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조건화가 만드는 몸에 대한 전쟁을 끝내며"
깨달음이라고 하는 체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야기될 수 없는 체험입니다. 아무리 정교하게 이야기하려고 해도 언어로 표현된 것은 늘 그것이 아닙니다. 종교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이를 형언불가능성(ineffability)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이 깨달음의 체험이 약에 취한 듯 두루뭉술하고 몽환적인 종교적 환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체험자에게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체험보다도 명징하게 다가오는 사실적 체험입니다. 오히려 체험하기 전까지의 삶이 흐느적거리는 비실제적 부유물과 같았다고 체험자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체험자들은 자신이 깨달은 줄을 압니다. 누구에게 인정을 받는다거나, 문헌을 통해 점검해보지 않아도, 자신이 그러한 줄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심지어는 깨달음 등과 같은 언어를 소비하는 문화에 있지 않았던 체험자라 할지라도, 이 자각은 생겨납니다.
때문에 종교심리학의 주제로 다루어지지만,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체험은 특정한 종교, 특정한 문화, 특정한 방법론에만 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진짜로 살고 있는 이라면, 또 진짜로 살고자 하는 이라면, 당연히 그 진짜를 만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진짜로 산다는 것은, 이야기없이 스스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그것만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그 모든 소재로도 깨달을 수 있지만, 그 모든 소재를 이야기로 소비하고 있는 한,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낡은 이야기를 벗어나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미지의 이야기를 향해 도전하고, 그 새로운 이야기가 충분히 자신에게 소화되게끔 연금술의 항아리 속과 같은 변증법적 시간을 가짐으로써 가능해진다는 식의 주장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그저 아주 전형적인 학습의 기제일 뿐,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깨달음은 학습이 아닙니다. 도전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 나아지려는 자기향상심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더, 더, 더, 라고 하는 학습의 상대적인 기제로는 원래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야기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선(禪)에서는 경전을 불태웠습니다.
그 어떤 신성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이야기 및 이야기의 학습기제에 의존해 살고 있는 한 우리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및 이야기의 학습기제를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가챠를 뽑을 때의 기대 반 염려 반의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곤 합니다.
'객관적으로 이만한 경지면 내가 깨달은 것 같은데.'
'이 정도 노력했으면 깨달음에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데.'
'뭔가 내가 조금 달라지고 놀라운 체험들도 조금 있는데 슬슬 이제 내가 깨달은 건가.'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깨달음이 아니니 마음 푹 놓고 안심해도 됩니다.
말을 바꾸어 보면 분명합니다.
'객관적으로 이만한 경지면 내가 소변이 마려운 것 같은데.'
'이 정도 노력했으면 소변이 마려운 상태에 조금 가까워진 것 같은데.'
'뭔가 내가 조금 달라지고 놀라운 체험들도 조금 있는데 슬슬 이제 내가 소변이 마려운 건가.'
이야기에 비추어야만 자신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나아가 이야기가 오히려 자신을 더욱 잘 말해준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깨달음의 가장 반대편을 향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착각의 기획 속에서는 더욱 길을 잃습니다.
이야기가 자신을 보여주니, 이제 더 많은 이야기를 소비하면 더 많은 자신을 알게 되고, 더 좋은 이야기를 소비하면 더 좋은 자신을 얻게 된다고 간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야기중독에 빠진 상태입니다.
치명적 질환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야기하는 증세보다 치명적입니다.
그것들은 다만 '건강의 상태'를 앗아갈 수 있을 뿐이지만, 이 이야기중독은 우리 자신의 '건강의 구조'를 영영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중독자들의 습성은 반드시 중독을 전염시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혼자 마약을 소비하면 되지, 꼭 다른 이들에게도 마약을 보급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이가 더 많은 타인을 속임으로써 거짓말을 공유하는 동일한 양적 세력을 만들어 그 안에서 안심하고자 하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들은 거짓말도 다 같이 하면 진짜가 된다고 하는 판타지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중독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 널리 보급하려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지구의 모든 인류가 "인간은 날 수 있다."라는 거짓말을 전원 다 공유해서, 함께 손을 잡고 모두가 동시에 고층빌딩에서 뛰어 내린다고 해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딱딱한 지면일 뿐입니다.
인류 전원이 하나의 신념을 성공적으로 똑같이 공유하게 되었다고 해서, 무슨 판타지 같은 의식의 진화가 일어나서 모두가 하나된 의식의 힘으로 사실법칙을 바꿀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일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특정한 이들만이 펼치는 일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잠정적으로 내재되어 언제라도 활성화될 수 있는 일입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야기로 축적되는 것이며, 지식인이란 곧 이야기를 자본으로 갖고 있는 지식자본가입니다.
