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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춘기

"관계 샤머니즘의 절대성을 무너뜨리며"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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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을 인간의 지성으로 통제하고자 이루는 것이 분석이라면, 현상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을 해석이라 한다.


때문에 해석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전제를 내포하지 않는다. 즉, 정답을 미리 내려놓고 그 정답에 따라 스토리를 끼워맞추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올바른 정답, 인간을 이끌어갈 위대한 예지, 어떤 사상가(보통은 여전히 마르크스)의 천재적 담론, 계몽의 기능을 수행하는 영웅신화의 대중문화콘텐츠, 패턴화된 집단주의적 사고 등과 같이 고답적으로 진리화된 것들을 통해 현상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수행하려 할 때, 거기에서는 인간의 삶에 대한 조망이 어려워진다. 그러한 사이비진리들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화만 누적될 뿐이다.


현상은 드러나 있는 그 자체가 결과며 기정사실이다.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다가온 것이다. 해석은 그러한 속성의 현상을 마주하고 있는 개인과 현상을 연결해주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현상이 알리는 바대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알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래서 해석은 현상에 대한 가상의 서사를 부여해, 현상을 서사의 자녀인 자아에게 복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현상이 마치 자아를 위해 펼쳐지는 것처럼, 또는 자아가 현상을 이끌어나가는 것처럼, 서사를 통해 자아를 현상의 주인공인 것처럼 꾸미는 일은 해석이 아니다.


오히려 현상의 의미는 자아가 저질댄스를 추며 독차지하고 있던 무대로부터 자아를 퇴장시키는 데서 드러난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은 자아의 그 어떤 서사적 이야기도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삶 자체다.


"내[자아]가 주인공이 아니다."


현상이 알리는 바대로 바로 이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아이는 어른이 된다.


물론 여기에서 어른이라는 것은 세간에 찌들어 조금 닳고 닳았지만, 그럼에도 순수한 눈빛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늘 도덕적 중심을 잃지 않으려는, 소영웅주의에 빠진 재미없는 윤리충 꼰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란 단순하게 자신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그렇게 실존하는 이를 의미한다. 이것은 모범적이고 진정한 반장 같은 내가 되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친절하고 인내심있는 엄마처럼 남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이 지점이 가장 묘사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말을 하자면 이것은 '나'라고 하는 것에 열려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고 하는 것에 열려서 산다는 것은 '나'를 체험하고, 만나고, 알게 해주는 현상에 열려서 산다는 것이다. 곧, 현상을 체험할 때 나의 모든 작용으로서 일어나는 느낌에 열려서 산다는 것이다.


이야기 없이.


그 어느 이야기에도 의존하지 않고.


이것이 키르케고르가 말한 단독자로 선다는 그 의미다.


무슨 자기만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잔다르크처럼 지키고 서있는 그것이 단독자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아다.


단독자는 지키지 않는다. 단독자는 다만 열려있을 뿐이다. 고집은 단독자와 가장 멀리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른은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밀려오는 삶의 사건들에 대해 자아의 이야기로 통합하려 하지 않고 개방적인 자세를 갖는 단독자'


조금 쉽게 말하자면, 자아가 지금까지 쌓아온 구조를 기각하고 지금 일어나는 삶의 작용만을 신뢰하는 것이 곧 어른의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어른이라는 언술은 쉬이 자유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어른이란 곧 자아가 만든 자기구속의 감옥으로부터 삶을 향해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묘사인 까닭이다.


'존재론적 단독성'과 '현상에 대한 개방성'이 분명하게 어른의 특성이다.


그리고 이 두 특성은 아이가 어른으로 이행되는 과도기적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사춘기에 처음 경험하게 되는 대표적인 성분들이다.


세상에 자기 혼자인 것만 같고,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만 같은, 바로 이 사춘기의 일상적인 느낌 속에서 개인은 사실 어른의 특성을 체험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 단독성과 개방성에 대한 자각을 실존의식의 자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존은 단순히 집단주의에 빠져 있던 이가 개체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개체가 개인이 되는 과정이다.


개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 근거를 다른 상대적인 것들에 의탁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렇게 현상에 더 개방적인 태도를 스스로의 기본태도로 설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개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의미다.


사춘기의 모든 혼란은 관계에서 비롯한다. 관계에 의존하면서도 관계로부터 한없이 떠나고 싶은 그 모순적 욕구가 충돌하는 시기가 사춘기다.


이를 '관계에 대한 관계성'을 배워가는 시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춘기를 살아가는 개인이 부모-자식 관계와 같은 불가피한 관계보다는, 친구 및 애인과 필요에 따라 형성하는 선택적 관계를 더 반갑게 느끼는 이유는 분명하다. 거기에서는 관계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진 가벼운 공기가 경험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춘기는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롭게 배워가는 시기다. 사실은 관계라고 하는 것이 대단히 임의적이고, 나아가 자의적이며, 근본적으로 필수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이 사춘기의 경험들 속에서 개방된다.


다시 말하자면, 사춘기는 그동안 신격화되어 있던 관계의 절대성이 의심되고, 도전되며, 해체되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개체에서 개인이 되기 위해 인간이 겪게 되는 사춘기의 과업이다.


이 사춘기의 과업을 완수하지 못했을 때, 애어른과 어른아이들이 함께 출현한다. 실은 미숙하면서 성숙한 척 기만하거나, 생물학적인 성숙 속에 미숙한 심리를 은폐하여 유지한다.


