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떻게 다른 세계의 권위에 침을 뱉는가?"
실존상담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삶의 특성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양극성(bipolarity)이다. 양극성이란 하나의 요소가 동시에 반대되는 속성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가장 사람들에게 친절한 척하는 이는 동시에 가장 사람을 도구로 취급하는 이가 되고, 가장 모두를 허용하는 민주적 태도를 가진 척하는 이는 동시에 자기만이 가장 주인공이 되려고 독재하는 이가 되며, 가장 똑똑한 척하는 이는 동시에 가장 무식하게 보이는 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양극성은 융이 말하는 판타지적 구조인 대극의 합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한 통합적 변증법은 결국 이야기를 구성하는 원리일 뿐이다. 예를 들어,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그의 적인 베지터와 싸우는 대립의 과정을 통해 베지터의 장점을 흡수하는 동시에 나아가 베지터와 친구가 되기까지 하는 스토리 구조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의 작법일 뿐, 삶에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
삶은 정반합의 통합적 변증법의 작용이 아니다. 실존철학자들 그리고 실존상담자들은 이 사실을 부단히 강조한다. 삶은 그저 양극성의 역설일 뿐이다. 하나를 의도하니 다른 하나가 필연적으로 생겨나며, 처음의 하나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그 반대의 극 또한 계속 유지되는 것이다. 상존하거나 상멸하는 문제일 뿐이지, 통합의 문제가 아니다. 나가르주나의 공(空) 사상과도 상통한다.
실존상담자들은 이 양극성이 낳는 것이 불안이며 긴장이라고 말한다. 이들이 불안과 긴장을 말하는 방식은 우리의 선입견과는 다르게 이것들을 대단히 좋은 소재로 묘사하며, 또 그것이 사실이다.
아주 쉽게 비유해볼 수 있다.
불안은 지금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이며, 긴장은 지금 자신이 낯선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직관적이고 실증적으로 동의가 된다.
그래서 실존상담자들은 실존적 태도란 곧 양극성 사이의 불안과 긴장을 통해 살아가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양극성 사이에서 펼쳐지는 자유와 사랑을 누리며 사는 것을 곧 삶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양극성이 붕괴되었을 때는 자유와 사랑 또한 붕괴된다.
붕괴된 잔해물만이 적체되어 무거운 지면을 형성한다. 이러한 지면은 굴곡 없이 수평으로 보이기에 안정적인 것처럼 착각되지만, 그 실체는 우울감이다. 이것을 보통 침적(sedimentation)되었다고 표현한다. 거짓의 안정이며, 거짓의 평화다.
이 거짓의 안정 및 평화를 위해 우리는 일부러 양극성을 무너뜨리려는 일을 하곤 한다. 이것이 신경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증의 회복은 신경증을 낳는 이야기들을 통합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삶에서 양극성을 회복함으로써만 가능해진다.
자아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 양극성을 붕괴시키는 주범이다.
언어로는 도저히 불이면서 동시에 물인 것을 묘사할 수 없다. 그러나 자아정체성은 언어적인 정합을 이루어야만 구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의 양극성을 무너뜨려야만 이것은 구성이 가능해진다.
나아가 마치 양극성을 무너뜨리지 않고 존중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구조는 더욱 교묘하다.
그것은 궁극의 자아정체성으로서, 메타인지를 가진 작가적 자아정체성을 상정하는 방식이다.
이 작가적 자아정체성을 통해, 양극성의 기만자들은 자신들이 다양하게 반대되는 측면으로 드러나는 많은 정체성을 동시에 존재하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곧 최면, NLP, 분아적 접근, 사이비 스토리텔링 등에서 말하는, 엄마 같은 관찰자아와 그 자식들 같은 다양한 소자아들이 이루는 통합주의적 구조다.
그러나 어떠한 언어적 기만을 펼친다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삶의 양극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붓다의 말이다.
엄마와 같은 작가적 자아정체성을 추구하는 이는 반드시 그 반대의 측면으로도 크게 드러난다. 그 반대의 측면이란 바로 가장 미숙하고 유치한 이기적 아동이다. 서브컬쳐의 소재인 참피[실장석]의 특성을 가진 아동이다.
