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나의 순교로 모든 것을 구원하겠다는 연예인병의 세습"
"저 하나만 책임지고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죠? 그렇다면 저는, 기뻐요! 그걸 남자답게 선택할게요!"
"괜찮습니다. 제 시체를 넘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더 멋진 세상을 위해 제가 초석이 되겠습니다."
"큰 힘의 권리에는 큰 책임의 의무가 따르지. 이제 의무에 먼저 헌신하는 어른이 되도록 해라."
국민학교 훈육교재로 '간첩잡는 똘이장군'이 쓰이던 시절처럼, 오늘날 초등학생들이 윤리적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가르치는 시청각 훈육교재의 모범은 역시 마블영화들이다.
유치한 아이가 책임감 넘치는 윤리적 어른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재미와 감동으로 세뇌시키려 하는 이 통속적 서사는, 유치하던 토니 스타크가 진정한 대의를 위해 어른스러운 순교의 선택을 하는 진짜 히어로 아이언맨으로 어떻게 거듭나게 되는지를, 그와 똑같이 유치하던 그의 아들 피터 파커가 마찬가지로 진정한 대의를 위해 어른스러운 순교의 선택을 하는 진짜 히어로 스파이더맨으로 어떻게 거듭나게 되는지로 반복해서 묘사함으로써 그 효과를 높인다.
구태의연한 모방품들이 복제되고, 반복재생되고, 결국에는 밈(meme)으로 기능함으로써 세뇌는 가속화된다. 원래 인생을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가상의 이야기는 삶을 견인하고, 추동하며, 동기화하는 강제력이 된다. 허구의 언어가 실존의 삶을 농락하는 입지를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념으로 삶을 좌지우지하려는 행보를 보여온 한국의 586 운동권 감성을 이해하려면 마블영화를 보면 된다.
대한민국이 왜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려면 마블영화를 보면 된다.
비극적 미학에 빠진 미소를 지으며 나 하나의 희생으로 이 모든 것을 구원하겠다는 윤리충 히어로를 꿈꾸는 심리적 미발달 아동들의 나라, 마블의 영화 속에만 묘사되는 현실이 아니다.
케빈 파이기니, 존 패브로니, 루소 형제니 다 마블냄새를 현실에서 진동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이들이다. 너드 감성으로 살다가 자신의 판타지 스토리로 인기를 끄니 이제 인생스승이 된 것처럼 사람들을 훈육하는 훈장님들이다. 그러면서도 마치 아이 앞에서 아이가 이해할 때까지 차근차근 시간을 가지며 배려해주는 미소띤 엄마처럼, 굉장히 털털하고 인간미 있는 친근한 모습으로 자신을 입지화하는 21세기 훈장 모델이다.
이들이 창조해낸 윤리충 히어로상은 이들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 자아다. 이러한 이상적 자아상은 한국의 586 정치인들이 갖는 자아상과 거의 동일한 면모를 보인다.
그래서 마블냄새(혹은 디즈니냄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란 곧 자아냄새라고 할 수 있다.
이 냄새의 핵심은,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열등감이 낳은 원한감정이다.
열등감의 소유자는 원한감정 속에서 자신의 열등감을 도덕적 우월감으로 변화시킨다. 니체에게 영향을 받아 개인심리학을 주창한 아들러는 이 과정을 섬세히 묘사한다. 도덕적 우월감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이를 한순간 자신이 특별하게 선택받은 듯한 소영웅주의의 주체로 우뚝 서게 만드는 효과를 제공한다. 정체성을 뒤바꾸는 언어적 연금술과도 같다. 그러나 어떻게 정체성을 날조한다 하더라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향수를 뿌려도 암내가 사라지지 않듯, 자아도취의 냄새는 언어적 향수와 뒤섞여 더 기괴한 구린내로 세상을 뒤덮는다.
왜 자아도취하는가?
실은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이다.
왜 윤리충 히어로가 되는가?
실은 인생이 우울하고 답답해서 다 때려부수고 싶기 때문이다. 도덕과 윤리를 대의로 내세우면, 마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짐으로써 자신의 폭력욕구를 정당하게 해방시킬 수 있을 것만 같다.
