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메어 앨리(Nightmare Alley)

심리학 사기꾼의 최후

by 깨닫는마음씨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는 사이비가 창궐한다. 2차대전 당시의 미국이나, 코로나로 시름하는 현재의 한국이나, 사이비가 활개치기에 좋은 무대다. 1941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2022년의 한국을 활보하는 사이비의 모습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되는 기분은 참 묘하다.


특히나 사회적 불안은 마음의 불안을 부채질하기에, 이러한 마음의 불안을 공략하기 위해 사이비는 심리학이라는 외연을 곧잘 취하게 된다. 멘탈리스트니, NLP니, 최면이니, 언어술사니, 어느덧 이 사이비 심리학을 지시하는 이름이 되어 버린 것들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늘 이유있는 승리를 거둔다.


첫 번째로는 사이비만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딱 들어맞는 사례도 없기 때문이며, 두 번째로는 사이비 심리학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정통 심리학으로서의 기준점을 프로이트만큼 잘 제공한 이도 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모든 사이비는 잠정적으로 부권의 상실로부터 출발한다. 정확하게는 살해다. 자신을 충분히 지켜주지 못했다고 인식된 약한 아버지를 살해하고, 이 사이비 유망주는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내 그가 상실한 부권을 대신하기 위해 채택하는 것은 바로 언어다.


세상에 질서를 제공해주는 기능, 즉 로고스의 기능을 하는 언어로서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것이다. 물론 언어가 만드는 그 질서는 애초 거짓 질서다. 그럼에도 사이비는 그 거짓 질서의 숭배자가 어떻게든 되려고 한다. 왜? 자신이 부권을 쟁취함으로써 엄마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사이비 유망주는 보다 유려한 언어를 가르쳐줄 이를 찾아 그를 스승으로 삼으며 이 언어의 힘, 곧 아버지의 힘을 얻으려는 여정에 접어든다. 그리고 이 여정은 스승의 살해와 함께 완료된다. 두 번째의 아버지의 죽음이다. 생물학적 아버지와 정신적 아버지를 다 죽인 후에, 이제 사이비 유망주는 부권의 힘을 자신이 독점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유망주의 꼬리표를 떼고 본격 사이비로 거듭난다.


그 첫 걸음은 물론 엄마의 쟁취다. 현란한 수사학을 통해 사이비는 엄마와 같은 대상을 말로 홀려 얻어낸다. 이에 따라 사이비는 언어가 가진 마법의 힘을 확신하게 된다. 인기없는 인생낙오자와 같았던 자신이 이제는 언어의 힘으로 매력적인 인물이 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이비에게 매혹되는 이는 사이비와 똑같은 부권의 상실을 경험한 이뿐이다. 사이비의 능력이 탁월하다거나, 언어가 가진 힘이 원래 대단해서가 아니라 더욱 단순하게, 아버지를 욕망하는 이에게 아버지를 줄 수 있는 것처럼 행위하니까 알고도 모르는 척 끌리는 것뿐이다. 영화에서도 다음과 같은 대사로 묘사된다.


"네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거야."


하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속는다 하더라도, 속이려는 의도가 존재하기에 그는 사기꾼이다. 이렇게 사이비는 그 첫 걸음부터 사기꾼으로 시작한다.


이 심리학 사기꾼에게 포섭된 그의 아내도, 모르는 척 그녀 자신을 속이는 일을 더는 할 수 없어 그에게 사기를 그만두라고 말한다. 그는 반문한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 나쁜 일이야?"


그녀는 아주 명료하게 대답한다.


"거짓말이면 희망이 아니지."


이것은 아주 중요한 통찰이다. 전술했듯이, 프로이트는 늘 이유있는 승리를 거둔다.


이렇게 새겨두자.


