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가기'를 누르기 전에 한 번만 잘 읽어보세요"
"왜 사는 거죠?"
이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오해된 질문입니다.
우선적으로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왜 사는지를 모르는 이는 사실 없습니다.
바로 확인해볼 수도 있습니다.
"엄마 난 왜 살아요?"라고 물으면 엄마가 꼬옥 안아줍니다.
자취하는 이가 동거하는 고양이와 눈높이를 맞추며 "난 왜 살아?"라고 물으면 고양이가 와서 이마를 부벼줍니다.
가장 정직한 연인들은 이 질문을 나누며 서로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네가 태어나 있는 것만으로 나의 행복이라는 걸 나에게 늘 알려주려고."
그런데도 너무나 명백한 이 답을 모른다고 하며 왜 사는지를 묻는 이들, 그들은 사실 왜 사는지가 궁금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경우 '왜' 사는지를 묻는 이들은 사실 '어떻게' 사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법적인 차원의 오해입니다. 의문사의 용법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는 방향성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는 방법론에 대한 것입니다.
방향성이 먼저 알려져야 방법론이 탐구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먹고 싶은 것이 스테이크인지 된장찌개인지를 모르는데, 포크를 써야할지 숟가락을 써야할지를 고민하는 일은 표현 그대로 고민을 위한 고민이 될 뿐입니다.
끝없이 쌓아 올려지는 이 무용한 만큼 무거운 고민의 바위산에 깔려 신음하는 상태를 우울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아니면 더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먹고 싶은지 아닌지도 확인하지 못한 채로, '어떻게?'의 고민만을 누적하고 있는 현실은 그야말로 절망입니다.
무용한 무게만을 더하고 또 버티고 있느라 아무런 힘이 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용하니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보람이 없습니다. 학습된 무기력의 상태에 젖어듭니다. 인생이 재미없고, 나날이 자신의 존재가 하찮게 경험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절망을 체화해가다가 그 끝에서 하나의 질문을 툭 던지게 됩니다.
"왜 사는 거죠?"
아니, 다시 물어야 합니다.
이처럼 오해된 형식의 질문을 던지면 자기 자신을 속이게 됩니다. 인생의 비극적 운명 앞에 노출된 순수한 순교자의 비장한 모습을 연출하며 자학하는 자폐적 미학에 도취되게 됩니다. 이 미학적 원리에 의해 안내되는 길은 금욕주의와 쾌락주의의 두 길입니다. 그러나 그 두 길은 동일한 자아도취의 길입니다.
자기기만이 자아도취를 만듭니다. 그리고 자아도취는 필연적으로 환상숭배를 만듭니다. 환상이 있어야 도취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대상에 덧씌워져 실체화가 되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 우상의 대표적인 이름은 바로 '주인님'입니다. 그래서 가장 무기력한 우울감에 빠져 있는 노예는 사실 자유가 아니라 주인을 찾습니다. 자유를 획득하는 일이 아니라, 나쁜 주인을 좋은 주인으로 갈아치우는 일이 그에게는 유일하게 중요해집니다. 즉, 노예는 주인을 바꾸면 자신의 우울감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좋은 주인에 대한 환상을 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오늘날은 이 우상숭배가 만연한 시대입니다.
더 진정한 주인님을 찾아 헤매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가피학(SM)의 정서적 대기가 짙습니다.
주인님은 고민이 많아 힘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소재로 기대됩니다. 주인님을 찾아 스스로 예속되려 하는 이유, 그것은 자신을 잘 이끌어줄 노련한 주인님의 말만 따라 살면 더는 힘들게 고민하며 살지 않아도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어떻게?'를 반복함으로써 누적된 고민의 문제를 주인님이 대신 해결해주기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인님의 핵심적인 속성 또한 이 지점에서 명백해집니다.
주인님의 자격으로 가정되는 것, 그것은 바로 지성입니다.
소위 말해, 생각 좀 반듯하게 하고 사는 것 같은 연예인들, 명사들, 미디어의 인물들이 이 시대에 주인님의 권위를 얻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 또한 분명해집니다.
자신보다 더 지성적인 이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매일 아침 방송에서 가르쳐주고, 무수한 정보 속에서 어떠한 정보를 취사선택해야 할지를 대신 결정해주고, 심지어는 내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방식에 대해서조차도 모델링을 시키곤 합니다. 바야흐로 그루밍의 시대인 셈입니다.
이를테면, 각종 그루밍방송과 그루밍쇼의 연출, 기획, 진행자들이 날카로운 비판적 지성의 전문가로서 자임하며, 그 자신들이 얼마나 건강하고 유능한 주인님인지를 알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이들이 악의를 갖고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집단정신이 주인님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이들은 그저 집단정신에 부응해서 움직이는 샤먼 같은 이들일 뿐입니다.
이 말은 다시 이러한 사실을 함축합니다.
주인님으로 행위하고 있는 이들 또한 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모르는 이들에 불과합니다.
우리 자신이 모르는 것은 주인님도 모릅니다.
샤먼은 단지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에 부응하여, '비를 내리게 하는 척' 연기를 하고 있는 쇼맨의 역할이지, 실제로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은 주인님도 못합니다.
지성적 속성을 가진 주인님의 말만 잘 들으면 두려움과 불안이 사라질 것 같았고, 더는 머리 아프게 고민하며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그 현실은 사실 주인님도 갖지 못한 현실입니다. 주인님도 주인님을 꿈꾸던 이만큼, 두렵고 불안하며, 늘 머리 아프게 고민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인님도, 주인님을 꿈꾸던 이도 종국에는 이렇게 질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사는 거죠?"
