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진정한 어른으로 만들지 마라"
"이 드라마는 가이아사상의 생태철학을 담아서 양자물리학을 적용한 현실을 기가 막히게 묘사하며 우리의 삶에서 아주 중요하고 심오한 개념들을 다루고 있어. 이건 단순히 애들 보는 게 아니야. 굉장히 수준높은 거야."
이처럼 자신이 소비하는 문화콘텐츠를 수준높은 것으로 뽐내고 싶어하는 이들이 있다. 여기에서의 수준이라는 것은 유치하지 않고 어른스럽다는 의미다.
이들은 그러한 문화콘텐츠를 소비함에 따라, 자신이 한 걸음 더 진정한 어른의 모습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그 소비의 행위 자체가 이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수련법인 것처럼 간주된다. 어른스러운 콘텐츠를 통해 인생에 대해 배움으로써 진정한 어른이, 바로 진정한 내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들은 정말로 자신이 성숙한 어른이 되는 일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들에게 있어 어른스럽다는 것은 그저 방패막이의 소재다.
자기가 소비하고 있는 유치한 본질의 콘텐츠를 어른스러운 것으로 포장함으로써, 이들은 그 콘텐츠를 소비해도 되는 정당성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래야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것을 보면서 자아도취하냐고 놀림받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판타지소설이 유치하다고 놀림받지 않기 위해 어른스럽다는 방패를 동원하는 방어태세 속에서 살아가다보면, 결국 정치지향적 성향을 갖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가 얼마나 인류에게 도움이 되고, 보편적 의의를 갖고 있으며, 세상을 바꿀 놀라운 실용적 가치를 갖고 있는지를 치열하게 증명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렇게 그 콘텐츠가 개체의 자아도취를 위해서가 아닌, 세상 모두의 공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증명을 해내야, 자신이 더는 수치심을 경험할 필요없이 안전하게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니까 방에서 판타지소설을 소비하고, 나아가 창작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순수한 꿈나무들이, 결국 대외적으로 진리를 부르짖으며 나와 정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수치심에 대한 장대한 면피전략이며, 빛과 소금 같은 재능을 스스로 사멸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정치가 유치해진 것이다. 그 본질적 내용이란 것이 마스터피스를 자칭하는 유아들의 습작과도 같은 판타지소설의 수준이기 때문이다.
"병신, 지가 배트맨인 줄 알아."
"ㅋㅋ 지가 무슨 어둠의 귀공자 대마법사인 줄 아나 보지?"
"미국드라마에 나오는 초능력자 흉내내네? 자기가 주인공인 줄 아나 봐."
이렇게 놀리는 일은 유효하다.
그래야 그 유치한 판타지소설을 마치 보편적 진리인 것처럼 알리는, 또 자기는 그 진리를 따르는 숭고한 존재인 것처럼 알리는 기만을 멈출 수 있게 된다.
판타지를 자꾸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려는 것은 그저 남들 보기에 쪽팔리지 않으려는 그 의도일 뿐이다.
진리적인 어떤 것을 향유한다고 하면 남들이 놀리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들의 존경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판타지의 꿈나무들은 자기 자신도 최면시킨다.
자기가 정말로 진리를 좋아하고, 그 진리를 찾아 진솔하게 살아온 정직한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이들은 진리에는 사실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무엇보다 진리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다만 판타지가 주는 재미다. 유치함이 낳는 재미다. 이들은 그 재미만을 추구한다.
왜 아기고양이들이 놀고 있는 것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는가?
유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귀엽고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유치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우리는 유치한 것을 좋아해도 되는 사람이다.
유치한 것이 마치 인간의 오래된 지혜를 담고 있는 소재이기라도 한 양, 우리가 진정한 존재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아름다운 교훈이라도 주는 소재이기라도 한 양, 또한 그 소재를 소비하고 보급하는 자신이 인간을 구원하는 위대한 예언서를 든 대현자이기라도 한 양, 사뭇 비장한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유치한 것에 포장을 입힐 시간에, 그냥 편하게 유치한 것을 즐기면 된다.
진리인 척, 진리의 탐구자인 척 사기치는 일을 그만두고, 그냥 유치해져도 된다.
이 시대의 많은 콘텐츠가 끝내는 재미없어진 이유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PC문화에 지배되었기 때문이다. 유치하면 안되고 언제나 인간을 향한 윤리적 교훈을 담아야 한다는 강박에 빠졌기 때문이다.
"너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이 잔소리를 매일 들으며 자란 판타지의 꿈나무는 결국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이 메시지를 내사시키게 된다.
"나도 이미 어른이고 충분히 어른스러운 것을 하고 있다고요!"
이처럼 모두에게는 진정한 어른이 되는 일만이 지상과제로 남는다.
마치 어렸을 때 판타지소설만 읽던 자신에게 아버지가 "쓰잘데기 없는 그딴 쓰레기 좀 그만 봐라!"라고 했을 때, 그에 대해 "이건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그런 삼류소설이 아니라, 518의 정신을 이어받아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는 법과, 또 참다운 마음의 깨달음을 얻어 개인이 더 윤리적이고 건강한 사회적 존재가 되게 만드는 심리학적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는 책이라구욧!"라고 자기를 변호하던 문답이 결국 만들게 된 결과다.