그러나 이처럼 명백한 양극성의 사실을 양극성의 기만자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신이 바로 그러한 미숙하고 유치한 이기적 아동이라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한다. 왜냐하면, 작가적 자아정체성을 궁극의 최종적 정체성으로 설정한 만큼, 이제 더는 뒤로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동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추구해온 궁극적 엄마의 정체성이 무너지게 된다.
때문에 이 기만자들은 궁극의 엄마를 무너뜨리느니 차라리 삶의 양극성을 붕괴시키고자 한다. 애써 무시하고 소외하고자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양극성의 기만자들은 거짓 안정과 거짓 평화를 만들기 위해, 작가적 자아정체성에 고착된 채 침적되어 고인 물이 된다. 썩은 늪이 된다.
이것은 썩어서 실패한 세계다.
그들은 지금 세계에 실패한 것이다.
자신의 세계에 실패한 이들이 반드시 움직이는 방식은 타자의 세계를 침략하는 것이다. 타자의 세계를 무시하고, 유린하며, 조롱한다.
이 세계 침략의 문제는 보통 권위의 문제가 된다.
세계에 실패한 이들의 핵심적인 특성은 자기의 권위만 존중받기를 바라며 남의 권위는 조롱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조금도 권위적이지 않고 평등하게 사람들의 자유를 증진해주는 민주적 리더인 것처럼 행세하며, 또 그것이 진정한 권위의 모습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언어로 자기의 정체성을 미화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결코 이러한 방식으로 권위를 집행하지 않는다. 남의 권위를 짓밟아 자신의 권위를 증대시키려 한다. 여기에서 남이라고 하는 타자는 이들의 품 안에서 착하게 행위하는 이들의 자식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즉 이들 자아의 확장된 대상물이 아니라, 이들이 침략한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가령 예를 들자면, 특정한 분야를 오랜 시간 연구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있는 전문가가 있다고 할 때, 이 세계 침략자들은 그 분야에 대해 적격한 학위 및 경력도 갖지 않았으면서 그저 자기 머릿속의 생각으로 그 전문가의 세계를 짓밟고자 한다.
아주 단순하게는, 어떠한 전공분야의 전문가인 박사에게 타전공의 학과생이 오히려 그 해당전공의 전문성을 자신이 더 갖고 있는 것처럼 입지화하며 해당전공의 세계를 무시하고 조롱한다는 말이다.
더 쉽게는, 상담심리학의 교수에게 문예창작학과의 학부생이, 마음의 진정한 본질은 이야기이고 심리상담의 진정한 본질은 이야기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다, 등의 주장을 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
이는 자격과 관계없이 평등하게 교류될 수 있는 일반적 주제에 대한 것이 아니며, 박사와 학부생 사이에 계급적인 우열이 있다는 말 또한 아니다.
문예창작학과 학부생이 문예창작의 논리를 들이밀며 이를 통해 자신이 심리학 교수보다 더 심리학 전문가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현실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수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일이 당연하다.
'문예창작학과는 원래 조폭들을 양성하는 곳인가? 물리적 힘이 없는 이들이 가서 펜으로 깡패짓하는 법을 배우는 곳인가? 작가라고 하는 이들은 자기가 글만 쓰면 그 어떤 전문가보다도 가장 높은 권위를 얻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인가? 작가들은 의료에 대한 글을 쓰면 의사보다 높아지고, 법률에 대한 글을 쓰면 판사보다 높아지며, 심리에 대한 글을 쓰면 심리학자보다 높아진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이들인가? 진짜 저질스러운 곳이고, 저질스러운 이들이구나.'
이처럼 세계 침략자로 인해, 가만히 온전하게 있던 문예창작학과와 작가라는 직업군은 무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이 또한 양극성이다.
침략자 자신이 무시하고 조롱하니, 무시되고 조롱되는 것이다.
세계에 실패한 이들은 반드시 무시하고 조롱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무시되고 조롱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순결한 희생자처럼 자신을 위치시켜, 해당분야의 전문가들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곤 한다. 자신은 겸손하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마치 해당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투사(projection)다. 자신이 해당분야의 권위를 무시하며 조롱하고 있기에, 해당분야의 권위자로부터 자신이 무시되고 조롱되는 것처럼 경험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는 아주 중요한 하나의 사실을 시사하는데, 그것은 이들이 정말로 무시하며 조롱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자신이 실패한 세계였다는 것이다.
