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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Jul 12. 2019

미드소마(Midsommar, 2019)

한여름낮의 악몽: 경계성 성격장애와 집단주의, 그 융합의 공포에 대하여


  태양의 빛이 가장 길게 내리쬐는 하지에는 어떠한 일이 생기는가?


  들판 위로 마음의 그림자가 가장 깊게 드리워진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투사되어 낯선 누군가를 하자(瑕疵)로 만든다.


  이 영화는 빛의 세력이 가장 강력한 하지에 펼쳐지는, 가장 잔혹한 타자의 하자화에 대한 영화다. 가장 밝은 빛 속에 가장 큰 공포가 있다. 바로 이 양가적 역설을 드러내고자 하는 이야기다.


  태양은 일견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형상화되는 상징물이다. 태양의 빛은 우리를 지지하고, 우리의 어려움에 공감해주며, 우리의 상처를 따듯하게 감싸주고, 우리가 소외되지 않도록 늘 비추어주며, 우리를 그 안전한 비호의 영향권하에 친히 위치시켜주는 것만 같다.


  태양 아래 우리는 동등하며, 또 평등하다. 우리는 형제자매며, 우리는 하나다.


  근대의 정신 속에 무수하게 발화된 이 선언 앞에 우리는 많은 감동의 눈물을 쏟았고, 동시에 '우리'가 아닌 이들에게 끝없는 비탄의 눈물을 쏟게 했다.


  밝은 빛의 조명을 통해, 그 빛 안에서 소외되는 이 없이 모두가 하나된 낙원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던 근대의 계몽주의는 최악의 악몽을 낳았으니, 이를 이름하여 우리는 동일성의 폭력이라고 부른다.


 이 동일성의 폭력 아래 수많은 타자들이 스러져갔다. 하나의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하자품으로서, 또는 하나의 빛을 더욱 환하게 밝히기 위한 도구로서, 억압되고, 남용되고, 약탈되고, 착취되며, 심판되고, 처벌되고, 규탄되고, 말살되었다. 개 같은 일이었다. 밝고 건강한 빛이 비치면, 반사적으로 침을 흘리며 헐떡대야 하는 아폴론의 개가 되어야 했던 일이었다. 인간성의 몰락이었다.


  동일성의 폭력은,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의 논리다. 그리고 타자는 언제나 인간의 다른 이름이다. 때문에 동일성의 폭력은 있는 그대로 살아있는 인간을 학대하며, 반드시 그렇게 있어야만 할 모습으로서의 관념을 숭상한다. 즉, 생명 없는 죽은 것들의 논리를 통해, 생명 있는 것들을 똑같이 죽은 것들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동일성이 유지될 수 있는 까닭이다. 변화하고, 예측할 수 없는, 곧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는 동일성을 유지할 수 없다. 때문에 생명 위에서는 동일성이 유지되지 못한다. 동일성의 왕국은 오직 시체들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라고 하는 태양의 백성들의 범주에 속하는 모든 인간을 티없이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하나된 빛의 의지는 이처럼 그 의지의 강렬함만큼이나 무수한 타자들의 시체의 산을 쌓아왔다. 홀로코스트는 어둠이 만든 것이 아니라, 빛이 만든 것이다. 빛에 대한 과잉된 의지가 바로 악의 실체였다.


  여기에서 빛에 대한 과잉된 의지라는 표현을, 우리는 안정에 대한 과잉된 의지라고 치환할 수 있다. 심리학적 치환이다. 


  우리를 제일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이름, 바로 그것이 타자다. 그리고 타자라는 개념의 성립은 관계라는 개념의 성립을 전제한다. 타자란 관계 속에서 상호적으로만 구성될 수 있는 개념인 까닭이다.


  바로 이 관계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우리는 관계를 통해 안정을 얻고자 시도하지만, 동시에 관계로 인해 불안해진다. 관계의 속성은 지극히 양가적이다. 이와 같은 관계의 모순적인 거미줄에 사로잡혀, 우리는 이 모순을 돌파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관계의 논리를 지배하기 위해 애쓴다. 즉, 자신과 함께 관계를 구성하는 타자에게서 얻는 이득은 최대치로, 자신이 제공해야 할 호혜는 최소치로 만들어 관계의 경제적 효율성을 꾀하려는 여러 방편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지지되는 지배에의 방편은 바로 융합이다.


