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상담 길라잡이
Don't psychoanalyse me
나를 정신분석하지마
You won't like me when I'm psychoanalyzed
내가 분석되면 넌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정신분석은 대부분의 상담의 실천론 속에서 다소간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접근이다. 또한 상담의 영역에서뿐만이 아니라, 문화예술 분야나, 또는 더 보편적으로 우리의 상식의 근저를 형성하는 일상의 영역에까지 정신분석적인 이해는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일례로, 이제는 우리에게 보편적인 믿음으로 되어버린, 그러나 오늘날에는 수십 년에 걸친 종단연구들 속에서 완전히 잘못된 착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 애착이론, 즉 아동에 대한 부모의 양육방식이 개인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개념과 같은 것들은 역시 이 정신분석적인 이해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정신분석이라는 이름을 표방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유사심리학(pseudo-psychology)들은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파악하면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특정한 심리적 방법론이 가능함을 주장하며, 일종의 유사정신분석처럼 기능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정신분석적인 이해가 우리 삶에 만연하게 된 나머지, 많은 편향과 곡해들이 필연적으로 야기되어 왔다. 때문에 이러한 굴절된 사태에 반동하여 정신분석의 허구성 및 폭거성을 비판하는 접근들이 출현해왔고, 그중 실존상담은 대표적인 세력을 형성한다. 실존상담은 언제나 정신분석의 반대편에서 작동하고자 하는 경향성을 내포해왔다.
아주 단순한 대조로는, 상대적으로 정신분석은 근대적 경향성을 띤 심리학이고, 실존상담은 현대적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는 근대와 현대의 시대정신이 왜 다른가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흔히 철학사에서 거대담론에 반동하는 미시담론들의 조명을 현대적 사조의 출발점으로 이야기하곤 한다. 즉, 인간의 구체성 및 개체성을 회복함으로써, 특정한 지배적 담론에 의해 야기되었던 인간 소외의 현상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키워드는, 몸, 삶, 유한성, 불확실성, 모호성, 의미, 소수자 등과 같이 일원적으로 통합될 수 없는 고유한 개인성의 강조를 이루는 표현들로 구성된다.
이러한 현대성을 열어간 것은 두 말할 것 없이 바로 실존철학이다. 키르케고르는 그 선구자다. 그는 근대의 완성자라고도 할 수 있는 헤겔에 반동하여, 개인성 없이는 우리의 그 어떤 삶도 정당하게 성립될 수 없음을 주장한 바 있다. 생철학, 실존철학, 현상학, 해석학과 같은 일군의 사조들은 결국 이 개인을 통해 고유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삶의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만으로 정신분석과 실존상담의 정당한 대조를 구성하기에는 분명 충분하지 않다. 상기한 그 모든 측면들은 정신분석 또한, 특히 현대정신분석에서는 충분히 풍요롭게 담지하고 있는 요소들인 까닭이다.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더욱 명확한 경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데, 그 경계는 바로 실체성의 경계다.
실체성이라는 건, 마치 언어성분에서의 명사와도 같이 고정되고, 항구적이며, 안정적이고, 그러한 까닭에 보다 진정한 가치를 담보하는 사물처럼(things-like) 여겨지는 속성을 의미한다. 근대의 역사는 바로 이 실체성을 확보해내기 위한 역사였다. 그리고 이 기획을 성사시키기 위한 근대의 핵심적인 방법론은 바로 주체-대상 구도, 즉 주객 구도의 적극적인 도입이었다.
데카르트에서 출발한 근대가 헤겔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결국 모든 것을 인식론적으로 대상화할 수 있는 신적인 주체가 성공적인 실체화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체가 대상을 인식한다고 하는 의미는, 주체는 대상과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분리시켜야, 즉 대상화시켜야 인식할 수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이러한 구조 속에서, 대상화된 모든 것들은 주체의 실체화에 봉사하기 위해 점점 더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바로 이것이 특정한 인식론적 주체를 제외하곤 그 모든 것이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다.
