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적 자아(atman)에서 벗어나 제도권을 존중하세요"
제목에서 다 알려드렸지만, 심심하시면 조금 더 읽으셔도 됩니다.
자아발달이 심리학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과, 아무리 자아발달을 한다고 존재와 삶의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 심지어는 자아발달이라고 하는 것이 "모든 것이 내 생각대로!"를 꿈꾸는 유아적 전능감의 메타주체적 실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한다면, 우리는 이제 투명하게 자아발달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아발달은 정말로 쉽습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직장상사 말을 잘 듣고, 사회적 규칙의 말씀을 잘 들으면 자아는 발달됩니다.
여기에서 잘 듣는다는 것의 의미는 그것을 무시하고 조롱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즉, 사람을 자기 편의대로 도구처럼 이용하며 손해는 보지 않되 이득만 최대한 뽑아 먹으려고 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잘해준 이의 등에 칼을 꽂지 않으면,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가 제일 중요한 인물이 되기 위해 이간질을 하지 않으면,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지 않으면 자아는 발달됩니다.
로버트 풀검의 유명한 에세이집의 제목처럼, 우리가 유치원에서 배운 것을 인생 전반에 그대로 적용하며 살면 자아는 아주 잘 발달됩니다.
이상한 자아발달의 사이비 이론을 비싼 돈을 들여 배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힘들게 뭘 쓰거나 쇼를 하는 식으로 과잉된 연극적 노력을 더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끝없이 자기를 성찰하며 무슨 체험을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도적 권위, 곧 제도권만 존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자아는 반드시 잘 발달합니다. 존중과 복종이 다른 것이라는 말은 굳이 길게 부연할 필요는 없는 말입니다.
제도권을 존중한다는 말의 의미는 성실한 타자의 이야기를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학교 잘 다니고, 공부 열심히 하고, 사회에서 하루하루 땀흘려 성실히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존중하면, 자아는 발달합니다. 자신이 제도권을 존중하며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자아발달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알아서 이루어집니다.
자 여기까지가 가장 쉽게 누구나 할 수 있고, 무엇보다 공짜로 할 수 있는 자아발달의 가장 핵심적인 원리입니다. 이 뒤는 이제 시간을 조금 들여 읽을 필요가 있는 자아발달의 굴절과 착각에 대한 내용입니다.
요즘 가장 흥행하는 분야인 콘텐츠 사업의 경영자 및 편집자들에게서 이러한 말을 자주 듣습니다.
"작가들 진짜 자아발달이 너무 되지 않았다. 글쓰는 일이 자기 특권적 재능인 줄 알고 세상이 자기를 왕자공주로 대하는 일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유아적인 속성을 그대로 가진 채 성인이 된 것처럼 보인다. 어린 아이 떼쓰듯이 모든 것이 다 자기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고 고집을 너무 부린다. 겉으로는 겸손하게 예의바른 척해도 실제 자기가 위에 있다는 식의 태도가 드러나고 사회성도 떨어진다. 작가 비위 맞추기가 아주 힘들다."
물론 작가들 중의 일부에 대한 말이겠지만, 그 일부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야기를 통해 더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 스토리를 통해 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 자아발달은 글쓰기를 통해 가능하다.'
이러한 작가들은 사실 자기의 이야기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자기의 소설을 팔 수 있는 소비자를 확보하기 위해 타인의 이야기를 존중하는 품새를 취하기는 하겠지만, 이들이 근본적으로 타인의 이야기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들의 제도권에 대한 태도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들의 가정은 이러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원래 이야기로 되어 있기에, 그 이야기를 집필하고, 편집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작가는 마치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이 세상 밖의 주체로서 이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내기해도 좋습니다. 목숨까지 걸 수 있습니다. 정말로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은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지 않습니다. 존재는 단 1%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번 이러한 말을 하는 작가들, 그리고 그 작가들이 외연을 변주한 사이비 심리학의 주체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이 이야기라는 것에 목숨 걸 수 있으세요?"
