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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사칭하는 사이비백서

"사이비 이해를 위한 기준과 서정들"

by 깨닫는마음씨




사이비의 목적은 일단 돈입니다.


사이비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들 생존이 어렵고 세상이 살기 힘들 때 사이비는 창궐합니다. 이것은 마치 숙주가 영양상태가 좋지 않으면 기생충이 더 난리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사이비는 이처럼 생존에의 절박함으로 가득한 이들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기생하는 것 외에는 효과적인 생존의 방법을 모르는 이들입니다.


사실 정확하게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있어도 이들은 남의 자원을 취하는 방향으로만 고집스럽게 움직이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이들의 유아적 욕구가 있습니다. 마치 엄마의 젖을 먹듯이, 남의 자원이 성공적으로 취해지는 현실은 이들에게 단지 자원의 획득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받는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한 사이비가 교묘하고 부드러운 말로 다른 이에게 초코파이를 얻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러면 그는 그만큼 사랑 또한 자신이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사랑이라는 것이 자기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며, 더 많은 사랑을 얻어내기 위해 사이비 활동에 더욱 매진합니다.


보통 여기에서 노력의 소재로 자주 채택되는 것이 바로 언어입니다.


"다양한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나의 놀라운 스토리텔링으로 사람들의 자원과 사랑을 얻어냈어! 아,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나의 글쓰기 재능이란 얼마나 황금같은가!"


사이비는 이처럼 자기의 언어능력을 신적인 것처럼 숭앙하는 경향성을 빈번하게 보입니다. 마치 어린 꼬마가 책에서 주워본 유식한 고급언어를 쓰니 엄마가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는 경험을 하고 난 뒤에, 자기가 언어만 잘 쓰면 이제 신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 엄마는 꼬마가 그냥 잔망스럽게 뺀질거리는 것이 귀여워서 꼬마의 말을 들어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사이비는 덜 자란 아이입니다. 그리고 사이비에 끌리는 이들 또한 덜 자란 아이들입니다.


때문에 사이비는 자기가 과거와 달리 얼마나 성숙해졌는지를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자기 또한 스스로가 덜 자랐다는 자각을 갖고 있으며, 그 미발달로 인한 열등감을 크게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인간의 생애사를 각 시기마다의 발달과업들을 이룩해 나가는 과정으로 보곤 합니다. 사이비는 특정한 시기에, 대체로 유년기에, 이 발달과업의 완수에 실패한 이들입니다.


사이비는 발달이 좌절된 자리의 공백을 대신 언어로 메웁니다. 이것을 우회(bypass)라고 합니다. 실제로 살았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을 마치 언어로 얻은 척 기만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아주 쉽게는, 사이비는 헛똑똑이들입니다.


말은 논리구조에 상응하게 맞지만, 그 삶은 언제나 틀립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틀립니다. 살지 않은 삶은 언제나 틀린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부모님들은 자기 자식이 사이비가 되었을 때 가장 슬퍼합니다. 사이비가 되었다는 것은, 그 삶이 틀렸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잘 살라고 하늘에서 받은 생명을 친히 부모의 몸으로 대행해서 자식에게 전해주었는데, 자식이 스스로 자기의 삶은 틀렸다고 증거하는 현실에 대해 "그래 우리 아들, 장하다! 아빤 니가 사이비라서 자랑스럽다! 역시 내 아들이구나!" 또는 "어머 우리 딸이 사이비가 되었다고? 어쩜, 엄마 너무 설렌다 얘. 니 고모한테도 바로 전화해줘야겠다!"라고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신생아실에서 갓 태어난 우리의 눈망울을 바라보며 우리의 부모님들은 사이비의 운명을 꿈꾸었을까요?


부모님의 입가에 가득 떠올라있던 그 미소는 성공적인 사이비의 미래에 대한 축원이었을까요?


달리 훌륭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달라고 눈가를 촉촉히 적시던 부모님의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의 유일한 마음의 소원, 그것은 사이비만은 되지 말아달라는 소원이었습니다.


사이비는 거의 유일하게 건강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비가 살인보다 나쁜 것이냐고 묻는다면, 이제 우리는 그렇다고 말해야 합니다.


살인은 한 개체를 부정하는 일이지만, 사이비는 인간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비는 반드시 인간을 호구로 만듭니다. 조금 더 공정한 표현은 도구입니다. 인간이 도구로 전락되는 현상을 소외라고 말합니다. 소외라고 하니까 그냥 조금 주변으로 밀려난 정도의 뉘앙스로만 생각된다면, 표현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파괴.


