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가 소통을 어렵게 하는 시대의 진짜 소통법"
"스토리는 이제 좀 짧게 이야기해볼까요. 아유 머리 아프네. 스토리말고 이제 느낌을 한번 말해보세요."
집단상담의 초기 과정에서 집단상담의 숙련된 촉진자들이 자주 발화하게 되는 말이다.
이와 같은 촉진자들은 소위 상담자의 덕목으로 요구되는 공감을 잘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삽화도 있다.
"............"
"선생님, 제 이야기 듣고 계세요? 지금 중학교 시절 왕따까지 얘기했는데... 선생님.... 지금 조셨죠? 어떻게..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죠.... 선생님이 제 이야기에 조는 모습 보려고 제가 비싼 돈 내고 집단상담 신청한 거 아닌데......"
여기에서 집단 촉진자의 성향에 따라 선택지가 생겨난다.
A: "비싼 돈까지 냈는데 상대가 내 스토리를 진정하게 읽어줄 의무를 다하지 않아 화가 나세요?"
B: "어쿠 제가 허벅지도 계속 꼬집어봤는데 자꾸 졸리게 되네요. 잘 집중하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무기력해지고 무겁고 멍해졌어요. 대체 왜 이러고 살고 있는지 회의감도 경험되네요. 이 묘사가 어떻게 느껴지세요?"
C: "허허,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동창놈들을 만나 술을 좀 마셨더니 아직 피로가 있나 봅니다. 허허, 상담자가 되어 졸다니 참 부끄럽네요. 제가 크게 사과드리겠습니다. 어렵게 들려주신 소중한 이야기를 제가 너무 예의없게 들었습니다. 제 부족한 점을 많이 배웁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A는 투닥투닥하며 조금 빨리 가자는 것이고, B는 대체로 정석이며, C는 자신이 지금 상담자가 아니라 무능력한 죄인이라는 고백이다.
그러면 이 셋 중에 누가 잘 공감한 것일까? 혹은 셋 다 공감이 아닌 것일까?
앞선 예도, 지금의 예도 전부 다 잘 공감한 것이다.
화의 상태든, 무기력의 상태든, 죄인의 상태든 바로 그 상태들이 내담자가 정말로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기의 스토리 속에서 임의로 설정된 특수효과가 아니라, 상기한 예들에서는 정말로 내담자 자신이 어떠한 것을 체험하고 있는지의 그 상태들을 상담자는 정확하게 체험하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졸림을 억지로 참고 내담자의 스토리를 잘 들어주는 것이 공감이 아니라, 내담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담자 자신의 졸린 상태를 그대로 상담자 자신의 졸린 상태로 전해받는 일이 공감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사실 공감은 소통에서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미 잘 공감한다. 상대의 상태를 잘 전해받는다. 다만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그 상태에 대해 자각을 못할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자각이다.
자각이 되지 않으니 소통이 어려워진다.
자각이라는 것은 현재 자신에게 알려지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안다는 것이다. 즉, 알려진 것을 알려진 그대로 아는 것이다.
알아야 전할 수 있다. 자신이 지금 경험하는 상태가 추운지 더운지를 알아야 상대에게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공감 자체가 아니라, 자신이 대체 무엇을 공감하고 있는 것인지를 자각해야, 소통이라는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공감되어야 할 그 '무엇'의 소재가 스토리가 아님은 분명하다. 애초에 공감이란 표현 자체도 느낌을 공유한다는 의미이지,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야기를 공유하는 일을 교육이라고 하며, 공유되는 이야기를 이념이라고 한다.
그래서 스토리에 공감을 요구하는 상황은 언제나 '이념 교육'의 현장이 된다. 이미 소통이 불가능한 장이며, 심지어는 폭력만이 지배하게 되는 장이기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이념의 교육이란 언제나 일방통행인 까닭이다.
폭력은 나빠서 폭력인 것이 아니라, 일방이기에 폭력이 된다.
