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섬세하게 작동시켜라"
그대의 과거는 후회고, 그대의 미래는 불안이다.
그대의 모든 문제는 후회와 불안 사이에서 펼쳐진다.
제대로 선택하지 못했고, 제대로 선택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택장애가 그대의 모든 문제의 이유다.
망설임은 바로 이 선택장애의 징후다.
망설임의 한쪽 편에서 그대는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고, 그대의 삶이 남의 뜻에 따라 피상적으로 휩쓸려가도록 방기한다. 망설임의 다른쪽 편에서 그대는 즉각 "에이 모르겠다. 인생은 한방이지."라며, 그대의 삶이 맹목과 충동의 급류에 좌초되도록 방치한다.
그대는 늘 모 아니면 도다. 윷놀이판에 몸을 던진다. 그대의 인생을 도박의 규칙에 맡긴다. 그리고 실패한다.
이러한 실패를 여러 차례 경험하다보니, 그대는 그저 움츠러들기만 한다. 가급적이면 선택이라는 불행이 자신에게 닥쳐오지 않기를 바라며, 주어진 매뉴얼과도 같은 삶의 정답을 갈망한다. 인생이라는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된 화석이 되고자 한다. 영원한 망설임의 표본으로 자리잡는다.
그대는 정말로 안다. 그대가 왜 이렇게 망설이게 되었는지를. 그대가 왜 이렇게 살게 되었는지를.
그대는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대는 내가 없는 것이다.
그대는 나로 사는 법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대의 어떠한 선택도 스스로 신뢰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대여, 이것은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인간이 나라는 것을 얻게 된지 고작해야 10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가장 최신의 삶의 형태다.
나라는 것은, 과거에는 특정계층만이 향유할 수 있던 럭셔리한 문화재였지만, 현대에 들어와 이제는 인간 모두에게 보급되게 된 트렌디한 보편재다.
그래서 그대는 단지 조금 혼란스러운 것뿐이다.
스마트폰이란 것을 처음 얻게 된 아마존의 원시부족처럼 조금 혼란스러운 것뿐이다.
그러나 그대여, 기억해보자.
나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이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대는 이 나라고 하는 문화재에 알 수 없는 흥분을 느끼지 않았던가?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지 않았던가? 그대의 가슴이 "바로 이거야."라며 약동하지 않았던가?
그대는 정말로 한번 나로 살아보고 싶지 않았던가?
어쩌면 감수성이 섬세해 트렌드를 일찌감치 캐치한 그대는, 바로 이 나로 살 수 있기만을 꿈꾸어오지 않았던가?
그대는 오직 나이기만을 소망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대여, 살자.
그대의 간절한 꿈이었던 나를 지금 바로 살자.
이제 더는 망설이지 말자.
살자와 말자 사이에서, 살지 말지 사이에서, 그저 살자.
삶으로써, 나라고 하는 그대의 꿈은 지금 바로 이루어져야 한다.
왕도, 귀족도, 금수저도 아니면서, 감히 나로 살고자 하는 그대의 뻔뻔스러운 꿈은 지금 바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그대가 하늘로부터 받은 자유의 권리인 까닭이다.
자유는 뻔뻔한 것이다. 자유는 뻔한 것이다.
그대에게 자유는 뻔한 것이어야 한다. 너무나 뻔하게 당연한 것이어야 한다. 그대의 것이 당연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이 나로 산다는 것이다.
무수한 과거의 인간들이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오직 그대만을 위해 기도했다. 그대는 인간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대가 나로 살 수 있기를 꿈꾸며, 무수한 과거의 인간들이 기도했다. 그 간절한 기도를 들은 하늘이 정확하게 응답해 그대에게 전한 선물이 바로 나다. 나는 성취된 예언이고, 실현된 소망이며, 영원한 언약이다. 천부인권론은 이렇게 성립된다.
나는 하늘이 내린 것이다.
나의 자유는 하늘의 크기와 같다.
자유는 내가 하늘의 아이라는 것을 그저 숨쉬듯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자유는 고집이 아니다. 나만의 스타일로, 나를 지키며, 나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강박적인 고집이 아니다.
이러한 고집은 나를 모르는 이들이, 나인 척 할 때 생겨나는 고집이다. 나를 몰라 세상이 두려운 만큼, 내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경직된 것이다.
나는 투박하고 거친 고집 속에 있지 않다. 나는 경직되어 있지 않다.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섬세함이다. 열려 있는 가슴이다. 흐르는 날개다.
'나 사용설명서'에 적혀 있는 하늘의 안내문은 오직 하나뿐이다.
"섬세하게 터치해주세요."
섬세한 만큼 그대는 나로 살게 되며, 그대의 삶에 자신이 생기고, 그대가 누려 마땅한 뻔뻔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된다.
섬세하다는 것은, 현재 그대에게 펼쳐지는 바로 앞의 것을 잘 느낀다는 것이다. 잘 느끼는 자는 수용하는 자며, 수용하는 자는 자유롭게 하는 자다.
그대가 삶에서 밀려온 바로 앞의 것에 대해 섬세하게 느끼며 허용한 그 자유로 말미암아, 이제 삶의 모든 장면이 그대가 있을 자리가 된다. 그대의 뻔뻔한 자유는 상냥하게 환영받으며, 그대의 자유의 날개 또한 깃털처럼 상냥하게 그대를 맞아준 모든 것들을 감싸안는다.
그대는 뻔뻔하게 사랑하며, 또 사랑받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나다. 인간이 누려 마땅한 나의 삶이다.
섬세함으로 작동되는 나의 삶이다.
감히 나를 꿈꾸고 있는 뻔뻔한 그대여.
감히 나로 살아보자.
섬세하게 나로 살아보자.
당연하게 그대가 바로 이 우주의 가장 귀한 이름임을 알려보자.
하늘의 아이임을 기억해보자.
기억한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대를 기다린다고, 오늘도 그대 귀에 속삭이는 소리 들려온다.
나의 소리, 들려온다.
구름 걸린 미루나무 - 이외수
온 세상 푸르던 젊은 날에는
가난에 사랑도 박탈당하고
역마살로 한 세상 떠돌았지요
걸음마다 그리운 이름들
떠올라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시울이 젖었지요
생각하면 부질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알 수 있지요
그리운 이름들은 모두
구름 걸린 언덕에서
키 큰 미루나무로 살아갑니다
바람이 불면 들리시나요
그대 이름 나지막히 부르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