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적 메타주체로부터 벗어나는 일"
마음에 대한 작가적 입장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텍스트로 다루는 작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입장을 설정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마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마음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라는 것은 마음 밖에서 그 마음을 다룰 수 있는 메타적 입장인 것처럼 상정된다. 이것을 작가적 메타주체의 입장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입장의 의도는 거리감을 두어 마음에 대한 안전감을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게다가 글을 쓰듯이 마음에 대해 무엇인가를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입장의 특성 또한 상정됨으로써, 이 작가적 메타주체는 자신이 무력하지는 않은 것처럼 스스로를 꾸밀 수 있다.
안전의 확보와 힘의 확인, 우리가 두려울 때 하고자 하는 일이다.
그러니 마음이 만드는 삶이라고 하는 작용을 작가적 메타주체는 언제나 이야기인 것처럼 굴절시키려고 한다. 삶을 이야기로 만들어야 작가인 자신이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동시에 삶이 이야기여야만 작가인 자신은 그 이야기에 근본적으로는 영향받지 않는 것처럼 밖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이야기의 밖으로 빠진 작가적 메타주체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분석하고, 가공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에게 위협을 주었던 이야기를 안전한 이야기로 바꾸어내려는 일이 이루어진다. 위험을 회피하고, 대안을 확보하며,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 작가적 메타주체는 삶을 유려하게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한 일은 그저 회피한 것뿐이다. 두려움으로부터의 회피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다만 회피라는 것이다.
즉, 이러한 작가적 메타주체는 그러한 입장을 상정함으로써 삶에 대해 더 우월한 지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 아니라, 다만 삶이 두렵기에 회피하게 된 것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두려워하는 것 앞에서 우월함의 미소를 짓는 일은 그저 비루한 정신승리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하는 그 정신승리의 방식이다.
이 정신승리의 우월감이 조금 더 은밀한 형태로 형상화되는 모습은, 작가적 메타주체가 마음에 대한 민주적 지도자의 모습을 취할 때다. 이를테면, 이 작가적 메타주체는 자기가 작가가 됨으로써 여러 마음이 자기의 목소리를 정당하게 낼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민주주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목소리는 보통 이러하다.
"너희들이 권위로 억압되지 않고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도록 내가 내 펜을 내어줄게. 너희를 자유롭게 만드는 펜의 권위를 너희에게 다 허용할게. 너희의 목소리대로 받아 적으며 너희 모두를 내가 주인공으로 만들어줄게. 나는 너희를 위해 살 거야. 언제라도 너희가 주인공이 되게끔 내 자신을 내어줄 거야. 바로 너희 마음이 나의 전부니까. 후훗."
이러한 방식으로 작가적 메타주체는 마음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세우려는 활동을 통해, 바로 자신이 메타세계를 움직이는 진주인공인 척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자식을 주인공처럼 잘 키워냄으로써, 자신이 그 영광을 얻는 진주인공이 되고 싶어하는 부모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자기가 직접 뛰어들기에는 두려운 삶 앞에서 이루는 정신승리의 굴절된 모습이다.
작가적 메타주체는 바로 이러한 일을 탈서사라고 부른다.
이야기의 밖에 선 작가의 입장에서,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음을 찾아 그 마음이 주인공의 입장을 회복하도록 도움으로써, 자신이 진주인공이 되려는 그 정신승리를 탈서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탈서사라는 이름의 지독한 독재적 서사다.
작가적 메타주체라는 진주인공만이 항구적이며 실체적인 주인공의 입지를 확보하게 되는 바로 그러한 독재적 내용을 담은 서사다.
당연하게도 실제로 탈서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다른 거대한 서사를 만들어내, 기존의 서사에 뒤집어 씌운 것뿐이다. 작은 정신승리가 휘청거릴 때, 그것보다 더 큰 정신승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 더욱 기만한 것뿐이다.
실제의 탈서사란, 이야기의 바깥에 상정된 작가적 메타주체가 되는 일이 아니다.