사이비는 인간성의 파괴를 그 목적으로 합니다.


조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사이비의 주체는 자신을 열등하게 만드는 인간이라고 하는 이 틀이 너무나 싫습니다. 자기의 정신은 더 고귀하고 높은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탁월한 천재적 언어능력으로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데, 구질구질하게 발달과업을 완수해야 하는 일이 너무나 성가십니다. 인간의 틀만 벗어나면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언어로 모든 것을 다 조종할 수 있는데, 자신이 인간인 까닭에 신적인 작가로서 자기의 초능력을 펼칠 기회가 제한됩니다.


그래서 사이비는 사람들에게 기생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신적인 작가로 우러봐주면 진정한 자기가 될 수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간성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 사이비는 사람들을 기생의 도구로 씀으로써, 결국 자신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도 인간성을 파괴하고자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자기는 인간 이상의 것이고,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것이 된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초월적 힘을 가진 자신과, 그 힘으로 자신이 친절하게 이끌어줘야 할 우매한 사람들의 구조가 자연스럽게 형성됩니다.


기생충이 숙주보다 높은 위격으로 입지화를 시도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기생충인 까닭에, 우리는 사이비에게 반드시 자원과 에너지를 빼앗기게 됩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물론 사이비는 이를 정당한 교환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사람들의 치유와 성장을 돕는 대신에 그들의 자원과 에너지를 취하는 일은 공정거래라고 주장합니다.


정말로 그럴까요?


사이비를 소비하는 이들의 소원은 대개 이러합니다.


"아 나도 저런 초월적 능력을 가진 저 분처럼 되고 싶다."


정확하게 바꾸어보면 이렇습니다.


"아 나도 기생충이 되고 싶다."


인간이 기생충을 동경하게 만드는 이 어처구니없는 일보다 더 인간성 파괴의 실례를 보여주는 일이 또 있을까요?


세상이 살기 힘들 때, 기생충에게 자원을 제공하는 것에 더해 심지어 기생충을 동경하기까지 한다면, 우리의 수난은 더욱 짙어집니다.


세상이 살기 힘들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겨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사이비들은 심리학이라는 이름에 자주 붙습니다. 자기가 마치 심리학인 척 의태하여 숙주가 다가오기를 기다립니다.


이처럼 심리학을 사칭하는 사이비를 판별하기 위한 기준의 목록을 구성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0. 마음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일단 심리학을 사칭하는 사이비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잘 모릅니다.


고작해야 자기 안에 있는 다양한 자기의 모습으로 생각합니다. 그 다양한 자기의 모습이 다 온전하구나, 정도가 사이비의 마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소위 이런 것을 분아적 접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모든 분아적 접근은 사실 다 자아론입니다.


사이비는 이처럼 자아를 마음이라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자아의 구성요소인 이야기를 더 많이 소비하고, 나아가 새로운 스토리텔링을 이루기까지 하면, 우리의 마음이 더 좋아진다는 식으로 말하게 됩니다.


마치 게임에서 본캐인 전사뿐 아니라 부캐로 법사와 도적, 힐러까지 다양하게 만들어 하면, 게임을 마스터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게임이 펼쳐지는 그 모니터 밖의 세상입니다.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이 모든 것입니다.


존재를 향한, 그리고 존재가 자기를 개방하는 사건인 삶을 향한 탐구가 곧 심리학입니다.


사이비가 자아론에 탐닉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슈퍼우주킹왕짱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유아적 소망을 이루기 위해 자아는 통제 가능한 소재로 보이기에 사이비는 자아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이비는 마음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더욱더 모르고자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로 만들어진 자아가 다시 또 만들어낸 이야기로 이루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자폐적 순환 속에서 "아, 내가 이렇게 다양한 모습이라는 마음의 온전성을 알았어!"라며 자위를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텐가 사용메뉴얼이지, 심리학이 아닙니다.



1. 심리학 관련 학위가 없다.


이것은 구조적인 차원에서 결정적인 항목입니다. 부연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학위란 논문과 졸업장입니다.