자본은 언제나 양적 논리입니다. 양적으로 많은 것이 우세합니다. 그러니 이 지식자본가들은 언제나 자기의 정보량을 더윽 증대시키려고 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를 소비하고 축적하여 지식자본가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하며, 나아가서는 더 효율적으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자신의 정보처리과정의 우수성 또한 특별하게 입지화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지식자본가의 방식이 그의 열등감 등과 같은 심리적 소인과 연결되어 과잉되게 활성화될 때, 지식자본가인 지식인은 흔히 말하는 구루(guru)가 될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에서 구루라고 하는 표현은 사전에 나오는 중립적인 의미가 아니라, 깨달음을 참칭하는 지식자본가를 특정하게 지시하는 표현입니다.
이 구루현상은 아주 쉽게, 누군가가 자신의 양적 자본을 근거로 깨달은 이인 척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양적 자본의 힘을 빌어 다른 이에게 인생스승인 척 구는 일입니다.
물론 지식만이 그 소재는 아닙니다. 양적으로 계량될 수 있는 돈, 인기와 같은 것들 또한 그 소재입니다. 돈과 인기를 바탕으로 남들에게 인생스승처럼 행세하는 이의 모습은 우리의 일상에 만연합니다. 그러나 특별히 지식이 중심소재가 되는 이유는 지금이 정보화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정보화시대의 지식인은 예전처럼 정보의 보급자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핵심적으로 정보의 평가자 역할을 합니다. 더는 한 개인이 소화해낼 수 없는 과도한 정보량 속에서 어떠한 정보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지를 사람들에게 대신 판단해주는 그 정보의 평가자 역할이 이 정보화시대에 지식인이 자임하는 역할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식자본가는 사람들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을 자신이 획득한 것처럼 간주합니다. 그 힘의 결과로 돈과 인기 또한 자신에게 수렴되는 것으로 경험됩니다. 그렇게 지식자본을 통해 왕처럼 우월한 입지를 확보한 이는 이제 이렇게 선언하게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지식자본가가 확연히 구루로 드러나게 되는 바로 그 지점입니다.
그리고 구루는 자신의 성공적인 지식사업의 요령을 다음과 같은 말로 다시 상품화시키게 됩니다.
"저처럼 이야기를 많이 소비해 깨달으시면, 돈과 인기뿐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자, 이야기를 통해 깨닫는 방법을 저에게 배우러 오세요."
이처럼 구루는 결국 사기꾼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사기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깨달음은 이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효과적인 지식소매상이 되는 법, 또는 정보보급자에서 정보평가자로 거듭나는 법, 또는 지식자본을 경영하는 법 등으로 언술될 때, 이것은 그 어떤 사기도 아닙니다. 너무나 정당한 사업모델입니다.
그러나 구루가 이러한 사업에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것은 순도 100%의 사기가 됩니다. 깨달음과 전혀 상관없는 일에 깨달음을 갖다 붙이는 일이 사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조금 조심스러운 구루는, 아마도 자신이 선량하며 정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구루는, 노골적으로 깨달음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대신에 다른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그 이름은 이러합니다.
'심리학과 심리상담'
구루들이 깨달음 대신에 오늘날 많이 활용하는 이름입니다.
이야기라고 하는 지식자본을 통해 이루는 자신의 지식사업에 대해 이들은 심리학 내지 심리상담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 또한 순도 100%의 사기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심리학 및 심리상담은 인간이 이야기라고 하는 지식자본을 통해 성장해나가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심리학이 그러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지금 심리학이라는 이름 대신에 서사학 내지 이야기학 등과 같은 이름을, 심리학의 내용을 지시하는 데 쓰고 있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수준에서도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심리학은 마음을 다루는 분야지, 이야기를 다루는 분야가 아닙니다.
만약 어떠한 구루가 "마음은 이야기다."라는 거짓말로 심리학을 이야기의 영역으로 엮으려고 한다면, 어떠한 심리학자가 전기공학 분야에 가서 "전기는 마음이다, 그러니 전기공학은 마음을 다루어야 한다."라고 하는 일도 정당화됩니다.
돌이나 안 맞으면 다행일 일입니다.
대체로 한국 사람들이 착해서 구루가 돌 맞아 죽었다는 뉴스가 들려오지 않는 일은 참 다행입니다.
