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회복"
말해보아라, 그대여.
오늘은 어떠한 잘못을 저지른 그대인가?
분명 그대는 오늘도 모든 것을 다 망쳤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대는 오늘도 어제의 태양 아래에서처럼 태어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을 것이며, 그대는 오늘도 내일의 태양 아래에서처럼 무엇을 해도 안되도록 운명적으로 정해진 저주받은 그대 자신을 확신했을 것이다.
그대의 이력서에 반드시 기재되어야 할 그대의 주특기 3종 세트가 있다.
배운 만큼 까먹기.
까먹은 만큼 못하기.
못한 만큼 자책하기.
이 주특기들이 보장해주는 그대의 성공적인 인생 공식은, 언제나 한결같이 못하기다. 모든 것이 늘 불확실한 그대이지만, 그대는 그대가 늘 못할 것이라는 이 사실 하나만큼은 든든하게 확신할 수 있다.
확신해도 좋다. 그대는 잘 못하는 자다. 그래서 그대는 잘못하는 자다.
그대여, 그대는 잘못한 존재다. 존재 자체가 잘못이다. 죄다.
애초 그대의 존재 자체가 잘못이라는 이 사실을 그대가 늘 확신하는만큼, 그대의 죄책감은 가눌 길이 없다.
아무리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대가 그대의 삶 속에서 잘 못하게 되는 일들은 여지없이 그대를 잘못한 존재로 다시 주저앉힌다. 그리고 무엇을 해도 여전히 그대가 잘못한 존재밖에는 될 수 없는 이 상황이, 그대의 죄책감을 더욱 크게 만든다. 더 커진 죄책감은,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더 큰 노력과 그 결과로서의 더 큰 좌절을 만들고, 죄책감은 다시 또 강화된다. 죄책감의 악순환이다.
나는 그대에게 늘 알린다. 그대가 함께 알도록 알린다.
반복되는 모든 순환은 거기에 골인할 수 있는 결승점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리고 모든 결승점은 바로 그대가 달리기를 시작했던 그 출발점이다. 자신의 출발점을 잠시 잊었기에, 그대는 결승점을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무지는 오해에서 비롯한다. 이렇듯, 무지로 인해 반복되는 모든 순환은 그대의 오해 때문에 생겨난다.
그대는 분명하게 오해하고 있다.
그대는 양심을 죄책감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대가 출발한 자리인 양심을, 그로 인해 그대가 다시 도달해야 할 그 자리를 죄책감으로 오해하고 있는 까닭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만 끝없는 달리기를 지속한다.
그대는 양심을 잊었다. 그렇게 그대는 양심을 잃었다. 그래서 그대는 양심이 없다.
양심이 없어서 죄책감이 있다. 양심이 부재한 그 자리를 죄책감이 대신 채운다. 그 결과, 그대의 인생은 고통뿐인 지옥이다.
그대여, 그대가 이 죄책감의 지옥에서 벗어나려면 양심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대가 잠시 잊은 양심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양심(conscience)이라는 영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함께 알다'이다. 양심(良心)이라는 한자어의 직접적 의미는 '어진 마음'이다.
함께 아는 것이 어진 마음이고, 어진 마음은 함께 아는 것이다. 이 둘의 실제적 의미는 같다.
그것은 소외되는 것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다. 통째의 온전함으로 있는다는 것이다.
그대와 내가 함께 알 때, 그대와 나 사이에는 소외되는 것이 없게 된다. 그렇게 소외되는 것이 없도록 온전함을 살피는 마음이 바로 어진 마음이다.
그대여, 고통의 가장 정확한 이름이 바로 소외다.
고통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대의 고통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기에 그대는 진정 고통스럽다. 이 우주에서 그대만 혼자 이러한 고통의 사건을 겪는 것 같이 느껴지기에 그대는 진정 고통스럽다. 그대의 고통을 이해하는 그대의 편이 한 명도 없는 것 같기에 그대는 진정 고통스럽다. 즉, 그대가 온전함으로부터 소외된 부분이 되어 있기에 그대는 고통스럽다.
