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면"
그대는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바로 그대 자신의 변화라는 꿈이다.
그대여, 그대는 바로 그 몸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自身)이다. 그대가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몸이며, 그대 자신이다.
몸이라는 것은 "아, 내가 지금 이렇게 느낀다."라며 스스로를 실감하는 바로 그것이다.
때문에 아무리 전신성형으로 외양을 바꾼다 해도, 그대가 그대 자신으로 느끼는 그 몸에 대한 실감은 바뀔 수 없다.
그러나 그대가 정말로 무엇을 바꾸고 싶어하는지를 나는 안다.
그대가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표현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그것은 바로 그대의 인격이다. 그대는 지금 그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 가진 것 같다. 그대가 못 가진 것들, 그래서 그대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들은 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 같다. '나만 없어'로 시작하는 시리즈는 다 그대 자서전의 목차들이다.
그대만 부족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대는 부족하지 않은 다른 사람이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인격을 바꾼다는 것은, 그대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더 어려운 일처럼만 느껴진다. 심리학 자조서, 자존감 트레이닝, 코칭, 스피치 학원, 최면, 시크릿, 마인드컨트롤, 전생체험, 트라우마 치료 등, 그대가 그 무엇을 하더라도 중요한 순간 소개팅녀 앞에서 결국 부르게 되는 애창곡은 '나란 놈'이다. 천엽처럼 비호감이고, 곱창처럼 질기며, 막창처럼 구리다. 징글징글한 기저귀 고무줄이다. 다시 튕겨올 때면 아프기까지 하다.
그렇게 그대는 중요한 때마다 중상을 입어왔다. 아파서 못 살겠다. 더는 이렇게는 살 수 없다. 이제는 바뀌어야만 한다. 그대에게 중요한 때에 그대는 정말로 잘하고 싶다.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다.
하지만 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고무줄을 열심히 당긴 만큼 그 반동으로 돌아오는 아픔은 더욱 크다. 더 한다는 것은 더 많은 아픔의 예감으로만 다가온다.
그대여, 안심해도 좋다.
더 하는 것이 아니다. 더하기가 아니다. 빼기다.
그대가 지금 그대라고 말하는 그 인격을 빼는 것이다.
그대가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가 아니다. 인격은 그대라고 하는 사람이 아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융은 인격에 대한 그대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유용한 용어를 제안했다. 페르소나(persona), 이는 인격(personality)이라는 단어의 어원이자, 가면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인격은 이처럼 연극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으로 은유된다. 가면이 배우가 아니듯, 인격은 그대가 아니다.
가면은 의복과도 같다. 다양한 상황에 맞춰 적절한 쓰임새로 활용하는 것이 바로 의복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있어야 할 기본적인 3대 요소에 속하는 의식주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는 의복은 분명 긴밀한 필요의 문제다.
즉, 가면은 필요의 문제다. 인격은 필요의 문제다.
그리고 그 필요는 환경이 결정한다. 장례식장이라는 환경이 검정 의복의 필요를 결정하듯이, 특정한 가면의 필요는 그 가면이 요청되는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장례식장에서 금빛 왕관을 쓰고 파스텔 핑크색의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사계절 내내 빨지도 않는 롱패딩을 걸치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라. 천엽처럼 비호감이고, 곱창처럼 질기며, 막창처럼 구리다. 그리고 아마도 그 모든 결과는 고무줄 같은 아픔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대여, 이와 같다.
그대가 중요한 때마다 지금 그대라고 생각하는 임의의 인격을 유지하는 일이나, 그대가 중요한 때를 위해 그대보다 더 나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임의의 인격을 추구하는 일이나, 이와 같은 무리한 고집이다.
고집은 바깥의 환경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듣는다는 것은 상호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환경의 말을 듣고 상호작용하기보다는, 오직 그대의 힘으로 해결하려 한다. 더 유능한 인격을 얻으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대는 하늘을 날고, 빔을 쏘고, 돈을 뿌리면서, 환경을 자기 뜻대로 바꿀 수 있는 아이언맨이 되기를 꿈꾼다. 그대는 불가능한 것을 꿈꾼다. 그 꿈 속에서 그대는 토니 스타크만큼이나 고집스러워진다.
한여름과 상호작용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롱패딩을 입고 있다면, 그대는 참을 수 없이 더워질 뿐이다. 고집은 더위의 문제 앞에 그대를 무능력하게 만든다.
