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꼰대에게 화가 나는 이유는, 꼰대가 자기의 화를 우리에게 전가하고 있어서다.


꼰대가 꼰대인 이유는, 그 자신이 화가 나있으면서, 화가 나지 않은 척 평정심을 가장하여 근엄한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꼰대와 접촉해 있는 사람들을 대신 화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선비모델을 추구하는 꼰대도 사람이기에, 내적인 악과 외적인 악에 동시에 노출되어 있는 꼰대는 힘들 수밖에 없다. 힘들어서 꼰대는 화가 난다. 억압해도 계속 화가 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화를 내면 자신이 잘 인내하는 훌륭한 존재로 보일 수 없을 것 같기에, 꼰대는 어떻게든 화를 처리할 수 있는 수단을 필사적으로 궁리한다.


그 궁리 끝에 나온 것이, 사람들을 대신 화나게 하는 방법이다. 자기가 꾹 참고 있으면 사람들이 대신 화가 나게 된다는 심리적 전이의 원리를 꼰대는 기적의 공식처럼 발견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렇게 꼰대는 사람들을 아직 수양이 덜 되어 화를 내는 모자란 이들처럼 만들어 놓고, 자기는 화를 초월한 존재인 것처럼 사람들의 앞에서 여유롭게 미소짓는다. 자기가 화를 전가시킨 사람들 때문에 자기의 화가 처리될 수 있었으면서, 오히려 사람들의 위에서 스스로가 인품이 훌륭한 스승인 것처럼 도사연을 한다.


이는 비유하자면 이러한 것이다.


자기가 싼 똥을 치우기 싫다고 입을 꽉 닫고 똥 앞에서 버티고 있는 아이에 대해, 그 냄새가 지독해 사람들이 아이의 똥을 대신 치워주었더니, 이제 그 아이가 사람들을 "똥 만졌대요, 똥 만졌대요, 더러운 사람들이래요."라고 놀리며 자기는 홀로 깨끗한 존재인 척하고 있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자기가 싼 똥을 남이 대신 치우게 한 뒤, 그 앞에서 자기는 멋지게 시조를 읊으며 정의를 부르짖는 미숙아가 바로 꼰대의 정체다.


자기가 싼 똥도 치우지 않으면서, 자기는 사심없이 오직 다른 이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만 살고 있다고 말하는 이 꼰대들이 모여 하는 활동이 오늘날의 정치며, 곧 선비모델의 전횡이다.


전술한 것처럼, 선비모델을 추구하는 꼰대들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악의 기제를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해야 자기가 싼 똥을 그 냄새에 못이겨 사람들이 대신 치워줄 수 있게 되며, 그로 인해 자기 대신 사람들을 더럽게 만들고 자기는 깨끗한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비란 것이 무엇인가?


원래부터 자기가 싼 똥 하나 안 치우고, 하늘의 도리가 어쩌니 하던 이들이다.


집에서 자기 똥을 대신 치워주는 엄마 덕에, 품격 있는 사람인 척할 수 있었던 발달심리학적 미숙아들이다.


기저귀에 똥을 뭉개고 앉아, 이 세상 모든 절망을 다 짊어진 고뇌의 표정으로 "이 모든 것은 다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라고 칭얼거리고 있는 세 살짜리 영아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 모습 위에, 미디어가 선전하는 젊고 잘생긴 배우가 아니라, 우리가 꼰대라고 현실에서 체험하고 있는 바로 그 얼굴을 오려 붙여보면, 바로 그것이 선비 모델의 실체다.


선비모델의 체현자인 꼰대가 짓고 있는 그 심각한 표정은 그저 똥을 싸고 있는 표정일 뿐이다. 변기 위에서 우리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자기 똥을 치워줄 이를 불러들이기 위해 관심종자로 활동하는 이 꼰대아이가 진정 악인 이유는 명백하다.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치우기 싫은 남의 똥을 우리가 숨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힘을 들여 치우게끔 유도되는 구조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이 꼰대아이가 우리 모두를 진정 화나게 하는 이유 또한 명백하다. 그렇게 자기 똥을 치우도록 강제한 뒤, 자기는 우리 위에 있는 인류의 스승처럼 행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똥을 치우는 일이 우리에게 부과된 거룩하고 신성한 대의적 의무인 것처럼 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유치함을 눈치채고, 자기 똥을 치우려 하지 않는 젊은 세대를 그래서 이 꼰대아이는 싫어한다.


