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자들의 변혁을 위한 실존상담의 의의

"실존은 힘이다"

by 깨닫는마음씨




실존이라는 개념이 고급언어로 유희하는 한량놀이를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것은 실제적인 것이며, 나아가 실용적인 것에 대한 묘사다. 게다가 그 실용은 범용이기까지 하다.


실존은 가장 없는 자들을 위해, 이른바 아주 보편적인 우리 대다수를 위해 최후에 남겨진 결전병기와 같은 것이다.


실존한다는 사실은, 우리 자신을, 그리고 우리 자신의 세계를 반드시 변혁시킨다. 실존은 분명하게 힘이다. 아주 강력한 변혁의 힘이다.


그러나 이 힘은 우리가 '힘'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쉽게 연상하곤 하는 그런 성질들의 힘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소위 우리가 마블이나 DC의 전신레깅스를 입거나, 쇳조각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니거나, 또는 아예 벗은 이들을 각기 개성적인 힘의 담지자로서 생각할 때, 그 모든 힘은 사실 나의 힘으로 남과 남의 세계를 바꾸려는 종류의 힘이다.


그러한 것은 변혁이 아니다. 변혁은 근본부터 뒤집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밑바닥부터 뒤집는 힘이야말로 변혁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근본을 뒤집은 이들이 말할 때, 그 말에는 강력한 힘이 담긴다. 타인의 변혁 또한 자극하는 영향력을 행사한다. 붓다나 예수의 말이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는 이유는, 그들의 말이 남들보다 더 논리적이거나 지적이어서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변혁하는 데 성공한 이들 특유의 묵직한 무게중심과 든든한 자기신뢰에서 비롯한 힘이 시공간을 초월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존이 촉발하는 변혁의 힘은 초월적이다.


이와는 반대로 마르크스와 같은 이의 말은 아무리 그 분석이 정교하고 언어가 명징하다 할지라도 초월적이지 않다. 임시적이며 조건제한적이다. 미약한 힘이다. 때문에 치밀한 학습을 통한 전승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는다면 말에 임의로 불어넣은 힘이 유지되지 않고 금방 소실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단지 훌륭한 지적 능력을 가졌을 뿐, 사치스러운 귀족생활을 고수하며 그 자신을 밑바닥부터 변혁시켜 본 적이 없기에 생겨나는 일이다.


이것은 삶과 말이 불일치한 것이다. 아무리 멋진 말이라도 말 자체로는 초월적일 수 없다. 말 자체에는 힘이 없다. 무협지 같은 고답적인 말투를 갖고 글씨를 품격있게 잘 쓴다고 힘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직 삶과 말이 일치해야 말에 힘이 담기며, 힘의 초월성 역시도 담보된다. 나아가, 단지 외현적인 생활의 모습을 말과 일치시킨다고 힘을 획득하게 되는 것 또한 아니다. 그것은 대본에 자기를 맞추는 연극과 같다. 진실로는 삶의 내적 차원인 마음이 말과 일치해야 한다.


마음이 말과 일치한 삶, 그것이 우리에게 초월적인 힘을 제공한다.


그래서 실존이라는 개념의 가장 실천론적인 형태로 작업하는 대표적인 이들인 실존상담자들은 그 자신의 마음을 먼저 말과 일치시킨다. 겉과 속이 같은 삶을 산다. 그 일치성이야말로 실존상담자가 실존상담자인 이유다.


사람들로부터 인기와 관심을 얻기 위해 꾸민 표면적인 말들과 자신의 실제적인 마음상태가 분리된 표리부동한 삶은 실존상담자에게 있어 가장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곧, 실존상담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변혁시키는 이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실존철학 및 실존심리학의 용어와 개념, 원리 등을 숙지하고 있다고 실존상담자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자신의 삶이 뿌리부터 근본적으로 뒤집히는 변혁의 힘을 그 자신의 삶으로 체화하고 있지 않다면 그 어떤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도 실존상담자라고 불릴 수는 없다.


이처럼 실존상담자는 삶에서 개방될 수 있는 초월적 힘의 대변자며, 자기변혁의 상징으로 이 세계에 선다.


그러나 이것은 또 다른 중2병 판타지에 대한 묘사는 아니다. 아마도 '초월'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쉬이 제공하는 유아적인 오해는 과감하게 거세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와 같은 인물은 초월자가 아니다. 그는 그저 전능자다. 그리고 초월자와 전능자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니체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가 실존적 인간상으로 제시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 overman)는 표현 그대로 초극인이다. 이 초극인(overman)은 초인(superman)과는 변별되는 것이다. 초극인을 초월자로, 초인을 전능자로 이해하면 정확하다. 이 둘이 완전히 다른 이유에는 유한성이 그 핵심에 있다.