탈(脫)이라는 것은 씌우는 것이 아니라 벗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다. 이야기를 벗겨내는 것이 탈서사다.
작가적 메타주체가 꿈꾸듯이, 이야기에 대해 그 바깥에 위치한 작가의 입장으로 빠져, 이야기를 다루는 일이 탈서사가 아니다.
그러니까 실제적 탈서사, 곧 실존적 탈서사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움직임은 오히려 작가적 메타주체가 삶에 대해 씌우고 있던 이야기를 벗겨내는 방향성을 갖는다. 그럼으로써 이야기로 은폐하려고 했던 존재의 사실을 개방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를 조금 더 정교하게 묘사하자면 이러하다.
작가적 메타주체의 탈서사는, 삶을 이야기로 보는 자리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삶에 이야기라고 하는 것을 씌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바깥으로 자신이 빠져나감으로써, 이야기에 대한 작가라고 하는 메타적 입장을 구성한다. 이미 이야기로 씌워진 그 위에 메타적 작가라고 하는 것을 한 번 더 씌우는 것이다. 씌움의 반복이다. 조금도 벗겨내는 것이 아니다.
반면, 실존적 탈서사는, 삶이 이야기처럼 명사화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바깥으로 나가 삶을 접촉하고자 한다. 이야기를 다루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삶에 참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삶이라고 하는 늘 동사로서 움직이는 강물에 뛰어드는 것이다. 벗고, 또 벗는 일이다.
작가적 메타주체의 탈서사가 드러내는 것은, 삶이라고 하는 두렵고 고통스러운 이야기에서 벗어났더니 커피향 그윽하게 풍기는 안온한 서재의 벽난로 앞에 평온하게 앉아 있는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식의 이야기다. 이처럼 작가적 메타주체의 탈서사의 경우에는, 폐색적 이야기의 바깥에 작가라고 하는 또 다른 폐색적 이야기가 있다.
보통 집중의 기제를 가진 수행활동을 한 3개월 치열하게 하면 이러한 상태를 체험하곤 한다. 지복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실체는 다만 가득 긴장을 모았다가 그 끝에서 이완된 상태일 뿐이다. 지루인 이가 힘들게 노력해 오르가즘을 느낀 뒤 찾아오는 현자타임의 상태와도 같다.
이러한 상태가 짧으면 3일, 길면 3주 정도 지속된다. 두려움이 야기한 긴장 속에서만 살던 이에게는 꿀 같은 시간이다. 그러니 계속 유지하고 싶어진다. 이럴 때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야기는 보존의 도구인 까닭이다. 이 지복의 상태가 마치 항구적인 진주인공의 상태인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어내, 그 이야기를 소비하면 자신의 상태 또한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다.
근본적으로 삶이 두려워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고 있는 입장에서는, 금방 다시 긴장이 쌓이게 된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를 소비하며 마음의 민주적 지도자로서 마음을 돌보고 있는 듯이 현실도피를 해봤자, 애초 마음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자기를 돌볼 부모와 같은 작가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강물이 민주적 지도자나 부모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실존적 탈서사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짜의 이야기에서 벗어나면, 처음으로 이야기도 작가도 아닌, 그 어떤 인위적 구성재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의 진짜 삶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탈서사는 벗고 또 벗는 것이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도 벗고, 작가도 벗는 것이다.
이야기를 벗어난다는 것의 의미는, 이야기가 아닌 작가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와 관련된 모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야기와 관련된 모든 것이 내가 아니다.
이야기도, 작가적 메타주체도, 내가 아니다.
이야기의 바깥에는 작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다. 돌아서 이야기의 안을 보면 그때서야 이야기의 안에도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 보인다.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인가가 있다.
없이 계신다.
존재한다.
다 존재한다. 작가적 메타주체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다.
그래서 그냥 나라고 부른다.
지금 이 나다.
삶은 이야기가 아니며 지금 이 하나의 몸짓이다.
그래서 또 나라고 부를 것이다.
실존적 탈서사는 나를 사칭하는 작가적 메타주체로부터 벗어나, 이 나를 향해 계속 벗으며 개방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