오늘날 분명하게 스토리는 이 일방의 폭력을 그것이 마치 폭력이 아닌 것처럼 수려하게 집행하기 위한 주된 도구가 되어 있다.
그냥 막 스토리 지상주의로 들이미는 것이다. 자기가 이야기하는 스토리를 잘 이해해야 자기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며 사정없이 스토리의 폭격을 한다.
이 폭격의 과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의 스토리를 잘 이야기해야 하고, 남의 스토리를 잘 들어줘야 하는 일이 일종의 윤리적 계율처럼 권면된다. 전술한 것처럼 공감이라는 개념의 굴절이 일어나는 이유다. 스토리를 잘 들어주고, 심지어는 스토리의 세부사항들을 놓치지 않고 암기까지 해야 하는 일이 마치 진정한 공감의 활동인 것처럼 오해된다.
이처럼 스토리에 대한 추구가 일종의 도덕적 진리담론이 되어 과잉된 풍조는, 분명하게 이 시대에 소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다.
"자기 잠깐 여기 좀 앉아봐. 준혁이는 방에 들어가 공부해."
인터넷 커뮤니티들에서 밈(meme)으로 자주 활용되는 이러한 장면은, 스토리를 통해 소통이 아니라 불통을 시도하는 상황에 대한 함축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소통할 수 없다. 소통이 자기를 잘 이해시키고 상대를 잘 이해하는 일이라면, 스토리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스토리로 소통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은, 마치 소설가 지망생들이 양쪽으로 앉아, 자기가 쓴 30권짜리 소설을 상대에게 읽으라고 서로 독촉하며, 자기의 소설을 완독한 다음에야 자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상황과 같다.
이미 대화가 아니다.
대화도 아닐 뿐더러, 상대의 소설을 완독한다 하더라도 이런 말을 듣기 십상이다.
"아직도 날 모르네. 제대로 읽은 거 맞아?"
그 씹상인 얼굴 앞에서는 늘 무지한 죄인이다.
그러나 모를 수밖에 없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한 스토리를 들이밀며 읽으라고 강요하는 이 또한 자기의 상태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스토리를 읽은 이가 무지한 죄인의 상태가 되는 것은, 역으로 훌륭한 공감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자기도 자기를 잘 모르는 무지한 죄인처럼 경험하는 발화자의 상태를 그대로 잘 전해받은 까닭이다.
이 훌륭한 공감의 결과 우리는 상대가 우리에게 떠넘기고 싶었던 상태를 대신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스토리의 폭력이란 이러한 것이다. 스토리의 발화자는 자신이 떠넘기고 싶은 상태를 스토리를 통해 떠넘기는 일이 정당한 것처럼 숭상되는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더 많은 상대들을 쓰레기통으로 만들게 된다.
우리가 스토리를 더 열심히 읽어주려고 노력하는 만큼, 역으로 우리는 더 빠르게 희생양이 되고 액받이 무녀의 신세가 된다. 그래서 대단히 억울해진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스토리의 능숙한 발화자들에 의해 마치 공감무능력자인 것처럼 판정된 많은 이들은 사실 말못할 억울함이 대단히 많다.
그러나 스토리가 만들어내는 이 부당한 폭력의 구조 속에서도 빠져나올 방법은 있다.
전술했듯이, 그것은 바로 자각이다.
만약 타인의 스토리를 공감한 그 결과 자신이 뭔가 결핍되고 잘못된 사람인 것처럼 경험하고 있던 이가, 그 순간 현재의 상태에 대한 자각을 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긴 소설을 쓰다니, 너는 사실 자신에 대해 잘 몰라서 스스로를 뭔가 결핍되고 잘못된 사람처럼 느끼며 필사적인 거구나?"
상대가 스토리를 사용해 자신에게 투기한 쓰레기를 통해, 오히려 상대가 왜 쓰레기를 투기했는가에 대한 그 이유를 발견함으로써, 상대에게 다시 반송택배를 부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핵심이다.
자각이 있는 곳에 스토리가 없으며, 스토리가 있는 곳에 자각이 없다.