후설은 이 근대의 주객 구도를 극복하고자 현상이라는 개념을 통해 의식작용과 의식되는 것을 불가분의 관계로 다시 드러내고자 했으며,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라는 표현을 통해 애초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의 구조를 명석하게 재정립하고자 했다. 결국, 이러한 통찰들을 담지하는 실존철학, 현상학, 해석학은 실존상담의 가장 굳건한 토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이러한 주객 구도의 극복을 위한 일련의 현대적 몸짓과는 상반되게, 여전히 실체성을 지향하는 요소들을 크게 담보하고 있다.
우선적으로, '분석(分析)'이라는 명칭 자체가 지니고 있는 '나누고 쪼개다'라는 함의는, 애초 분리된 주객 구조의 성립을 전제해야만 가능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분석은 우리의 삶을 명사적인 실체성으로 이해할 때만이 성립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은, 하이데거가 말하듯 언제나 현재진행형인 동사이다. 동사는 분절될 수 없다.
물을 예로 들자면, 물은 동사적인 흐름이다. 나누고 쪼갤 수가 없다. 때문에 실체화될 수도 없다. 나아가서는 모든 실체들 중에서 더욱 진정한 실체의 가치를 담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분명히 이러한 작업을 하고 있다. 고전적인 정신분석의 구조에서부터 이미 인간의 마음은 명사처럼 실체화되어 있다. 이를테면, 자아-초자아-원초아 등과 같은 심리적 구조는 이미 분석을 위해 인간의 마음을 실체화한 정확한 결과다. 더군다나 이러한 실체성들 속에서 보다 우세한 실체적 가치 또한 가정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분석가의 가치다.
분석가는 그 모든 실체성들 속에서도 가장 실체적인 것이다. 분석가는 가장 투명하고 객관적인 인식력을 대표하도록 촉구받는 존재다. 그럼으로써, 혼란한 마음이라는 대상에 새로운 정합적 질서와 규칙을 부여하는 로고스의 힘을 대변하는 신적인 주체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근대적 기획 그 자체다. 설령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 대한 분석가라 하더라도 이는 마찬가지다. 타자를 대상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기 자신조차도 대상화하게 되는 것뿐이다.
이는 정신분석이라는 접근 자체가 여전히 근대의 잔재 속에서, 근대가 가장 숭앙한 지성주의의 가치를 근거로 해 성립된 접근인 까닭에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현상이다. 정신역동이라는 표현으로 이러한 접근의 외연을 확장시키면, 융의 분석심리학 등과 같이 프로이트의 영향하에 파생된 거의 대부분의 접근이 이와 같은 지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노출될 수 있이다. 하다 못해 NLP 등과 같은 오늘날의 유사심리학들이나, 켄 윌버 같은 트랜스퍼스널 심리학자의 접근들 역시도 결국 이 지성주의에 근거해 성립되는 접근들이다.