  융합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넌 나와 같아야만 해. 같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행위해야만 해."


  바로 이 융합이야말로, 끝없이 동일성의 폭력을 생성하는 당위적 기제다.


  이 융합의 문제가 우리의 관계논리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형태로는, 미시적으로는 경계성 성격장애를, 거시적으로는 집단주의를 들 수 있다. 양자 모두 타자에 대한 철저한 배척과 소외의 논리다.


  실제로 이 영화는, 미시와 거시의 양 측면에서 동일한 융합의 현상을 조명한다. 한 여성이 보이는 심리적 현상은, 그대로 스웨덴 오지의 마을에서 펼쳐지는 집단주의의 현상으로 은유된다. 우화의 구조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대니는 다분히 경계성 성격장애로 분류될 만한 모습으로 영화 내에서 묘사된다. 경계성 성격장애가 속한 B군의 성격장애들[반사회성, 경계성, 연극성, 자기애성]은 대체적으로 유사한 특성을 갖는데, 그 핵심은 관계의 양가성을 임의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타자의 자기화를 이루어 관계를 자기 뜻대로 지배하고자 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대니에게 있어서도 관계는 양가적이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동시에 그를 전적으로 통제하고자 한다. 상대가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을 경우, 그녀는 상대 앞에 우울하고 무력해짐으로써, 곧 자신의 화를 상대에게 투사함으로써, 상대에게 죄책감을 안기는 식으로 상대를 처벌한다. 이를 수동공격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피를 말리는 경계성 성격장애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또한 그녀 자신은 상대에게 누구보다도 공감을 요구하지만, 상대의 입장에는 결코 공감하지 않는 일방통행의 태도를 보인다. 부모든, 친구든, 애인이든, 그녀에게는 모든 타자가 그저 자신의 말을 들어주어야만 하는 도구다. 그녀는 스스로를 피해자처럼 상정하며, 그 피해의식에 입각하여 세상이 자신에게 잘 대해줘야만 한다는 강박적 도식을 갖고 있다. 그 도식에 의해, 타자는 그녀를 위한 봉사적 도구로서만 취급된다.


  이처럼 타자의 도구화가 이루어지는 까닭에, 타자에 대한 대니의 태도는 일회용 소모품에 대한 태도와 같다. 자신을 더 인정하고 지지해줌으로써 자신의 피해의식을 보상해줄 더 유능한 타자가 출현하면, 그녀는 과거에 자신이 의존했던 타자를 심판하고, 처벌하며, 파멸시키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녀에게는 이 삶이 한 편의 연극과도 같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루어지는 연극이다.


  때문에 그녀는, 타인의 삶과 죽음의 문제에 정말로 공감하지 못한다. 그녀가 누군가의 죽음과 상실로 인해 고통받는 유일한 때는, 그 누군가가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이득을 제공하는 인물이었던 경우다. 곧, 그녀는 타자의 죽음과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잃음으로써 자신이 더는 주인공이 되지 못하게 되는 현실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비극적으로 보이는 그녀일지라도, 자신을 더 화려한 연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것처럼 보이는 대상이 나타나면, 이내 그녀의 본색은 드러난다.


  그녀는 활짝 웃는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이 장대한 연극의 중심인 여왕으로 다시 등극하게 되었음을 자축하며.


  이 경계성 성격장애를 포함한 B군의 성격장애들은, 이처럼 철저하게 타인을 도구로 대한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타자에게 융합하여, 그 타자의 자원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 이득을 누리고, 타자가 자신에게 벗어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면 죄책감을 부여해 제재함으로써, 타자를 오로지 자신만의 소유물로 만들어 남용하고자 한다. 마치 유기된 것처럼 불쌍해보이는 모습을 연출하여 상대를 옴짝달싹 못하게 통제하는 것은 이들의 대표적인 전략이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타자의 자기화다. 곧, 동일성의 폭력이다. 그러나 경계성 성격장애의 주체에게는 이 폭력이 더 은밀하고 기만적인 형태로 펼쳐지는데, 여기에는 바로 "네 탓이야."의 기제가 작동한다.