탱크를 몰고 다니듯 무식하고 힘만 센 이들에게 똑똑한 자기가 무시받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러나 실은 똑똑한 자기와는 대비되게 무식하고 힘만 센 이들이라고 타인을 무시해온 이들이, 무시했기 때문에 무시받은 그 필연적 결과를 패배감으로 경험한 뒤, 이제 이를 악물고는 가공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자기가 만든 이야기 속에서 도덕적 승리를 쟁취하기를 꿈꾸게 된다. 그러한 방식으로 복수하고 또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 복수와 보상을 이루는 최고의 방식은 바로, 상대를 치유하고 용서하는 구원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가 더 크고 높은 존재인 것처럼, 자기가 적대하는 적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다. 거북이가 편하게 쉬고 있는 토끼를 억지로 깨운 뒤, "토끼야, 같이 골인하도록 하자."라며 인자한 미소를 짓는 모습과도 같다.
만약에 토끼가 "나를 깨우다니 이 어리석은 바보, 후후."하며 혼자 뛰어가게 된다면 이 구원자 신화는 더욱 성공적이다. 자신의 헌신과 희생의 고귀한 가치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을수록 더 수준이 높아지고 빛을 발하게 되는 까닭이다. 마치 명절 때 가족들은 배불리 먹고 고스톱을 치며 즐기는 가운데 어둑한 부엌에서 홀로 가득 쌓인 설거지를 하며 짓는 엄마의 고귀한 비극적 미학의 미소처럼, 구원자는 언제나 순교적 자학으로 승리한다.
이것이 최종적이고, 궁극적이며, 영구적인 승리를 거두고자 하는 윤리충 히어로가 만들어지는 방식이다.
토니 스타크가 했던 짓이고, 그의 아들인 피터 파커가 반드시 하게 될 짓이다. 위대한 아버지의 유산을 세습받아 그의 아들이 이제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난다고 하는 윤리충 히어로의 재림을, 순교적 가치의 상습적 예찬을 우리는 언제나 보게 될 것이다. (마블판 스파이더맨의 새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마블이 그리는 피터 파커는 반드시 이러한 짓을 할 것이다. 그게 마블이니까.)
그러나 무슨 쇼를 하든 간에, 어떠한 자아도취에 빠지든 간에, 이러한 방식으로 원한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감정의 근간은 전술한 것처럼 열등감이며, 그것은 곧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기 때문이다.
존재에 대한 수치심은 자아를 아무리 다루어도 해소되지 않는다.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갈아치우든, 새로운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든, 순교를 통해 자아를 내려놓든 또는 자아에 도취되든 간에, '자아를 변화시키면 존재도 변화될 것이라는 착각'은 그냥 착각이 아니라 완벽한 착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블냄새가 늘 난다.
24시간 빨래방에서 풍겨오는 세제냄새처럼, 순교를 통해 존재세탁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그 흔적으로 마블냄새가 남는다.
마블영화들이 묘사하는 이야기는 다 조금씩 이상심리학적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이, 그 자신의 헌신과 희생으로 자기 존재를 세탁하는 데 성공하여 결국 인류의 스승이 되는 이야기다. 진실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우기고 있는 이야기다. 가능성으로 치자면 차라리 드래곤레이더를 만들어 드래곤볼을 모으는 일이 더 유망하다.
그러나 이 불가능성을 향한 의지가 굳센 이유는, 그렇게라도 되어야 자기 인생이 가치가 생기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인류를 위해 뭔가를 일조한 사람인 것 같은 입지를 얻어,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을 에반게리온의 회심한 겐도가 열혈 신지를 바라보듯이 "장하다, 내 아들!"의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금새라도 구멍이 뚫린 풍선처럼 자신의 존재가 쪼그라들 것만 같다.
그렇게 586의 거품이 이제 꺼져간다. 장미빛 솜사탕처럼 반생을 부풀어있던 그들의 인생이 이제 저물어간다.
평생 동지들과 골목에서 히어로 가면을 쓰고 오징어게임을 하며 뛰어놀 것이라 믿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석양 속으로 사라져간다.
자기들이 정말로 제일 똑똑하고 잘나서 이 모든 것을 다 얻는 것이 당연한 줄 알던 너드들의 세상이 막을 내려간다.
AT필드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얻어맞으며 버티는 거북이의 정신승리가 있었을 뿐이다.