이 사람들의 선함에 빌붙어, 구루는 사기의 사업을 지속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더 많은 돈과 인기를 모음으로써 자신의 깨달음이 진정한 깨달음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구루는 사실 자신이 정말로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셈입니다.
깨달음의 정도를 소유된 양적 자본의 정도로 환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깨달음을 어떠한 상대적 '정도(degree)'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깨달음은 돈과 인기를 얻으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돈과 인기를 얻어야 된다는 것 또한 아닙니다.
돈과 인기가 없으면 충분한 자신이지 않은 것 같아 견딜 수 없어 하는, 바로 그렇게 돈과 인기라는 상대적인 것에 의존해야만 자신을 세울 수 있다고 믿는 그 착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돈과 인기, 그리고 지식의 상대적 정도에 따라 더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있는 깨달음이라면, 그러한 것을 굳이 얻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더 쉽게 얻을 수 있는 다른 상대적인 소재는 많고도 많습니다.
깨달음이란 다만 절대적인 것에 대한 사랑으로 끌리는 길일 뿐입니다. 상대적으로 얼마든지 대체가능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대체불가능한 것을 얻고 싶어 가는 길일 뿐입니다. 자신이 바로 그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싶어 가는 길일 뿐입니다.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통해 획득되는 지식정보라는 것은 늘 빠르게 대체되는 대표적인 상대재들입니다.
이러한 상대적인 소재를 아무리 소비하고 축적한다 해서 절대적인 소재인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중독에 빠진 이들이 자주 믿는 판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적인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고유하게 성장해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바로 그러한 것이라고 믿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라고 하는 것에 임의적인 절대성을 부여하고자 하는 이 일은 판타지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실제 자신의 이야기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무수하게 반복되어 온 흔하디 흔한 이야기입니다.
실존적 경향성을 가진 정신분석가인 어빈 얄롬은 그의 책 『니체가 눈물 흘릴 때』에서, 한 개인이 자신만의 것이라고 확신하던 하나의 고유한 이야기가, 실은 그 역할의 위치에 어느 누가 있더라도 늘 똑같이 구성되는 진부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소설 속 주인공이 단 한 번뿐인 자신만의 대사였다고 생각한 것을, 과거 주인공이 했던 역할에 지금 서있는 인물이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발화합니다. 그에 따라 상대도 과거 주인공에게 했던 반응과 완전히 똑같은 반응을 반복합니다. 이를 보며, 주인공은 자신에게만 유일하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순간이 완벽한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정말로 이해합니다.
이것은 정신분석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꿈을 꾸며 살고, 그 꿈속에서 똑같은 연극만을 반복하며, 연극 속 전형적인 역할을 '진정한 나의 이야기'라고 믿고 사는 바로 이 이야기로부터 해방되고자 정신분석은 출범하였습니다.
실존상담은 이야기로부터 해방된 자리가 바로 존재의 자리라는 사실을 이어 알립니다. 그리고 이 존재의 자리가 실은 이 모든 것의 원래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야기로 존재의 자리를 뒤덮어 마치 이야기가 더 본래적인 것인 마냥 기만을 통해 어떻게 존재를 소외시켜 왔는지를 발견하게끔 안내합니다.
이 지점에서 실존상담과 선(禪)은 마치 배다른 쌍둥이처럼 조우합니다.
실존상담이 많은 심리상담의 접근 중에서도 거의 독보적으로, 심지어는 영성과 심리학의 결합을 표방하는 자아초월 심리학보다도 더 명징하게, 깨달음을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와 같습니다. 실존상담은 선의 기획처럼 개인이 존재의 자리를 스스로 직접 발견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접근인 까닭입니다.
무수히 말했어도 또 말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아닙니다.
존재만이 대체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그 안이 아무리 넓고 풍요롭게 보여도 반드시 닫힌 세계입니다. 자기완결적 세계입니다.
근본적으로 통제의 감옥입니다.
때문에 붓다는 이야기로부터의 해탈을 말했고, 예수는 이야기를 끊는 사랑을 말했습니다.
정말로 역설적이게도,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는 사랑이야기지만, 사랑은 이야기없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속성으로 따라붙는 무조건성의 의미를 떠올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무조건성은 무서사성입니다.
이 무조건성의 의미를 일부러 굴절시켜, 그 어떤 이야기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전(全)서사성을 대개 구루는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실증적으로 너무나 잘 압니다.
