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무당이 지배하는 독재사회에서 살아남기

"생존을 위한 실존메뉴얼"

by 깨닫는마음씨




한국의 문화심리학적 지형도는 성리학과 무속이라는 두 세력이 양방향에서 펼쳐내는 억압 가운데 낀 무고한 가재, 붕어, 개구리들이 늘 척추가 터져 나가는 그림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이를 다시 표현하면, 무능하지만 위인전과 무협지는 많이 읽어서 자신이 대단히 고고한 정의의 용사인 줄 아는 선비아빠와, 감정을 주체못해 상시 신경증적인 만큼 권력욕이 남달라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 수렴청정을 하거나 또는 치마를 휘두르며 동네조폭두목이 되어 적극적인 이익의 조작을 하는 무당엄마 사이에서, 늘 죄책감과 불안에 시달리는 마마보이들의 현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리학과 무속은 사실 같은 것입니다. 서로 견제하며 대립하고 있는 듯한 구조를 취하나 실은 하나의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이 동전의 이름은 '통제'입니다. 합리적인 척하는 표면의 질서로 통제하려 하든, 마술적인 척하는 이면의 힘으로 통제하려 하든, 그 둘은 동일한 통제욕의 표현입니다.


자신들이 개입하지 않으면 인간은 똑바로 자랄 수 없다고 하는, 매우 오만한 부모절대주의입니다.


인간을 이미 미숙하고 무력한 아이처럼 상정하고 있는 것이 이 부모절대주의의 대표적인 특성입니다. 물론 그러한 인간관은 자기투사에 불과합니다. 자신들이 기품있는 선비아빠와 힘있는 무당엄마를 꿈꾸고 있는 그 렌즈로 세상을 보고 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마치 선비아빠와 무당엄마의 양육과 보호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로 보이는 것뿐입니다.


이들은 프로이트적인 역동의 이해가 너무나 잘 적용되는 모범사례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엄마를 신사임당 내지 성모마리아 또는 유관순 같은 존재로 보며, 아빠보다 더 진정한 선비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는 바람직한 인물상으로 이들은 상정합니다. 실제의 아빠는 나름 선량하지만 무능력하고 패기없이 삶의 무게에 매몰되어 화석화된 그저 '불쌍한 냥반'일 뿐입니다. 이들에게 있어 가정을 이끌어온 현명하고 인간미 넘치는 주역은 어디까지나 엄마입니다. 이 엄마가 없으면 세상은 똑바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기 엄마가 남편을 보는 그 시각대로, 이들이 자기 아빠를 보고 있는 그 모습입니다. 이를 융합이라고 합니다. 엄마와 정서적으로 융합되어 엄마의 감정을 자기의 감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독립되지 않은 것이며, 아직 자기로서 개성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엄마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된 마마보이들의 특성입니다.


마마보이들은 그래서 대개 신성한 엄마를 수호하기 위해 아빠를 공격합니다. 엄마가 아빠를 벌레보듯이 한심하게 보는 그 눈빛을 세습하여 동일한 눈빛을 아빠에게 보냅니다. 그러다가 아빠에게 얻어 맞기도 하며 그 가정 내의 희생양이 됩니다. 아빠는 사악한 적으로, 자신은 억울한 독수리오형제 같은 것으로 상정하여 이 희생양의 연극을 반복집행함으로써, 지구방위대의 총수 김여사는 언제나 신성불가침의 안전한 우상의 자리에 위치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마음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사실 자신이 아빠를 미워하지 않으나,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조종당하듯이 아빠에게 저항하게 된다는 미묘하게 불일치한 느낌을 언제나 눈치챕니다. 뭔가 조작되어 이용되고 있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러나 자신을 조종하고 착취하고 있는 것이 엄마라는 사실을 이들은 끝내 무시하려 합니다.


그 대신에 자신의 시야를 사회로 돌려, 사회에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나쁜 아빠'처럼 보이는 정치인이나 사회현상들에 대해 화를 내다가, 조금 더 심화되면 이내 '나쁜 엄마'로 보이는 정치인이나 사회현상들에 대해 화를 내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나쁜 엄마'를 정의롭게 심판하는 '좋은 아빠'로서 자신을 위치짓고자 시도합니다.