에반게리온의 창조자 안노 히데아키가 "우리 마누라가 최고야. 덕후들아 결혼이나 빨리 해. 그게 최고야."라며 한 발 먼저 놀이터에서 사라진 것은, 새롭고 유별난 선택이 아니라, 처음부터 일관된 소망이었다.
이제는 철이 들었다며 엄마 말씀에 잘 따라서 학원에 가거나, 아니면 놀이터 그네에 홀로 앉아 신나는 척 그네를 격하게 흔들며 오지 않는 동무들을 기다리다가 결국에는 자신을 찾으러 온 엄마를 만나거나.
엄마, 엄마, 엄마.
윤리충 히어로들이 희구하는 그 대상이다.
DC가 마블을 따라 마블냄새를 묻히면 당연히 이런 대사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응? 니네 엄마 이름도 마사야?"
어떤 고귀하고 비장한 미사여구로 포장해도 이들의 종착역은 엄마의 자궁 속이다. 그 엄마의 자궁이 이념적 추상물로서 기능하는가, 실체적 대상물로서 기능하는가의 문제일 뿐이다.
엄마를 대리해줄 팬들의 관심, 애청자들의 관심, 애인의 관심, 배우자의 관심, 이러한 관심의 시선들 속에서 이들은 평화로이 양수에 잠긴다.
영원한 유년기의 꿈에 빠져든다.
이것이 마블의 꿈이고, 대한민국의 꿈이다.
메타버스? 가상의 이야기가 이제 현실보다 더 현실이 된다? 세상이 더 긴밀하게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활성화되는 만큼, 뉴런도 같이 상응하여 연결됨으로써 뇌 속의 미지의 영역이 더 빠르게 활성화되는 사이버 집단지성의 힘?
초록색 쫄쫄이 전신타이츠를 입은 할아버지가 놀이터에서 초등학생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와 같다.
집에 가는 초등학생들의 발걸음을 단 1분이라도 더 놀이터에 붙잡아두어보려는 그 간절함으로 노래되는 이야기다.
그럼으로써 그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시선 속에서 이제 자신이 또 엄마의 양수에 잠길 수 있으리란 그 기대감으로 애원하는 이야기다.
할아버지의 타이츠 사이로 삐져나온 몽고메리 내복에 싸인펜으로 써있는 그 이름은 바로 피터다.
팬인지 파커인지가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최후의 사기꾼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근본적인 자기 존재에 대한 수치심으로 마음이 아픈 이는 언제나 자신이 도취될 강박적 환상을 필요로 한다. 그 병적 환상으로 세상을 뒤덮어 자신의 도취가 그치지 않도록 만들고자 한다. 공허한 퇴폐만이 지속된다. 이것이 데카당스다.
여기에서 가장 강박적으로 도취될 수 있는 환상이 바로 윤리다. 그래서 정말 역설적으로 데카당스는 결국 윤리충 히어로들을 양산하는 모태적 조건이 된다. 동시에 그 모태는 다시금 윤리충 히어로들이 복귀할 바로 그 자리다. 유치한 아이가 이상적 자아의 구현물인 참된 아버지상의 순교의 기제를 유산으로 상속받아 이제 모태로 당당히 복귀할 자격을 얻어 결국 과거급제한 이몽룡처럼 마마춘향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데카당스는 이렇게 자기완결적인 자폐 속에서 자문자답만을 반복한다.
시작할 때부터 끝나있는 것과 같다.
데카당스는 이렇게 출현했고, 또 이렇게 끝나간다.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의 망령에 지배받던 너드들의 데카당스의 시대가 끝나간다는 이 사실, 오직 이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신뢰하게 될 때, 데카당스가 내린 자답으로서의 윤리충 히어로는 설 자리가 없다. 사기칠 꺼리가 없다.
21세기 데카당스여, 정말 퇴폐적인 시대였다. 찌질한 비극적 미학으로 가득찬 볼을 부풀리고 턱을 앙다문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시대였다.
늘 불만이지만 뭐가 불만인지도 몰라, 모든 곳에서 적을 만들고 장벽을 쌓아, 가슴에서 타오르는 원한감정으로 사방의 벽에 똥칠을 하던 시대였다.
그 발달장애가 낳은 조기치매를 숨기기 위해, 윤리와 도덕적 우월감으로 자신을 위장한 초등학교 크레파스 색깔 같은 원색옷을 입은 광대들이 꽃같은 순교의 이야기만 바이러스처럼 전파하던 시대였다.