때문에 자각의 정도와 스토리의 사용정도는 정확하게 반비례한다.
세 가지의 경우가 있다.
A: 자각이 되지 않아서 스토리를 사용한다.
B: 자각하지 않기 위한 은폐의 의도로 스토리를 사용한다.
C: 자신은 자각했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를 자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스토리를 사용한다.
A는 간절한 삽질이고, B는 간편한 기만이며, C는 간사한 사기다.
그래서 A는 정확한 방향성만 잡히면 바로 소통의 능력을 회복하고, B는 통제를 소통으로 착각하고 있기에 그 회복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며, C는 애초 회복의 문제가 아니다. C는 자기를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소통할 수 있는 인간으로 회복되는 일을 회복이 아닌 추락으로 여기며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실은 C가 가장 자각의 정도가 낮은 셈이다.
우리는 분명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만큼 자각의 정도가 높아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각은 인간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 자각하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른다. 많은 존재자 중에서도 인간만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존재의 대변자다. 이 모든 것이 왜 이 모든 것으로 존재하는지를 자신의 몸으로 밝히는 존재의 탐구자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자각의 의미다.
알려진 것을 알려진 그대로, 곧 존재가 알리는 것을 알리는 그대로 존재함으로써 아는 일이 자각이다.
공감은 존재의 특성이며, 자각은 공감을 통해 존재를 알 수 있는 인간의 특권이다.
그렇다면 명확하다.
인간이 인간과 소통한다는 것은 결국 자각이라고 하는 서로의 특권을 함께 행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는 서로를 인간으로 발견하고 확인하는 것이다. 서로를 통해 인간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존재가 무엇인지를 한층 더 깊게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쁨이다.
소통이 잘 이루어지면 우리는 왜 기쁜가?
자신을 인간으로 실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간이 아주 감동스럽기 때문이다. 자신이 인간으로 터잡고 있는 이 세상도 함께 감동스럽다.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인간으로 더욱더 실감하게 해주며, 그 실감의 자각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의 색채가 더 생생해진다.
사는 일이 너무 행복하다. 태어나서 진짜 좋다. 다 사랑스럽다. 이러한 소감이 자각이라는 인간의 특권을 통해 이루어지는 고백들이다.
아무리 세간의 천재적 지성들이 한데 달라붙어 긴 시간을 작업하며 감동적으로 잘 구성한 스토리라 할지라도, 개인이 이루는 이 자각의 감동에 비할 수는 없다. 비교불허다. 절대적이다.
그래서 개인은 절대적이다. 개인은 스토리의 바깥에서 존재하게 된 이를 의미한다. 실존철학에서 자주 묘사되는 단독자의 의미는 그것이다. 스토리를 벗겨내고 그 자신의 몸으로 존재의 사실을 경청하고, 공감하며, 자각하는 절대적 세력에 속한 이가 바로 개인이다.
이 절대와 절대가 만나 이루는 것이 소통이다.
그래서 소통은 상대적인 것들의 전략회의나, 권모술수나, 비교경쟁이 아니다.
절대 더하기 절대는 절대일 뿐이다.
스토리 밖에서 내가 느끼는 이 절대가 바로 네가 느끼는 그 절대다.
"우리는 같은 것을 느낀다. 스토리 밖에서는."
이러한 명제로 묘사해도 좋다.
이것을 '공각(共覺; co-realization)'이라고 묘사해볼 수 있다.
표현 그대로, 함께 자각하는 것이다.
함께 느끼는 것이고, 함께 존재를 이해하는 것이며, 함께 깨닫는 것이다.
이 공각은 아주 역설적이다.
상대적인 관계가 만들어내는 스토리에서 빠져나와 단독자가 될수록, 오히려 더 상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원리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상대의 마음을 알아내는 피상적인 차원의 독심술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심원한 깊이를 갖는다.
상대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처럼 알게 된 후에는, 우리는 이내 그것이 상대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도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그것은 그 어떤 상대적 소재도 아닌 절대다. 절대의 마음이다.