'나쁜 아빠엄마'에게 저항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아빠엄마를 몰아낸 후에 '좋은 아빠'를 엄마 옆에 마련해주어야, 엄마가 혹시라도 '나쁜 엄마'가 되지 않고 자신의 망상적인 인식 속에서처럼 계속 '좋은 엄마'로 있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엄마에게 향해있는 분노를 소외시키고, 그 반대로 엄마를 계속 충족시키고자 한 결과, 자신이 '좋은 아빠'가 되어 엄마 옆을 지켜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프로이트적인 이야기입니다. 엄마에게 평생을 종속되어 사는 마마보이들의 비극입니다.


선비란 이 마마보이들의 한국적 이상형입니다. 선비가 되어야 무당인 엄마의 한스러운 운명이 구제됩니다. 그렇기에 무당의 입장에서도 또한 자기의 자식을 형편없는 남편 대신에 선비로 키워내려고 합니다. 무당은 선비를 양육하고, 선비는 무당을 구원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표면적인 가부장제의 권위는 반복되며, 이면적인 모권주의의 권력은 반복됩니다. 인셉션의 팽이처럼 앞뒤가 같은 동전이 한없이 돌아갑니다. 영원한 착각의 꿈속에서.


오늘날의 선비들은 민주주의를 주장합니다. 그것이 이권의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유용한 도덕적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민주'라고 하는 용어는 '선비적인 어떤 것'을 지칭합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선비들이 근거하고 있는 성리학과 무속의 결합체를 우리는 '민주무당'이라고 지칭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민주무당의 꿈이 가열차게 회전하고 있는 때입니다. 그 회전을 통해 주위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들여 자신의 양분으로 삼습니다. 에너지 흡혈귀와도 같습니다. 관심종자 중의 관심종자입니다. 모든 엄마에게 자기만을 봐달라며 홀로 무대 위에서 끝없이 과잉된 쇼를 펼치는 아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한 독재입니다.


독재는 하나의 수렴점을 향한 에너지의 착취가 종용되는 현상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무당의 세력인 엄마를 충족시키고자 선비흉내를 내는 마마보이들에 의해 이 독재가 심화되어 있는 오늘날입니다.


민주무당이 지배하는 독재사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제 민주무당에게 에너지를 그만 뺏기고, 그 에너지를 자신의 삶으로 돌려야 합니다. 더는 남의 엄마와 남의 자식을 위해 우리의 목숨을 거는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선비와 무당에게 양쪽에서 얻어맞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보배인 바로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귀하게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 실천적인 지침이 여기에 있습니다.


민주무당과 결별하여 나의 길을 사는 법, 이를 실존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것은 실존메뉴얼입니다.



1. 유치원에서 배운 것을 기억한다


유치원에서 배우는 가장 첫 번째의 핵심적인 것은 자기만 엄마가 있는 것처럼 굴지 않는 일입니다. 엄마로부터 분리되어 엄마의 신성성을 깨는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늘 엄마에 의한 편법과 반칙이 허락되는 깍두기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하지 않는 일입니다. 자신이 남을 때리거나 거짓말을 해서 남의 것을 갈취했다면, 자기편인 엄마들을 앞세워 그 세력의 힘으로 정당화해야 할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미안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거짓에 거짓을 더해 합리화할 시간에, 빼앗긴 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를 한번 상상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늘 어떻게 살아야 할지 헷갈릴 때 돌아가야 할 원점입니다.



2. 특별규칙은 없다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구조입니다. 자기만 해리포터이거나 네오이지 않습니다. 자기에게만 허용한 특별규칙은 실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규칙입니다. 타인을 하나의 기준에 의거해 공격했을 때, 동일한 공격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은 억울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착하게 살았는데 그러한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러한 일을 늘 남들에게 해왔기 때문입니다.