정직하게, 선생님은 자기를 잘 따르고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고, 엄마는 스스로 척척 잘 하면서도 엄마에게도 애교많고 살가운 아이의 이야기를 더 좋아하며, 결혼을 원하는 이는 우선 으뜸으로 인성이 훌륭하면서도 외모, 재산, 학벌, 직장 등의 요소 또한 일정 수준 이상을 충족시키는 결혼상대자의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모든 이야기를 다 무조건적으로 온전하게 품어낼 것이라고 말하는 구루도, 그에게 돈과 인기를 더 많이 제공하는 이야기를 더 가득 품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이처럼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원래 조건적입니다.
조건을 충족시켜야 보상을 받는 것이 이야기의 구조입니다. 이야기를 이야기로 성립시키는 그 핵심인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어렵사리 조건을 달성해 보상을 획득하는 과정에 대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작법으로 인해 가장 조건화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통제라는 것은 조건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이야기의 작법처럼 통제의 기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몸을 이해하려고 하고, 동시에 몸을 이끌어가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몸은 이야기에 의해 계속 조건화됩니다. 자기가 설정한 이상적인 자아정체성의 이야기를 달성하기 위해 몸을 끼워 맞추려는 일 등이 대표적인 일입니다.
즉, 이야기의 구조로 인해 우리는 우리의 몸과 갈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와 갈등하고 있습니다.
실존철학자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우리는 몸을 도구로 가진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바로 몸이다."
인간 존재란 곧 이 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자신이 조건적으로 다루어야 할 도구로 간주하고 있는 한, 우리는 조건적 이야기로 우리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는 원래 조건없이 존재합니다. 존재의 본래적 특성은 당연히 무조건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조건성의 몸[존재]을 억지로 이야기의 조건적 감옥에 넣어, 이야기의 창문을 통해서만 몸을 접하려 하고, 이야기의 규칙에 의해서만 몸을 통제하려 하니, 곧 무조건성을 억지로 조건성으로 구속시키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감옥의 속박은 해방되어야 하고, 감옥의 창살은 끊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조건없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조건없는 사랑의 일입니다.
이처럼 우리를 해방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 사랑의 무조건성입니다. 그리고 이 무조건성은 다시 존재의 특성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무조건성입니다. 무조건성의 회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무조건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무조건성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존재[몸]의 무조건성은 존재[몸]에 대한 도구화를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확인됩니다.
지식, 돈, 인기, 이러한 양적 소재들은 인간의 몸을 도구로 환원시켜 조건을 달성함으로써 그 보상으로 얻게 되는 것들입니다. 이야기의 구조입니다. 이 구조에 따라 자신의 몸과 상대의 몸을 성취의 도구로 조건화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조건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곧 조건의 이야기에서 빠져나온 것입니다.
더 실천적으로 말하자면, 존재의 무조건성의 회복은 몸을 가만히 놓아둠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지식자본가들은 몸 또한 지식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가만 놓아두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몸을 이야기의 소재처럼 도구화시켜, 몸의 작용으로부터 이야기를 도출해내려고 합니다. 실제로 몸의 반응에 따른 이야기를 쓰고 또 씁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소재로 한참을 착유되어 지친 몸이 조용해졌을 때, 결국 자신이 이야기를 통해 몸을 편안하게 만들었다고, 또 몸의 작용인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이를 온전함을 획득하는 방법이라고 부릅니다. 깨달음의 방법이라고까지는 부르지 않더라도, 이를 심리상담적 방법이라고는 곧잘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몸을 이야기의 작법에 따라 도구로 남용하는 일일 뿐입니다.
이를테면, 두려움을 느끼는 이가, 헬스장에서 한 3시간을 열심히 운동한 끝에 지쳐서 가라앉은 몸의 상태에 대해, 이제 자신의 노력으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몸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느낌이라고도 부릅니다. 조금 더 감각적으로 몸과 마음의 전인적 양상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때문에 자기의 마음이 불편하게 경험될 때, 머리를 굴리고, 손으로 글쓰기를 하고, 발로 달리기를 하는 등의 '몸'을 써서 마음을 해결하려고 하는 일은, 실은 몸에 대한 몸의 도구화와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의 몸의 반응이 해소된 것 같아도 그것은 또 하나의 몸의 착취만을 야기할 뿐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꾸준히 몸은 노예와 같은 조건화의 길로만 접어듭니다.
몸의 조건화가 치명적인 이유는, 이것이 단지 개체에 대한 조건화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몸의 조건화는 모든 것의 조건화입니다.