미숙하다는 것은 이렇게도 다시 말할 수 있다.


관계를 신으로 보고 있는 것, 그것이 미숙함이다.


미숙한 이들은 관계를 신적인 것으로 숭배하며 신앙한다. 관계의 논리를 절대적 명령처럼 간주하여 그 명령을 완수하는 일에만 자신의 인생을 매진한다. 이러한 것을 관계의 노예가 된 삶이라고 부른다.


관계의 우상숭배며, 관계중독이고, 관계에 대한 주술적 믿음이다.


바로 '관계 샤머니즘'이다.


관계 샤머니즘,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자유로운 개인이 되지 못하도록 막는 가장 큰 장벽이자, 지금 이 시대의 끝없는 고통을 양산하는 핵심적 동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불어.'

'나를 위해, 그가 있다.'

'우리가 XX다.'


전부 다 이 관계 샤머니즘의 의도로부터 발화된 표현들이다.


지금 이 시대를 독재하고 있는 집단정신 내지 이념의 정체가 바로 이 관계 샤머니즘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독재가 종결될 가능성을 개방하기 위해 코로나라고 하는 현상이 드러나 있다. 코로나에 대한 반응으로 관계 샤머니즘의 독재가 출현한 것이 아니다. 코로나라고 하는 현상은 오히려 그동안 어떻게 독재가 이루어지고 있었는가를 더 가시화해서 보여주게 된 촉발재였을 뿐이다. 나아가 어떻게 독재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통찰재이기도 하다.


코로나라고 하는 현상은 관계 샤머니즘을 절대적인 것으로 숭배하며 그 안에 갇혀 미숙한 개체의 상태로만 머물던 인간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심리적 사춘기를 다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인간은 이제 불가피하게 단독자로서 그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관계가 모든 것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망상은 근본부터 위협받아 붕괴되어갔다. 관계 자체가 성립되기 어려운 물리적 조건을 코로나가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당연하다고 믿었던 그 모든 관계의 조건들이 그렇게 무너져갈 때, 그 속에서 인간은 진실로 발견할 수 있었다.


더는 관계가 필수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관계가 없어도 자신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 및 자신과 관계를 맺던 이들은 그 누구도 도구적 대상이 아니라, 똑같이 온전하게 살아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관계를 통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로 인해 인간이 지금껏 추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관계는 진실로 인간을 성립시키는 절대적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수수께끼를 풀듯이 애인이 오늘 뭘 먹고 싶어할지를 독심술사처럼 맞춤으로써 "이제 공감능력 조금 생겼네."라는 인정을 받아먹기 위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가던 주말의 시간도, 늘 똑같이 반복되는 주식과 코인 이야기 속에서 불판의 삼겹살과 함께 지루하고 건조하게 말라만 가던 공허한 회식 자리도, 자신들의 노화와 죽음에 대한 불안을 자식에게 투사하여 늘어놓는 장대한 훈화말씀을 그저 인내해야만 하던 명절의 순간도, 이제는 절대적 필수요소가 아니게 되었다.


그 모든 관계에 투신하여 영혼을 갈아넣지 않으면,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죄인처럼 간주되던 그 모든 비참한 시간들이, 이제는 불가피하게도, 그래서 다행스럽게도, 절대적 의무로 강요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인간은 더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만큼 관계라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하고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스스로 확보한 사실적 지평 위에 인간이 비로소 직립하게 됨으로써 삶에 대해 더욱 열려 있는 개방적 자세 또한 가능할 수 있게 되었다. 관계라고 하는 신주단지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며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던 현실이 이러한 방식으로 기적처럼 전환될 수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인간이 관계의 논리를 초월해 실존할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분명하게 관계 샤머니즘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그럼으로써 관계 샤머니즘의 절대성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무너진 그 잔재 속에서,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이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태초의 빛을 내게 된 것이다.


이 코로나라고 하는 현상이 알리고 있는 의미는 이처럼 인간의 온전한 사춘기의 회복이었던 것이다. 관계 속에서 늘 착한 아이와 같은 강압된 미숙아로 남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제 스스로 어른이 되어도 된다고 하는 온전한 자유와 성숙에 대한 허가가 이 현상 속에 담겨 있던 의미다.


코로나가 제공한 심리적 사춘기, 즉 코로나 사춘기는 그래서 심리적 차원에서는, 또한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분명한 기회다.


인간이 더는 나를 위해서도, 또한 남을 위해서도 살지 않아도 되는, 이제 처음으로 나로서 살아볼 기회다. 스스로의 두 발로 땅 위에 직립한 그 든든한 단독성과, 자유로워진 두 팔로 하늘을 끌어안을 그 유연한 개방성으로, 이제 진짜로 나로서 살아볼 그 기회가 왔다.


그러나 기회는 선택이다.


이러한 때일수록 더욱 관계의 중요성을 관철함으로써, 관계를 위협하는 어떠한 고통에도 패배하지 않을 진정한 자아의 서사적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각자가 그처럼 고유한 영웅적 자아가 되어 그 힘으로 더 멋지고 선한 연대를 이루며 관계 샤머니즘 앞에 복종된 고통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심리적 퇴행의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단순하게 내[존재]가 주인공으로 한번 일어나보는 선택을 할 것인가.


이것은 정말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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