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된다는 것"
아무리 이른 폭염이 기세를 부려도 그대는 반드시 자신을 치장하고 밖으로 향할 것이다. 그대는 단 한 순간도 놓칠 수 없는 까닭이다. 이 폭염마저도 그대에게는 기회다. 그대가 며칠 전 다른 이의 페이스북에서 본, 바벨탑처럼 쌓여 있던 장엄한 위광의 트로피칼 빙수는 오늘의 폭염을 배경으로 삼아 휴대폰 카메라 앞에서 그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예비된 자원이다.
매일매일이 그대가 주인공이 될 기회처럼 느껴진다. 빛나는 나날들이다. 그래서 매일매일을 허투루 보내게 되면 그대는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대가 이러는 동안에도, 그대가 아닌 다른 이들이 그대의 것임이 마땅한 주인공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것처럼 생각된다. 그대는 질 수 없다.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길 수 없다. 그대가 바로 주인공이어야 한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그대에게는 전투의 장이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 또는 최소 다른 사람만큼은 동등하게, 그대는 주인공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힘쓴다.
나는 보았다.
백종원의 자취를 따라 정신없이 골목을 헤매는 그대를 보았고, 유별난 이름이 붙은 밥 한끼를 먹으러 땡볕 아래 30미터는 되는 긴 줄에 서 있는 그대를 보았으며, 농수산물 배달을 위해 오가는 냉동탑차들 사이로 빈티지한 담벼락에 기대 우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대를 보았다.
삼청동에서, 망리단길에서, 연트럴파크에서, 유튜브에서, 팟캐스트에서, 아프리카TV에서, 페이스북에서, 인스타그램에서, 트위터에서, 문화 플랫폼 공간에서, 인문학 소모임에서, 청년 포럼에서, 나는 누구보다 뜨겁게 자신이 주인공임을 천명하는 그대를 보았다.
그대가 너무나도 진중하고 열정적이어서, 차마 그대에게 나는 말을 걸지 못했다.
무슨 호들갑이냐고, 그저 기린처럼 웃으며 소확행의 인생을 즐기고 있을 뿐인데 심각한 건 오히려 당신 아니냐고, 그대에게 타박을 들을 것이 두려워, 차마 그대에게 나는 말을 걸지 못했다.
행여라도 내 손 끝이 스치면 그대의 정원에 북풍이라도 밀어닥쳐, 그대가 고운 린넨 테이블보 위로 차려낸 어여쁜 정성들에 생채기라도 날새라, 차마 그대에게 나는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말을 걸지 못한 이유는,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되고 싶어, 그 모든 풍경 속에서 몸으로 악다구니를 치며 울고 있던 그대를 나는 보았다.
주인공이 되고 싶어, 그대는 그대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것처럼 말하던 모든 곳에 찾아가 대가를 지불하며 주인공이라는 것을 사고 있었다. 그렇게 그대가 지불한 무수한 대가들은 역설적으로 그대가 아닌 그 대가의 수혜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고, 그대에게 남은 것은 화석 같은 사진뿐이었다. 그렇게 그대는 박제된 사진으로만 남게 되었다. '주인공의 삶'이라고 타이틀이 쓰인 핑크빛의 앨범 속에.
박제된 그대는 요동치고 있었다. 몸으로 울고 있었다. 앨범의 페이지가 늘어가면 갈수록, 박제되면 될수록, 그대는 점점 더 주인공으로 스스로를 느끼지 못하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그만 둘 수도 없다. 앨범에 수집될 사진들마저 없으면, 주인공이라는 이름으로부터 그대는 영영 소원해질 것만 같다.
주인공이 꼭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인공이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주인공이 된 꿈이라도 꿀 수 있게 내버려다오. 주인공인 척 사기라도 칠 수 있게 모른 척 해다오. 주인공인 것처럼 자신이라도 속일 수 있게 말 걸지 말아다오.
그렇게 그대는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모든 비루함 속에서, 온 몸으로 울었다.
그 울음의 정확한 이유를 그대는 안다. 그대가 결코 주인공이 아니라는 그 사실을 그대는 안다. 그대가 매일매일을 주인공이 될 기회로 여겼던 만큼, 어느 하루도 주인공이지 않았음을 그대는 안다.
그대의 간절함의 크기는, 그대의 부재의 깊이와 동일하다.