근대적 이해 속에서, 지성의 핵심적인 기능은 바로 인식이고, 인식을 통해 지성은 가장 실체적인 것 중의 실체로서의 위상을 담보하게 되었다. 지성은 오염되어선 안되고, 오염될 수도 없는 것으로 상정된다. 지성에 부여된 이 무오성(infallibility)은 다시 한 번, 그 지성의 담지자로서의 주체에게 투명하고, 객관적이며, 세계 및 타자와 분리된 초월성을 요청하게 된다. 소위, 정신분석가들이 내담자에게 영향받지 않으려는 투철한 의지를 갖고, 내담자가 상담자를 ‘감히’ 오염시키려 하는 전이감정 등을 오히려 대상화시켜 이를 분석하고자 하는 그 이유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명료하게 경계지은 것처럼, 세계 및 타자와의 관계에서, 곧 맥락(context)에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는 독립적 실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미 연결지어진 이 상호성을 오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자 한다면, 오염되지 않고 투명한 객관성으로 존재할 수 있는 세계-내-존재는 결코 성립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신분석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대단히 필사적으로, 집요하게 이 객관적 실체성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사실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매우 자주 종교처럼 느껴지게 되는 그 이유이기도 한데, 실제적으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통해 유신론적 기획을 다시 성립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유태인으로서 히브리적 전통에 속해 있던 프로이트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인식론적 주체로서의 부상으로 인해, 이제는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신의 존재를 철저하게 부정당하게 된 당대의 이해 속에서,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당한 신의 자리를 복권시키고자 하였고, 그 결과로서 내재화된 아버지, 즉 초자아를 출현시킨다. 바로 이러한 기획으로 인해, 인간은 외부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신적인 아버지를 상실했지만, 대신에 자신의 내면에 신적인 아버지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정신분석은, 그리고 정신분석적인 경향성들은, 결국 아버지라는 실체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접근이라고 거칠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아버지는 개인을 안정과 번영으로 이끌어줄 분명한 신적 실체성의 상징이며, 분석가는 바로 그 아버지의 힘을 대변하는 자다. 즉, 분석가는 위대한 아버지에 무한히 근접해감으로써, 또는 아버지의 상실을 통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아버지와 같은 주체성을 스스로 창조해감으로써, 곧 아버지와 같은 실체가 되려는 의지로 충만한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입장은, 실존주의에 의해 철저하게 공박된다. 실존주의는 위대한 아버지와 같은 환상의 구조를 해체하고 인간이 자신의 사실적인 삶을 직면할 것을 요청한다.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인간은 위대한 아버지와 동일시되어야 할 아들과 같은 입장이 아니라, 애초에 우주에 이유없이 던져진 고아이다. 즉, 인간의 삶의 근간을 형성하는 것은 위대한 아버지라고 하는 실체적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애초에 누구의 아들도 아니라고 하는, 즉 아버지와는 아무 상관없는 무의미성이다. 이 무의미성이야말로 삶의 근원적인 사실이다.
동시에 이 무의미성은 곧 비존재가 담지하는 속성이기도 한데, 우리는 비존재를 거부하기 위해 아버지라는 실체성을 만들어내 그에 위탁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틸리히가 말하듯, 존재는 비존재를 관통하지 않고는 애초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는 애초 공속적인 역설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이다. 비존재를 거부하면 존재 또한 거부된다. 때문에, 비존재를 거부하기 위해 실체성을 지향하고자 하는 의지는 오히려 존재를 소외시킬 뿐이다.
실존상담은 그 성립에서부터 이와 같은 문제를 철저하게 조명해왔다. 실존상담의 초기의 형태인 현존재분석은, 정신분석가로 출발했던 빈스방거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파훼하고자 한 결과로서 성립된 접근이다. 빈스방거는 정신분석이 갖는 실체적 구조가 오히려 개인의 실존적 삶을 말살하게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했다.
슈나이더, 두르젠, 스피넬리, 콘 등과 같은 현대의 실존상담을 대표하는 이론가 및 임상가들은,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석과의 엄밀한 거리를 선언한다. 이들에게 있어 정신분석은 가장 반실존적인 접근으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날 한국에서 그의 소설들 덕분에 실존상담자로 가장 잘 알려진 얄롬이, 실상 임상의 실제에 있어서는 정신분석가로 드러난다는 사실은 참 역설적이다.
최근의 실존상담은, 우리 삶을 실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더욱 반동적이다. 이들의 이해 속에서, 삶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늘 양극단 사이에서 움직이는 역설적인 것이다. 즉,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 등과 같은 양극단은 애초 분리될 수 없는 전인성(wholeness)을 띠는 것이며, 그것은 분석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삶에 대한 거대한 입체적 조망으로 포섭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과 조망은 개인이 철저한 단독자로서의 입장을 구성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실존상담의 이해에서, 개인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제공한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이 담지된 아버지의 세계를 구현하려는 자가 아니다. 또는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아버지를 닮아감으로써 아버지 대신 세계를 사랑하려는 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아버지에 대한 담론과는 아무 상관없이, 자신이 던져진 이 세계의 놀라운 신비성을 자신이 직접 만나려는, 그럼으로써 사랑을 회복하려는 자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무의미성에 대한 이해를 성찰해보는 일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무의미성에 대한 이해가 실존상담과 정신분석이 근본적으로 왜 상이한 태도를 갖는지를 명료하게 변별해주기 때문이다.