온전함이 깨어져 소외되는 것이 고통이다.
그래서 양심의 일은 소외된 고통을 살핌으로써 온전함을 회복하는 일이다.
통째의 전체에서 무엇이 소외되어 있는지를 비추는 일, 그렇게 누가 고통받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일,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받는 이에 관심을 갖는 일, 바로 그것이 양심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양심은 언제나 고통을 끝내기 위한 방향성을 갖는다.
이에 반해, 그대가 양심을 잊은 동안 그 자리를 대체하기 위해 채택하고 있던 죄책감은 정확하게 고통을 증가시키기 위한 방향성을 갖는다. 죄책감은 더 정확하게는 채찍과 당근의 논리다. 고통과 보상을 통해 그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려고 만들어진 메카니즘이 바로 죄책감이다.
때문에 죄책감은 언제나 학습되는 것이다. 프로이트 선생의 이야기다.
죄책감은 언제나 부분화된 공동체로부터 학습된다. 부모가 정한 규율, 사회가 정한 규율, 국가가 정한 규율 등, 이 특정한 공동체의 규율이 깨지지 않고 유지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대에게 죄책감은 학습된다. 그리고 이 특정한 공동체의 질서에 순종하는 '좋은 부품'으로서 잘 못할 때, 그대는 스스로를 잘못한 존재로 느끼며 죄책감을 갖는다.
이와 같이, 그대는 죄책감의 채찍을 맞으며, 언젠가는 부모의 칭찬과, 사회의 인정과, 국가의 지지라는 당근을 얻어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홀로 노새처럼 멍에를 지고 수레바퀴를 끝없이 돌린다. 그렇게 운동에너지를 열에너지로 바꾸어 공동체의 저녁식탁에 올릴 티본 스테이크가 요리될 오븐을 달군다. 그대의 자리만은 없는 그 저녁식탁을 위해.
그대여, 정말로 눈치채야 한다.
죄책감은 노예의 원리다. 니체가 옳다. 정녕 옳다. 그대가 죄책감으로 사는 한, 그대는 노예로 살게 되는 것이다. 부분에 봉사하는 그대는 온전한 인간으로부터 부분의 도구로 소외되는 것이다.
이 노예의 삶이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죄책감은 그대 스스로를 노예처럼 느끼지 못하게 하는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까닭에, 그대는 좀처럼 노예를 그만둘 생각을, 끝없는 달리기를 멈출 생각을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죄책감은 가장 단순하게, 자기의 죄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 상태다. 바로 '내 탓이오'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는 무엇인가?
남이 시키는대로 살지 못한 것이 그대의 죄다. 남이 시키는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는 자신을 책망한다. 즉, 그대는 남을 만족시키지 못한 자신을 책망한다.
여기에서 그대는, 그대의 행위에 따라 남의 만족과 불만족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지위를 취득한다. 마치 신이라도 된듯한 입장에서 남의 행복과 불행의 여부를 그대가 당연하게 관장하고 있는 것과 같은 구조를 작동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대에 의해 남의 삶이 결정된다는 이 구조는 오만한 주체를 은밀하게 성립시키는 구조다. 이러한 맥락에서 '내 탓이오'의 진짜 의미는 '내가 신인데 너네 인간에게 잘 못해서 미안해'라는 의미다. 즉, '신인 내 탓이오'다.
이처럼, 죄책감에 쌓인 그대는 자기를 은밀하게 신으로 보며 똑바로 신의 역할을 하지 못한 스스로를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죄책감은 오만함에서 나온 자기 처벌이다. 그리고 이 오만함으로 인해, 그대가 실제로는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은 은폐되며, 그대 스스로는 오히려 노예의 반대편에 놓일 주체적인 [신적] 삶을 살고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죄책감으로 사는 그대에게는 양심(良心)이 없다. 신에게는 마음(心)이 없는 까닭이다.