3. 제일 중요한 것은 나다


정확하게는 내 생명입니다. 아무도 나 대신에 죽어줄 수 없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부여받은 단 한 번의 가장 고유한 기회입니다. 남을 위해 낭비할 수 없습니다. 남에게도 나와 동일하게 받은 그의 생명이 이미 있습니다. 내 생명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이만이, 그의 생명의 존귀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남을 위해 쉽게 죽을 수 있다는 거짓말을 통해 실은 남의 생명을 가장 비루한 것으로 무시하는 오만한 일을 하지 않게 됩니다. 나를 사소하게 여기면 남도 사소하게 여기게 됩니다. 나를 중요하게 여겨야만 남도 중요하게 여길 수 있게 됩니다.



4. 죽은 자는 요구하지 않는다


죽은 자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며 까다로운 신이 되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신처럼 섬기며 오히려 생전보다 우상화하는 일은 선비와 무당에 의해 대표적으로 자행됩니다. 죽은 자의 권위를 빌미로 삼아 실은 자신들이 권위를 얻어 우리의 에너지를 착취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는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티라노 사우루스와 다른 세계에 속한 우리가 티라노 사우루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죄책감은 죽은 자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내세워 우리를 조종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우리에게 자극하고 주입하는 것입니다.



5. 굿판에서 빠져나온다


'늘 적이 있어야 한다.'가 굿판의 대표적인 논리입니다. 이 논리는 변증법적 지양이라는 개념으로 다시 한 번 미화됩니다. 역사변증법이 굿판을 끝없이 돌리는 원동력입니다. 늘 치열하게 싸우다가 눈물을 쏟는 마당놀이 한마당에서 이득을 얻는 것은 그 연극을 연출하고 집전하는 PD인 무당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말대로 움직이는 모습에 전능감을 느끼며 만족해하는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년과 같은 모습입니다. 가상의 적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제공될 때마다 그 자리에 양치기 소년만을 놓아둔 채 집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6. 도덕의 협박에 빠지지 않는다


선비와 무당이 공통적으로 활용하는 협박의 무기는 도덕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규범들로 이루어진 명세서를 우리에게 들이밀고 그대로 살 것을 종용합니다. 그래야 규범의 제정자로서의 자기들의 권위가 유지되며 이득이 창출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 메뉴얼의 1번과 2번 항목을 이미 실천하고 있다면 가장 근원적인 도덕율과 일치하여 살고 있는 것이기에, 명세서들을 바로 찢어버리고 무시해도 좋습니다.



7. 더불어 살지 않는다


스스로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산다는 것은 내 마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으로 살지 못하는 이들이 자기의 마음을 남들에게 대신 처리해달라고 살게 됩니다. 2번의 원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러한 계약이 성립된 까닭에 이제는 남들의 마음을 자신이 대신 처리하며 살게 됩니다. 서로가 마치 서로의 집의 쓰레기를 대신 버려주며 사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니 늘 억울해집니다. 남의 집의 쓰레기는 언제나 내 집의 쓰레기보다 많게 느껴지는 까닭입니다. 각자가 자기 집의 쓰레기를 자기가 치우며 살면 더는 억울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스스로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자기가 충분히 소화하며 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8. 이 화는 내 화가 아니다


사회적인 이슈로 화가 날 때, 그 화가 자신의 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한 화는 선비 또는 무당이 너무나 화가 나서 자기가 그 화를 소화하지 못하기에 불특정다수에게 그 처리를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의연한 척 지적으로 깐죽거리며 왠지 모르게 화를 유발하고 있는 이는, 실은 지금 너무나 약이 오르고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정서적으로 미발달된 아동의 상태와 같습니다.