자기 몸을 이야기에 따라 조건적 방식으로 대하는 이는 세상의 모든 것 또한 조건적 방식으로 대하게 됩니다. 자기뿐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감옥에 가두어 통제하려는 모습을 반드시 보이게 됩니다.
아무리 복지가 잘 되어 있고 풍요롭다 하더라도 감옥은 그냥 감옥입니다.
다른 것이 감옥이 아니라 조건화의 의도 자체가 감옥입니다.
이러한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는 길이 깨달음입니다. 상대적인 조건에 갇혀 그 상대적인 조건을 해결한답시고 또 다른 조건을 만들어내어 결국에는 무수한 조건들의 압박 속에서 질식하게 되는 그 비참한 운명에서 해방되기 위해 향하는 길이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조건이 아니라 절대적인 사랑을 향하는 길입니다.
조건없는 사랑을 향하는 길입니다.
조건이 있는 곳에 사랑이 없습니다. 또한 사랑이 있는 곳에 조건이 없습니다.
조건이 있다는 것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있는 곳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조건화의 이야기를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그러한 감옥의 이야기를 또한 자유로 착각하고 있는, 비극적 현실만이 있습니다.
자유는 사랑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몸은 언제 자유롭다고 느끼냐면, 곧 언제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냐면, 그저 가만히 있을 때입니다.
이야기를 소비함으로써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식의 성취에 대한 압박이 없이, 모든 이야기가 기각된 채 그저 가만히 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와 사랑을 체험합니다. 존재의 무조건성을 체험합니다.
순간 깨달아집니다.
표현 그대로입니다.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 곧 이야기가 될 수 없는 것이 깨달음의 체험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가 있는 곳에 깨달음이 없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깨닫는 것이 아니라, 존재[몸]를 깨닫는 것입니다. 원래 이야기가 아닌, 존재[몸]의 무조건적인 무아(無我)적 실제(reality)를 깨닫는 것입니다.
구루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 또 이야기를 통해 존재[몸]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갈수록 사실과 멀어지는 거짓말만을 쌓아 갑니다.
아주 단순하게 떠올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며 그 영화 속 이야기에 빠져들어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의 몸을 잊고 있습니다.
대단히 실증적이며 직관적인 이해입니다.
이야기는 자신의 몸을 잊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모든 중독재는 다 개인이 자신의 몸을 망각하게 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잊고 싶은 이들이 점점 더 중독재를 소비하는 것입니다. 중독은 분명한 존재망각의 현상입니다.
반대로 깨달음은 이러한 모든 조건화의 중독에서 벗어나, 존재[몸]를 발견해 그 존재[몸]로 사는 것입니다. 존재[몸]가 망각으로부터 깨어나 더 생생해지는 길입니다. 그러니 이야기가 제공하는 특수효과가 아니어도, 있는 그대로의 삶에 감동이 넘칩니다.
마크 존슨과 같은 몸 연구의 대가는 몸의 핵심적인 특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가만히 놓아둘 때, 몸은 가장 잘 기능한다."
매일 수상한 건강보조제를 복용하고, 수상한 주술적 운동을 하고, 수상한 영성 음식을 먹는 일 등은, 몸을 절대로 가만히 놓아둘 수 없는 이야기중독자들이 자주 보이는 현상입니다. 구루는 이와 같이 '몸을 무력한 아이처럼 대하며 과잉되게 행하는 치맛바람'을 오히려 권장하는 이입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몸이 엄마 같은 역할을 하는 이야기 없이는 제대로 살 수 없는 것처럼 구는 삼류 판타지에서 벗어나, 우리의 몸을 신뢰하여 그 몸으로서 스스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존재로 스스로 살아가게 될 때,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가 이야기로 자신의 몸을 조건화시키고 있는 동안에는, 세상 또한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러니 세상이 이야기로 만들어졌고 이야기에 의해 돌아가는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라고 하는 조건화의 기제에서 벗어났을 때 이제 우리에게는 세상이 우리에게 달성해야 할 모종의 조건들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으며, 동시에 우리가 세상을 조건지어 통제해야 하는 소재로 보지도 않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스스로 잘 작동하는 만큼, 세상 또한 스스로 잘 작동하는, 신뢰할 만한 것으로 보이게 됩니다.