"모든 언어는 원래 다 거짓말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언어를 신봉하는 따위의 일은 하지도 않았다. 그에게 신경증이라는 것은 애초 거짓말인 언어를 진리처럼 모시며 그 언어의 권위로 삶의 에너지[리비도]를 통제하려 하기에 생겨나는 증상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프로이트는, 내담자가 사용하고 있던 역기능적 언어를 쇄신하여 그가 건강하게 사용할 수 있는 더 나은 대안적 언어를 제공하면, 그 결과 내담자가 회복을 이루고 나아가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애초에 언어를 통해 인간이 더 나아지리라는 판타지 같은 기획은 프로이트에게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프로이트는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다. 그만큼 정확하게 사실을 보았다. 그에게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원초적인 에너지 그 자체였다. 니체와 같다. 프로이트에게는 리비도인 것이 니체에게는 삶의 의지다. 결국 생명력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니체보다는 조금 더 그 마음이라고 하는 생명력의 강렬함을 두려움으로 경험하였기에, 프로이트는 방비책을 세워야만 했다.


그러니까 로고스적 원리로 세워지는 초자아와, 그 초자아의 힘을 빌려 리비도를 다루고자 하는 자아의 개념은, 실은 로고스를 통한 리비도에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언제라도 폭격당해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는 전선에서 가녀린 철책에 기대 겨우겨우 버텨가는 모습에 더욱 가깝다.


그래도 그러한 일이라도 해야 저 거대한 생명력에 휩쓸려가지 않을 것 같아서, 프로이트는 그것이 거짓말인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했다. 때문에 프로이트는 늘 마음에 대해 겸손했다. 언어를 통해 마음의 작용인 삶을 변화시킨다거나, 삶의 의미를 획득한다거나, 삶이 가야할 제대로 된 방향을 제시한다거나 하는 등의 사기를 치려 하지 않았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깊은 숲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이에게 "이거 사실 그냥 헝겊조각이지만 그래도 손에 들고 있으면 조금 힘이 날 수도 있을 거야."라며 작은 봉제인형을 쥐어주는 일이 프로이트의 일과 같았다.


그에게 언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미덥지는 않지만 그래도 울며 겨자먹기로 채택할 수밖에 없는 애처로운 필요악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겸손함을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에게 언어술을 전수해준 그의 정신적 아버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신이 뱉은 거짓말을 믿고 자신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눈이 먼다. 선량한 사람들을 망치게 된다. 거짓말을 하고 또 하며 그 거짓말을 사실로 믿어 눈이 먼 그 최후에야 결국 신을 만나게 되어 알게 된다. 인간은 신을 초월할 수 없다."


이렇게 변주하며 읽어도 된다.


"언어는 마음을 초월할 수 없다. 언어는 존재를 초월할 수 없다. 언어는 삶을 초월할 수 없다."


애초 모든 언어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이 거짓말이 유익한 경우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쇼를 할 때다.


주인공의 정신적 아버지나 그의 아내나 그가 그냥 정직하게 쇼를 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를 바랐다. 쇼맨은 사이비도 사기꾼도 아니다. 허구의 미학을 드러내는 정당한 문화주체일 뿐이다.


그러나 사이비의 역사는 뿌리깊다. 그 첫 걸음은 그가 심리적 언어술을 배움으로써 시작되지만, 그 씨앗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심어져 있었다.


자신이 물리적으로 패배하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한다고 상정되었던 강한 부권에 대한 동경과, 그 부권을 행사하지 못했던 실제의 아버지에 대한 좌절로부터 사이비는 일찌감치 태동했다.


사이비란 무엇일까?


거짓으로 사실을 대체하려는 것이다. 이 말은, 사이비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는 의미다.


사이비가 그의 실제 아버지에 대한 상실을 극복한 것처럼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개 또 하나의 거짓말이다. 많은 경우 극복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극복되었다고 말하는 양상 또한 부권에 대한 표상이 생물학적 아버지에서 정신적 아버지로 또는 언어로 옮겨간 것에 불과하다.


모든 사이비는 말한다.


"절대로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고 그는 사이비가 된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인 그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이며 그는 사기꾼이 된다.


심리학 사기꾼이라는 것은 이처럼 명백하다. 그는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불안에는 언어가 잘 듣는다는 거짓말로 언어라는 약을 팔러 다니는 약장수다. 그렇게 거짓의 약을 복용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을 더 빨리 그리고 더 힘들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언어의 무기상인이다.


폭력적으로 언어를 쓰는 일이 언어를 무기화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그 거짓말이 가장 큰 언어의 무기화다.


그리고 심리학 사기꾼은 바로 이 언어를 무기로 쓰는 동일한 방식으로 자기도 다른 사기꾼에게 당해 최후를 맞게 된다.