이러한 변호의 습성이 굳어져 끝내는, 자기는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진정한 진리의 판타지만 소비하며, 또 그 소비를 통해 진정한 어른이 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는 식의 자기최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자기최면된 개체는 다시 타인에 대한 최면의 의도를 담아, 판타지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훌륭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선전하며, 판타지가 담고 있는 교육적 가치와 민주적 의의를 계몽하게 된다.
"나는 판타지를 통해 진정한 어른이 되었다."
아마 이러한 내용을 본질로 내포하고 있는 책을 쓰게 되기도 할 것이다.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조립식 프라모델에 과학교재라고 써붙여 놓던 그 의도가 만드는 일이다.
판타지를 진리로 선전하는 이나, 또 그것을 소비하는 이나 실은 동일한 의도 속에 있다.
그저 유치한 판타지를 유치한 재미로 즐기고 싶지만, 이미 자기 안에 내사된 금지명령이 있는 까닭에, 그 위에 교육 및 학습이라는 포장지를 입힘으로써 그것을 안전하게 즐기고자 하는 의도다.
할리퀸 로맨스를 윤리 교과서로 감싸 읽고 있다가, 엄마가 과일접시를 들고 방문을 노크하면 "아 나 공부하고 있다고! 방해하지 말라고!"라며 역정을 내고 있는 그 모습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모습이다.
많은 경우, SF물은 이러한 캐모플라주의 의도에 아주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된다. 무슨 과학 지식을 배우고 최첨단의 개념을 익힐 수 있는 것처럼 쉬이 포장될 수 있는 까닭이다.
아빠엄마가 눈에 쌍심지를 켤 때, 퀀텀 렐름 뭐시기를 지껄이면서 든든하게 변호의 논리를 갖출 수 있는 까닭이다.
"아 요즘 애들 다 어벤져스와 테넷으로 과학탐구영역 공부한다고! 존나 촌스럽게 왜 이래? 요즘은 에듀테인먼트의 시대라고!"
이러한 진술의 밈(meme)으로서 잘 알려진 버전은 이러하다.
"페이트는 문학입니다."
다 같은 표현들이다.
"판타지는 진리다."
"SF를 통해 배우는 진정한 심리학의 원리."
"히어로물이 가르쳐주는 멋진 어른 되기."
진짜 촌스럽게 왜 이러냐.
유치함을 정직하게 즐기지 못하는 아동들이, 자기의 유치한 취향을 숨기기 위해 그 이야기를 억지로 성숙한 진리처럼 포장하고 있을 때 생겨나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러한 은폐의 의도 속에서 발화되는 이야기는 언제나 삼류 저질 스토리가 된다.
은폐한 것은 언제나 더 커지는 마음의 원리 때문이다.
자기가 유치하지 않은 척 은폐하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더 큰 유치함으로 드러나게 된다.
바야흐로, 인생이 본격적으로 유치해진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늘 정신연령이 낮은 미숙아처럼 살게 된다. 유치함을 은폐하고 어른스러운 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또 그렇게 어른스러운 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이라고 여기고 있기 때문에, 실제의 자신은 더 유아적 퇴행의 상태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 가련하고도 배배 꼬인 기만의 의도에, 나는 결코 복종하지 않는다.
이 의도가 만들어낸 가장 유치한 삼류 저질 인생과, 삼류 저질의 진정한 나라고 하는 것에, 나는 절대로 복종하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유치함에만 복종한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만 복종한다.
남이 좋아하는 것에는 복종하지 않는다.
그러니 남들도, 그들에게 남인 내가 좋아하는 것에 복종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유치한 것을 보편적 진리라고 위장하여 사람들에게 뿌리려는 사기를 나는 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유치하든 성숙하든, 나는 다만 내가 좋아하는 것에 정직할 뿐이다. 내가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정직할 뿐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진리를 넘어선 것이다.
나는 언제나 진리를 넘어서, 그 무엇인가를 사랑한다.
나는 진정한 어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촌스럽고 유치하게 말하자면, 차라리 나는 영원한 소년소녀다.
윤리와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자기규정 속에 한계의 달인들이 되어, 모든 것을 다 뻔하게 바라보는 회색의 눈동자로 살아가다가, 유일하게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투쟁의 불꽃이 피어오를 때만 불구경을 하듯 상기된 표정으로 황홀에 도취된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게 되는, 진정한 어른이라는 이름의 진짜 삼류 저질 인생 속에 나는 없다. 나는 절대로 그 속에 편입될 수 없으며, 복종될 수도 없다.
진정한 어른에, 진정한 어른으로 만들어준다고 하는 그 모든 삼류 저질 이야기에,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
나는 투명드래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크아앙, 투명드래곤이 울부짖었다. 결코 복종하지 않는 나의 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