그대여, 울고 있는 그대여, 그대는 주인공이 아니다.
울음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그대여. 아무리 눌러봐도 터져나오는 울음을 그대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그대여. 울음이 그대보다 크다. 울음 앞에 그대는 무력한 타자다. 곧, 울음은 그대보다 큰 타자다.
때문에, 울고 있는 그대가 주인공이 결코 아니다. 그 타자인 울음이 있는 그대로인 진짜 주인공이다.
지금의 이 삶 속에서 울음이 그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이 그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대를 살고 있는 이 진짜 주인공의 이름은 마음이다.
그대가 마음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그대하는 것이다.
그대를 살고 있는 울음은, 그 진짜 주인공은 현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해."
마음은 그대한다. 울음은 그대한다.
울음은 바로 그러한 그대가 되도록 그대를 살아낸다.
그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대이기를 소망하며 그대를 살아낸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대는 박제될 수 없다. 화석이 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대는 사진 속에 존재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대는, 그대가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말하는 지금의 이 생생한 울음으로서만 증거될 수 있다. 울음이라는 진짜 주인공의 대사로서만 선포될 수 있다.
이처럼 그대를 사는 마음은, 그 자신의 형상으로 그대를 만들고자 한다.
타자인 마음은 그대를 살아, 그대를 자신으로 만든다. 그렇게 그대는 자신이 된다.
주인공인 마음이 그대를 살아, 그대는 주인공인 자신이 된다.
이것이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그대여, 이 자신이란 것은, 영원한 주인공의 약속된 이름이다. 마음이 보증해주는 이름이다.
그대가 그대를 주인공이라고 칭하는 것, 이것을 절대주의라고 부른다.
그대가 모두를 주인공이라고 칭하는 것, 이것을 상대주의라고 부른다.
그대가 타자를 주인공으로 영접하는 것, 이것을 상호주의라고 부른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는 똑같은 망상이다. 그대와 타자 간의 분절된 경계 속에서, 그대가 스스로에게 홀로 주인공의 자리를 부여하고자 하는 망상이다.
마음이 타자임을 이해하고, 마음을 주인공으로 영접하며, 그대가 마음 앞에 물러설 때, 그때 망상은 깨지고 상호주의는 꽃핀다. 타자였던 마음이 주인공으로서 그대를 살아냄으로써, 그대를 동일한 형상이 되도록 한다. 곧, 그대로 하여금 타자에서 주인공이 되도록 한다.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한다.
이 주인공으로서의 자신은 그대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타자가 만들어준 것이다. 타자로부터의 귀한 선물이다.
실존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I)는 언제나 당신(Thou)으로부터만 태어난다고 말한다. 이처럼 타자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자신이 꽃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사는 것, 이것이 상호주의다.
주인공이 되고 싶은 그대여, 마음의 강물에 몸을 던져라.
그대의 몸은 강물과 만나고, 물의 부력은, 그대를 자신처럼 잘 뜨는 힘으로 만들 것이다. 그대는 그대를 띄우려는 물의 부력을 온 몸으로 느낄 것이다. 그것이 온 몸으로 운다는 것이다. 타자를 진실되게 주인공으로 영접하려 할 때, 그대는 반드시 온 몸으로 울게 된다. 온 몸으로 울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떻게든, 반드시, 그대를 자신과 같은 주인공이 되게 하려는, 곧 주인공인 자신이 되게 하려는, 그대 앞에 선 마음이 너무나 감격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마 그대에게 나는 말을 걸지 못했다.
그대가 온 몸으로 울던 그 순간, 그대는 분명 그대가 아닌 마음이 주인공임을 알아차리고 있던 까닭이다. 매일매일이 그대가 마음을 주인공으로 영접할 기회라는 것을 눈치챈, 그대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순간이었던 까닭이다.
빛나는 나날들이다. 마음이 그대를 빛내는 나날들이다. 나날들 속에 빛나는 그대 자신이다.
다이브인투유 - 너에게로
나는 너에게로 뛰어 든다
끝도 없는 그 알 수 없는
나는 너에게로 뛰어 든다
끝도 없는 그 알 수 없는
그 먼 시간 찾아 헤매던
내 살아갈 이유된
그런 너에게로
나는 네게로 너는 내게로
나는 네게로 너는 내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