초월성은 애초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속성이다. 유한성에 응답하고자 창조되는 것이 초월성이다. 때문에 유한성이 부정되면 초월성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전능성은 유한성과 관계없이 전능한 것이다. 때문에 전능성은 유한성을 부정하려는 경향성을 내포한다.


유한성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주 쉽게, 인간을 부정한다는 것이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부정한다는 것이다. 전능자는 자신이 생명인 것을 부정하고 생명 아닌 더 높은 차원의 존재인 것처럼, 마치 죽지 않는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고자 한다.


그래서 전능자는 사실 사춘기를 잘 통과하지 못한 아동들이 추구하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13세에 모든 마법을 다 마스터한 대현자, 자신의 말 한 마디로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멘탈리스트, 숨겨진 고대의 비밀을 찾아내 그 신비한 힘을 운용하는 오컬티스트 등, 전능자의 형상은 끝이 없다. 무수하게 변주되는 중2병 내지 이고깽 판타지의 소재들이다.


사춘기는 우리가 자신의 유한성을 실감함으로써 처음으로 실존의식이 싹트게 되는 시기다. 그 핵심은 죽음과 관계된다. 자신이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될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유년기에 자신을 보호해주던 부모 및 사회도 자신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직감하기에 부모 및 사회에 대한 반항도 시작된다. 자신과 같은 운명을 공유하는 또래집단과의 동질감 또한 배양된다. 그 중심에는 분명 죽음에 대한 이해가 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심화될수록,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긍정적 태도 역시도 함께 심화된다. 결국 사춘기의 발달과업이란 죽음의 사실성을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을 긍정해내는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유한성을 긍정한다는 이 표현을 더욱 쉽게 묘사하자면,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철학 및 실존문학이 전통적으로 사춘기를 정직하게 겪어내는 많은 청춘들에게 탐독서가 되어온 역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춘기는 사랑이 시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대단히 익숙한 말이다. 500원을 넣고 돌리는 운세뽑기의 문구로부터 세계적인 연예인의 노래가사에까지 '자신을 사랑하라.'라고 하는 이 말은 널리 울려퍼져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나 힘이 없는 말이다. 마음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일치하지 않게 되었냐면,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우리는 자신의 어떤 것을 사랑해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랑의 소재로 선정되는 것이 유사연예인처럼 SNS에 올린 자기 사진 정도뿐이다. 더 멋지고 남들 보기에도 그럴듯한 자기 모습을 연출하면 할수록, 보정을 강화하면 할수록, 그것이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 끝에서 왠지 모를 우울감과 함께 이런 말을 한숨처럼 내뱉곤 한다.


"내 마음을 모르겠다."


모르는 것이 당연한다. 관심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유한성의 산물이다. 우리가 마음을 느낀다고 할 때, 그것은 자신의 유한성을 느낀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마음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유한성에, 즉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것을 사실로 알게 되면, 더는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된다. 즉, 자신을 특정한 목적을 달성할 도구로 여기지 않게 된다. 자신을 도구로 여기지 않으니 타인도 도구로 여기지 않게 된다.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착취의 현실, 바로 관계의 현실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우리가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를 괴롭히는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망각하기 위해서다. 마녀로 지목된 이와 심판자 대 죄인이라는 관계를 맺어 돌을 던지는 동안에는 죽음의 손길이 자신을 비켜가 마녀에게만 향할 것 같기 때문이다. 전적인 착각이다. 사실은 그렇게 타인을 괴롭히고 있으니, 자기 세계의 고통의 총량은 증대되고, 그 결과 죽음의 징후는 자신에게 더 빨리 찾아온다.


자기는 마음에 관심을 가져 왔다고 말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실상 생각에 관심을 가져 온 것이다. 그 생각의 대부분 또한 관계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을가에 대한, 즉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잘 보일 수 있을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그러한 생각에 '자신을 사랑하는 법'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서 지속하고 있던 동안에는, 진실로 깜깜하다.


분명하게 말하건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유한성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초극인의 속성을 묘사할 때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말을 쓴다. '운명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말이다. 유한성이 바로 이 운명이다. 우리는 유한하도록 운명지어졌다.


그래서 초월성이란 결국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일, 자신의 유한성을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유한성의 산물인 자신의 마음을 사랑하는 일을 일컫는다.


덜 떨어지고, 못나고, 한심하고, 무능력하고, 열등하고, 무식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남들에게 잘 보이려는 의지가 만들어낸 긴장만 살짝 풀면 그 즉시 우리의 온몸을 엄습해올 것 같은 바로 그러한 죽음에 가까운 느낌을 사랑하는 일을 의미한다.


이것을 대체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힘이 있으면 가능하다.


사랑은 힘이다.


모르는 것을 모르는 것으로 인정하며, 제대로 알고자 하는 관심의 힘이다.


그 관심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제대로 있게 하는 실존의 힘이다.