  B군의 성격장애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남의 탓이다. 하자가 있는 것은 언제나 타자지, 자신이 아니다. 때문에 자신이 융합한 상대로 인해 자기에게도 불리함이 경험되면, 이들은 그 하자를 상대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은 무결한 존재처럼 스스로를 어필하고자 한다. 자신은 마치 부당한 취급을 받은 것처럼, 세상 모두가 자신에게 악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들 자신의 투사다. 자신이 바라는대로 상대가 이득을 충분히 제공해주지 않기에, 즉 상대가 효율적인 도구로서 기능하지 않기에, 그 상대를 자신이 심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투사는 영화 속에서도 잘 묘사된다. 대니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녀가 사람들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이 성격장애들의 핵심은, 자신을 남들과 다른 존재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누군가를 감히 도구로 삼을 수 있고, 누군가를 감히 지배하려 할 수 있으며, 누군가를 자신에게 봉사해야 할 열등한 존재로 보며 감히 비웃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은 남들과 다른, 즉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입장이 이들의 근본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 까닭에, 이들의 태도는 연극적이다. 자신은 남들과 다른 지평 위에 서있는 연출가이자, 각본가이며, 명배우다. 이들은 늘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는 연극을 기획하며, 그 연극의 각본이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꿈꾼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타자를 착취하고, 남용하며, 가학한다. 이들 자신의 꿈은, 타자에게는 악몽이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모습이다.


  바로 이러한 경계성 성격장애가 거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집단주의다. 집단주의는 대표적인 융합의 사태다. '하나'라는 이름으로, '우리'라는 이름으로, '빛'이라는 이름으로, 이 집단주의는 타자를 끝없이 포식한다. 타자의 희생을 양분으로 삼아 자신을 유지한다. 아메바의 생태와 같다.


  『구토』에서 사르트르는 개인을 악착같이 집어삼키려 하는 이 집단주의에 대한 분노와 공포를 표현한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도, 니체에게 있어서도, 모든 실존주의 사상가들에게 있어서도, 이 집단주의는 가장 반실존적인 사태였다.


  실존신학자인 틸리히는 이와 같은 집단주의가, 전체에 함몰됨으로써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의도임을 밝히면서, 이 집단주의로 인해 야기된 악몽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묘사한다. 광기적인(demonic) 도취는 집단주의의 원동력이었고, 그 결과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적인 대참사였다. 또 한 번,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모습이다.


  경계성 성격장애도, 집단주의도, 모두 다 건강하고, 밝고, 아름다운 꿈을 실현하려는 의도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우리]에게만 아름다운 꿈인 까닭에, 그 경계 밖에 놓인 타자들에게는 터무니 없는 폭력이다. 인간성의 철저한 말살이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악몽이다.


  이 영화는 경계성 성격장애인 주인공의 심리와, 집단주의에 근거한 폐쇄적 공동체의 생리를 함께 엮어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 악몽의 전모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안내한다. 동일성의 폭력이 어떻게 소수자의 외연을 걸침으로써 오히려 타자에 대한 역차별의 기제로 작동하게 되는지, 즉 피해자의식이 어떻게 교묘한 방식으로 타자에게 더 큰 가해를 가하게 되는지를 잘 묘사한다.


  "넌 나와 같아야만 해. 같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행위해야만 해."


  경계성 성격장애의 이 인지도식이 현실로 구현되어, 영화 속 공동체의 모든 이들이 똑같은 감정을 느끼며 하나된 융합체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진실로 공포스럽다. 그 중심에 영화의 주인공인 대니가 여왕으로 서있다. 집단주의가 전체주의로, 나아가서 독재로 체현된 모습이다.


  모두가 자신과 동일한 모습으로 화한 한 편의 장대한 연극 속에서, 그녀는 천상에 막 도착한 듯한 환희의 웃음을 얼굴에 떠올린다. 자신이 주인공이 됨으로써 완성된 연극의 성공을 황홀한 도취로 자축한다. 거룩한 태양빛 아래 집단주의적 의도가 공감하고, 지지하며, 실현해준 그녀의 꿈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끝나지 않는 한여름낮의 악몽이다.


  이른바, 하지의 꿈은 타자를 하나로 융합시키려는 섬뜩한 집요함 속에서, 결국 타자를 하자로 만들어내 파멸시킨다. 하나이거나 하자이거나, 빛의 광기가 지배하는, 미친 여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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