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뇌인가?"
"마인드 해킹을 통해 자아 쉬프트를 이너체인지하는 것이 성장가속성을 높이는 하이퍼 솔루션입니다."
"메타버스의 브레인파워가 되어보자. 놀라운 사이버에고의 컨스트럭션을 정복하는 뉴노멀 심리전략."
"의식의 힘을 높이는 7스텝 프로세스, 리얼 셀프가 만드는 뇌의 퀀텀이펙트로 마음을 이노베이션한다."
지적 열등감 내지 학력에 대한 열등감이 이와 같은 이상한 이야기들에 끌리도록 만든다. 영어로 된 관념어들이 조합되면 마치 무슨 심오한 전문용어처럼 느껴지면서, 그 용어들을 가까이에서 소비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뛰어난 지적 존재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 존재의 정당성을 지성이라고 하는 요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이다.
열등감이란 존재의 부재감이다. 지성을 통해 이 열등감이라고 하는 존재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경우, 똑똑해야만, 아니 정확하게는 남들에게 똑똑하게 보여야만 자기의 존재감이 견고해질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에 따라 결국 똑똑하게 보이려는 이들이 사람들에게 똑똑해보이는 말들을 전파하고, 마찬가지로 똑똑하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그 말들을 찾아와 소비한다.
존재감이 없는 이들이, 상대에게 존재감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존재감이 없는 서로를 찾고 있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존재 그 자체다. 단 1mg도 부족하지 않은 충만한 존재감이 나다. 이 우주에 그것밖에 없으며, 그것 하나로 그냥 모든 것이 다 최종적 엔딩이며, 그만큼 가장 완벽하게 꽉 찬 존재가 바로 나다.
때문에 존재감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내가 없다고 하는 의미가 된다.
내가 없는 이들이 상대가 나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상대에게도 없는 나를 내놓으라고 서로를 찾아 헤맨다.
뱅글뱅글 뇌 속에서 하고 있는 허깨비와의 술래잡기와도 같다.
지성을 통해 존재감을 획득하려 할수록 우리는 이처럼 점점 더 안개낀 미로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근본적으로, 마음을 뇌의 작용이라고 간주하는 착각이 전제되어 있기에 생겨나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존재감을 뇌에 의존해 얻고자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뇌가 하기에 따라 우리는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여기에서는 존재보다 뇌가 더 강력한 세력이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뇌의 대표적인 기능인 지성은 우리 존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신적인 요소로 상격된다.
그러니 맨 처음에 묘사한 이상한 이야기들이 선뜻 발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삼류 저질 스토리들의 핵심은 단 하나다.
"뇌를 컨트롤하면 세상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다."
정말 그런가?
뇌는 그저 단말기일 뿐이다. 정보처리기계다.
방구석에 앉아 단말기로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우리는 믿어야 하는가?
최고의 해커들은 가능하다고, 그러니 뇌-마음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마음의 해커라면 당연히 가능한 일이라고, 입을 삐죽 내밀고 볼을 풍선처럼 부풀린 15세의 대현자로서 반문하고 싶은가?
해봐라.
해가 서쪽에서 뜨도록 해보고, 물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도록 해보고, 남몰래 짝사랑하던 그 아이가 우리집 초인종을 누르도록 얼마든지 해봐라. 방구석에서 키보드를 두다다다 두들기면서 하고 싶을 만큼 충분히 해봐라.
정말로 되는지.
이러한 일들이 결코 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마음은 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은 존재다.
자신의 뇌가 죽어도, 이 우주는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뇌와 아무 상관없이 존재한다. 자신의 뇌가 있기 전에도 존재했으며, 없고 난 후에도 존재한다.
뇌는 존재-마음을 수신해서 처리하는 단말기다. 존재의 사실들이 이 유기체적 신체에 잘 조화되어 작용할 수 있도록 처리하는 탁월한 일꾼이지, 존재의 사실들을 관장하는 신이 아니다.
물론 나이기 위해서는 심장이 필요하고, 위장이 필요하고, 폐가 필요하듯이, 뇌가 반드시 필요하다.
존재의 사실들이 섭식되어 나를 성립시킨다. 마음이 나의 마음으로 수용되어 나는 등장한다. 뇌는 존재의 사실들을 나라는 존재로,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알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뇌는 존재라는 아주 멋진 이 우주의 신비를 우리에게 개방해주는 중개자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뇌가 존재를 창조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일은 마치 남이 만든 영화를 영사기에 걸었을 뿐인 영화관 사장이, 자기가 그 영화를 만들었으니 아카데미상을 자신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때문에 지적 열등감이라는 것 또한 실은 코미디와 같은 것이다.
책상 위에 놓인 노트북 앞에 서러운 표정으로 앉아 비장한 음색으로 이렇게 말하는 이의 모습을 떠올려볼 수 있다.
"그래..... 내가 진 것 같구나... 아무리 해도 너를 이길 수가 없구나... 나도 최선을 다했어... 정말 열심히 살았지... 그런데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아... 네가, 이겼다... 축하한다.. 패자는 이만 물러나도록 할게... 태어난 일에 아무런 가치 없고, 그저 걸어다니는 똥 자판기에 불과할 뿐인 나는 이만... 사라지도록 하마... 다시 한 번 축하한다.. 똑똑한 친구.. 늘 건강해라.... 밥 잘 챙겨먹고......."
자신이 쿠팡에서 399000원에 산 노트북에 대해 경험하는 이 극화적 절망감이 바로 지적 열등감의 실체다.
이처럼 지적 열등감이라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이의 지성과 갈등하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은 자기 뇌와 갈등하고 있는 것이다. 뇌가 더 신적인 성질로 드러나서 자기를 구해줘야 한다며, 이 우주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정당하게 만들어줘야 한다며, 뇌가 할 수 없는 일을 뇌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노트북으로 야동을 보다가 마음에 드는 이성이 보이면 "자 노트북아, 저 이성을 모니터 밖으로 빨리 꺼내주렴, 호이."라고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성립될 수도 없는 명령어를 그렇게 천재 해커의 주문처럼 외우다가 결국에는 "그래... 너는 똑똑해서 예쁜 이성들을 네 안에 많이 갖고 있어 좋겠다... 나한테는 하나도 안 꺼내주구.... 내가 멍청하고 자격이 부족해서 그런 거지?.... 그래... 내가 졌어... 패자는 이만 물러나도록 할게..."라고 시무룩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삼류 저질 연극에 나는 정녕 복종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뇌가 아니기에, 나도 뇌가 아니다.
마음이 그 마음 하나만으로 가득하게 온전해서 존재감이 충만해질 때 그것이 나일 뿐이다.
바로 그것이 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뇌일 뿐, 뇌가 나는 아니다.
뇌는 마음을, 존재를, 나를 알리는 아주 충실한 나의 AI이지, 나의 신은 아니다. 신인 나도 아니다.
아침에 나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자명종을 분해한다고 그 안에서 내가 나오는 것은 아니듯이, 뇌 안에 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귀 안에 도청장치는 있을지언정, 뇌 안에 나는 없다.
뇌를 마음이라고, 존재라고, 나라고 말하는 그 모든 이야기에, 나는 복종하지 않는다.
나는 알려질 뿐이다. 기특하게도 내가 없는 속에도 나를 늘 기억하는 뇌를 통해. 나는 또 여기에서 나를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