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정죄가 멈춘 자리가 실존하는 천국이다"
실존(實存)이라는 말은 단어 뜻 그대로 '진짜로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면 진짜로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여기에서 사르트르의 섬세한 명제는 빛을 발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진짜로 있다는 것은 본질에 앞서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본질의 규정에 구속된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먼저 있다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인간의 비유로 이해하면 명확하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그를 가두는 감옥보다 먼저 존재한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인간이 만들어낸 나머지 것은 다 부차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인간이 감옥보다 더 우선하며, 감옥보다 더 거대한 존재라는 사실은, 인간이 감옥을 열고 나가 그 밖에 서게 됨으로써 여실없이 증명된다.
그래서 existence(실존)라는 단어는 ex(-의 밖으로)와 essence(본질)가 결합된 형태를 띤다. 그렇게 실존은 본질의 바깥에 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서 본질은 분명 전술한 예처럼 인간을 구속하는 당위적 속성을 담지한다. 본질이라는 표현이 이렇게 퇴락한 이유는 신의 죽음과 함께 동반된 형이상학의 몰락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설적인 이야기다. 인간을 구속하는 신이 자취를 감춘 뒤로 인간은 자유를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구속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도덕이다.
도덕은 인간이 신을 추방한 뒤, 신에게서 빼앗은 힘과 권위를 자기가 멋대로 유용하고자 한 자기우상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덕은 인간이 신인 척하려는 오만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다.
니체만큼 이 도덕의 기만성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을 가한 이도 없다. 도덕에 대한 니체의 핵심적 질문은 이것이다.
"대체 어떠한 누가 도덕을 주장하고 있는가?"
니체는 도덕을 주장하는 이가 실은 도덕을 이용해 권력을 획득하고 싶어하는 의도로 가득한 이에 불과함을 노골적으로 폭로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분명하게 도덕은 타자에 대한 폭력의 도구다. 도덕의 이름 앞에 타자를 복속시켜 타자로부터 자원을 강탈해내는 실질적인 무기다.
본질이라는 개념의 실용태가 이처럼 도덕이라는 표현과 동일시됨으로써, 실존은 이 본질로부터의 해방을 기획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존의 함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해도 무방하다.
'더는 전방위적 죄인으로 살고 싶지 않은 존재방식'
도덕은 본질론을 들이대며 인간을 모든 방향에서 겁박해온다.
개인이 살아가면서 무수하게 청취하게 되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돼."라는 이 말은 "정도에서 어긋나지 말고 진정한 본질을 따라 살아야 돼."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그 '진정한 길'이라는 것은 누가 제정한 것일까?
이 질문 속에 답이 있다.
'진정한 길'은 제정된 것이다. 누군가의 창작물이다. 문예창작동아리의 동인지 같은 것이다. '진정한 길'이 많이 팔려야 이득이 생겨나는 특정한 개인 및 집단에서 판매하고 있는 공산품이다.
즉,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하늘에서 주어진 신성한 것이 아니라, 가급적 최대수의 인간에게서 자원을 쟁취하기 위해 다른 인간이 만들어낸 창작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비지니스 활동이 치사한 이유는, 이 공산품을 구매하지 않으면 죄인으로 낙인찍히며 비난받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데도,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억지로 구매해야 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강매가 정당화되며, 약탈이 공공연해진다.
바야흐로, 도덕의 폭력인 셈이다.
오해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도덕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윤택한 생활을 조력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화적 발명품인 도덕이,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 남용된 결과 명백한 폭력으로 작용하게 된 역기능적 현실을 지시하는 이야기다.
폭력은 인간을 위축시킨다.
문예창작물의 강매는 단지 돈만을 약탈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약탈한다는 것은 시간을 약탈한다는 것이며, 시간을 약탈한다는 것은 삶을 약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을 약탈한다는 것은 바로 존재를 약탈한다는 것이다.
도덕의 강매가 인간에게서 인간 그 자신의 존재를 약탈해간다. 존재를 빼앗기니 존재가 작아진다. 존재는 위축된다.