정말로 정신이 나가서 그렇다고 눈을 부라리며 대답하는 이가 있다면 다시 이렇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럼 지금 당신의 목숨을 끊으면, 당신의 존재는 이야기이니까 다시 이야기를 써서 살아날 수 있는 거죠? 또는 생물학적으로 당신이 죽어도 당신이란 이야기는 다른 이들에게 소비되면서 불멸인 것이니까 지금 그 몸이 죽어도 문제될 것이 없는 거죠?"
혹시라도 아직은 아니라고, 조금 더 알려져서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더 많이 기억할 정도로 유명해져야 불멸이 되기 때문에 아직은 이야기를 알릴 이 몸이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사실 지금 존재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인 까닭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입니다.
붓다와 예수 같은 종교적 선각자들이나 진리를 이해했던 사상가들이 사람들에게 꾸준하게 알리고자 했던 사실은 분명합니다.
"존재는 이야기가 아니고, 너는 그 존재다."
우리는 정확하게 우리가 필요로 하던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그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던 것입니다.
존재는 이야기가 아니며, 존재는 이야기에 대한 작가도 아닙니다. 존재는 이야기 및 작가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직접 체험해 깨달은 이들은 다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동안 나의 이야기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고 착각해왔는지 그게 너무 코미디 같아요. 이 존재는 나의 이야기와 정말로 아무 상관이 없는데."
이것은 자아라고 하는 이야기 역시 존재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자아를 벗어나본 이들의 정직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이야기로 사는 척은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이 이야기인 것은 아닙니다.
물론 자아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이야기라고 하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자아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사이비 심리학 작가들의 핵심적인 의도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아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뒤덮거나, 적어도 자신이 중심의 위치를 차지하는 입장에서 모든 자아가 하나로 통합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자아중심성이라고 말합니다. 자아중심성은 미발달된 자아의 핵심적인 특성입니다.
이러한 자아중심성은 아주 교묘한 기만의 형태로 드러납니다.
자기는 마치 자아 밖에 있는, 자아가 아닌 신적 작가인 척하는 것이 그 기만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작가야말로 자아 중의 자아입니다.
붓다가 비판한 아트만(atman)이라는 개념은 단지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자아 아닌 척하며 가장 초월적인 세력으로 행세하고 있는 이 '작가적 자아'를 의미합니다.
붓다가 이를 비판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작가적 자아가 존재를 망각시키기 때문입니다. 거짓말로 모든 것을 뒤덮어 존재의 사실을 지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이제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작가적 자아의 논리로는 자아발달 또한 성공적으로 이루지 못합니다.
전술했듯이, 자아발달이란 타자와 그 성실한 타자의 이야기인 제도권을 존중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심리학, 교육학, 사회복지학, 경영학 등등, 발달을 다루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대개 학부과정 1학년 때부터 가장 기초적으로 접하는 발달심리학 개론에서 늘상 나오는 에릭 에릭슨 같은 이의 자아발달이론만 읽어 보더라도 이 사실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작가적 자아는, 자아발달을 자기의 글쓰기를 통해 이루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제도권을 넘어서는 대안적 이야기를 자신이 집필하면 그에 따라 제도권 같이 낡은 이야기보다 더 좋은 이야기로 인간의 자아가 발달하는 것이라고 기만합니다.
아니 이야기가 중요하다면서, 왜 가장 성실한 이들이 써왔던 제도권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무시하려는 것일까요?
우회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노력하지 않고도 양아치처럼 자원을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좋은 대학교에 가려고 밤새 공부하던 그 시간을, 자신이 낄낄거리며 무협지를 보고 즐기던 그 시간으로 이기고 싶은 것입니다.
학력지상주의도 물론 부조리한 일이지만, 이러한 작가지상주의는 더욱더 부조리한 일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이야기고, 모든 이야기는 존중받아야 한다면서, 가장 그 세력이 큰 제도권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조롱하기까지 하는 일은 모순입니다.
작가라는 입지를 취하면 자신이 제도권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 모든 과정을 다 우회하여 순식간에 해당 분야에서의 최고의 위상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그 분야에 대한 조롱입니다.