"감히 내가 싼 똥을 치우려 하지 않다니, 너네들 진짜 이기적으로 자기만 알고 산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자기도 모를 아이가 하는 말이다.


발달이 아주 오랫동안 정체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고, 노화로 인한 퇴행이 빨리 찾아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이것이 꼰대다. 선비모델로 살아가는 아이의 모습이다.


벽에 똥칠을 하듯, 세상을 캔버스로 삼아 그 일을 웅장하게 하고 있는 아이의 전성기다.


"우리 아이,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지지를 통해 더욱 웅장해질 수 있게 된 황금빛의 그림이다.


사악한 왕과 여왕을 단두대에 보낸 뒤, 착하고 예쁜 스머프 인형들이 대신 그 안에서 사이좋게 살아가는 베르사유 궁전을 꿈꾸었겠지만, 그 결과는 발 디딜 곳 없고, 숨 쉬기 어려워진, 그래서 하늘로 데려가줄 코인날개만이 간절해진 똥밭의 현실이다.


여기에서의 희망은, 어떠한 것의 전성시대라는 것은, 동시에 그것의 마지막 시기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꼰대는 자기들의 전성시대를 우리가 인내하며 버텨내기를 요구한다. 어두운 밤에 새벽동이 터오기를, 그리고 빼앗긴 들에 봄날이 찾아오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마음을 촉진한다. 자기들이 경험했던 인내의 시간을 우리 또한 똑같이 경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꼰대가 파고 있는 최후의 함정이다. 재래식 변소의 구멍 위에 덮어놓은 융단과 같은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이 꼰대의 전성시대를 비장하게 인내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인내라는 악의 기제를 반복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악의 역사를 정말로 끝내야 할 필요가 있다.


악의 활동 속에서 우리는 악을 쓰게 된다. 악바리가 된다. 똥을 싸고 뭉개며 버티고 있는 아이의 자세가 된다.


악의 역사를 끝내는 방법은 이 악바리 같은 아이의 역사를 끝내는 것이다.


악바리에 대한 우리의 바람직한 자세, 그것은 놀리는 것이다.


놀림의 원형은 간지럼이다.


악다구니를 치며 가득 굳어져 있는 것을 간지럽히는 것이다.


자기가 싼 똥 위에서 비장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뭉개고 있는 모습이 코미디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꼰대를 놀려야 하고, 선비를 놀려야 한다. 남에게 자기 똥을 치우라고 세상 다 산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의 똥냄새를 놀려야 한다.


꼰대가 우리에게 전가한 화는 우리의 웃음으로 승화된다.


선비모델의 심각한 무게는 웃음소리의 경쾌함으로 해방된다.


장자가 그러했듯, 꼰대의 마지막을 이 웃음으로 고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화나게 하는 악과의 고별이다.


"안녕, 위장활동이 왕성하던 아이들아, 비피더스가 필요없던 대한의 건아들아, 그 음색, 그 눈빛, 그 향기,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미간을 가득 찌푸리며 힘을 다해 '어벤져스, 어셈블!'을 외치던 그 절규에 응답하듯 세워지던 바벨탑 같은 정의의 응집물들과, 세상을 지키기 위한 그 격렬한 사투 끝에 결국 다리의 힘이 풀려 그 정의의 탑 위에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좌절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만든 그 정의의 탑을 (굳이) 밟고 계속 맹진해나가라고 사람들에게 부르짖던 그 과감한 용기를, 영영 잊을 수 없을 거야."


아이는 영원한 관심을 받아야 한다.


그 자신이 정성스럽게 빚어낸 황금빛 결과물에 뿌듯해하며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다 불러 모아야 한다.


"엄마, 이것 보세요. 이렇게 굵은 것 좀 보세요. 내가 해냈어요."


아이, 착하다. 우리 아이. 우리 꼰대. 우리 선비.


벽을 황금색으로 칠하고 있는 마지막 황혼기의 퇴행자들도 같은 말을 듣고 싶은 것일지 모른다. 영원한 관심을, 그 최종적인 관심을 받고 싶어, 세상을 황금빛 들판으로 물들이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웃기다가 뭔가 근본적으로 조금 슬퍼진다면, 우리는 지금 잘 고별인사를 건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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