몸이 우주라는 비유는 아주 유효한 비유입니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것을 경험하고 있던 그 관점과 방식은, 결국 자신이 자신의 몸을 경험하고 있던 그 관점과 방식입니다. 자기의 몸이 불만스러운 이는 늘 세상에 대해서도 불만스럽습니다. 자기의 몸에 화가 나있는 이는 세상에 대해서도 화가 납니다. 자기의 몸을 이야기에 따라 조건지으며 착취하고 있는 이는 세상 또한 이야기로 착취하게 됩니다. 이와 같습니다.
그러니 자기의 몸을 잘 가만히 놓아두고 있는 이는, 세상 또한 가만히 놓아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가만히 놓여 있는 몸에 자유와 사랑의 감각이 회복되고, 세상 또한 자유와 사랑이 가득한 곳으로 새롭게 경험됩니다.
자신이 무조건성을 회복하면, 세상도 그 무조건성을 회복하는 셈입니다.
그러니 깨달은 이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내가 깨달으면 이 세상이 깨달은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몸을 이야기에 따라 조건적으로 부정하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는 몸이 부정되는 일이 만연해집니다.
가장 몸을 부정하는 일, 그것은 바로 전쟁입니다.
모든 전쟁은 몸과의 전쟁입니다. 이야기로 몸을 부정하려는 것이 전쟁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전쟁은 아픈 것입니다. 몸이 부정되면 아프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발원자들의 목소리를 형상화하면 언제나 이렇습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
결국 격렬한 선지자처럼 "너의 이야기를 시작해!"라고 부르짖거나, 자상한 엄마처럼 "제가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릴게요."라고 속삭이거나 하는 일은 그저 전쟁의 씨앗을 잠정적으로 잉태하게 만드는 메시지에 불과합니다.
구루들이 이러한 일을 합니다.
지식자본가들이 이러한 일을 합니다.
양적 자본의 축적은 전쟁을 통해 더 효과적으로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무기로 삼는 구루들은 결국 무기상인이 됩니다. 한쪽에는 공격용으로 쓰일 지식병기를, 다른 한쪽에는 방어용으로 쓰일 지식병기를 팔아먹으며 최대한의 이득을 꾀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들은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장합니다.
즉, 구루들은 '가만히 있어도 원래 괜찮은' 우리에게, 더 성장해야 할 것이 있다는 둥, 낡은 이야기를 새로운 이야기로 업데이트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둥, 우리를 뜨거운 발전기와 같은 상태로 몰아넣으려고 선동합니다.
발전이라는 것은 열을 내는 일이며, 곧 분자가 마찰되는 일이고, 바로 갈등에 다름아닙니다.
구루들은 그래서 늘 뜨겁습니다. 갈등 속에서 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놓인 그 갈등상황만큼 세상을 본질적으로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게 하고자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최대치의 이득을 달성할 수 있는 까닭입니다.
깨달음을 참칭하는 구루들이 진짜 나쁜 놈들인 이유입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는 평화의 현실을, 어떻게든 전쟁의 현실로 바꾸고자 깨달음의 깃발로, 또는 심리학 및 심리상담의 깃발로 사람들을 전선으로 유인하는 것이 구루입니다.
일부러 평화를 깨고 갈등을 촉발하여 우리를 늘 전쟁터 속에 살게 하는 것이 이 사기꾼들입니다.
나아가 이 사기꾼들은 자신이 갈등을 만들어놓고, 오히려 자신이 갈등을 해소해주는 평화의 해결사인 척하는 데 능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특성을 가진 이들은 어느 사회적 집단의 활동에 참여하든 간에 늘 갈등의 불씨를 일으킵니다. 그렇게 실제로는 자기가 일으킨 불길을 자신이 멋지게 진화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선전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게 평화를 실현할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실체는 그저 전쟁광이며 무기상인일 뿐, 평화와는 가장 멀리 떨어진 이들이 바로 이 구루 사기꾼들입니다.
이들이 이처럼 전쟁을 좋아하는 이유는, 전술한 것처럼 이들 자신의 몸에 대한 태도 때문입니다.
구루들은 자신의 몸을 싫어합니다. 몸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탁월한 지성이 제한을 받는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우수한 정신적 능력을 가진 자신이 생물학적 몸의 건장함을 가진 이들에게 그 인기가 밀리는 일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몸만 아니었으면 이들은 자신이 지금보다 더 대단해졌을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이처럼 구루들은 몸에 대한 열등감이 강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몸을 망각하기 위해 이야기를 더욱 소비하는 일은 필연적인 결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몸을 망각하게 하기 위해 이야기를 더욱 보급하는 일 또한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모든 조건이란, 결국 몸에 대해 이야기가 걸고 있는 그 조건들입니다. 이야기로 몸을 통제하고자 하는 기준들이 결국 조건입니다.