9. 전문가를 존중한다


선비와 무당은 사실 자기 것이 없는 이들입니다. 선비는 남의 글에 주석이나 달며 남의 글이 가진 권위를 통해 자기도 괜찮은 존재인 것처럼 보이려던 이며, 무당은 남의 욕망에 편승하여 자기도 힘을 얻고자 한 이입니다. 반면 전문가는 자기 것을 성실하게 쌓아온 이입니다. 선비와 무당은 전문가로부터 권위를 갈취해 자기의 권위로 만들고자 하는 경향성을 갖습니다. 즉, 자신이 대신 해당 분야의 전문가처럼 보이려고 합니다. 선비와 무당이 결합된 한국형 연예인들의 일부가 흙발로 경계를 넘나들며 자기가 다른 분야의 전문가처럼 행세하려고 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진짜 전문가를 존중해야, 우리 자신도 바로 그러한 전문성의 소유자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10. 진짜 스펙을 쌓는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입니다. 나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시간이라는 것은 남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하며 보내는 시간입니다. 이러한 나의 시간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습니다. 한평생 우리 자신을 지켜주는 힘이 됩니다. 나의 시간을 쌓는 일이 바로 진짜 스펙을 쌓는 일입니다. 선비가 제공하는 대의적인 언어들, 무당이 제공하는 마법적인 언어들을 소비하느라 시간을 흘려보내면 허울뿐인 가짜 스펙만 남게 됩니다. 인생이 허무하고 서러워집니다.



11. 낡은 세계관을 업데이트한다


선비와 무당들이 준거하는 세계관이 고작해야 근세적인 세계관에 정체되어 업데이트되지 않은 낡은 세계관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선비와 무당들이 고중세적인 세계관을 낡은 것으로 비판한다고, 그들이 최신의 세계관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중2병에 걸린 중학생이 산타할아버지를 믿는 초등학생을 놀리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체해야 할 대표적인 세계관은 오히려 중2병의 세계관입니다. 진정한 정의가 있고 사악한 거악이 있다고 믿는 이원론적인 바로 그 세계관입니다.



12. 몸을 신뢰한다


11번의 항목과 관련하여, 가장 최신의 세계관으로 업데이트하는 방법은 바로 자신의 몸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감응체입니다. 받아들이는 성질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의 현황을 자동으로 다운로드하여 업데이트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우리 몸의 성질입니다. 이것을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실제의 세계를 체험해야 세계관이 업데이트됩니다. 자기의 머리 속에만 있는 헤겔적인 그리고 마르크스적인 세계관의 그림을 수정보완한다고 세계관이 업데이트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고착이며 나아가 퇴행입니다. 사실적인 몸의 느낌보다 자신의 머리가 짜낸 논리적 도식을 따르고 있을 때, 우리는 실제적인 차원에서 점점 더 도태됩니다. 꼰대가 되어갑니다.



13. 음모론은 취미생활로만 즐긴다


진리는 결코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가 똑똑하다고 칭찬받고 싶어하는 지적 열등감에 빠진 아이들뿐입니다. 자기의 똑똑함으로 숨겨진 진리를 발견해냄으로써 인정과 관심을 얻어 보상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들이 음모론을 창조해냅니다. 사람들의 취미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문예창작의 귀재들입니다. 그러나 드래곤볼은 재미있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14. 문학작품을 많이 읽는다


양질의 문학을 탐독하면, 다양하고 심도있는 스토리텔링의 문법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중2병에 걸린 중학생 수준으로 얕잡아보며 만들어낸 그 수많은 저질 스토리텔링 쇼에 낚이지 않게 됩니다. 고색창연한 유치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저질 스토리텔링에 선동되어 광장으로 뛰어나가 감기에 걸려 몸이 고생하는 일이 없어지게 됩니다.



15. 경계를 존중한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가 완전히 다른 나라이듯이, 북한과 남한이 완전히 다른 나라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함부로 쉽게 동일시하려는 충동은 유아기적인 퇴행의 욕구입니다. 엄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가 합일하고 싶은 마마보이의 욕구입니다. 경계를 존중하는 일은 타자를 정말로 타자성으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타자성의 다른 이름은 존귀성입니다. 경계를 회복해야, 우리 자신 또한 타자에게서 무시받지 않는 존귀성을 회복할 수 있게 됩니다.