투사의 기제를 활용해 이들은 자기가 침략한 세계의 권위자로부터, 자신의 세계에 대한 무시와 조롱이 자기를 대신해 발화되게끔 만든다.
즉, 이들은 자기가 실패한 세계의 권위를 짓밟고 싶은 것이다.
예를 들어, 소설을 쓰지 못해 실패한 이는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은 그 소설계의 권위를 짓밟고 싶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할 수는 없다. 그러니 다른 세계를 침략함으로써, 다른 세계의 전문가가 대신 소설계가 이렇게 형편없는 곳이냐며 비난하게끔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다.
이들이 직접 자기가 실패한 세계의 권위를 조롱할 수 없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러면, 자신의 실패가 기정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가 권위를 얻을 만큼 능력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자신의 세계를 조롱한다면 이러한 말이 들려올 것이다.
"니가 소설을 쓸 능력이 되지 않으니까 소설계의 권위를 무시하려고 하는구나. 여우의 신포도네."
그러니 이들은 자신이 실패한 세계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이동하려고 한다. 그렇게 다른 세계를 침략하여 대신 무시하며 조롱하고자 한다. 그래야 자신이 있던 원래 세계에서의 능력의 부재가 은폐될 수 있는 까닭이다.
다른 세계에서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원래 자기 분야가 아니었다는 합리화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른 세계에서 권위를 얻고자 하는 일에 치열하다. 왜일까? 그렇게 다른 세계에 집중해야, 원래 자기 세계에서의 실패를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험에 실패한 이가, 청소가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굴며 치열하게 청소를 하는 모습과도 같다.
그래서 이러한 침략자들이 다른 분야의 권위를 무시하며 조롱하는 정도는, 실제로는 자기 분야에서 성취를 거두지 못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무시하며 조롱하는 정도에 비례한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스스로를 무시하며 조롱하고 있다는 자각이 은폐되어 있기에, 이 무시와 조롱은 전술한 것처럼 다른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먼저 비롯한 것처럼 착각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다른 분야의 전문가의 무시와 조롱이 자기의 길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하다.
이를테면, 자기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가 있다. 그는 동네 편의점 아저씨에게 찾아가 자기를 인정해달라며 큰 소리를 낸다. 자기가 얼마나 그 편의점 점주보다 더 진정하게 편의점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지를 주장한다.
이것은 이러한 코미디다.
편의점 점주는 당연히 그를 무시하고 조롱할 수밖에 없다. 호인이라면 불쌍하게는 볼 것이다. 대개는 정신병으로 본다.
조금 더 심화해서 들어가볼 수도 있다.
이러한 이는 그의 아버지에게 무엇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는 소설을 쓰고 싶은데, 아버지가 그러한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아서 자기가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간주한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를 강압적인 독재자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의 특성은 아주 빠르게 동네 편의점 아저씨에게 투사된다. 그리고 이제 그는 편의점 점주가 원하는 상품만을 매대에 진열해놓는 점주의 '독재'에 대해, 통렬하게 분노하며 자신이 모든 이를 위한 민주적 편의점을 만들겠다고 저항한다. 자기가 모두를 만족시키는 진정한 민주적 편의점의 점주라며 그러한 자신의 권위를 실제의 편의점 점주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아버지 대신에 편의점 점주를 강압적인 독재자처럼 만들어 놓은 뒤 점주에게 저항하고 점주와 경쟁하는 엉뚱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세계 침략자들이 늘상 하는 일이란 이와 같다.
그러나 투사를 다 철회해보면, 실은 그의 아버지도 독재자가 아니다.
사실은 이러하다.
자기의 소설 쓰는 능력에 자신이 없고 실제로 결과물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 대해, 마치 아버지가 지지해주지 않아서 자기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굴며, 그는 자기 삶의 책임을 아버지에게 전가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
그의 세계는 왜 실패했는가?
그의 삶을 직접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임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자신이 직접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존적 태도다.
우리는 언제나 성공과 실패라는 양극성을 동시에 선택하며, 그 결과 또한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공만 하고 실패는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성공을 바라는 이는 동일한 크기로 실패에 노출된다. 여기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은, 자신이 큰 성공을 추구했기에 그 결과로 큰 실패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이 위대한 소설가가 되기를 꿈꾼 만큼, 보잘 것 없는 소설가로서의 운명 또한 함께 출현한다.