도덕의 강매는 정죄를 통해 이루어진다. 도덕적 정죄는 상대의 고통을 자신의 이득으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부당거래의 대표적인 활동이다. 이 도덕적 정죄로 말미암아 인간의 존재는 나날이 위축되며, 전방위로 위축된다.
'자신이 너무나 보잘 것 없고 하찮아서 견딜 수 없다.'
도덕적 정죄에 짓눌리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 탄식이다.
그러나 이것이 도덕적 정죄 때문에 생겨난 탄식임을 개인이 쉬이 자각할 수 없도록 도덕적 정죄가 작동하는 방식은 아주 교묘하다.
도덕적으로 누군가를 정죄하려는 이는 상대를 직접적으로 정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상대를 힘없고 철없는 아이처럼 남들에게 보이게 만든 뒤, 그러한 모습을 자신이 참고 견디며 헌신하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자기는 도덕적으로 대단히 높은 상위에 있는 주체인 것처럼 입지화한다. 상대보다 더 인품이 있고 깨어있는 모습을 연기하며 상대가 어떤 실수를 하든 너그러이 품어주는 커다란 주체인 양 행세한다.
이것이 바로 타자에 대해 상정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도덕적 정죄의 방식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늘 하던 일이다. 선비들이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밥먹고 하던 일은, 전방위적으로 자기의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며, 똑같이 전방위적으로 타자에게 도덕적 정죄를 가하던 일이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도 정치사회적 현실뿐만이 아니라 다방면에서 펼쳐지고 있는 만행이다.
한 개인이 이러한 선비 같은 이의 모습을 훌륭한 인격자의 풍모로 보며,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그만큼 부족한 존재로 경험하고 있다면, 그 개인은 사실 지금 도덕적으로 정죄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의 존재를 약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만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나의 살을 잘라 남을 배불리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다.
우울증은 존재가 약탈되어 위축되었기에 생겨나는 대표적인 현상이다.
마음은 존재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존재방식을 일컫는 표현이다. 존재의 위축은 곧 마음의 위축이다.
마음 또한 도덕적 정죄를 당할 때 위축된다.
마음이 위축되는 대표적인 경우도 동일하게, 마음 앞에서 어떠한 개인이 인품있는 상위의 주체처럼 행세할 때 야기된다.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했다고, 마음아 미안해 눈물지으며, 마치 마음에 대해 아이를 유기한 부모처럼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 자기가 더욱 잘 양육해주지 못해서 마음이 많이 토라져 있는 것처럼, 마음에게 인자하고 자상한 부모행세를 하려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지금 마음을 도덕적으로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놀랄 필요가 없다. 도덕적 정죄라고 하는 것은 이처럼 교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죄라는 개념과는 완전히 정반대편에 있는 것 같은 현실을 통해 은밀하게 작동한다.
존재라는 표현과 마음이라는 표현을 등가로 놓고 이해하면 분명해진다.
존재가 자기 밑인가? 마음이 자기 밑인가?
자기가 존재의 부모인가? 마음의 부모인가?
그렇다면 자기가 임의대로 어떠한 마음을 존재하게 하거나 존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전혀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다.
진짜로 있는 존재는 본질에 앞선다. 즉, 실존은 도덕에 앞서고, 실존은 선비에 앞서며, 실존은 부모에 앞선다. 언제나 그러하다. 오히려 도덕과, 선비와, 부모는, 존재하는 일 이후에 펼쳐지는 존재방식의 작은 일면들일 뿐이다.
그래서 이것은 고전적인 비유로 하자면, 작은 파도가 자신보다 먼저 존재하고 또 자신을 존재하게 한 바다에게, "바다야, 몰라줘서 미안해, 우리 불쌍한 애기, 이제 많이 안아줄게. ㅜㅜ"라고 말하는 현실과도 같다. 허황된 현실이다.
도덕적 정죄를 가능하게 하는 본질이라고 하는 특정이익집단의 발명품을 하늘에서 내려온 진리처럼 믿는 구조를 채택하고 있는 한, 이 허황된 현실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구조를 뒤집어야 한다.