무의미성은 결국 비존재, 즉 존재의 부재에 대한 묘사인데, 이는 정확하게는 존재의 근거의 부재를 의미한다. 곧 무의미성은 무근거성이다. 애초에 우리가 존재하는 그 어떤 필연적인 근거가 부재한다는 사실이 있다. 인간의 탄생은 정합적인 필연의 목적론적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무수한 우연들의 결과다.
정신분석은 이 지점에서, 이 우연성을 필연으로 전환할 아버지와 같은 내적 실체성을 요청하거나, 또는 그러한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 즉 아버지의 부재를 통렬하게 경험함으로써 자신이 대신 세계의 의미를 창조할 주체성을 획득하고자 한다. 이를 아주 단순하게 얘기하면, 아버지와 같은 신을 찾거나, 또는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실존상담과 선은 이 지점을, 아버지에 대한 논의로 불필요하게 연결시키지 않고, 그저 정확한 역설의 지점으로 포착해낸다. 이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선언인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가 내포하고 있는 함의인데, 결국 우리가 존재하는 데는 그 어떤 근거도 정초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의미성의 실제적인 내용인 무근거성은 바로 이 자리에서 무조건성으로 전환된다. 우리의 존재는 무조건적이다. 우리의 존재는 이미 그 어떤 조건적 근거 없이도 성립되어 있는 신비 중의 신비다. 실존철학자 마르셀은 이를 정확하게 묘사해낸다. “삶은 성찰해야 할 미지의 신비다.”
이 우주에는 인간이라고 하는 삶의 신비만 있을 뿐이지, 우주적 아버지는 없다. 즉,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실체성은 가정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실체성을 가장하거나 가공하려고 할 때, 삶의 신비성은 붕괴된다. 허무주의는 삶의 신비성이 붕괴된 결과다.
정신분석은 이러한 허무주의적인 성향을 깊게 내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근대적 지성주의의 영토 위에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지성주의는, 미지의 자리를 환상으로 채워넣고 이를 구조화시킨다. 즉, 실체화시킨다. 이처럼 지성주의의 기획 속에서는 미지가 거부되니, 신비 또한 추방된다. 무의식을 도식처럼 묘사하는 정신분석의 실체적 발명품은, 바로 이처럼 지성주의를 통해 미지를, 그리고 신비를 추방하려고 시도한 결과물이다.
신비의 자리를, 언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가장된 실체성의 개념으로 대치하는 것을, 또는 그 실체성의 부재에 대한 반동으로 자신이 대신 그 실체적 위상을 획득하려는 기획을 실존철학에서는 기만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정신분석에서 곧잘 감지하게 되는 교조적인 권력성은 바로 이러한 기만성에 기인한 것이다. 이는 틸리히의 표현으로는 바로 우상화의 징후다. 유한한 것이 스스로의 유한성을 망각하고, 자기 자신이 신적인 실체성을 구성하려고 하는 모든 지향을 우리는 우상화라고 지칭한다. 정신분석은 이 우상화의 경향성을 다소간에 분명히 내포한다. 실체성은 필연적으로 절대성이 되고, 절대성은 곧 우상화를 낳는 까닭이다. 스피넬리나 콘과 같은 이는, 정신분석적 경향성을 갖는 심리상담의 접근들이 이러한 우상화의 구조를 얼마나 은밀하게 내포하고 있는지를 명석하게 드러내고 있는 실존상담자들이다.
이처럼 실존상담이 특히 정신분석에 대해 예리한 대립각을 세우는 이유는, 키르케고르나 니체가 헤겔에 대해 반동했던 그 입장과, 또한 선종이 교종에 대해 반동했던 그 입장과 대단히 유사하다. 결국 그 핵심은 삶을 질식시키고 있는 우상을 파괴하기 위해서다.
