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괴물, 죽음에 대한 두 태도
나이트 샤말란은 우화구조의 스토리텔링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감독이다. 우화는 간명하나 핵심적인 통찰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 삶을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한다.
이 영화를 통해 샤말란은 하나의 피상성을 해체하기 위한 물음을 던진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인가, 아니면 괴물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언뜻 이상한 물음이다. 많은 공포영화에서 묘사되듯이, 괴물이라고 하는 비일상적 기괴함의 소재는 죽음과 동일시되는 상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괴물에 대한 두려움은 곧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시사한다고 우리는 생각해왔다.
그러나 샤말란은 이 융합을 해체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두려움의 원인은 정말로 무엇인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 영화에서 어떠한 사람들은 점차 괴물처럼 변해간다. 시각적으로도 그 형상이 뒤틀려가며 사람 아닌 모습을 갖게 된다.
사람과 괴물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 아닌 것'으로 말해질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란 삶의 명사형이다. 삶은 동사며, 그 동사가 마치 명사처럼 덩어리를 갖게 된 것이 사람이다.
때문에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은 '삶'과 '삶 아닌 것'이라고도 묘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삶 아닌 것'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죽음일까? 피상적인 이해 속에서 대개 삶의 반대말을 죽음으로 설정하듯이, '삶 아닌 것'은 결국 죽음이 되어야만 논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을까?
이에 대해 샤말란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정확한 실존철학적 이해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라는 말과 '하루하루 죽어간다'라는 말은 언어적 표현으로는 반대말 같지만, 실제적인 현실에서는 동일한 현상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바로 시간의 흐름에 대한 묘사다.
삶을 산다는 것은 시간을 산다는 것이며, 시간을 산다는 것은 흐른다는 것이다. 시간은 죽음을 향해 흘러간다. 흐른다는 현상은 삶과 죽음의 양측면을 동시에 드러낸다.
때문에 '삶 아닌 것'은 죽음이 아니라 실은 '죽음 아닌 것'이다.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것은, 곧 살지도 죽지도 않은 것은, 흐르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상태 그대로 고정되고자 하는 것이다.
괴물의 속성이다.
괴물은 시간에 저항하는 이가 얻게 되는 최후의 결과다.
특정한 상태를 유지하고자 끝없이 흐르는 시간에 저항하려는 무리한 힘을 쓰다 보니 심신이 비틀린다.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갖게 된다. 역설의 출현이다. 자신이 이상적으로 느끼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 결과, 더욱 추한 모습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샤말란은 우리가 살지도 죽지도 않을 때 이러한 괴물로 화하게 됨을 알리며, 그럼으로써 죽음과 괴물의 동일시를 해체하려고 한다.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괴물이지, 죽음이 아니다. 그리고 괴물은 오히려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아 생겨난, 죽음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괴물에 대한 두려움은, 괴물이 우리의 삶을 붕괴시킬 것 같은 바로 그 두려움이다. 이것은 정확하다.
시간에 저항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그 괴물같은 의지가, 실제로는 우리의 삶을 붕괴시킨다. 살지도 죽지도 않으려는 이는, 정말로 살 수 없게 되는 까닭이다.
정말로 산다는 것은,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삼아 산다는 것이다. 시간에 끌려 다니는 것도, 시간을 멈추려는 것도 아닌, 시간의 흐름 위에서 파도타기를 하듯이 나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다.
이를 시간의 주인이 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이것은 나의 시간이다."라고 선언하는 이는,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째로 받아들인 것이다. 시간의 주인으로서의 자신의 면모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면 괴물은 사라진다. 괴물은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시간이 낳은 부산물 같은 것이다. 시간이 통째로 나의 시간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소외는 극복되며, 더는 괴물이 자리할 공간이 없다.
괴물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더는 두려워해야 할 것이 없다는 의미다.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온 것이 괴물인 까닭이다.
이를 더 쉽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자신이 시간을 산다는 사실, 자신이 흐름 속에 있다는 사실, 곧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이는, 더는 괴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시간을 거부한 결과로 생겨나게 되는 괴물이 이미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또한 모종의 심각하고 비장한 각오를 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비장미는 죽음과 괴물을 동일시하고 있었기에 연출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온전하게 시간의 문제로 이해하면 경쾌해진다.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이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충실하게 살면, 바로 그것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눈앞에 설거지꺼리가 있을 때 내가 이 시간의 주인공으로 서서 나의 설거지를 하면 죽음은 받아들여진 것이다. 또한 눈앞에 모래가 있을 때 내가 이 시간의 주인공으로 앉아 나의 모래놀이를 하면 죽음은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영화에서의 주인공 남매의 모습이다.
자신에게 경험되는 이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 여유가 생겨난다. 시간에 쫓기지도, 시간을 쫓아가지도 않으며, 지금 이 순간 시간을 나의 것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시간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죽는 것은 정해져있다. 무엇을 해도 시간은 흐를 것이다. 무엇을 하든 간에 죽음은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롭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 모든 괴물같은 행위들이 실은 시간의 흐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 그 행위들을 해야 할 필연성은 사라지며 행위들은 감소한다. 우리에게는 진실로 여유가 생겨난다. 그 여유라는 이름의 여백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여유가 생기면 사람은 비로소 놀 수 있게 된다.
놀 수 있다는 것은 자유롭다는 뜻이다.
그 자유로운 놀이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시야가 트인다. 기억이 난다. 환기가 된다. 스스로의 길이 찾아진다.
소년소녀의 총명함이다.
죽음을 받아들여 사는 사람은 이처럼 생물학적 노화 속에서도 언제나 소년소녀의 재기로 가장 젊게 살게 된다. 생생한 지혜가 그들에게 작동한다. 죽음을 받아들인 결과가 역설적으로 더욱 삶다운 삶을 창출해내게 되는 것이다.
반면,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괴물은 늘 두려움에 싸여 가장 피폐하게 노화된 모습으로 살게 된다. 화석처럼 경직되고 심보가 뒤틀린다.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결과가 역설적으로 더욱 죽음의 기운을 창출해내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괴물은 반드시 더 많은 죽음의 현실을 만들게 된다.
죽음과 삶을 반대말로 인식하는 착각 속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신의 의지를 더 많은 사람을 살리겠다는 대의의 의지로 오해하며, 이에 따라 그 대의를 통해 실제로는 구체적인 사람을 더 많이 억압과 착취로 몰아 넣어 죽게 만드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낳게 된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모습 그대로다.
그렇게 이 영화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사람을 죽이는 괴물, 이 두 존재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에 대한 태도의 차이에 의해 사람과 괴물이 각각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는지를 명석하게 알리는 우화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더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으로 살다가 죽는 온전한 시간을 누리는가, 아니면 살지도 죽지도 않는 괴물로서 다른 사람만을 괴롭히며 모든 시간을 보내는가?" 이것만이 중요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