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이라고 상담 못하란 법 있나요?

상담자의 전문성에 대해

by 깨닫는마음씨




있습니다. 그와 같은 법이.


헌법에서 제한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성문법만이 아니라 불문법도 중요합니다.


아무리 특정 연예인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성도 훌륭하고, 지적이며, 모두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며, 정의롭고, 정치적 올바름을 잘 지키는 (또 돈도 있는 능력자로서) 좋은 사람으로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상담자로서의 자격과 전문성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연예인이 정말로 진지하게 심리상담을 하고자 한다면, 그는 연예인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아니면 심리상담을 우습게 보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심리상담자에게는 연예인과 가장 정반대의 속성과 특질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연예인은 대중에 의존해서 자신을 존립시킵니다. 사람들의 욕구를 파악해서 그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이 연예인의 주된 활동이며, 욕구에 대한 최대한의 공약수를 두루 만족시키는 연예인일수록 더 많은 인기와 권위를 얻게 됩니다.


즉, 연예인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YES'를 외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상담자는 정확하게 그 반대입니다.


상담자는 자신의 내담자에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최후의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상담에 대해 가장 오해하고 있는 통속적 관점은, 상담이 달달하고 부드러운 감정적 위로와 함께, 적당한 교훈과 성찰이 담긴 좋은 말을 해주며, "괜찮아. 토닥토닥. 언제라도 난 네 편이야."라는 식의 메시지를 전하는, 마치 지친 정의의 용사를 힐링시켜주는 회복법사와 같은 일로서 인식하는 관점입니다.


만약 상담이 그런 것이라면, 자신들이 늘 팬 여러분의 영원한 지지자라고 노래하고 있는 아이돌 그룹들이 최고의 상담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의 욕구에 부합하는 달콤한 말을 속삭이려는 이의 의도는 그로부터 인기를 얻기 위함입니다. 자신이 그에게 중요한 존재로서 거듭나기 위함입니다.


내담자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상담활동을 하는 이, 그는 상담자가 아니라 연예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는 한, 그는 내담자를 착취하는 이입니다.


연예인이 연예인으로서 얻은 인기와 권위를 바탕으로 상담자 자격을 얻은 척하며, 연예인 성질을 그대로 갖고 와 상담을 하려 하는 한, 그는 가장 폭력적인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존이 사람들을 만족시켜서 인기를 얻는 일에 달려있는 이에게는 애초 상담이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을 전부 다 거절할 수 있는 이, 자신이 의존하여 자원을 얻고 있는 그 모든 관계에 대해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이에게만 상담은 성공적으로 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상담자가 드러내는 바로 그 기질과 태도야말로 내담자가 찾고 있던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물망 같은 관계들에 헌신하고 봉사하느라 자기를 잃고, 관계의 감옥에 갇혀 쳇바퀴만 돌려야 하는 듯한 우울감과 무기력 속에서, 어디에도 탈출할 수 있는 희망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아 좌절하고 있을 때, 내담자에게 'NO'라고 말하며 복종하지 않는 상담자의 바로 그 기질과 태도야말로 내담자에게는 기적 같은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상담비를 주어야만 생존하여 연명할 수 있는 상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상담자가 자신 앞에 비굴하지 않고 한없이 당당한 모습을 드러낼 때, 내담자는 그 모습을 통해 자신의 가장 본원적인 인간성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 모든 관계에 매여 노예처럼 비루하게 살아온 자신이 다시 찾고 싶은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또 실감하게 됩니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눈치를 보며 그 기분을 맞춰주는 이가 아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내담자와 교묘하게 협상하는 이도 아닙니다. 상담자는 친절달달하게 위로가 되는 소비재가 아닙니다.


물론 혹자가 그러한 상담을 통해 충분한 치유를 받았다고 말하는 일은 정당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에게 필요했던 것은 실은 상담자가 아니라 엄마였을 뿐입니다. 그리고 상담자의 전문성은 엄마의 대리물 내지 유사엄마로서 기능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아가 상담자의 전문성은 엄마와 아이 사이에서 펼쳐지는 통속적 역동을 거절하는 데서 개화됩니다.


이를테면, 상담자는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그 앞에서 열심히 재롱을 부리거나, 장난감을 쇼핑카트 안에 넣기 위해 엄마에게 다음 중간고사에서의 평균 85점을 약속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엄마에 대한 재롱꾼과 협상꾼의 역동 사이에서 자란 몇몇의 아이들이 연예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연예인들은 이제 내담자에게 같은 전략을 시도합니다. 엄마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믿는 그 수단으로 내담자를 통제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엄마도 사실은 그러한 아이를 자신이 효과적으로 통제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엄마는 아이가 재롱꾼과 협상꾼이 되게 함으로써 엄마에게 매여서 엄마만을 세상의 중심으로 바라보게 하는 목적을 달성합니다.


그렇게 엄마에게 종속된 아이 중 몇몇이 커서 연예인이 된 후 상담행위를 하게 될 때, 결국에는 자기 엄마가 했듯이 내담자를 아이처럼 종속시켜 연예인 자신만을 가장 중요한 존재로 바라보게 만들게 되는 일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내담자에게 신이 되려고 하는 의도와 같습니다.


상담자가 되려는 연예인, 그리고 역으로 연예인이 되려는 상담자에게서 자주 드러나게 되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선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 실제적인 결과는 대단히 파괴적입니다.


이것이 그루밍(grooming)입니다.


