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죽음

"두려움에 대한 실존심리학의 이해"

by 깨닫는마음씨




우리가 너무나 쉽게 잘 죽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언어가 세워졌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한 자구책으로서.


그러나 이것은 인류의 역사상 단 한 번도 효과적으로 작동해본 적이 없는 무용책이다.


정직하게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정말로 개인이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100만 권 정도 쓰면, 코로나가 3차 접종자들을 귀하게 알아보고 피해가듯이, "아 여기 훌륭한 작가분이 계셨군요. 제가 미처 몰라보고..."라면서 죽음이 자신을 피해가는가?


아니면 자신의 글로 아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나중에 유엔에서 전세계인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연설도 하게 됨으로써 더 많은 이들에게 기억될 수 있게 되면, SF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사이버공간에 자신의 의식을 업로드하듯이 사람들의 뇌 속에서 독립된 자의식을 가진 개인의 모습 그대로 생존할 수 있게 되는가?


또는 나중에 고전으로 불리게 될 위대한 문학작품을 써내면, 비록 작가의 몸은 죽을지라도 인류의 가슴 속에 그 정신이 불멸하게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러한 것을 정말로 개인의 생존이 유지되는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는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 언제라도 톨킨이랑 카톡을 하듯이 "형 밥 먹었어? 나 미선이랑 헤어졌는데 소주 한 잔 사주라. ㅋㅋㅋ"라며 인격 대 인격의 대화라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백은 땅으로 흩어지고 혼은 하늘로 올라가니 혼으로서의 진정한 자신은 죽지 않는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소비하여 일종의 영적 지식을 충분히 축적해놓으면, 그 지식의 도움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모든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언어의 자구적 효용성이 아니라, 다만 죽음을 우리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 두려움의 정도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실상 이 글의 제목에서처럼 언어와 죽음은 정당한 대립항으로 병렬되어 쓰일 수 있는 것이 원래 아니다. 착각을 해지하기 위해 마치 그것이 대립항인 것처럼 임의적인 구도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언어와 죽음은 본질과 실존의 변주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실존철학의 이 명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그러니 이렇게도 성립된다.


"죽음은 언어에 앞선다."


애초에 상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앞서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만, 애초 맞먹을 수 없는 것을 맞먹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흐르는 자리에는 늘 애처로운 몸짓이 있다.


이 애처로움은 자아의 것이다.


자아는 언어로 만들어졌기에, 언어의 끝은 자아의 끝이다.


모든 언어는 죽음 앞에서 끝나며, 때문에 죽음이란 자아에게 정말로 죽음이다.


그래서 죽음이 직감될 때 자아는 더 많은 언어로 자신을 무장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 의도를 낳는다. 자아가 자신을 더욱 언어로 무장하는 만큼 실은 언어의 한계는 더 빨리 찾아오게 되는 까닭이다. 쓸 수 있는 패가 금방 다 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죽음을 직감하는 자아는 언어를 남용함으로써 더욱 빨리 자아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직감에 대한 자기충족적 예언을 이룬다.


그러나 언어를 쓰지 않을 수는 없다.


언어로 만들어진 자아는, 언어 말고는 쓸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쓰면 쓸수록 더 빨리 죽음을 마주하게 되지만, 쓰지 않으면 그저 무력하게만 죽음에게로 끌려가게 되는 것 같다. 자아에게는 그러한 자신의 무력함이 더욱 싫다. 차라리 쓸데없는 저항이라도 해보고 싶다. 그리고 동시에 자아는 쓸데없이 저항한 만큼 죽음을 오히려 가속화시킨 그 자신의 결정에 너무나 화가 난다.


그래서 자아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폭탄이 되어 이제 타자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세상으로 화를 뿌리러 다닌다. 그냥 무력해지기보다는, 또 해결할 수 없는 자기모순 속에서 자기비난만을 거듭하는 방식으로 더 무력해지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에 대해 영향력이 있는 주체가 되고 싶은 것이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강력한 신적 위세라도 한번 얻어 보고 싶다.


그렇게 자아는 작가가, 연예인이, 정치가가 된다.


프로이트는 위대하다.


이 모든 예능은 화의 승화다.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형태로 표현된 화다.


그리고 이 화는 두려움에서 온 것이다. 화난 이는 언제나 두려워하는 이다. 그 둘은 같다.


죽음 앞에 서있는 자아의 모습,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일 뿐이다.


오늘날, 작가, 연예인, 정치가가 가장 관심의 중심이 되어 있고, 또 그러한 예능인으로 기능하는 일이 예찬되고 있는 시대상은, 이 시대에 얼마나 거대하게 우리가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 방증이다.