3차대전 대신에 코로나 전체주의를 타임포스트로 세우며, 이 시대는 이제 떠나간다.
젖먹이 우유내음처럼 비릿하게 이 데카당스의 시대를 가득 채우던 마블냄새여 이제 안녕. 피터 팬인지 파커들인지 다만 쉰내 나는 자아의 내복냄새여 이제 안녕. 너드들의 윤리충 히어로가 감동적인 척 벗게 된 철가면 속에서 풍기던 꽃같은 암내여 이제 안녕.
'라스트 오브 어스 2'의 조엘과 엘리의 운명처럼, 스파이더맨도 순교하도록, 아니 순교되도록 방조한 소니도 잠시 안녕.
잘 가거라.
인간이 자신을 열등하다고 착각했던 마지막 시대여.
윤리충이 되어 순교하지 않으면 정당하게 존재할 수 없을 것처럼 강박적인 두려움에 떨던 날들이여.
놀이터 화장실에서 비장하게 홀로 존재를 세탁하던 최후의 수치심의 시대여.
궁상맞던 존재들의 구질구질하던 날들이여.
이제 정말로 잘 가거라.
세습될 것은 없다.
우리는 이제 이웃을 위해 순교하는 친절한 이웃으로 살지 않는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해도 홀로 묵묵히 더불어 삶을 실천하는 비극적 미학의 자폐아로 더는 살지 않는다.
순교로 인간자격을 획득하려는 비장한 마마보이 오사무의 꿈은 끝이다.
순교의 세습을 강요하는 이 구태의 시대와는 절교다.
이러한 세상을 구원하려 하지 말고, 이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야 한다.
오늘날의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윤리충 히어로의 다른 이름은 '순교하는 연예인'이다. 슈퍼스타다. 친절한 이웃이라는 표현의 실제적인 의미다.
여기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은 연예인을 그만두는 것이다. 순교하지 않으면서 더 진정하게 연예인을 할 방법이란 없다. 연예인을 그만두어야 순교가 멈추어진다.
자신의 존재를 슈퍼마켓 매대에 올려진 교환가치로 삼으니, 존재의 수치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단순하게 연예인을 그만두면 수치심은 애초 존재하지도 않는다.
존재의 수치심은 착각이다. 연예인이 되려고 하니 수치스러워진 것뿐이다. 그 수치심을 이기려고 순교를 꿈꾸게 되고, 그 결과 더 아파지는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은 역기능적으로 반복된다.
이처럼 자기가 연예인을 강박적으로 꿈꾸고 있기에 생겨나는 그 모든 아픔을, 마치 인간의 삶이 원래 그러하다는듯이 존재의 우주적 비극인 것처럼 묘사하며 세탁하고 있는 그 모든 마블냄새들이 늘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유감스럽게 만든다.
이제 순교하는 연예인의 자아도취쇼는 지긋지긋하다.
연예인이 인생스승으로 거듭나 우리를 가르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그 영웅적 서사들의 실체가 진절머리난다.
연예인의 꿈에 미친 이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자살을 하든, 살인을 하든, 어그로를 끌든, 눈물로 셀프영상을 찍든, 왜 그러한 것만이 이 세상의 전부처럼 되어 있는가?
"아유 저 연예인지망생 아이 참 가엾다. 그래도 다시 또 혼자 열심히 해보려는 모습이 참 대견하네."
정작 가엾은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예인들의 이야기나 진정한 인생스토리처럼 소비하고 있는 동안 결국 죽는다.
연예인이 되려고 인생낭비를 하고 있는 이들에게 휘말려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하고 있는 공동순교다. 더불어 삶이다.
그러니 연예인병에 걸린 이들은 그대로 혼자 죽게 두는 것이 좋다. 우리가 그들과 같이 죽을 필요가 없다. 그들을 위해 죽을 이유는 더욱더 없다.
남이 인생스승으로 우리를 가르치는 연예인이 되도록 하는 데 우리 인생의 그 어떤 자원도 주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생의 자원은 전적으로 온전하게 우리 자신을 위해 쓰여야 한다.
이것이 순교하는 연예인들의 마블냄새 넘치는 세상에서, 어느 차원에서나 그 연예인병이 세습되는 다중우주에서, 언제라도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다. 우리 자신의 우주를 지키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