본질이 실존보다 앞서 있는 허황된 구조를 뒤집어, 실존이 본질보다 앞에 가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관념적인 말장난이 아니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는 사실 그대로를 드러내는 구체적인 실천론은 '정죄하지 않는 것'이다.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은, 특정이익집단이 권력을 얻기 위해 인간에게 주입하는 도덕적 기준을 본질로 상정한 뒤 그 본질의 인식틀에 입각해 현상을 판단하며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을 기각하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현상을 보는 것이다. 현상이 다가와서 알려주는 바 그대로를 정직하게 보고 아는 것이다. 즉, 현상학의 정직한 실천이다.
예수는 이러한 실천론의 대가였다.
예수로 말미암아, '가짜로 아는' 본질은, '진짜로 있는' 실존 앞에 늘 기각되었다.
요한복음[8:1-11]에는 잘 알려진 사례가 묘사된다.
...
예수가 성전에 앉아 사람들을 가르칠 때, 도덕주의자들과 본질주의자들이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와서 세워놓고 예수에게 말했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도덕은 이런 여자들을 돌로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선생님은 이에 대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는 그들의 말을 들은 체도 안하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그들이 계속해서 물으니 마침내 예수는 몸을 일으키고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 물러가고 마침내 여인과 예수만 남았다. 예수가 여인에게 물었다.
"여인아, 그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들이 하나도 없느냐?"
여인이 대답했다.
"주님,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가 그 말을 듣고 말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는 네 존재를 소외시키지 말라[죄를 짓지 말라]."
...
그리고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정죄의 목적을 위해 강매되지 않을 이러한 문예창작물도 가능하다.
...
시간이 지나,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던 한 아낙네가 여인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까 저 사람이 땅에 무언가를 쓰던데, 대체 뭐라고 쓰던가요?"
여인은 대답했다.
"그 분께서는 이렇게 쓰셨습니다."
'오빠 믿지?'
...
믿어야 한다.
신뢰해야 한다.
그 어떤 본질보다도, 그 어떤 감옥의 규칙보다도, 가장 위에 있는 것이, 가장 우선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임을 신뢰해야 한다.
내가 바로 그 인간임을 신뢰해야 한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중한 사실로서 신뢰해야 한다.
인간에 대한 본질을 임의로 규정하려는, 그럼으로써 인간을 정죄하려는 그 모든 기만적 수작을 다 잊어야 한다. 그 모든 '진정한 길'을 다 잊고, 오직 지금 자신의 실존만을 기억해야 한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이 지금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정죄당해도, 아무리 위축되어도, 존재는 존재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존재는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
존재는 나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존재는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
틸리히는 죄를 소외라고 다시 말한다. 정확하다. 죄라는 것은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뜻이다.
정죄는 개인을 그 자신의 존재로부터 소외시키려는, 곧 존재를 부정하려는 그 모든 행위다.
그러나 존재는 행위하지 않는다. 존재는 정죄하지 않는다.
존재는 다만 존재한다. 끄떡없이 존재함으로써 소외된 것을 묵직하게 붙들어맨다. 이 자리로 기어이 다시 돌려놓는다. 그리고 명한다.
"살아라. 더 살아라. 누가 너를 존재하지 말라고 말해도, 존재 그 자체인 내가 너를 허락한다. 너는 살아라."
이 명령을 신뢰해야 한다.
유일하게 본질적인 이 명령을 신뢰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실존은 그 자체로 인간의 본질이다.
진짜로 있으라[실존하라]는 명령의 구현이 그대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구명이다.
천국은 본질에 대한 은유다.
도덕적 정죄를 멈출 때, 곧 도덕을 이용한 권력욕에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소외시키는 일을 멈출 때, 그곳은 이미 실존하는 천국이다. 실존하는 본질이다.
존재가 가장 충만한 자리다.
그래서 예수는 "천국은 너희 마음속에 있다."라고 한 것이다.
천국은 자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그 사실 속에 있다.
개인의 그 실존 속에 있다.
뒤집혀져 가장 존귀하게 올라선 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