언어가 실용적 보편화를 이룬 것이 이념이다. 우리는 쉬이 이 이념에 중독되고자 한다. 이념중독은 곧 언어중독이다. 언어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념이 보급되는 이유는, 그 이념을 통해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즉, 이념이란 해결사의 위상을 갖게 된 언어인 것이다.


이념중독은 이러한 해결사적 언어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니 이를테면 대표적인 이념중독인 정치중독이 담고 있는 "정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거야."라는 목소리는 실은 정확한 형태가 아니다. 그 정확한 형태는 "언어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거야."라고 하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 생활의 도처에 문제들이 산재해있고, 언어는 그 문제들을 처리해줄 유능한 해결사처럼 간주된다.


이처럼 분명하게 언어는 어벤져스다. 오늘날 히어로물의 과잉소비는 결국 언어의 과잉소비와 관련된다.


두려움이 추동하고 있는 문화현상들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두려움에 대한 실존심리학의 중요한 두 가지의 통찰을 살펴보는 일은 대단히 유익하다.


1.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이다.


2. 우리는 근본적인 두려움을 잊기 위해 작은 두려움들을 일부러 창조해낸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언어를 해결사로 간주하고 있는 한, 오히려 문제들은 끝없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어서 해결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해결사를 있게 하기 위해 문제를 있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를 드높이기 위해, 우리의 세상은 더욱더 복잡한 문제 속으로 빠져든다.


그럼에도 죽음이라고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건드려지지 않는다. 언어로는 죽음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솔직히 다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죽음은 모르는 척 소외시킨 채, 언어의 힘으로 그밖의 다른 작은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드높이며, 언어를 더욱 영광되게 만들고자 한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 눈 감고 하는 아웅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죽음을 어르고 달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을 보고 결국에는 죽음이 방긋 까르르 우호적인 웃음을 지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이것이 바로 주술이다.


눈을 감고 상대는 외면하면서, 상대와 관계없는 요식적 행위를 하고 있으면, 그 상대가 임의대로 통제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 행위는 정확한 주술적 의도에서 비롯한다.


원래 언어는 주술이다.


언어가 그처럼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주술이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영원한 삽질이라는 의미에서 주술이다.


죽음의 문제에 대한 삽질은 언제나 동시에 삶의 문제에 대한 삽질이다.


삶과 죽음은 가장 근본적인 양극성이다. 둘은 동시에 함께 간다. 상존하며 상멸한다.


그러니 언어라고 하는 주술이 실은 죽음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아무런 효용없는 무용책이라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이 자리에서, 우리가 삶에 대해 이런저런 고급언어로 아는 척을 해온 일들이 다 헛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말로 열심히 지어낸 소설들이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거짓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언어로 모든 것을 품어내는 삶의 스승인 양 행세했던 시간들이 전적인 착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래서 자아는 실존심리학을 싫어한다.


자아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부정하려는 나쁜 예언자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미움을 받아도 실존심리학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자아는 원래 헛된 것이고, 때문에 자아는 그 임무를 충실하게 완수했다고.


자아의 경계를 분명하게 짓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정말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묻기 위해서다.


실존심리학은 이렇게 묻는다.


"너 자아니?"


실존심리학은 우리 자신이 자아가 아니라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고자 한다.


깨달음에의 제안은 이어진다.


"혹시 자아가 아니라면, 건방지게 네 자신을 부모처럼 놓고 죽음을 아이처럼 놓은 뒤 죽음에 대해 눈 가리고 아웅하지 말고, 한번 죽음이라고 하는 상대를 존귀한 타자로 존중하며 눈을 뜨고 마주하는 게 어때?"


이 말을 듣고, 자아가 더는 아니고 싶은, 자아의 종족특성인 두려움에서 이제 그만 벗어나고 싶은 이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 죽음을 마주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아무 것도 없는데?"


당연하다.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일 올 비를 오늘 볼 수는 없다.


다만 당신은 보고 있다.


당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당신 자신의 삶을.


당신의 눈앞을 가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언어로 가려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삶만이 당신의 눈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바로 이렇게, 죽음을 마주하여 보고자 하는 당신은 삶을 마주하여 보게 된다.


죽음을 깨닫고자 하는 당신은 삶을 깨닫게 된다.


당신이 그 어떤 언어에 의존하지 않고도 이미 스스로 살아 있다는 가장 위대한 존재의 사실 그 자체를 깨닫게 된다.


당신은 존재한다.


아, 그렇다, 당신은 존재다.


자아가 아니라, 당신은 존재다.