그렇게 자기의 몸을 조건적 이야기로 통제하고자 하는 구루로 인해, 이 세상은 더욱더 타인의 몸을 조건적 이야기로 통제하고자 하는 전쟁의 양상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이야기를 들으라구! 니들이 들어야 할 이야기 보따리가 많다구!"
니 이야기 따위는 이제 지겹고, 우리는 대신에 몸을 돌아봐야 합니다. 자신이 바로 몸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며, 그 몸으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그냥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야기 대신에 사실이 알려집니다.
조건적인 반쪽의 이야기 대신에 무조건적인 온전성의 사실이 알려집니다.
이것은 "아 내가 온전하다! 나는 괜찮았고, 착했고, 나빠도 괜찮았고, 이런 나도 괜찮았어! 모든 내가 괜찮았어!" 식의, 본질적으로 나, 나, 나만 반복하는 정동적 도취가 아닙니다. 나, 나, 나가 바로 앞서 말한 더, 더, 더와 같은 것입니다. 조건화를 시동하는 기제입니다.
사실은 언제나 공통사실입니다.
사실의 자리에는 그래서 언제나 '너'가 들어옵니다. '너'에게도 괜찮으면 그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너'는 철저하게 소외시킨 채, "나는 괜찮아!"만 반복하고 있는 그 자리는 언제나 전쟁을 촉발하는 자리입니다. 자신만 평화를 위장하기 위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자 하는 전쟁광과 무기상인의 자리입니다. 바로 이야기의 자리입니다.
깨달음에는 언제나 '너'가 있고, '너를 향한 눈물'이 있습니다.
이것은 윤리와 동정이 아닙니다. 윤리와 동정은 분리감 속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회복된 몸[존재]은 분리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몸으로 사실을 사는 이는 분리되지 않은 삶을 사는 이입니다.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어떠한 것이 도구화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구는 도구의 사용자와 언제나 분리되어 있습니다. 분리되어야만 도구는 도구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즉, 소외를 바탕으로 도구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를 도구화시키는 일을 인간소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자신의 몸으로 사실을 사는 이는, 인간을 이 소외로부터 회복시키는 이입니다.
예수는 이러한 기제를 아주 명료하게 묘사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그리고 이것이 예수가 말한 바,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몸으로 사실을 살고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실을 말하게 됩니다.
사실을 말하는 일이 곧 사랑입니다.
나의 몸에도 사실이고 너의 몸에도 사실인, 이 인간의 몸에도 사실이고 저 인간의 몸에도 사실인, 그 공통사실을 말하는 일이 인간을 향한 사랑입니다.
나만의 이야기? 너만의 이야기? 사랑이 부재한 전쟁의 조건적 논리입니다.
전술한 것처럼, 조금 더 몸에 밀착되어 묘사된 마음에 대한 표현이 느낌입니다.
이 느낌을 우리가 글로 쓰거나, "이얍!"하며 계왕권을 쓰듯이 더 잘 느껴보려고 하거나, 자신이 이 모든 느낌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주겠다며 허용의 몸짓을 취하고 또한 그 결과로서 '아 이렇게 내가 크구나! 느낌들이 이 안에서 가득하게 다 쉴 수 있구나! 이것이 나란 존재구나!'라며 부르르 떠는 자화자찬의 감격을 누리고자 할 때, 우리는 느낌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즉 몸을 '도구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루들이 대개 이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유하자면, 엄마가 안아주기만을 바라며 일부러 걷지 않으려던 아이가 결국 그것이 습관화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걷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상태를 어떻게든 수용하고 이해하겠다며 열심히 다양한 심리작업이라는 것을 한 끝에 결국 걸음을 내딛게 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한 놀라운 존재인 척 자위하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에게는 일종의 인간승리의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그는 이제야 남들만큼 걷게 된 것이지, 그가 우주의 대장이 된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이것은 사실 인간승리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그는 장애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이제야 고집을 그만둔 것뿐입니다.
그러니까 더 쉬운 예로, 마트에서 엄마가 장난감을 사줄 때까지 바닥에 누워 고집을 부리며 버티고 있던 아이가, 어느 순간부터 "이야압! 나 혼자 일어나야 해! 진정한 나의 길을 가야 해!"라며 바닥에서 글쓰기도 하고, 요가도 하고, 빈의자기법도 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한 그 끝에야 감동적인 것처럼 벌떡 일어서서 "아아! 이것이 깨달음이구나! 이것이 존재구나! 이 모든 것이 다 온전하구나!"라고 하고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삼류 저질 쇼도 이런 쇼가 없습니다.