뿌리부터 뒤집으면 된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 안다고 생각해온 그 모든 것을, 특히 자신의 마음이라고 착각해온 그 모든 관계가 만들어낸 생각을 전부 부정하고, 실제로 우리가 경험해온 그 죽음에 가까운 느낌의 뿌리부터 다시 알아보면 된다.


덜 떨어지고, 못나고, 한심하고, 무능력하고, 열등하고, 무식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그것을 정말로 다시 알아보고자 하는 관심 속에서, 아마도 이 세상에서 처음 출현한 우리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그 관심 속에서, 모든 것은 달리 보이게 된다. 그것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비난하지 않는 태도가 이렇게 처음으로 우리에게서 관심을 통해 등장한다.


관계들 속에서 모든 것을 비난해오던 태도가 처음으로 그 근본부터 뒤집힌다.


유한성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죽어가는 이 모든 것을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덜 떨어지고, 못나고, 한심하고, 무능력하고, 열등하고, 무식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그 느낌으로 알려지는 마음은 지금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게 지금 자신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만이 죽어갈 수 있는 까닭이다.


마음은 우리가 엄연히 살아가고 있다는 존재의 증거다.


마음을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마음을 비난하고 있기에, 마음을 모르게 된다. 자기 존재를 비난하고 있기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게 된다.


실존의 사촌인 선불교의 스즈키 선사는 이렇게 묻는다.


"왜 당신은 당신의 존재를 나에게 사과하나요?"


여기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자폐적 미학은 철폐된다. 자기 비난은 사실 궁극적으로는 타인을 비난하기 위한 도구다. 마치 엄마에게 자기의 비극성을 알림으로써 그 엄마에게 죄책감을 불어넣기 위한 아동의 수단과 같다.


타인을 비난해서 타인이 죄책감을 형성해야 타인을 조종할 수 있는 까닭이다. 모든 자기 비난은 타인을 조종할 수 있는 관계에서의 전능성을 획득하고자 이루어진다. 전능성을 얻으면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유아적 착각이 작동하고 있어서다.


그 결과, 자신도 타인도 형편없이 추락해가는 존재론적 몰락을 맞이한다.


덜 떨어지고, 못나고, 한심하고, 무능력하고, 열등하고, 무식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마음의 상태는, 바로 그러한 존재론적 몰락이 만연한 관계의 현실 속에서도, 죽음에 가까운 현실 속에서도, 마음이 어떻게든 살고자 한 그 증거들이다. 존재하고자 한 애틋한 몸부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같은 마음의 상태를 비난하지 않고 다시 발견함으로써, 역으로 우리의 존재를 다시금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한 상태가 비난의 소재가 아니라 실은 우리 자신이 가진 존재의 힘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이를테면, 덜 떨어진 것으로 경험되는 하나의 상태는, 그러한 마음 상태는 유한성의 산물이다. 잘나지 않으면 비난받는 세계 속에서 잘나지 않아 죽을 것 같이 경험되는 마음이다. 그리고 덜 떨어진 것으로서 계속 그 경험을 지속함으로써, 잘나지 않으면 비난받는 세계 속에서도 그 비난이 자신을 결코 죽일 수 없다는 존재의 강력한 힘을 반증하고 있는 마음이다.


자신은 왜 이렇게 한심한가? 한심함이 죽을 것처럼 비난받는 세계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가 결코 죽을 수 없다는 고귀한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심하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이와 같다.


우리를 죽일 것처럼 비난하는 그 모든 관계를 뒤집고, 관계가 우리를 결코 죽일 수 없다는 존재의 근본사실을 명백히 증거하고자 이와 같이 산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유한성에 관심을 갖고 이를 다시 발견해보면,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작동하고 있던 초월성으로 새롭게 알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유한성의 산물인 마음은 그렇게 초월성의 발현으로서 그 위상이 즉각 뒤집어진다.


이렇듯 유한성과 초월성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유한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초월성이 내재한다.


관계 속에서 우리가 가장 초라함을 경험하던 순간이, 실은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우리가 가장 멋진 일을 해내고 있던 순간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그러한 일을 했는가?


바로 그것을 이해하는 구체적인 활동이 실존상담이다.


실존상담은 모든 것을 뒤집는 활동이다.


죽음을 삶으로, 유한성을 초월성으로, 가장 없는 것을 가장 있는 것으로, 그래서 가장 빛나는 것으로 뒤집어낸다.


가장 없는 자들이 그렇게 가장 빛나는 자들로 변혁되는 길이다.


실존은 분명 이 변혁을 이끄는 힘이다.


마음을 사랑할 수 있는 초월적 힘이다. 마음 그 자체에서 비롯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의 힘이다.


없을수록 더욱 강력하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의 마지막에도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다 뒤집을 수 있도록 해주는 최후의 결전병기다.


우리가 지금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려 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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