이야기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면 남의 이야기부터 존중해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를 존중하지 않으니, 자아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통해 자아발달을 이룰 수 있다."라는 가정이 언제나 거짓말로만 밝혀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고 싶어서, 뒤늦게라도 학점은행제를 통해 학부과정을 마치고, 상담대학원에 들어가 공부하며, 또 슈퍼바이저의 감독하에서 상담경험을 쌓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성실한 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한 남의 이야기를 본질적으로 바보 취급하는 것이 바로 이 작가적 자아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자기의 천재적 글쓰기가 있으니 다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무시하며, 작가적 자아는 자신이 제도적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적격한 심리상담사인 척 행세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심리상담자가 아닌 판타지 작가나 할 법한 이야기 예찬론을 사람들에게 전파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작가적 자아는 성실한 남의 이야기를 짓밟고 조롱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고유한 이야기를 존중해주세요. 저도 열심히 살았어요."
바로 이것이 자아발달이 되지 않은 모습의 표본입니다.
자기가 성실한 타자의 이야기를 먼저 그리고 실시간으로 모독하고 있었다는 자각은 완전히 빠진 채,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웁니다. 자기를 존중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을 모독하는 일은 참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작가적 자아의 실체입니다.
자아발달이 되지 않은 이가 사람들의 자아발달을 도울 수 있다고 말하는 자체가 이미 그 자아중심적 교만의 끝을 보여줍니다.
타자는 언제나 진짜 타자입니다.
즉, 자기의 이야기에 공조하며 유사한 궤적을 그리는 타인이 타자가 아니라, 자신이 가지 않은 그 길 위에 서있는 이들이 타자입니다.
제도권을 가지 않은 작가들이 타자인 제도권을 무시하며 조롱하는 일은 가장 미발달된 자아가 하는 일입니다.
타자를 가장 무시하며 조롱하는 방식은 그 타자를 참칭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가지 않았고 타자는 성실하게 갔던 그 길을, 마치 자기가 간 것처럼 그 타자의 위상을 자기가 얻으려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무시와 조롱의 방법론을 자아발달의 비결이라며 전하는 일입니다.
만약 자아가 정말로 이처럼 기만과 사기의 결정물이라면, 우리는 하루 빨리 자아를 포기하는 편이 낫습니다.
다행히 자아는 이러한 방식으로 발달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아직 자아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결국 사이비 심리학으로 기능하는 작가적 자아는 자아발달이라는 이름으로 실은 자아가 최대한 발달하지 않고 미숙한 상태로 유지되는 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터팬 콤플렉스 같은 것입니다. 나아가 이 세상 모든 것을 피터팬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작가적 자아는 자기에게는 이 피터팬 콤플렉스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이야기 밖에 있는 이야기초월적인 메타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작가적 자아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미숙한 아동처럼 만들어 놓고, 자기는 제일 높고 상냥한 부모 같은 메타적 주체로서 기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 부모상에 대한 이 작가적 자아의 콤플렉스가 있습니다.
이는 작가적 자아 자신이 심리상담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지, 그 자신이 심리상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대로 시사합니다.
그러나 작가적 자아는 심리상담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이러한 작가적 자아는 비용을 지불하고 정당하게 제도권에서 이루어지는 심리상담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그 제도권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남의 이야기의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 밖에 있는 작가의 초월적 입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작가적 자아의 입장에서는, 심리상담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자기에게 돈을 지불해야지, 자기가 심리상담이라고 하는 이야기에 돈을 지불하는 일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남들에게는 자신의 심리상담의 활동에 돈을 지불하라고 말합니다.
자기모순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 모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착각 때문입니다.
작가만은 이야기를 써내는 주체이지 이야기가 아니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가도 이야기입니다.
작가적 자아도 그냥 자아입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자아발달 속에서는 고착되지 않는 것입니다. 중2병과 이고깽의 시절이 지나가듯이, 작가적 자아라는 것 또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적 자아는 작가를 궁극점으로 삼아 늘 거기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이야기로 보며, 그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자신을 이야기 밖의 메타적인 입장처럼 세워놓고 그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입장인 것처럼 행위합니다.