2. 대중성을 전문성으로 등치한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3살 아이에게도 설명할 수 있다. 진정한 전문가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구태의연한 말을 토대로 사이비는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해 인기를 얻기만 하면 자기의 전문성이 증명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할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세계적 석학들에게도 설명할 수 있다. 진정한 전문가는 깊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사이비는 이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의 지식은 너무나 얕습니다. 영단어를 조합해 마치 의미깊은 개념인 것처럼 말장난을 하지만, 내용은 없습니다. 진짜 전문가들 앞에서는 수치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사이비는 진짜 전문가들이 있는 곳에는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사이비는 자기가 자기 아래의 수준으로 우습게 보고 있는 이들에게만, 전문용어를 과시하며 잘난 척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이비를 전문가로 보며 칭송하고 있는 이는 사실 사이비에게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3. 전문분야를 우습게 본다.


사이비는 보통 다른 이가 설명해준 말을 그대로 자기의 말처럼 전합니다. 마치 출발 비디오 여행에서 해설해주는 내용을 듣고는 자기가 그 영화를 보고 다 이해한 것처럼 굽니다. 고작 이런 정도의 활동으로도 자신이 해당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신이 전문가임을 자칭합니다.


10년 동안 남에게 주워들은 니체의 말을 인용하면, 자기가 니체 전문가가 되는 것일까요? 그 10년이란 시간이 정말로 니체 전문가로서 살아온 시간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란, 그 분야를 자신이 직접 독대해서 탐구하는 이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과외선생님이 풀어준 문제의 답을, 동일한 문제를 푸는 친구에게 쉽게 알려주면 수학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고, 과학 참고서 뒤편의 정답을 보고 베끼는 일을 많이 하면 과학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4. 선배 사이비를 세습한다.


사이비는 그에게 가장 본이 되었던 선배 사이비의 말을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그대로 반복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그 선배 사이비와 동일한 모습이 됩니다. 이것은 사이비계의 위대한 유산과 같습니다.


이를테면, 이 세상 모든 것을 프로그래밍 언어라고 말했던 선배 사이비가 있다면, 사이비는 그 구조를 그대로 계승합니다. 차후 다른 요소들이 첨가된다 할지라도, 그 핵심적 틀은 그대로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들을 미혹시킬 수 있는 성공적인 틀이기 때문입니다.



5.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서 활동한다.


전문가가 해당분야의 전문가인 이유는 그 어떤 보상이 없어도 그 분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여정을 지속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이비는 자신이 전문가임을 사칭하는 해당분야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심리학을 사칭하는 사이비는 심리학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은 다만 액세서리일 뿐입니다. 사이비는 심리학을 착용함으로써, 자신이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바랍니다. 즉, 심리학은 사이비가 사랑받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만약 사람들에게 지질학이 인기가 있게 되는 시대가 온다면, 사이비는 바로 심리학 전문가에서 지질학 전문가로 자신의 입장을 이동시킬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자원과 에너지를 획득하기가 수월한 까닭입니다.



6. 연예인병이 있다.


이 또한 굳이 부연이 필요없는 항목입니다. 사이비는 잘 생기거나 예쁘지 않아 아이돌이 못 되었고, 몸이 건장하지 않아 운동선수가 못 되었으며, 다른 예능적 재능을 갖추지 않아 다만 사이비가 된 이들입니다.


그렇다고 심벌즈를 치는 원숭이를 옆에 놓고 약장수를 하는 일은 너무 천박하다고 생각되어, 그나마 공상 속에서 단련된 언어능력으로 마치 고급재인 것처럼 만들어낸 비실체적 약을 팔려는 이들입니다.


즉, 연예인이 되지 못한 좌절로 만들어진 유사연예인이 사이비인 셈입니다.



7.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를 상시 발화한다.


이것은 소위 라포(rapport)라는 것을 형성하기 위한 사이비들의 전형적인 밑작업입니다.


외로운 현대인들에게 마치 그들의 말을 친절하게 잘 들어주는 인물처럼 다가가서, 경계의 벽을 허물고, 자신이 원하는 자원을 얻어내고자 하는 상투수단입니다.


상대의 취약성을 공략하는 일이 사이비가 기생충인 대표적 이유입니다.



8. 통합을 주장한다.


통합이라는 말은 말만 아름다운 말입니다. 보통 이 말이 주장되는 때는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첫째는, 깊게 공부하지 않고 표면적으로만 대충 알아서, 원래 통합될 수 없는 것들이 통합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둘째는, 자기가 이득을 위해 수호해야 하는 자기의 세계관이 위협받을 때, 위협하는 소재를 일부러 굴절시키고 축소시킴으로써 위협이 아니라 자기의 편인 것 같은 모습으로 억지로 만들어 편입시키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무지하다고 불리고, 후자는 자아의 제국주의라고 불립니다.