구루들이 정말로 이와 같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는 이 쇼를 통한 인간승리의 주인공처럼 자신을 입지화한 후에 결국 사람들에게 보급하는 것이란, 바닥에 드러눕는 방법입니다. 고집부리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많은 노력의 시간을 가진 후에 극적으로 일어나는 방법입니다. 즉, 쇼를 하는 방법입니다.
자기가 삼류 저질 쇼만 하고 살았으니, 구루가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또한 삼류 저질 쇼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삼류 저질 쇼를 위해 늘 준비되는 무대가 바로 전쟁입니다.
고집을 부림으로써 전쟁은 시작되며, 마치 감동적으로 화해한 척 슬며시 고집을 후퇴시킴으로써 전쟁은 종결됩니다.
이 고집이란 결국 이야기에의 고집입니다.
모두가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는 유아적 전능감이 만들어낸, 이야기에의 악질적인 고집입니다.
고집부리는 동안 모든 인간의 몸이 고통받는다는 사실은 언제나 가장 먼저 소외됩니다. 자기의 쇼를 지속하기 위해 인간은 늘 고통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악질입니다.
몸의 느낌이란 이러한 방식으로 쇼를 위해 남용되어야 할 소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만히 있으면, 그냥 알아서 스스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신뢰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본성입니다.
어떠한 느낌이 들 때 우리가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은 그냥 놓아두면 그 본성대로 가장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낌을 신뢰하게 되면, 결국 우리 자신을 신뢰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어도 가장 좋은 곳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라는 신뢰가 점점 증대됩니다.
이것을 삶에 대한 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느낌이라고 하는 마음작용에 대한 신뢰는, 우리의 존재[몸]에 대한 신뢰고, 곧 삶에 대한 신뢰입니다.
깨달음은 삶을 신뢰하며, 그 삶에 자신을 투신하여 살아가는 존재방식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체험으로 다가오지만, 그것은 일회적인 체험은 아닙니다. 지속되는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진짜로 사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존재의 본성 그대로 사는 방식입니다.
그대로 놓아두면 본성 그대로입니다.
몸을 가만히 좀 그대로 놓아두는 일이, 그 모든 조건의 이야기에서 벗어나, 무조건적 절대성을 향하는 아주 쉬운 길입니다.
이 깨달음의 길은 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될 수 없는 삶을 사는 길'
상기한 것처럼 몸을 가만히 놓아두고 살면, 그렇게 몸을 편하게 하고 살면,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이 더욱 선명해지며 그 색이 진해집니다. 그만큼 이야기는 점점 더 벗겨지고 저 뒤편으로 멀찌감치 밀려나게 됩니다.
삶이 가속을 붙여, 도저히 언어가 뒤따를 수 없는 속도로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역설적입니다. 우리의 몸이 가만히 놓여 있는 만큼, 삶은 언어가 추격할 수 없는 그 선두에서 더욱더 세계의 신비를 열어갑니다. 『갈매기 조나단』에서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최고의 속도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것, 그냥 존재하는 것, 그냥 몸인 것, 이러할 때 존재[몸]의 무조건성은 확연히 자각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무조건성의 발현인 사랑과, 사랑으로 말미암은 자유의 세력은 그 기세를 올립니다. 더욱더 사랑하고, 더욱더 자유로운 세계가 펼쳐집니다. 신이 납니다. 표현 그대로, 신(神)이 나는 듯한 삶의 양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 속에서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뒤따를 수 없는 만큼, 도저히 이야기될 수 없는 체험들이 더 많이 일어나곤 합니다. 언어화될 수 없는 신비가 우리에게 더 많이 그 염화미소를 드러냅니다.
그렇게 이야기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이야기 없이 열린 우주를 향해 우리는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는, 누구에게라도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야기한 것들과, 도저히 이야기될 수 없는 것들 중에 어떤 것이 당신에게 소중한 삶이었습니까? 대체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다 후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다 진짜를 알고 있습니다.
이미 다 진짜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놓아두면 진짜는 진짜라고 스스로를 알립니다. 스스로 알고 있는 스스로를 압니다.
그렇게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 때, 우주는, 이 존재의 몸은 사랑으로 새롭게 열려갑니다.
전쟁은 이미 까마득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