불교적 비유로 하자면, 깨닫지도 못한 이가 궁극의 자리인 척 앉아 깨달음을 흉내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작가적 자아가 아트만인 것입니다.
애초에 자아발달은 깨달음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가적 자아는 단지 자아발달만을 다루려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깨달음을 참칭하곤 합니다. 물론 깨달음이라는 말은 직접적으로 쓰지 않지만, 그러한 입장에 서있는 것처럼 작가라고 하는 개념을 늘상 묘사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자아가 자신의 노력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가장 꽉 막힌 태도와도 같습니다. 영원히 깨달을 수 없는 가장 불가능한 태도입니다.
깨달음은 고사하고 이러한 작가적 입장으로는 자아발달 또한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트만은 가장 잘 발달된 자아가 아니라, 그저 가장 자아중심적인 자아입니다.
자아발달의 핵심적인 특성은, 발달이 심화될수록 더욱더 자아중심성이 깨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타자에 대한 존중만이 자아발달의 열쇠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물론 전술했듯이, 자아발달과 존재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자아가 발달한다고 존재가 더 강력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의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그것이 종이의 여백을 발달시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아중심성이 해체되어 이제 여백 위에 자기의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그림을 그리세요!"라며 더 많은 이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게 된다고, 그것이 존재에 대한 차원인 것 역시도 아닙니다. 이는 그냥 윤리일 뿐이며, 자아발달은 윤리적 발달과 그 궤를 함께합니다. 그러나 윤리적 발달은 존재 및 깨달음과는 또한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자기가 마치,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품으며 함께하고 있는 존재인 양,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권위인 양 행세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가 바로 사이비입니다.
존재라면 그 반대도 성립될 수 있으면 됩니다. 가장 자상한 부모인 척하는 것을 존재이자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가장 냉혹한 부모로서 존재하는 일 또한 성립시켜야 합니다. 특정한 대상들에게 적극 아양을 떨고 있는 이가 그 반대로 동일한 대상들을 적극 내치지도 못하면서 깨달은 존재인 척하는 일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존재는 원래 무속성이고, 탈속성이며, 전속성입니다. 때문에 자기가 임의적인 언어로 존재에 반쪽뿐인 속성을 부여해서 그것이 진정하고 온전한 존재의 형상이라고 말하는 일이 결국에는 가장 사이비의 일인 것이며, 가장 독재의 일인 것입니다. 친절하게 모든 것을 품는 척하는 그 사이비가 실은 가장 독재자인 셈입니다. 이처럼 사이비는 존재를 자기 생각대로 규정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가장 모독하기에 언제나 가장 악질입니다.
자아초월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과 같은 분야에서, 괜히 자아발달의 트랙과 존재자각의 트랙을 별개로 설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초월 심리학의 발달은 사이비 심리학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루어져 왔습니다.
특히 자아발달을 통해 깨달은 척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거짓을 보급하여 사람들이 더욱더 존재를 망각하게끔 만드는 사이비 심리학의 행태를 크게 비판해 왔습니다.
자아발달은 자아발달이고, 존재자각은 존재자각입니다. 그 둘의 경계를 흐리지 말아야 합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님의 것은 주님에게, 경계는 언제나 명확합니다.
살펴본 것처럼, 이 세상은 이야기로 되어 있고 자아발달은 이야기를 통해 가능하다고 하는 작가적 자아의 주장은, 두 가지의 이유에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작가적 자아가 제도권이라고 하는 성실한 타자의 이야기를 무시하며 조롱하고 있기에 자아발달의 기제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작가적 자아가 언어적으로는 자아발달만을 다루는 척하지만 실은 은근히 자신이 존재 및 깨달음의 영역까지 다룰 수 있는 것처럼 경계를 무시하며 조롱하고 있기에 자아발달의 기제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후자의 의도에 은밀하게 천착되어 있기에 사이비가 대개 구제불능인 것입니다.