16. 정치로 내 삶이 구원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정치라고 하는 이들의 말에 속으면 안됩니다. 삶을 우습게 보고 있는 이들입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언어적 담론게임에 복속될 수 있다고 믿는 통제욕 가득한 이들입니다. 어떠한 정치도 삶과 죽음의 문제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삶이 원래 정치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거대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구원하는 것은 삶 스스로이지, 정치가 아닙니다. 정치를 내다볼 시간에, 내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17. 내로남불에 섬세해진다


집없는 내가 불쌍하게 보며 지키려 하는 이는 내가 평생 벌어도 살 수 없는 집에 살고 있습니다. 자기 옆집에 평생 아프간 난민이 살 일이 없을 동네에 사는 이들이 더욱 적극적인 난민 정책을 주장합니다. 남의 아이에게 내가 목숨걸고 있는 시간에 나의 아이는 사발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삶이 뭔지도 모르며 귀족생활의 꽃인 파티문화에 중독되어 늘 빚을 내서라도 파티를 벌이던 마르크스가 노동자의 권리를 말합니다. 평생 자기 엄마에게 의존하며 산 등골브레이커였던 레닌이 인간의 평등을 외칩니다. 이 모든 것에 섬세해지면, 이 모든 것을 그만하게 됩니다. 내 인생에 무척이나 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18. 종말론적 사유를 경계한다


종말론적 사유란 곧 유토피아에 대한 예언적 믿음입니다. 가장 최근을 돌아봐도 1992년 휴거, 1999년 노스트라다무스, 2012년 마야의 예언의 결말이 어땠는지를 기억해볼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국가가 다 망했다는 사실 또한 같이 상기해볼 수 있습니다. 그 시절 젊은 혈기에 불타올라 동지들과 다양한 차원에서 끈적한 눈빛으로 여러가지를 함께 나누던 그 낭만의 현실은 셔터를 내린 폐쇄적 골방 안에서 일어났던 것임을 정말로 다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종말론적 사유란 곧 자폐적 사유입니다. 15번 항목에서 묘사했듯이, 근본적으로 타자를 타자로서 대하지 않는 자폐적 사유만이 모두가 하나인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19.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시대의 죄인이라는 유사죄책감은 내 것이 아니라, 선비와 무당이 나에게 뒤집어씌우고자 한 그들 자신의 것입니다. 동시에 죄책감이란 자신의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이 경험하는 실존적 현상이며 심리적 현상입니다. 이러한 이들은 죄책감을 통해 다른 사람들 또한 그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억압합니다. 고민충이 되어 인생에 대한 후회와 반성을 억지로 공유하게끔 만드는 물귀신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자기를 죄인으로 만드는 것 같은 자기 엄마의 시선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내가 함께 죄인이 되어야 하는 당위를 형성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이들은 이처럼 자기 엄마를 신으로 만들어, 나에게도 그 신을 두려움으로 공손히 섬기라며 종용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이미 정신병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나는 자유롭습니다.



20. 이 세상은 절대로 선비와 무당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아주 단순합니다. 선비와 무당은 늘 이 세상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통제하려고 하는 일은 이 세상과 가장 적대하며 싸우는 방식입니다. 통제하려고 하면 늘 벗어납니다. 통제하려고 하기에 늘 그 통제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니 일단은 안심해도 됩니다. 절대로 이 세상은 선비와 무당의 뜻대로 놀아나지 않습니다. 그 안심 속에서 우리는 이제 조금 쉬어도 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쉬게 해줄 때, 우리는 더는 엄마를 찾지 않아도 되는 현실에 도달한 것과 같습니다. 스스로를 쉬게 해주는 이야말로, 이 시간을 자기의 시간으로 온전하게 살아가는 이, 즉 가장 성숙한 이이기 때문입니다. 쉼은 정확하게 통제의 반대말입니다. 쉬면 쉴수록 통제의 기운은 옅어집니다. 우리의 자유는 이 쉼을 통해 개방됩니다. 시간을 나의 시간으로 삼아 쉬는 순간, 시간은 공간이 되고, 공간은 질량을 드러내며, 질량은 존재를 눈치채게 합니다. 나의 존재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 쉼의 공간 속에서 한없이 자유로웠습니다. 살아도 되는 존재였습니다. 사는 게 좋은 존재였습니다. 선비와 무당의 뜻대로는 절대로 되지 않는 이 세상이 그 자체의 뜻대로 되게 만든 바로 그 세상의 보배가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보배인 나는 절대로 선비와 무당의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나는 민주무당이 지배하는 독재 속에서도, 나인 한, 늘 살아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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