통합은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 둘 중의 하나인 짬뽕소설입니다.



9. 자전적 삽화를 아이템의 신빙성을 높이는 데 쓴다.


사이비는 보통 자기 고생한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특별한 아이템을 판촉하고자 합니다. 이는 사실 다음과 같이 언술될 수 있습니다.


"어 형도 그렇게 고생해봤는데, 형이 이렇게 하니까 해결되더라. 형 말 듣고 너도 한번 해봐. 라떼는 말이야, 영원한 거더라구. 먼저 고생해본 형이 니 맘 알아서 하는 말이니까, 좋은 인생교훈 쉽게 얻는구나 하며 형 말 들어봐."


해병대 전우회 할아버님들이 콘테이너 안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그러나 심리상담자는 자기가 고생한 만큼 남들에게 정당한 스승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꼰대의 역할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나아가 이렇게 판촉되는 아이템은 보통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실은 그 문제를 만들었던 병인입니다. 병주고 약주고의 그 소재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아이템을 소비할수록 우리가 더 고생스러워지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10. 자기가 하는 것을 제일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남의 것을 짓밟는다.


사이비의 핵심적 특성은 바로 질투입니다. 질투하기에 끝없이 모방하고 약탈합니다.


질투는 자기가 1인자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이비판에서는 배신이 빈번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1인자의 의미는 언제나 비교급입니다. 남의 것보다 내가 하는 것이 잘나야 하는 것이 사이비의 방향성입니다. 때문에 사이비는 임의적으로 남의 것을 끌고 와서, 자기의 것이 그것보다 좋은 것임을 시종일관 묘사하려고 합니다. 사실을 무시하면서까지 자기가 채택하고 있는 소재를 제1의 것처럼 보이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이를테면,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소재로 채택하고 있는 사이비는,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적 사실을 무시하면서까지 이야기의 가치를 예찬합니다. 마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 존재의 사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식입니다.


이것은 초등학생이 다른 아이들에게 자기 아빠가 아이언맨이라고 말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니네 아빠는 평범한 삼성맨이고, 또 니네 아빠는 흔하디 흔한 건물주인데, 우리 아빠는 하늘을 나는 아이언맨이니 더 잘났어, 라고 말하는 아이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아이입니다.


열등감은 분명 발달과업의 실패가 야기하는 현상입니다. 특히 자기 몸의 운동능력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지 못했을 때, 이는 사회적 열등감으로 번져갑니다. 그래서 사이비는 이 열등감에 의거한 질투로 늘 자기를 1인자처럼 보이고자 남의 것을 겸손한 언행으로 교묘하게 짓밟습니다.



11. 최면, 세뇌, NLP를 주도구로 활용한다.


최면, 세뇌, NLP는 특히 심리학을 사칭하는 사이비의 주도구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쉽기 때문입니다. 하루이틀이면 배워서 자기도 마치 심리학 전문가인 양 행세할 수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보통 더 첨가되는 것은, 밀턴 에릭슨, 칼 융, 켄 윌버 같은 이들의 개념이나, 휴먼디자인 같은 오컬트 체계입니다. 이러한 소재들은 통합주의적 판타지 소설을 잘 쓰는 이들에게 최면, 세뇌, NLP의 보완재로 자주 활용됩니다.


그러나 공정하게 말하자면, 최소 융이나 윌버와 같은 이들, 그리고 그 후예들은, 사이비가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전개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실제 활동하는 분석심리학자들은 지적으로 아주 우수하고 섬세한 이들이며, 대개 상징의 해석을 주요하게 다루지, 내담자를 판타지 같은 스토리텔링 속에 유입시켜 까르르 하는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즉, 분석심리학자들은 소설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비평가의 입장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윌버는 사이비 심리학을 대단히 혐오합니다. 최면? 세뇌? NLP? 공부도 깊게 안 하고 누군가가 심리학 전문가인 척 한다? 윌버에게는 매서운 비판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사이비는 이러한 이들의 개념을 그 표피만 차용해 자기의 최면, 세뇌, NLP를 지지하는 요소로 삼습니다.


최면, 세뇌, NLP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이야기를 입히는 일입니다.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진정한 피험자의 이야기를 찾아준다며, 사실은 거기에 시험자의 이야기를 입히는 일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시험자의 이야기는 각론이 아니라 메타내러티브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분아적 접근과 같은 식의 커다란 이야기틀을 가용해 그 위에서 피험자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최면, 세뇌, NLP는 반드시 시험자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세상을 보는 틀이 시험자가 제공하는 메타내러티브의 틀로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내 뜻대로 조종하고 싶다."