그리고 선택이라는 것은 양자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렇게 '양자를 동시에' 선택하는 것이다.
성공을 추구했기에 실패한 세계의 책임을 회피하고, 그것은 마치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왜곡하며, 그리고 여전히 자신은 능력이 있다면서 다른 세계를 침략해 권위를 얻기를 희망하는 일은, 그저 영원한 자기기만에 불과할 뿐이다.
권위에 대한 집착이 생겨나는 이유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능력이 없는 만큼, 타자의 권위를 빼앗아 자기의 권위로 삼고자 하며, 그러한 권위가 자신의 능력을 대신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아무리 권위에 집착해도 능력은 생기지 않는다. 남의 세계를 약탈해 얻은 그 전리품으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위장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밑줄을 그어 읽는 편이 좋다, 능력의 정도는 책임의 정도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책임지는 이만이 능력을 갖게 된다.
잘 알려진 스파이더맨의 대사인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뒤집어야 정확한다.
"큰 책임에는 큰 힘이 따른다." 표현 그대로다.
능력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책임져야 한다.
이를테면 하나의 예로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심리학을 책임질 각오가 되었는가? 그 책임을 위해 적격한 자격을 갖추었는가? 누가 심리학을 이상한 것이라고 공격해도 정당하게 지켜낼 수 있는 그 정통의 위상을 취득했는가? 자기 자아가 아니라 심리학을 위해 싸울 수 있는가?
이러한 것이 책임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물론 이 또한 양극성 사이에서 펼쳐진다. 심리학과 심리학이 아닌 것 사이에서의 불안과 긴장을 그 책임으로 안고 간다. 심리학과 심리학이 아닌 것을 통합해내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과 심리학이 아닌 것에 섬세해지는 것이다. 그 섬세함이 바로 능력이다.
그러니 양극성을 책임지는 일에 실패한 자신의 세계에서 도망쳐나와, 타자의 세계를 침략하려는 책임회피자들에게 이러한 능력이 생길 가능성이란 없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세계의 실패자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져야 한다. 그 자신이 성공과 실패를 동시에 선택했다는 그 사실에 응답해야 한다.
세계가 실패한 것은 자신의 능력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하게 그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세계는 계속 실패한 세계로 남게 된 것이고, 그 자신은 계속 세계의 실패자로 남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것이 앞서 말한 침적의 상태다.
이 침적의 상태는, 타자의 세계에서 권위를 얻음으로써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한 세계로 돌아가 그 세계에 응답함으로써, 이제 그 자신의 삶을 책임짐으로써 해소된다.
우리는 언제나 양극을 동시에 선택하는 것이며, 그 선택은 결국 그러한 양극 사이에서 삶을 지속하겠다고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계는 펼쳐진다. 권위는 확보된다. 지속성이야말로 권위의 핵심이다.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계속하기를 계속하기."
그 어떤 보상과 대가가 없어도, 선택된 양극 사이에서의 삶을 계속하는 일을 계속하는 일이 곧 자신의 세계에 권위를 담보해준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선택하는 것인가?
중도(中道)를 선택하는 것이다.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의 볶음밥과 같은 중립이나, 짬짜면 같은 중첩이 아니다. 중도라는 것은 양극에 치우지지 않는 것이다.
큰 성공과 그에 상응하는 큰 실패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하니, 책임지기는 수월하다. 책임이 더는 무거운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게 책임지니 능력이 살아난다. 계속하기를 계속할 수 있는 지속력이 담보된다.
권위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통제하지 않는 자상한 민주적 지도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은밀한 도덕주의의 우월감에 근거해 얻어지는 것이 권위가 아니라, 자기의 세계를 배신하지 않고 지속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 권위다.
그리고 세계 침략자는 바로 이러한 타자의 권위에 침을 뱉은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원래 세계가 가졌어야 할 그 권위에도 침을 뱉은 것이다.
자신이 지금 특정분야에 적격한 권위를 갖고 있지 않은데도 오히려 그 분야의 전문가들보다 더 전문가인 척 권위를 얻으려 하고 있다면, 이제는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야 할 때다. 자신이 배신한 자신의 세계를 되돌려야 할 때다.
세계의 실패자에게도 아직 가능성은 있다. 삶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세계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일을 그만 두면, 자신의 세계는 꼭 다시 펼쳐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