이처럼 오해된 질문을, 이 지경에 이르러서까지도, 여전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다시 물어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거죠?"
질문이 애초 가졌어야 할 정확한 형식으로 발화되어야 문제가 분명해집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왜 사는 거죠?"라고 물었던 그 모든 질문은 사실 다 "어떻게 사는 거죠?"였습니다.
그러면 두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리의 삶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진심으로 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지경에 이르러서까지도, 곧 어디로 가야 할지 조금도 모르겠는 절망 속에서도 여전히 '어떻게?'만을 물으며, 마치 방향성은 이미 아는 척, 정답은 이미 아는 척하는 쇼맨으로 연기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어떻게?'에 답해줄 지성의 기능을 맹신하고 있었으며, 과대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성은 아주 훌륭한 기능입니다. 방법론의 문제에는 정확하게 답해줍니다. 그러나 '어떻게?'라는 질문 너머의 것들에 대해서는 턱없이 무능합니다. 특히 '왜?'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 지성은 가장 무력합니다.
이를 이렇게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성은 비추는 기능입니다. 어떠한 것을 조명함으로써 그것을 구체화하고 실현하는 힘입니다. 때문에 지성은 조명할 것이 없으면, 또는 조명할 것을 찾지 못하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합니다.
전술한 것처럼, 방향성이 없으면 방법론에 대한 모든 논의는 전적으로 무용해집니다. 무수한 밤을 '어떻게?'를 고민하며 지샌다고 인생의 답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지성 안에는 원래 답이 없습니다. 지성은 답을 비추는 기능이지 답이 아닙니다. 손전등 안을 아무리 찾는다고, 깜깜한 밤에 우리가 가야 할 방향성이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게,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을 확인하고 그 길로 나서게 되었을 때, 길을 비추는 도구의 역할이 바로 지성의 역할입니다. 가고 싶은 길도 확인하지 않은 채, 방 안에서 손전등만 이리저리 비추고 있으면 단지 에너지의 낭비만 생겨날 뿐입니다. 나아가 손전등이 방 안에서 만들어내는 커다란 그림자의 환상에 취해봤자, 그 모든 소재는 그저 자기폐색된 작은 방 안의 것들일 뿐입니다.
진실로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방 밖의 것들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벽 너머를 향한 소망입니다.
즉, 마음은 그 자체로 방향성입니다. 벽 너머를 향한, 한계 너머를 향한 방향성입니다. 방향성을 확인한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그 확인을 돕는 질문이 바로 "왜 사는 거죠?"라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여지껏 해보지 않았던 그 질문입니다.
"왜 사는 거죠?"라는 형식으로 사실은 "어떻게 사는 거죠?"만을 끝없이 반복적으로 묻고 있었던 현실을 넘어, 정말로 "왜 사는 거죠?"를 묻게 될 때 이 질문은 이러한 메아리로 돌아옵니다.
"왜 살고 싶죠?"
마음에는 반드시 소망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왜?'라는 의문사가 그 발견을 촉진합니다. 그렇게 살고 싶은 방향성을 떠오르게 합니다.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살고 싶은가, 이 질문이 허용될 때 삶에 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전환됩니다.
삶은 이유가 아니라 소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삶은 소망입니다.
마음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지성은 마음이 소망하는 그 길을 비추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 소망대로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명하고, 구체화하며, 실현하는 기능이 지성입니다.
이처럼 지성은 마음의 도구입니다. 마음이 활용하는 아주 온전한 도구입니다.
이 지성이라고 하는 도구는 마음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사는 거죠?"를 묻지 않으며 오직 "어떻게 사는 거죠?"만을 반복적으로 묻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는 마치 손전등으로 끊임없이 뒤를 비추고 있는 상태와도 같습니다. '내가 더 잘 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며 계속 지나간 사건에 대한 생각만을 거듭하며 반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앞이 보이지 않으니 넘어질까봐 더욱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뒤로 가기'만을 계속 시도하게 됩니다. 안전해 보이는 까닭입니다. 그렇게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삶은 정체되고, 그 위에 고민은 적체됩니다. 주저앉아 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위대한 환상, 주인님만을 찾아 부르게 됩니다.
그러니 '뒤로 가기'를 누르기 전에, 한 번만 잘 읽어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한 번만이라도 잘 읽어봐야 합니다.
내 마음이 말하는 정직한 소망의 내용을 잘 읽어봐야 합니다.
그러면 "왜 사는 거죠?"라는 질문이 즉시 대답됩니다. 왜 사는지를 원래 알고 있던 바처럼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전술한 것처럼, 삶은 마음의 소망입니다. 마음은 살고 싶어합니다. 내 마음은 '살고 싶다'고 나에게 계속 전하는 내 가슴의 목소리입니다.
그렇게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는 늘 살고 싶어했습니다.
살아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마음이 살아서, 더 많이 내가 살아야,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고 싶다는 소망은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입니다.
사랑이 언제나 우리의 방향성입니다.
사랑은 거듭해서 벽을 넘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운동을 통한 우리 존재의 자기증명입니다.
"왜 사는 거죠?"
이 질문을 정확하게 자신의 것으로 받은 이는 그래서 그냥 웃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너무 벅차고 뿌듯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왜 살고 싶은가, 한 번만 잘 읽어보면, 저도 모르게 웃음으로 풀리는 일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