고집은 언제나 실제적인 그대의 필요를 소외시킨다. 필요가 소외되니, 그대는 스스로를 필요의 문제에 응답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중요한 때에 잘 할 수 없는 부족한 존재로 경험하게 되며, 결국 또 그대의 애창곡을 부르기 위해 쓸쓸히 코인노래방을 찾게 된다.
그대여,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다. 고통스럽다.
그냥 롱패딩을 벗어보자. 그대의 몸에서 롱패딩을 빼보자. 그대 자신에게서 그 인격을 빼보자.
그러나 뺄셈은 언제나 섬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성급하고 투박하면 계산이 틀리게 된다. 수학은 섬세함의 학문이다.
아주아주 섬세하게, 지금 그대가 놓인 환경에 귀기울이며 물어보자.
"지금 이게 필요한가?"
그대의 몸이 대답할 것이다. 인격이 아닌 그대 자신이 대답할 것이다.
그대의 등줄기에서 비오듯 흐르는 땀이 바로 그렇게 정확하게 대답하고 있다면, 이제 망설임없이 롱패딩을 벗자.
시원하다. 뺄셈은 언제나 불필요한 짐을 더는 일이라 시원하다.
그대여, 지금 그대가 마주하는 환경에서 지금 그 인격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오히려 그 인격을 활용함으로써 역기능적인 고통만 생겨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그저 그 인격을 치우면 된다. 어, 넌 지금은 필요없어, 라며 옆으로 밀어두고, 현재의 환경에만 귀를 기울이면 된다.
그러면 환경이 그대에게, 현재 가장 적합한 쓰임새의 인격을 새로이 구성해준다. 환경과 상호작용한 결과로서 현재 가장 유용한 인격이 새로이 만들어진다.
바꿀 수 있다.
그대는 그저 환경에 귀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그저 빼기만 하면 된다. 그대가 빼면, 환경이 더해준다. 그것이 바로 상호작용이다.
그대가 이렇듯 과감하게 뺄셈을 해도 되는 이유는 그대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그 몸이며, 그대 자신인 까닭이다. 어떠한 임의의 인격이 치워져도 그대인 몸은 죽지 않는다. 인격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의 몸은 특정한 인격만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무인격적인 공통구조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갖는 공통구조다. 때문에 그 공통구조 위에서 어떠한 인격이라도 자유롭게 구현될 수 있다. 그대는 어떤 인격도 아니라서 모든 인격이 될 수 있다. 붓다는 이 사실을 2500년 전에 발견했고, 여기에 무아(無我)라는 말을 붙였다. 그대와 관계없는 하늘 위의 신비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그대의 실제적인 몸이 무아다.
그대는 그 몸으로 환경의 소리를 들으며, 그때그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능하는 각각의 인격들을 통해 그대의 삶을 누리면 된다. 그렇게 매순간 인격들의 춤사위를 통해 유연하게 펼쳐지는 행복을 누리면 된다. 중요한 때에 멋진 모습으로 설 수 있게 되는 실감나는 감동을 누리면 된다.
천엽처럼 개성있고, 곱창처럼 든든하며, 막창처럼 풍요롭게.
분명, 다른 사람은 다 가진 것 같다. 그대가 못 가진 것들, 그래서 그대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들은 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 같다. '나만 없어'로 시작하는 시리즈는 다 그대 자서전의 목차들이다.
그대여, 그대가 바로 그 다른 사람이다. 환경과 상호작용함으로써 필요한 것들을 다 채운 그 다른 사람이 바로 그대다. 어느 사람도 아니라서 다른 모든 사람인 그대다. 부족한 것 없는 모든 사람인 그대다. '나만 없어(無我)'로 시작하는 시리즈는 진실로 다 그대 자서전의 목차들이다.
어느 페이지를 펼쳐봐도, 그대가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얼마나 충만한 존재로 살았는지, 오롯한 그 목소리 들려온다.
귀를 기울이면.
이호석 - 귀를 기울이면
칭얼대는 아이들 소리
벤치에 노인들의 수다
정류장에 커다란 하품
연인들의 작은 속삭임
피아노 연습하는 소리
지나가는 소녀의 노래
무심코 나온 혼잣말
지나가는 고양이의 대답
가끔 주윌 돌아보면
시간이 멈춘 듯이 길 위에 서 있던 사람들
뭘 듣고 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미소 짓고 있는 사람들
귓볼에 느껴진 바람
스치는 나뭇잎 소리
내가 너에게 했던 말
네가 나에게 했던 말
가끔 주윌 돌아보면
시간이 멈춘 듯이 길 위에 서 있던 사람들
뭘 듣고 있는지
발걸음을 멈추고
미소 짓고 있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