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윤리

"심리학의 자리는 어디인가?"

by 깨닫는마음씨




종교는 윤리를 포함하지만, 종교 자체가 윤리는 아니다. 오히려 종교성의 발달을 위해 윤리를 깨는 일에 서슴없는 것이 또한 종교다.


이 종교와 결을 함께하는 것이 심리학이다. 그래서 심리학은 윤리가 아니다.


윤리는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의 기원은 철학의 인식론적 전통 위에 서있다. 현대에서는 현상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잘 보는 법이다.


잘 봐서 잘 아는 법이다.


즉 심리학은 어떻게 하면 잘 사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삶을 잘 아는가에 대한 것이다.


잘 알기 위해서는 편견과 선입견이 걷어져야 한다. 편견과 선입견의 렌즈로 삶을 바라보는 일을 지양해야 한다.


여기에서 삶을 굴절시키는 최고의 편견과 선입견이 바로 윤리다.


윤리를 정답처럼 들고 살면 삶을 모르게 된다. 잘 알아지지 않는다.


삶을 잘 알기 위해서는 윤리를 떠나야 한다. 이것은 최선을 다해 비윤리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윤리의 절대성에 대한 착각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한 개인이 자신이 신앙하는 윤리의 절대성에 대한 착각을 고수하는 일이 보통 심리상담에서 내담자의 저항이라고 부르는 작용이다. 저항함으로써 내담자는 윤리에 대한 신앙을 지키려 한다. 그 결과 더욱 힘들어진다.


윤리가 마치 하늘에서 하사된 절대적 명령인 것처럼 간주하는 착각 속에 있다 보면 다양한 심리적 장애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장애를 해소하는 방법은 그 장애를 만들어낸 착각을 해지하는 것이다. 곧, 삶을 장애물로 보는 착각을 해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삶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윤리라고 하는 것이 근거하는 것은 인과론이다. 윤리는 인과론의 구조로 만들어진 앞뒤가 딱딱 맞아 떨어지는 논리적 스토리의 서사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는 언제나 그 본질에 있어 윤리적이다. 인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리학은 이야기 위에는 세워질 수 없다.


심리학은 이야기라고 하는 가상의 왕국이 붕괴된 그 삶의 지평 위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조악하게 비유하자면, 커다란 세계수가 플레이스테이션 5 위에서 자라날 수 없는 것과 같다.


SSD의 용량을 늘리듯 개인의 용적을 늘리고, 클라우드를 통해 연산력을 강화하듯 인간 공동체의 네트워크의 힘을 강화해도, 삶은 이야기를 통해서는 정말로 잘 알아질 수가 없다.


개인이 공동체에 헌신함으로써 더불어 잘 사는 방법에 대한 그 모든 윤리적 의지의 강박을 넘어선 자리에서만 삶은 자기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은밀히 알려준다.


삶은 계시와 같다.


키르케고르가 묘사한 것처럼 삶 앞에 선 단독자만이 오롯하게 아는 일이 가능한 계시다.


그래서 삶을 잘 알고자 하는 심리학은 일종의 종교적 방법론이다.


물론 이것은 과학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편화된 알고리즘에 따라 모두가 똑같이 모방하여 집행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의 과학이 아니라, 별의 운행을 편견과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그렇게 지금까지의 세계를 완전히 붕괴시키는 가장 위대한 발견을 하고 또 그것을 검증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의 과학이다.


바로 깊이(depth)의 과학이다.


이 깊이의 과학은 자기를 향하지 않고 삶을 향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반대로 윤리라고 하는 것은 늘 자기를 향한다.


자기가 똑바로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만 초점을 둔다. 타인과 세상을 향한 윤리적 시선 또한 이러한 자기의 행실에 따라 작동한다.


왜냐하면 윤리라고 하는 것은 애초 개인이, 아니 더 정확하게는 아직 개인이 되지 못한 이가 자기를 세우기 위해 발명해낸 보조재이기 때문이다. 자전거에 다는 보조바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자전거타기를 사랑하며 즐기는 이는 차라리 몇 번 넘어질 지언정, 자기가 지금 페달을 올바로 돌리고 있는지, 또는 핸들을 똑바로 잡고 있는지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 대한 신뢰와 함께, 원심력과 중력과 관성이라고 하는 사실적인 힘들에 대한 신뢰 속에서 그냥 자전거를 탄다.