당신은 아무런 무리없이 너무나 쉽게 잘 살아 있는 존재다.


그와 같이, 매우 중요하게도, 삶과 죽음의 동시적 양극성에 따라, 당신은 너무나 쉽게 잘 죽을 존재다.


아주 쉽게 떠올려보자.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 죽음에 실패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죽음에 불합격하는 이는 없다. 모두가 다 한 번에 통과한다. 이처럼 우리가 너무나 쉽게 '잘' 살아 있는 존재인 것처럼,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잘' 죽는 존재이기까지 하다.


이미 잘 하는 일이다. 노력없이도 이미 삶이듯이, 노력없이도 이미 죽음이다. 이처럼 삶을 '잘' 하니, 죽음도 '잘' 한다.


이미 잘 하는 일인데, 무엇이 두려운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어디 차가운 우주 같은 깜깜한 공간에서 좁은 관에 갇혀 홀로 외롭게 표류하다가 점점 폐색되어 작은 먼지로 사라질 것 같은, 소위 죽음에 대한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다. 전적인 판타지다. 전부 다 언어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그 환상 때문에 두려워진 것뿐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실 죽음이 낳은 두려움이 아니라 언어가 낳은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해결사인 양 행세하고 있던 언어가 실은 우리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사신(死神)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아까 우리는 확인하지 않았던가.


죽음을 정말로 마주하여 보고자 눈을 떴을 때, 우리의 눈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를 단 1%도 위협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의 삶만 있었다.


죽음이 우리를 위협한다고 말하는 언어만을 우리의 눈앞에서 보고 있다가, 이제 눈앞에 그러한 언어들이 아무 것도 없도록 치우니, 자연스럽게 드러난 사실적인 삶은 우리에게 결코 위협적인 것이 아니었다.


삶이 우리에게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니, 자연스럽게 동시적 양극성에 따라, 죽음도 우리에게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알려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충분하다.


죽음이 주관성 속에서 어떻게 체험될지는 이 세상 누구도 모른다.


죽음의 내용은 다만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죽음과 우리의 상관적 차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의 특성과 동일하게, 죽음은 우리에게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며, 동시에 죽음은 이미 우리가 너무나 쉽게 잘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위협적이지도 않고, 쉽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이 두려운가?


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싫은 것이다.


우리는 고통이 싫은 것이다.


죽음이라는 언어는 사실 죽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수반되리라고 가정되는 물리적 고통, 신체적 고통, 관계적 고통 등을 지시한다.


전적으로 모르는 것은 언어로 지시할 수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언어는 죽어가는 이가 내지르는 괴로운 신음, 사별한 이의 서러운 눈물, 신체의 상태로 짐작 가능한 몸의 통증 등을 묘사하며,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죽음이 아니라 고통이며, 고통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싫은 것이다.


고통은 정말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불호의 대상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불호의 고통을 해소해주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섬세하게 접근될 필요가 있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있으니 빨리 죽는 것이 낫다는 염세주의적 담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균형에 대한 신호다. 지금 균형이 깨져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고통이다.


다시 말해, 고통은 균형을 이루어야 할 양극성이 붕괴되었을 때 생겨난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통은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근본적인 양극성 사이에서, 삶이라고 하는 축을 과잉되게 강조함으로써 양극성을 해치는 '삶의 남용'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남용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방식이 다시 한 번 언어중독이다.


자아는 언어에 중독되어, 언어를 통해 삶을 더욱 거대하게 확장된 형태로 유지하고자 한다. 삶에 언어를 끝없이 밀어넣어 그 덩치를 부풀리는 것과도 같다. 이렇게 삶을 과잉되게 남용한 만큼, 자아는 자신이 죽음을 방비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삶과 죽음의 균형이 깨진 이 상황에서 발생하는 것이 고통이다. 그런데 자아는 이 고통을 싫지만 감수하려 한다. 고통을 참는 만큼, 죽음은 멀어지고, 삶은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고통을 만드는 주체는 사실 자아다. 대표적인 붓다의 말이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라면 고통은 필수라고 자아는 간주하기도 한다. 자아 자신이 언어로 삶을 남용해 만든 고통을 스스로 신성한 필수재처럼 삼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만든 것을 스스로 신봉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아는 사실 고통의 우상숭배자며, 고통의 예찬자다.


이러한 일이 생겨나는 이유는, 상대적인 언어로 사는 자아의 입장에서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상대적인 모순의 관계로밖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이 가장 최대치가 되면 죽음은 가장 최소치가 되는 것이라고 자아는 간주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아는 언어를 통해 자신이 삶을 지켜냈다고 믿으며, 더욱더 언어의 효능감에 중독된다.