마음은 존재의 목소리며, 절대의 마음은 절대의 존재의 목소리다.
그렇게 우리는 공각을 통해, 절대적 존재에게로 한층 더 깊이 다가가게 된다. 우리라는 표현 그대로, 우리는 함께 다가가게 된다.
기독교적인 언어로 비유하자면, 나는 너를 느끼고 있었지만, 동시에 실은 너를 통해 드러나 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원래 소통은 언제나 3자 소통이다.
너와 나 사이의 소통은, '너' '나' 그리고 '사이'라는 3자의 관계성이다.
이 '사이'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현대의 사상가들이 말을 했던가. 나아가 우리는 이 '사이'를 묘사하는 아주 일상적이며 접근성 높은 표현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모든 소통은 '나' '너' '마음'이 이루는 3자 소통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을 또 하나의 주체인 것처럼 실체화해야 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사이'로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비유하자면, 없는데 있는 것이다. 없으면서 있는 것이다. 없었다가 있는 것이며, 있었다가 없는 것이다. 존재의 속성이다.
그래서 모든 존재는 사이존재다.
이 사이존재에 대한 아주 명징한 실감, 그것이 바로 공각이다.
쉽다. '존재에 대한 자각'이라는 말의 실제적인 의미가 '사이존재에 대한 공각'이다.
그러니 자각만 잘 이루어진다면, 그 자각 자체가 이미 공각이다.
그렇다면 남는 질문은 이것 하나다.
어떻게 잘 자각할 수 있는가?
이 글의 서두에서부터 이미 말하고 있었다.
"스토리는 이제 좀 짧게 이야기해볼까요. 아유 머리 아프네. 스토리말고 이제 느낌을 한번 말해보세요."
한국상담계의 대원로이자 인본주의 및 실존주의적 집단상담의 1인자라고도 자주 말해지는 김명권 선생님의 단골 멘트다.
김명권 선생님은 조금 더 안내한다.
"저는 자신이 어떠한 상태인지 잘 모르겠을 때 잠깐 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질문을 공간에 띄워봅니다."
"명권아, 지금 어디 있니?"
자각의 기술을 심리상담계에 효과적인 방식으로 소개해온 유진 젠들린 또한 동일한 표현을 한다.
"자신의 느낌을 알고 싶다면 먼저 공간을 만드세요. 그리고 물어본 뒤 기다리세요."
공각은 공간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이존재가 터한 곳이 바로 공간이다. 공각은 사이존재에 대한 공각이며, 그렇게 공간이 있어서 공각이 가능하다.
이것을 불교적으로는 "존재는 공하다."라고 지당하게 표현할 수도 있다.
존재가 허무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존재는 자기완결적으로 빽빽하게 구조화되어 있는 스토리 밖에서 드러나는 속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3부작 미드의 정주행을 마치고, 그 다음 또 다른 5부작의 미드를 시청하기 전의 그 공백, 그것이 바로 공간이다.
거기에서 진짜(reality)는 드러난다.
스토리가 작동하지 않는 검은 모니터에 반사된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는 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 시리도록 외로워서 이 짓들을 하고 있구나, 라며 그는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그는 깨달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이 다 진짜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어떤 것으로도 부정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그 압도적 존재감을, 그것이 바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누가 알고 있는가?
그는 지금 바로 나라고 하는 존재를 깨달을지도 모른다.
존재의 세례가 넘쳐 흐를 것이다.
그는 지금 회복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회복되었으면, 모든 것이 다 회복된 것이다.
그가 깨달았으면, 모든 이가 다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그는 모든 곳에서 부처님을, 예수님을, 사랑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존재를 향한 그의 사랑이 이제 막 시작된 까닭이다.
이것을 공각이라고 부를 것이다.
공각은 존재를 향한 사랑으로 소통하는 방법이다.
소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진짜 소통법이다.
"너와 내가 함께 너의 스토리와 나의 스토리가 아닌 존재를 사랑한다."
마음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마음이 존재를 알리는 현상인 느낌을 따라, 이 성공적인 소통의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