마음은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자신이 유한한 까닭에, 인간은 소망을 갖는다. 그 소망의 표현이 바로 마음이다. 마음은 소망이다. 그러나 신에게는 마땅히 이루어져야만 하는대로 이루어져야 할 당위만 있지, 이 소망이 없다. 오직 인간만이 소망을 갖는다.
그대여, 그대는 인간이다. 그대에게는 분명 소망이 있었다. 그대가 달리기를 시작한 그 출발점은 그대가 기존에 느낀 한계의 끝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대는 소망을 가졌던 것이다. 그 소망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 소망은 무엇이었는가?
그대 자신과, 그대가 사랑하는 모두가 고통받지 않기를, 누구도 소외되지 않기를, 온전하기를.
온전함, 그것이 그대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것이 그대 양심의 진실된 모습이었다.
양심은 온전함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그대는 그 거울을 본원적으로 갖고 태어났다. 죄책감은 남에 의해 학습되는 것이지만, 양심은 그대가 갖고 태어난 그대 자신의 것이다.
그대는 신이라는 이름의 노예가 되어, 특정한 남과 특정한 공동체를, 곧 특정한 부분을 만족시키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대의 양심으로 온전함을 비추어 고통을 끝내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다시 기억하라.
그대는, 그대의 양으심로 온전함을 비어추 고통을 끝기내 위해 태난어 것이다.
그대는 어떻게 이 문장을 알아보는가?
그대는 원래 전체로 지각하는 까닭이다. 원래 온전하게 지각하도록 태어난 까닭이다. 그대에게 양심이 있는 까닭이다.
양심이 있는 곳에 죄책감이 없다. 온전하게 비추어지는 곳에 소외는 사라진다.
그대여, 그대도 아는 것처럼 그대의 성공적인 인생 공식은, 언제나 한결같이 못하기다. 모든 것이 늘 불확실한 그대이지만, 그대는 그대가 늘 못할 것이라는 이 사실 하나만큼은 든든하게 확신할 수 있다.
그대는 죽었다 깨어나도 소외만은 못한다. 언제나 한결같이 소외를 못한다. 그대가 늘 소외를 못할 것이라는 이 사실 하나만큼은 든든하게 확신할 수 있다.
그대에게는 양심이 있는 까닭에, 그대는 아무리 죄책감의 논리에 지배받더라도 소외만은 결코 못한다.
그대에게는 양심이 있는 까닭에, 그대는 고통을 결코 두고볼 수 없다. 고통을 방치하고, 고통받는 이를 소외하는 일만큼은 결코 할 수 없다.
그대에게는 양심이 있는 까닭에, 그대는 인간이다. 그대는 결코 소외할 수 없으며, 그대는 결코 소외될 수 없다.
양심은 인간의 조건이다.
그대는 인간이다. 그대는 온전하게 태어난 인간이다. 그대는 온전하다.
모든 결승점은 바로 그대가 달리기를 시작했던 그 출발점이다.
온전함에서 출발한 그대여, 그대가 달리기를 멈춰야 할 그 자리도 바로 온전함이다.
바로 양심의 자리다.
그대가 자리에 앉아 거울을 바라볼 때, 그 거울에 가장 먼저 비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렇게 그대 자신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온전하다. 가장 소외될 수 없는 것이, 가장 고통받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그대 자신이다.
그대의 양심은 바로 그 사실을 그대가 함께 알도록 늘 그대 자신을 비춘다. 그렇게 온전한 그대 자신을 모두가 함께 알도록 늘 그대 자신을 비춘다.
그대는 늘 그대가 소외되지 않도록, 그대를 함께 알고 있는 이 어진 마음 속에 있다.
강아솔 - 나의 대답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어느 때보다 그대
정직한 사람이길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어느 때보다 그대
여린 사람이길
거짓된 마음들이 돋아나는 세상에 살며
아플까 날 감추는 데 익숙해진 건 아닌지
그대여 난 온전한 그댈 원해요
그대 내게 언제나
정직하기를 원해요
늘 몰래 삼켰던
그 목소리로 내게 이야기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