물론 그 효능은 완벽한 허상이며, 심지어는 플라시보조차도 일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기 때문이다. 양극성이란 역설을 의미한다. 이것은 삶이 가장 최대치가 되면 죽음도 가장 최대치가 되는 것이다. 가장 삶이 있으면 가장 죽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삶이면 가장 죽음인 것이다.


그러니 자아가 삶을 과잉되게 하는 일은 결국 죽음 또한 과잉되게 하는 일만을 야기한다. 더 빨리, 더 가까이, 그리고 더 강한 세력으로 죽음은 자아 앞에 서있게 된다.


이처럼 죽음을 피하기 위해 자아가 언어로 삶을 남용한 일의 결과는, 그저 죽음을 더욱 자기 앞으로 불러들인 것뿐이다. 심지어는 그 남용의 부산물인 고통마저도 부가시켰다.


죽는 데다가 고통까지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을 고통스러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아가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이 고통스러운 죽음이다.


자아는 자신의 언어능력으로 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회피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 실상은 언어를 쓰고 있기에 더욱 고통이 증폭되는 것이다.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어떤 이가 아침에 일어나 전날 무리해서 마신 술 때문에 숙취를 호소한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구토감이 가득하다. 전형적으로 언어로 만들어진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자아정체성을 과잉되게 소비하며 삶을 남용했기에 생긴 고통이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죽을 것만 같다. 그래서 이 숙취호소인은 펜을 들어 자신의 감정을 글로 묘사하고자 한다. 분노와 회한과 고독과 환희를 울고 웃으며 메모지에 열심히 담아낸다.


숙취가 해결되었는가?


이러한 언어활동을 하는 일이, 숙취의 고통을 더는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고통만 더 배가시킬 뿐이다.


여기에서 고통을 해소하기에 가장 좋은 일은 무엇인가?


자는 일이다.


죽은 듯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드는 일이다.


잠은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죽음의 현상이다.


죽음은 모든 연쇄를 끊어낸다. 고통의 연쇄마저도 끊어낸다. 이것이 고통을 치유하는 죽음의 힘이다.


붓다는 이 사실을 알았다. 가장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한 붓다가 보리수에 앉아 죽음을 자기 앞으로 끌어왔을 때, 모든 고통은 해소되었다. 삶과 죽음이 애초 하나이며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존재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 그렇게 자신이 투쟁하고 있었던 죽음이라고 하는 존재의 사실을 온전하게 받아들인 순간, 그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그는 가장 존재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죽음의 힘을 다시 존재의 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존재는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삶으로도 죽음으로도 언제나 언어 따위가 흉내낼 수 없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그러니 언어로는 더 악화되기만 하는 것을 죽음은 할 수 있다.


언어는 자아의 원리고, 죽음은 존재의 원리다.


그러니 자아는 할 수 없는 것을 존재는 할 수 있다.


고통을 정직하게 싫은 것으로 알기에 존재는 늘 고통을 끊으려고 움직인다.


존재는 고통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고통을 인내하며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아나 하는 일이다.


존재는 삶과 죽음으로 다 존재하기에, 죽음을 회피하고자 삶을 남용하며 만들어진 고통을 다시 또 인내하는 식으로, 몇 겹의 삽질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결국 우리가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앞서 살펴봤던 죽음의 문제도, 그리고 지금 살펴본 고통의 문제도, 대단히 유연하게 해소될 수 있다.


언제나 자아이기에 문제가 된다.


자아는 자기가 존재한다고 착각하기에, 즉 자아는 자기가 존재라고 착각하기에 문제가 된다.


자아가 나라고 하는 존재를 참칭하기에 문제가 된다.


이러한 자아는 그 오만함으로 인해 대개 고통스러운 죽음을 향한다. 자아 자신이 제일 피하고 싶었던 현실을 정확하게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도덕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이다.


양극성과 같은 실존심리학의 개념을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주 단순한 예로 고통스러우면 그만 해야 되는데, 자기 머릿속의 언어로 계속 밀어붙이니, 더 고통스러워지고, 더 쉽게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우리가 자아일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잘 죽는다.


또한 우리가 존재일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잘 죽는다.


동일한 언어표현이지만, 그 의미는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하나는 영원한 두려움의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한 미소의 차원이다.


자아는 두려워하고, 존재는 미소짓는다.


언어에 뿌리내린 자아는 두려워하고, 죽음에 뿌리내린 존재는 미소짓는다.


이제 물어보자.


무엇이 두려운가?


자아다.


자아가 두렵지, 당신은 아니다.


당신은 그 미소를 잃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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