그때서야 정말로 알게 된다. 언어라고 하는 것이 대단해서, 그리고 그 언어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자신이 대단해서, 사람들이 속아주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람들의 취약성을 빌미로 잡아 선택을 강요했기에, 사람들은 알고도 당하는 비통함 속에서 속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자신이 사기꾼 정도가 아니라, 사실은 가장 비열한 협박범이자 살인자였다는 그 사실을.


욕망은 언어가 만든다. 때문에 언어의 크기는 욕망의 크기에 비례한다. 언어의 신이 되고자 하는 이는 곧 욕망의 신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언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타인의 욕망 또한 충족시킬 수 있다고 간주하는 상태다. 그러나 언어를 키운 만큼 욕망도 커지게 되기에 욕망은 쉽사리 충족되지 않는다. 그러니 다시 언어를 더 크게 확충하는 방식으로, 이 언어와 욕망 사이의 줄다리기는 끝없이 계속된다.


그러니 프로이트가 다시 한 번 이유있는 승리를 거둔다.


프로이트의 기획은 욕망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욕망을 빨리 좌절시켜야 사이비가, 나아가 사기꾼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프로이트는 알고 있었다.


현실적인 말을 하고 현실적인 일을 하는 것이 프로이트가 보는 건강한 자아의 모습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쓰면 자신의 삶이 바뀐다느니, 첨단의 언어를 업데이트해야 한다느니, 심지어는 언어가 발달하면 인간이 더욱더 완성되고 깨달을 수 있다느니 같은 식의 말들은, 실제로 사이비 교주들이나 심리학 약장수들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매번 똑같이 질리지도 않고 하는 말들이다.


욕망이 성공적으로 좌절되지 않아 계속 유아적 전능감의 망상 속에 빠져 있는 이들만이 이러한 말을 한다. 욕망의 좌절이란, 현실에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그 좌절이 아니라, 언어의 좌절이다.


심리학 사기꾼들은 현실에서 어떤 좌절을 겪더라도 자기의 언어만은 신주단지처럼 품에 꼭 끌어안아서 지키고 있다. 상황이 자신에게 조금 유리해지면 언제라도 그 보따리를 풀어 약장사를 시작하려는 의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신의 언어를 자신의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언어의 좌절이 이루어질리가 없다.


심리학 사기꾼들이 탁월한 언어능력을 갖고 있어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기에 언어의 좌절이 안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기만의 달인들이기 때문에 언어의 좌절이 늘 회피되는 것이다. 사실은 모르면서 언어적으로 다 이해한 척하며, 마치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하며, 또는 좌절이 아니라 더 성장하기 위한 과정인 척 소설을 쓰며, 이들은 결국 언어를 통한 노력으로 그 모든 것이 극복되었다는 듯한 품새를 취한다.


이 심리학 사기꾼들은 지금 삶이 두려워서 계속 자기를 속이고 있는 중인 것이다.


삶을 그냥 리비도라고 말해도 된다. 심리학 사기꾼들은 자기에게 작용하는 리비도를 두려워한다. 그래서 언어로 그 리비도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주 쉽게 말하면, 성에 대한 과도한 강박이 있는 이가, 이를 기만하기 위해 더욱더 순수한 소년선비인 척하는 모습과 같다.


그러나 리비도를 다루기 위해 언어를 더 발달시킨 그 결과는 리비도를 더 강렬한 형태로 조우하게만 되는 일이다. 전술했듯이, 언어의 크기는 욕망의 크기에 비례한다.


언어로 쌓은 커다란 욕망이 오히려 자기를 붕괴시킬까봐 두려워 더 큰 언어로 욕망을 누르려 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은 영원한 욕구불만의 현실이다. 말했잖은가. 프로이트는 언제나 이유있는 승리를 거둔다고.


좌절되지 않은 언어, 좌절되지 않은 욕망은, 심리학 사기꾼을 만들어내고 이내 그를 좁은 길로 몰고 들어간다. 빠져나갈 곳이 없이 거짓말에 거짓말만 더해야 하는, 끝없는 악몽과도 같은 길이다. 스스로를 농락하고 사람들을 농락한 거짓말에 자기 자신이 걸려 넘어지게 될 그 길이다. 이것이 심리학 사기꾼의 최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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