이처럼 윤리로 살지 않는 이는, 곧 삶의 사실적인 작용들을 신뢰하는 종교적 감수성을 가진 이는 자연스럽게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면모를 보이게 된다.


반면 윤리로 사는 이는 언제나 최우선으로 자기의 옳고 그름만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성을 보인다.


역설적인 일이다.


때문에 오히려 종교-과학적 태도로 사는 이는 윤리를 지향하는 이보다 그 결과에 있어 더 윤리적인 면모로 드러나게 된다. 그가 결코 윤리를 목적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윤리적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이지 않다는 것은 곧 삶이 중심이라는 말이다.


자기라고 하는 것은 삶을 중심에 두고 공전하며 또 자전하는 움직임이다.


그렇기에 고정될 수도 없고 항구적이지도 않다.


그래서 무아(not-self)라고 부른다.


융은 자아(ego)와 자기(self)를 구분하며, 개인은 자아로부터 진정한 중심인 자기로 발달해나가는 것이라는 개인의 신화를 주장했지만, 그 둘은 그 자신이 중심인 한 사실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자아를 개인으로 이해하고 자기를 삶으로 이해한다면, 융의 분석심리학도 개인이 삶을 중심으로 공전해가는 그 여정이 아니냐며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삶일 수 없는 이유는 단순하다.


삶은 알고리즘이 아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를 통해 그림자를 알고, 아니마-아니무스를 통합해서 자기에 이르는 이 여정은, 융이 좋아하는 문학적 작법으로 존중받을 수는 있겠지만, 또 많은 신화가 이러한 작법에 의해 쓰였다고 지지될 수는 있겠지만, 실제의 삶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실제의 삶이, 누군가가 초등학교를 나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을 통합해내는 과정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과정은 삶이 아니라, 인간이 발명한 임의적 프로세스다.


바로 윤리의 프로세스다.


이 과정을 따르면 그래도 중간 이상은 하며 잘 살 수 있을 거야, 라며 도입한 아주 임시적이고 변통적인 기제다.


윤리가 하는 일이 이러하다. 근본적으로 사람을 거푸집에 넣고 찍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윤리는 자신의 기준을 벗어나는 양극, 즉 가장 탁월한 것과 가장 무가치한 것을 동시에 소외시키고 억압한다.


그러니 윤리가 지배하는 세상은 늘 빨주노초파남보의 원색으로만 유치하게 칠해진 촌티가 흐른다.


아주 섬세한 비가시의 영역은 인간에게서 실종된다.


이 비가시의 영역을 우리는 신비라고 부른다.


신비라고 하는 개념은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아스트랄하다고 말해지는 망상과 사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신비는 언제나 존재의 신비다.


"아무 것도 없는데 왜 무엇인가가 있는가?"


철학과 물리학을 낳은 이 원초적인 질문이 개방해온 우리 삶의 가장 놀라운 영역이다.


존재의 신비를 접촉할 때 우리에게는 감동이 생겨난다. 이것은 윤리의 권속인 이야기가 제공하는 정동의 특수효과와는 다르다.


신비를 통한 감동에는 언제나 지혜가 동반한다. 종교체험연구의 대가인 윌리엄 제임스가 말하는 바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존재하는 이 삶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정말로 존재하는 것의 그 존재감은 늘었다가 줄었다가 가감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주만큼이다.


우리 자신이 어떤 것을 못한다고 존재감이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 자신이 어떤 것을 잘한다고 존재감이 더해지지 않는다.


존재는 행위와 아무 상관없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무조건 존재하며, 그 무엇도 존재를 막을 수가 없다.


무조건 나도, 당신도, 살아도 된다.


심리학의 모험은 반드시 이 자리에 도달한다.


실존심리학은 조금 빨리 도착해 돗자리를 펴고 꽃놀이를 즐기고 있는 세력이다.


루미의 시를 인용해볼 수 있다.


"여기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만약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또 만약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실존심리학의 세력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의 길드의 동료들이다.


고통에서 더 빠르게 벗어나고 싶어 윤리의 왕국을 떠난 모험가들이 대개 조금 먼저 도착하는 법이지만 원래부터 누구나 도착할 수 있는 영토다.


종교라고 말하고 있지 않지만, 이 길은 분명하고 정확하게 종교적 길이다.


이 종교적 길을 통해 심리학은 비로소 자기 자리에 당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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