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버림돌로 포석하자

"질문은 언어로 하지만 대답은 존재로 다가온다"

by 깨닫는마음씨




츄르츄르.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사다리, 하이데거에게는 집이다.


언어를 가장 잘 쓰는 이들이 쓰는 가장 고급의 언어용법이다.


언어로 좋은 것을 이루기 위해 언어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버리기 위해 언어를 쓰는 것이다.


삶은 언어가 아니다. 사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설가들이 아는 것처럼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삶은 결코 언어가 아니다. 삶은 언어 너머에 있다. 언어로 단 1mm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언어로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본질적으로, 언어로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다. 정신병이다.


더 가벼운 차원에서도, 삶을 묘사하는 수사학을 달리해 언어로 삶을 변화시킨 척하더라도, 실은 그 양상은 언제나 동일한 반복의 삶이다.


반복을 끊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새로운 언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언어를 버려야 반복은 멈춘다.


언어를 버린다는 것은, 언어의 경계를 명확히 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말할 수 있는 것만 명료하게 말하라.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


하이데거는 말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이것들은 경계를 짓고자 하는 말들이다.


경계가 지어짐으로써, 명확해지는 것은 공간이다.


말할 수 있는 것들만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의 공간은 명확해지며, 언어로 벽을 세우고 지붕을 올림으로써 그 입체의 테두리로 감싸여진 공간 또한 명확해진다.


그냥 다 비어있을 때보다, 울타리를 치니 그 가운데 비어있는 공간이 더욱 명징하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공간이 성소(聖所)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과 대답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언어라고 하는 버림돌을 포석하는 일이 우리가 질문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맞수할 또 다른 언어를 대답으로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언어를 대답으로 포기한 행위다.


언어로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의미, 사랑, 존재, 죽음, 자유, 온전함 등에 대한 대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눈치챈 이가 가는 길이다.


그는 언어의 한계를 통해 경계를 지어 공간을 개방한다.


대답을 모시기 위해 언어를 죽여 번제를 올린다.


그렇게 공간을 환히 밝히며 그는 기다린다.


침묵으로 기다린다.


다 조용하다.


주님도 침묵하신다.


그리고 이내 그는 그 침묵으로 말미암아 알게 된다. 진실로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다 조용하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대단히 이상한 경우라는 것을.


실은 이 거대한 침묵 자체가 대답이라는 것을.


순간 그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훅 실감한다.


그것은 미소였다.


없이 계신 이가, 이미 성소의 울타리가 쳐지기 전부터 다가와 지금까지 보내고 계셨던 미소였다.


한 줄기도 헛됨이 없었다.


당연하다. 이 세상의 모든 곳에 빈틈없이 만유(萬有)하고 계셨기에, 단 하나의 눈물도 받쳐든 그 손바닥 위에서 새어나간 적이 없다.


정녕 없이 계셨고, 빈틈으로 빈틈없이 계셨고, 공간으로 존재하셨다.


그 사실을 안 그에게 이제 공(空)하다는 말은 사랑으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언어로 집을 지어 유주택자가 된 자신이 그에 따라 삶의 동반자를 얻을 자격이 생기게 된 현실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대답을 얻기 위해 질문다운 질문을 할 수 있었던 이가 실은 질문을 하기도 전에 대답이 먼저 다가온 현실이다.


언어로 사는 이가 언어를 버리면서까지 대답을 얻고자 하는 일, 이것이 질문다운 질문의 방식이다. 자기를 던지는 질문이며, 자기를 포기하는 질문이다. 자기보다 더 큰 것이 있음을 신뢰하며 그 앞에 귀의하는 방식이다.


질문은 언어로 하지만 대답은 존재로 다가온다.


존재 그 자체가 대답이다.


여기에는 범주의 도약이 있다. 상대적인 언어의 질문에서 절대적인 존재의 대답으로 넘어가는 이 과정은 그래서 초월이라고 불린다.


초월은 유한이 있어서 가능하다. 한계지어진, 경계가 분명한, 그 유한한 것이 있기에, 초월은 이루어진다. 대답이 질문을 향해 범주를 넘어 다가온다. 존재 그 자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대답을 향해 그 자신을 던져 질문했던 유한자 앞에 와서 선다. 이 우주에 반드시 대답이 있으며, 그 대답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처럼 초월은 사랑의 운동이다.


인간이라는 테두리 안의 공간에서 시작되어, 그 테두리를 벗어난 외부의 공간을 알리며, 자신이 그 모든 공간과 같음을 알리며, 다시 재귀적으로 테두리 안으로 복귀하는 왕복운동이다.


인간이라는 테두리가 있기도 전부터 이미 와계셨던 것이다.


이 모든 전부와 같았던 것이다.


이 모든 자체와 같았던 것이다.


존재 그 자체가 언제나 이미 질문보다 먼저 다가와있는 대답이었다.


없이 계신 존재 그 자체는, 울타리가 없어도 원래 비어있었고, 울타리가 있어도 원래 비어있었다. 비어있는 방식으로 채우고 있었다.


언어가 있어서 그 비움으로 채워진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언어와 아무 상관없이 원래 있던 공간이었고, 언어 밖에는 이미 더 넓게 펼쳐져 있던 공간이었다. 언어에 대한 강박이 낳은 무게로 언어의 바벨탑이 스스로 무너짐으로써 그 공간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 것뿐이다. 긴 시간을 헛되이 쓴 후에야.


그래서 이 모든 낭비를 줄이고자, 언어를 버림말로 포석한다.


이것은 칠판 밖에서 칠판 안의 문제를 풀어내는, 마치 자기는 언어 밖에 있는 메타언어적 위상의 신적 주체인 척하는 일이 아니다. 아동을 대하는 엄마와 같은 일이 아니다.


"야옹아, 츄르 먹을래?"라며 고양이의 고개를 칠판에서 돌리게 하는 일일 뿐이다.


진짜 심리상담사들, 선사(禪師)들, 깨달은 이들은 다 이 일을 한다.


언어를 가장 잘 쓰는 이들은 다 이 일을 한다.


존재로 대답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존재로 대답하면 된다.


언어를 버림돌로 놓는 방식으로 언어를 가장 잘 쓰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를 키워야 하지 않냐는 질문은 그저 고집의 표현일 뿐이다.


"이 산이 아닌가벼?"라고 말하려면 그 산을 올라가봐야 하지 않냐는 말과 같다.


이러한 주장은 언제나 이 의도일 뿐이다.


"내 힘으로 혼자서 내가 해내쪄요!"


그래 츄르나 먹으렴.


삽질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처음부터 갖다 놓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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