최면, 세뇌, NLP를 소비하고자 하는 이들이 지배적으로 꿈꾸는 이 망상은, 결국 시험자의 메타내러티브에 종속되는 피험자에 의해 현실처럼 만들어지는 셈입니다. 이 최면, 세뇌, NLP의 과정은 아무리 그 폐해를 경계하고 언어적으로 미화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인간성 파괴의 생생한 현장입니다.



12. 플레이어와 해설자를 착각한다.


메시의 플레이를 쉽게 설명해주면 자기가 메시 같은 플레이어로서의 권위를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이비입니다.


즉, 심리학이 아니라 심리학 해설자가 실은 사이비의 본질적 면모입니다. 그런데 자꾸 자기를 심리학 전문가라고 거짓 권위를 얻으려 하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수 년간 메시의 플레이를 해설한다 하더라도, 결코 메시처럼 플레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살지도 않으면서, 메시의 동영상을 보며 진정한 메시처럼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일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메시의 드리블을 겉모습만 비슷하게 흉내내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자기의 오리지널이 아닙니다. 모방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러한 모방자가 "자 이제 메시를 마스터했으니, 이제 나는 진정한 내 자신의 길을 간다."라고 말하는 일은 그저 코미디입니다.



13. 유치하다.


이 항목이 가장 사이비를 판별하기에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항목입니다.


그냥 들으면 그 내용이 유치한 것이 사이비입니다. 만약 사이비가 내용을 쉽게 알 수 없게끔 현란한 고급언어의 수사로 눈을 흐리게 한다면 물어보면 됩니다.


"내용의 핵심만 한 줄 요약해주세요."


그렇게 들어보면 내용이 진짜 유치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우리를 어떻게든 사랑하면 됩니다. 이를 악물고 '나야, 사랑한다!'를 하루에 세 번씩 해주면 마음이 건강해집니다."


"내 자신을 다양한 소설 캐릭터처럼 설정해서, 각각 다른 개성을 살려 여러 화법과 문체로 글을 쓰면 됩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소외되어 있던 마음들이 이제야 자기가 말할 당당한 기회를 얻어 깨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놀랍도록 풍요로워집니다. 자, 이제! 소외된 당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세요! 당신의 소외된 마음이 이야기할 기회를 주세요! 제가 듣고 있습니다! 제가 소외된 제 마음을 깨어나게 했듯이, 소외된 당신의 마음도 깨어나는 그 아름다운 일을 돕겠습니다!"


"괴로운 감정이 있으면 그걸 가슴 안에 넣고 '넌 내 마음이다. 너랑 같이 영원히 살 거야. 이제 보내지 않아. 넌 내 마음이니까! 내 아들아!'라고 해주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유치하다 못해 부끄럽습니다.


이 내용들이 유치한 이유는, 자아의 소영웅주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단 하나입니다.


"내 힘으로 내가 해냈어!"


이렇게도 묘사할 수 있습니다.


"엄마, 제가 경식이한테 맞은 다음에 이상했는데요!! 제가 평소와는 다르게 놀이터에서 막 그네를 발로 차며 있다 보니까, 제가 경식이한테 화가 많이 나있었어요!!! 저는 제가 착한 줄 알았는데 경식이를 미워하는 마음도 제 안에 있었어요!! 엄마 저 잘했죠? 엄마 칭찬해주세요!! 제가 열심히 해서 화난 마음이를 알아줬어요!!!"


그리고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습니다.


더 단순한 예는 이러합니다.


"엄마! 엄마! 제가 꽈당! 넘어져서 아야! 했는데, 으쌰! 하고 제 힘으로 일어났어요. 그랬더니 으앙! 하던 제 안의 애기가 이제는 방긋! 하고 웃어요."


"그래그래, 참 장하다."라고 말해줘야 할까요?


아이라면 안아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마치 대단한 심리학의 비밀이라도 되는 양 선전하며 심리학 전문가처럼 행세하고 있는 이라면, 우리는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요?


"유치하다."


아마도 이것이 유일한 대답일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불쌍합니다.