초기의 기획 속에서는, 부모에 대한 개인의 우상화를 파훼함으로써 신경증을 극복하고 주체적 자유를 안내하고자 했던 정신분석이 오히려 우상화의 결정물이 된 현실은 분명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는 어떤 의미에서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정신분석은 환상을 걷어낸 자리를 신비의 자리로 놓아두지 않고, 그 자리에 대신 실체적 자기를 등극시켰던 까닭이다. 즉, 우상을 또 다른, 좀 더 건강해보이는 우상으로 대치시킨 것뿐이라는 의미다.
이 자기의 우상화의 문제는, 모든 종교적 전통에서도 최후로 존재하는 함정과도 같다. 막다른 길이다. 허무와 공허함으로 경험되는 무의미성의 자리, 곧 비존재의 자리를 견딜 수 없어 그 자리에 끝내 자기를 위치시키게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종교적 변주라고도 할 수 있는 정신분석 또한 이처럼 이 자기우상화의 함정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것으로 드러난다.
실존상담의 입장에서는 이 무의미성과 비존재의 문제는 애초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버텨야만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전술한 것처럼, 이는 오히려, 아무 의미도 없는데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 인간존재의 기적과도 같은 사실로서 선언된다. 아무 근거도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롭고, 아무 조건도 없기 때문에 인간은 무조건적인 사랑 속에 이미 위치한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번뇌가 곧 깨달음)라고 하는 선의 명제는 실존상담의 이 역설성을 잘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실존상담에는 이러한 삶의 역설적 신비성을 바탕으로 한 활력이 있다. 정신분석적 태도 속에서 잘 읽히는, 비극적이고 공허한 세계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의미 있게 정립시키고자 고군분투하는 주체의 심각성은, 일견 우리가 실존주의라는 이름에서 갖는 편견과는 상이하게 실존상담에서는 잘 채택되지 않는 인간관이다.
실존상담은 분명하게 인간 긍정의 현실을 안내한다. 물론 정신분석도 인간 긍정의 현실을 안내할 것이다. 그러나 그 차이는, 실존상담은 인간이 이미 긍정된 삶을 지시한다면, 정신분석은 어떻게든 삶을 고되게 긍정해보고자 하는 인간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즉, 전자의 긍정의 주체는 삶이고, 후자의 긍정의 주체는 인간이다. 전자는 삶을 더 거대한 것으로 놓고 있고, 후자는 삶을 더 작은 것으로 놓고 있다.
그런데 삶은 최대치에 가까워질수록 신비가 되고, 최소치에 가까워질수록 자기우상화가 된다. 즉, 신비와 자기우상화는 반비례한다. 때문에 정신분석과 대조되는 실존상담의 방향성은, 이 자기우상화를 경계함으로써, 삶 그 자체가 신비로서 되살아날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인간 자체가 신비로서 되살아날 수 있도록 정향되어 있다.
어떠한 정교한 언어로 실체적 구조를 창작해내든 간에, 우리에게 주어진 정직한 답은 단 하나다. 그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이 미지(未知)라는 사실이다. 실존상담은 이 사실에 대해 전적으로 정직한 태도를 갖는다. 미지 앞에 개방된 가장 정직한 인간의 태도는 바로 무지(無知)다. 반면, 미지를 거부하고자 하는 인간의 태도는 바로 기지(旣知)다.
실존상담의 입장에서, 우리는 지성주의의 산물인 기지의 인간으로서 삶 위에 서서 삶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한 인간으로서 조우하는 삶을 처음으로 배워나가는 것이다. 삶에 대한 처음의 앎은, 곧 삶을 향한 첫사랑이다. 실존상담은 이러한 삶을 향한 첫사랑의 태도 속에서, 실존상담이 실존상담일 수 있는 가장 고유한 특성을 확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