그루밍은 성적인 착취에만 적용되는 용어가 아니라, 자신이 그의 신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이를 '감히' 자기의 울타리 안에 넣으려는 그 모든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현재 취약함을 경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에게 다가가, 그의 엄마처럼 위로하고 승인해주려는 그 모든 건방지고 오만한 행위가 바로 그루밍의 의도입니다. 아무리 상냥하고 친절해보여도 그것은 폭력입니다.


신이 되려는 과잉모성과, 신에게 억압된 마마보이, 이 둘 사이에서 예능적인 어떤 감각은 출현합니다. 그 감각은 'NO'라고 하지 못한 서러움을 늘 담지합니다. 광대가 슬퍼보이는 그 이유입니다.


광대가 그 자신의 슬픔을 자각할 때, 그리고 그 슬픔의 이유를 명확하게 이해할 때, 그렇다면 광대는 정당한 상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상담자로 거듭나게 되는 광대는 다음과 같은 사실 위에 서 있습니다.


"나쁜 엄마가 아니라 오히려 좋은 엄마가 나를 노예로 만들었다."


이 사실을 아는 광대는, 나쁜 엄마를 추방하고 좋은 엄마를 우리 손으로 모시자는 정치적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또는 자신이 좋은 엄마의 역할이 되어 사람들을 가엾은 아이로 보고 구원하려는 양육적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행위들 자체가 바로 '좋은 엄마'가 자행하는 선량한 폭력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까닭입니다.


전통적으로 문화사 속에서 광대가 중요한 상징이었던 이유는, 광대는 왕에게조차 'NO'를 외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광대가 광대라고 하는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까지 'NO'를 할 수 있으면, 더는 광대로 사는 일을 그만할 수 있으면, 그는 분명 상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그 모든 찬사와, 존경과, 인기를 포기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종속되거나 사람들을 종속시키는 그 노예의 현실을 거절할 수 있으면, 그는 훌륭한 상담자입니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언어적 논리를 통해 어떠한 광대가 독재자에게 종속되는 노예의 현실을 끝내고 진정한 왕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다면, 그는 사실 상담자의 정반대편에서 사람들에게 그루밍을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착한 일진과 나쁜 일진이 있는 것이 아니듯, 종속은 똑같은 종속입니다.


상담자가 상담자일 수 있는 이유, 곧 상담자의 전문성은 그 모든 종속성을 거절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상담자는 악에서 벗어나 선에 종속되려 하지 않습니다. 상담자는 불의에서 벗어나 정의에 종속되려 하지 않습니다. 상담자는 오른쪽 감옥에서 나와 왼쪽 감옥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많은 내담자가 이와 같은 일을 합니다.


하나의 감방에서 나와 옆의 감방으로 들어가는 일을, 자기실현이라고, 성장이라고,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언어적으로는 뭔가를 이룬 것 같은데, 실제로는 다시 감옥에 들어간 것뿐이니 몸은 괴롭습니다. 언어와 신체가 불일치하게 됩니다. 말과 삶이 불일치하게 됩니다. 이 불일치가 진짜 고통의 이유입니다.


이를테면, '아둔한 국민'이라는 명패가 붙은 감방에서 나와 옆에 있는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감방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야이, 그렇다고 아둔한 국민 될 거야? ㅎㅎ"라며, 마치 우리에게 이미 현명한 답이 정해져있는 양자선택을 강요하는 듯한 현실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감방에 더 눌러 앉게 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야 합니다.


깨서, 닿아야 합니다.


감옥 자체를 깨서, 바깥에 닿아야 합니다.


우리를 눌러 앉혀 영구한 죄수가 되게 만드는 감옥은, 간수들이 모두 친절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사람이 먼저라며 우리에게 "괜찮아. 토닥토닥." 해주고 있는 그 감옥입니다.


깨닫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 모든 종속을 위한 연극적 미소 앞에 'NO'라고 하면 됩니다.


감격에 겨워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지도 모릅니다.


환희하고 있는 중입니다.


결코 저항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그 거대하고 신성한 엄마와 같은 대상에게 'NO'를 말하는 순간은,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과도 같습니다.


자신의 힘을 되찾는 순간이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감옥 같은 알껍질을 깨고, 저 바깥의 하늘에 닿는 순간입니다.


감옥 안에서 잠도 못자고 늘 깨어있으며 서로의 잘못을 감시하는 비루한 인생은 이제 끝입니다.


나를 깨달았습니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나를 깨달았습니다.


"제가 당신을 토닥토닥 해서 행복하게 만들어드릴 수 있어요. 'YES'라고만 해보세요."


"아니요(NO). 당신은 저를 행복하게 만들 수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저에 대해 아무 힘도 없습니다. 저를 행복하게 만들 힘은 제가 집행합니다. 제 행복은 제가 직접 느끼고 결정합니다."


이처럼 상담자의 전문성은, 내담자의 욕구에 부합하여 내담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기만적인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NO'를 말함으로써, 내담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의 주권자가 바로 내담자 자신이며, 내담자 자신이 이미 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도록 돕는 데에 있습니다.


상담자는 인간은 결코 종속될 수 없다는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참된 'NO'의 법의 대변자로서 내담자가 바로 그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비추기 위해 내담자 앞에 그렇게 있습니다.


그와 같은 법이 있습니다.










"자유로 이끌어가는 법만이 참된 법이다."
- 갈매기 조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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