모든 사이비는 자기가 이제는 짐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그 짐을 지고 있습니다. 숙주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기생충처럼, 모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영아처럼, 사이비는 마치 짐이 아닌 것처럼 늘 반복해서 굴려오던 영원히 동일한,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그 바위를 또 굴리기 위해 언덕을 오릅니다. 선배 사이비와 동일한 모습으로 바위를 올립니다.


그 처연함은 마치 쇼가 끝난 극장에 혼자 앉아, 아직도 더 새로운 쇼가 남았다며, 이제 고난을 극복함으로써 더욱 진정하고 멋진 쇼를 보여줄 수 있다며, 스포트라이트여 가지 말라며 외치는 메아리의 처연함과도 같습니다.


인간은 시간을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간을 무시하고자 하는 애달픔이 있습니다. 아이돌이 되지 못한 중년 연습생이 늦은 밤 연습실의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고 느끼게 되는 그 심정이 있습니다.


춤을 추다가 안 되고, 그림을 그리다가 안 되고, 글을 쓰다가 안 되고, 결국에는 심리학을 붙잡습니다. 심리학으로는 아직도 연예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심리학을 사칭합니다.


한 번이라도 이렇게 말해보기 위해.


"엄마 내가 내 힘으로 해내쪄요!"


그러나 사이비에게 이 소원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입니다.


기생충이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자원과 에너지를 빼앗아 자기 것처럼만 했지, 단 한 번도 자기 힘으로 정말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이 알려주는 답에 따라, 그 답이 정말로 답이었음을 나중에 자기가 경험하게 된다고, 그것이 자기가 한 것은 아닙니다. 수학문제에 이미 한참 전에 적힌 답을 애써 모른 척하며 마치 자기가 고생해서 혼자 푼 것처럼 한다고 그것이 사실은 아닙니다.


사이비는 새로운 어떤 것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간 적도 없습니다. 언어적 표현만 바뀔 뿐, 사이비는 늘 똑같은 것만을 합니다. 시지프는 늘 똑같은 왕복운동만을 합니다.


부정직하기 때문입니다.


사이비의 진짜 핵심은 이 부정직함입니다.


부정직함으로 인해 고통이 만들어지고, 그 고통 속에서 고생을 하며, 고생 끝에 마치 새로운 것을 얻게 된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은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입니다.


넘어져서 "앗 아프다!"라는 것을 숨기고 있다가, 10년 동안 고통에 대한 자서전 200권을 처절하게 써낸 뒤에야 "아! 내가 그때 아팠구나! 앗 아프다!"라고 한다고, 무엇인가 더 진정한 것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순간 실시간으로 누군가가 "아 아프겠다."라고 하는 말에 대해 "음..... 난 잘 모르겠네. 한번 내가 좀 더 내 마음을 살펴볼게. 싱긋."이라고 부정직하게 무시하며 이루는 사이비의 일이란 이처럼 근본적으로 도돌이표입니다.


정직하면 더 쉽게 앞으로 갈 수 있는 것을, 부정직해서 아주 어렵게 제자리로만 돌아오는 운동입니다. 공허한 텐가의 반복운동입니다.


"엄마, 제가 심리학 강의해드릴게요."

"엄마, 제가 심리상담해드릴게요."

"엄마, 제가 소외된 엄마의 이야기 들어드릴게요."


엄마에게, 그리고 엄마를 대신할 유사엄마인 청자들에게, 관객들에게, 피험자들에게 "아유, 우리 애기가 이제 혼자서도 잘 하네. 혼자 힘으로 혼자 해냈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아마도 멈출 일이 없을 반복운동입니다.


그렇게 반드시 엄마가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다는 점에서, 따라서 엄마 없이 '혼자 해내게 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것은 영원히 멈출 수 없을 모순의 반복운동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사이비가 근본적으로 내포한 불쌍한 성질에 대한 이유일 것입니다.


기생의 생리를 심리학의 진리처럼 정당화하려는 동안 사이비는 속절없이 시간만 버립니다.


사이비는 정말로 늙고, 정말로 죽습니다.


돈도, 엄마도, 그에 대한 반복운동도 그의 생존을 효과적으로 담보시켜주지 못하며, 시간의 위협은 오히려 더욱 크게 경험됩니다.


반복은 망각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존재의 망각을 위한 것입니다.


실존, 즉 사실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시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존재를 망각하면, 시간도 망각됩니다.


그러나 어디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망각했을 뿐 늘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불꺼진 연습실의 거울을 보니 어느새 이 모습입니다.


이것을 존재를 망각한 슬픔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조금 불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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