붓다도 데바닷타라고 하는 이 작가적 자아의 인물을 유일하게 포기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되어도, 이것만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깨닫고 싶은 이를 깨닫게 조력할 수는 있지만, 자기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이를 깨닫게 조력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사실 깨달음이니 존재니 이러한 것들에 관심이 없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자아발달이 필수재가 아니라 일종의 유희재라는 사실을 이해하며 그냥 즐겁게 자아발달의 트랙을 살면 한 세상 잘 살았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유희재를 필수재처럼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이야기를 소비하며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데다가, 나아가서는 자아발달을 우리 존재의 가장 심원한 차원에까지 거짓으로 연결지으며 사람들을 추동하는 이가 있다면, 빨리 멀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자아발달은 당연히 되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퇴행이 일어납니다. 그 퇴행을 더 좋은 것으로 여기며 고착됩니다.
진심으로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십시오.
사이비의 스토리를 소비하고 있을 시간에, 토익 공부를 하는 일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자아발달에 유익합니다.
넷플릭스에서 미국드라마를 볼 시간에 수능시험 점수를 올리기 위해 공부하는 일이 자아발달에 유리합니다.
판타지 소설을 쓸 시간에 논문을 한 편 쓰는 일이 자아발달에 효과적입니다.
이런 글을 읽고 있을 시간에, 부모님과 전화통화라도 하는 일이 차라리 자아발달에 좋습니다.
자아발달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효과적인 사회활동을 위해 구성되는 것이 자아입니다. 사회활동의 역량을 높이기 위해 증진되는 것이 자아입니다.
자아의 기능은 원래 현실에 대한 적응입니다.
그런데 제도권이라고 하는 현실에 대한 부적응자들이 자꾸 사이비에 빠짐으로써 오히려 현실을 초월하여 새로운 대안적 현실을 써내려가는 작가가 되자는 생각을 품습니다.
즉, 자아가 약한 이들이 현실에 적응함으로써 자아를 발달시킬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자아가 발달될 것이라는 망상을 믿으려 합니다. 사이비가 이 망상을 조장합니다. 진짜 못된 일입니다.
여기까지 긴 노력을 통해 읽어주신 분들 중 자아발달을 원하는 분이 계시다면, 마지막으로 진심 한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온라인상에 있는 이러한 글들 읽지 마시고, 특히나 이야기로 마법 같은 일들을 펼칠 수 있다는 식의 글들은 최대한 피하십시오.
그리고 그 대신에, 아르바이트라도 구해 일을 하시고, 학교에 다니시고, 부모님께 안부인사를 자주 하시고, 좋아하는 이성이 있다면 한번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 보시고, 과장님과 사이가 안 좋다면 먼저 소주 한 잔을 청해보시고, 친구랑 정치이야기 하지 마시고, 자격증도 많이 취득하시고, 자원봉사의 형태라도 본인이 원하는 사회경험을 최대한 많이 하시며, 최대한 성실하게 그 몸으로 살아보시면 좋겠습니다.
원래 자아발달이란 이러한 말을 하는 꼰대가 되어가는 일입니다. 자아는 라떼를 좋아합니다.
자아발달이란 무슨 인생마스터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자아는 바리스타가 아닙니다.
그 꼰대가 되기 위해, 대체로 당신의 부모님들께서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자아실현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것이 다른 비현실적인 것을 포기하고 실현된 자아의 모습입니다.
꼰대가 되어야만, 당신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당신의 제일 가까이에 있는 제도권을 존중해주세요.
그 제도적 권위는 당신의 현실을 지키기 위해 행사되고 있던 바로 그 성실한 타자의 권위입니다.
망상의 이야기 속에서 살지 마시고, 성실하게 현실을 살아주세요. 부모님이 당신의 현실을 지키셨던 그 성실한 방식으로 당신의 현실을 이제 스스로 지켜주세요.
그러면 잘 발달한 자아입니다.
자아가 발달하는 법을 마지막까지 성실하게 알려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