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마음의 크기

"마음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by 깨닫는마음씨



내 마음이 어떤지 몰라서 힘들다고들 말합니다.


마음을 모르면 힘든 것이 맞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자기가 알려질 때까지, 자기를 드러내는 상황을 반복해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힘들게 경험하게 된 힘든 상황이 있다면, 그 힘든 상황은 반복되게 됩니다.


마음을 알아야 이 반복이 멈춥니다. 그로 인해 반복되던 고통이 끝납니다.


이것은 아주 쉬운 글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하면 잘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방법론을 익히는 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마음을 안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돕고자 하는 글입니다.


마음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크기를 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하는 마음의 크기를 몰라 우리는 힘들어 합니다.


이를테면, 자신이 지금 화나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 얼마만큼 화나있는지를 모릅니다. 막연합니다. 구체적이지 않고 두루뭉술합니다. 그러니 경계가 희미해집니다.


경계가 희미하다는 것은 해도 해도 끝이 없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경험하던 마음에 우리는 쉬이 지치곤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힘들어지는 이유입니다.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을 과제처럼 마음이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경계를 명확하게 실감하면 됩니다. 그러려면 마음의 크기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할 때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이 홍대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뒤에서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는 외제 세단에 깜짝 놀라 길을 비켜주게 되었습니다. 차가 지나가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야, 뒤늦게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이 자각됩니다.


왠지 수치스럽기도 하고, 뭔가 패배한 것도 같으며, 더러운 신자유주의와 썩어빠진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와, 이 천박한 시스템에 낄낄대며 편승하고 있는 우민들에게 혐오가 치밀기도 합니다. 고작해야 BMW 5시리즈였을 뿐인데, 차주가 카푸어 놈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왜 비루한 모습으로 길을 비켜주었는지 자기 자신에 대한 화도 많이 납니다.


그게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얼마만큼 화가 났습니까?


상상해보십시오.


홍대거리 한복판에서 자신이 쩌렁쩌렁 울리는 노성으로 "이 씨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알!!!"이라고 외침으로써, 홍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서는 전부 다 쫄아서 동작을 멈춘 채 분노를 폭발시킨 이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보는 그림이 보인다면, 그 그림이 충분히 만족스럽니까?


바로 그 그림을 이루기를 바랐습니까?


그 정도로 충분한 화의 크기입니까?


아니면, 그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이 서울 전체로 파장을 미치는 그림이 그려질 때 만족스럽게 됩니까? 또는 남한으로, 동아시아로, 북반구로, 지구 전체로, 태양계로, 그 어디까지라도 경계가 확장되어도 좋습니다.


어느 정도만큼의 범위에 자신이 내는 화의 목소리가 울려퍼져서 영향력을 갖게 되면, 그 그림이 충분히 만족스럽습니까?


점차 확장해보면 사실 자연스럽게 알게 됩니다.


피식, 하며 웃음이 지어지는 그 흐뭇한 정도가, 지금 그 화의 크기입니다.


명확한 경계가 확보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크기가 명확한 경계로 알려지는 순간을, 마음을 만난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만난다는 것은, 그 순간 자신이 어느 정도의 크기로 그 마음을 소비하고 싶었는가를, 즉 그 마음의 도움으로 대체 얼마만큼의 크기의 자신으로 드러나고 싶었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으로 드러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기에, 그 좌절의 상황이 반복됩니다.


이 말은, 그러한 자신을 만들어준 바로 그러한 크기의 마음이 분명 그 순간 자신을 위해 존재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 좌절의 상황이 반복된다는 뜻입니다.


더 자세히 말해보자면, 우리가 혼자로는 좀 힘들고 도움이 필요한 어떤 상황에서, 마음이 바로 그 십자군으로 우리에게 날아왔는데, 우리가 그 마음의 군세가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결국 충분히 도움받지 못한 비루한 존재로서 우리 자신을 좌절 속에 파묻히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그 좌절의 정체성을 스스로 강화하며, 다가오는 사건들 속에서도 좌절의 정체성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려는 부정적인 자기충족적 예언을 실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은 우리가 자신에게 거는 저주와 같습니다. 저주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넌 혼자야. 아무도 너같이 하찮은 건 도와주지 않아. 찐따새끼, 초라하게 살다가 죽을 팔자니까, 괜히 나대지 말고, 남들 피해주지 않게 눈치 잘 보며 중간만 가게 살아."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혼자일 때라도 절대로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마음이 늘 함께합니다.


마음을 자기의 뇌라고 간주하거나, 오히려 자신이 돌봐주어야 할 귀찮고 성가신 아이 같은 마인드(mind)의 개념으로 착각하는 이라면 이 말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어려워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통해 존재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혼자여도 함께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어떠한 상황이 펼쳐질 때, 그 상황의 크기에 맞춰 마음의 크기를 형성합니다. 상황이 크게 경험되면, 그 순간 경험되는 마음의 크기도 큽니다.


우리가 거대한 마왕과 싸우는 상황인 것만 같을 때, 그 자리에 레벨 1의 마을사람 A와 같은 마음만 달랑 나타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만약 정말로 마왕과 싸우는 상황이라면, 마음은 반드시 만렙 용사의 모습으로 우리의 옆에 섭니다.


이러한 사실을 신뢰하는 것이 곧 마음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신뢰한다는 것은 바로 마음의 크기를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편입니다.


우리편의 세력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를 우리는 한 번이라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우리편을 신뢰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마음이 있어 든든해집니다.


인간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해도 좋습니다.


창조주가 직접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늘 자신의 권능이 인간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인간에게 마음을 주었다고.


그래서 이 또한 비유적으로, 모든 마음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같은 비유 속에서, 결국 마음을 안다는 것은 마음의 크기를 안다는 것이며, 마음의 크기를 안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안다는 것입니다.


보통 크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자기 안에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여, 가뜩이나 작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보다도 더 작게 만들어야 할 그 크기가 아닙니다.


이처럼 마음을 자기 안에 가두어 작게 만들고 있을 때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내 마음이 어떤지 모르겠어서 힘들다."


이 말은 다시 이러한 비유적 표현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모르겠어서 힘들다. 하나님이 정말로 내 하나님인지 모르겠어서 힘들다."


그러니 상상해보십시오.


자신 안에 가두고 있던 마음을 밖으로 확장시켜, 그렇게 자신의 시공간을 마음대로 확장시켜, 정확하게 어느 정도 크기의 그림이 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지를.


그렇게 확인해보십시오.


이 마음의 크기가, 하나님이 지금 실시간으로 전하고 있는 이 사랑의 크기가 대체 얼마만큼인지를.


이것이 마음을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통행하는 시선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