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 콤플렉스

"장발장은 왜 빵집아저씨는 망각할까?"

by 깨닫는마음씨



한 선사(禪師)가 있었는데 그는 이제 사람을 그만 만나고 싶다며 조금 슬픈 눈빛을 했습니다. 그가 빵집아저씨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난 후에야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나도 알려지지 않는 것은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빵집아저씨입니다.


장발장은 왜 빵집아저씨에게는 사과하러 가지 않을까요?


자기는 오랜 감옥생활 동안 충분히 고통받았고, 미리엘 주교에게 용서도 받았으며, 또 수양딸도 키우고 사회적으로 좋은 일도 하는 등,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니 빵집아저씨는 과거의 저 너머로 망각해도 되는 것일까요?


마치 영화 '밀양'에 나오는 목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자기는 타인에게 유일한 아들을 죽였어도 하나님에게 용서받았으니 사과할 이유가 없다는 그 태도는 장발장과 다른 것일까요?


게다가 장발장이 훔친 빵은 샤니 포켓몬 빵이 아닙니다.





이런저런 인터넷 커뮤니티들에도 한번씩 올라오듯이, 영화적 과장이 있다 할지라도 최소 장발장이 훔친 빵은 한 가족이 며칠간 연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빵을 수작업으로 만들기 위한 빵집아저씨의 노고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장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만드는 정성의 결실입니다.


장발장이 정의의 마음으로 무슨 악덕 자본가가 만든 공산품을 훔친 것이 아닙니다. 빵이 팔려야만 그의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한 가장에게서 그의 생존권을 훔친 것입니다.


그 시대의 기준에서 그 정도로 귀한 것을 훔쳤기에 5년형의 금고가 선고된 일은 무리수가 아닙니다. 총 19년의 형량은 장발장이 반항하며 탈옥을 시도했기에 스스로 늘린 형량이지, 타인의 생활을 파탄낼 폭력에 대한 5년형은 부당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장발장은 자신을 억울한 희생자로만 규정짓고 있다가, 미리엘 주교를 만남으로써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은 마치 사회가 낙인찍은 딱딱한 껍데기에 그 자신도 동의한 채 그 투박하고 견고한 가면을 쓰고 살다가, 자신의 부드럽고 약한 맨 얼굴을 누군가가 알아주자, "아 내가 이렇게 여리고 무서움에 떠는 인간이었구나! ㅜㅜ"라며 인간의 가련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모습을 발견한 경험인 것처럼 묘사됩니다. 마치 다스베이더의 가면 안에는 사실 약하고 여린 아버지의 인간으로서의 참얼굴이 있었다는 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야기가 만든 쇼입니다.


자신이 직접 책임지지 않으려고 구원극인 것처럼 기만하는 쇼입니다.


"나는 약한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었어. 그게 인간의 한계였어. 그러나 난 이제 용서받았어. 이제는 가면을 벗고 진실된 얼굴을 드러내며 살 거야. 난 잘못한 게 없어. 난 단지 약했을 뿐이야. 누구도 나를 비난할 수 없어. 난 약했을 뿐이니까. 다만 인간이었을 뿐이니까. 인간인 게 잘못이라면 이 세상 모두는 죄인일 거야. 그러나 우리가 인간인 것은 다만 약하다는 것일 뿐 그것이 죄는 아니야. 나는 너와 같이 이렇게 부드럽고 또 취약한 인간일 뿐이야."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필사적인 쇼입니다.


정말로 회심(conversion)을 체험한 이들은 어떠한 일을 하는지 아십니까?


가장 먼저 자기가 잘못한 이들을 찾아가 엎드려 사과를 합니다. 자기가 대체 무슨 일을 했던가를 정말로 이해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 책임회피자들은 그러는 대신에, 엉뚱한 곳에 가서 아이를 입양하고, 사회복지기금을 기부하는 등, 딴청을 피웁니다. 과거에 오만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인간을 위해 이제 좋은 일을 한다며 시치미를 뗍니다.


이것이 이 기만극의 주인공 장발장의 모습입니다.


바로 이러한 장발장의 이야기와 동일시되어 있는 것을 '장발장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실존심리학에 근거해 『깨달음의 심리학』을 집필한 연구자이자 상담자인 존 웰우드는 이러한 콤플렉스를 '영적 우회(spiritual bypass)'라는 개념으로 묘사합니다. 개인이 자신의 책임성을 회피하기 위해 영적 원리 내지 사이비심리학적 원리를 남용하는 일을 일컫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책임회피의 의도가 있기에, 어떠한 체험이 그에 맞춰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장발장 콤플렉스의 체험내용은 전부 다 동일합니다.


이를테면, 모종의 사회적 죄를 지어 구치소에 들어간 이가, 어떻게 하면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처절하게 궁리한 끝에 결국 무의식적 차원에서 체험이 만들어집니다. 그 자신의 연약함이 용서받으며 "그러한 너도 인간이다!" 등과 같은 식의 메시지를 얻게 되는 방식으로 체험은 조형됩니다.


면피라는 의도를 집행하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장발장과 동일시해오며 미리엘 주교 같은 대상을 늘 꿈꾸던 이가, 스스로 만들어낸 미리엘 주교 효과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상체험을 정통의 종교방법론 내지 수행방법론에서는 철저하고 엄격하게 경계합니다. 소위 마구니에 빠졌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장발장 콤플렉스는 이러한 환상체험을 더욱 적극적으로 지향합니다.


심지어는 이러한 것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이들 또한 너무나 많습니다.


장발장 콤플렉스는 흔히 말해, 오컬트키즈들, 뉴에이지영성판, 사이비심리학의 소비자들에게서 아주 빈번하게 드러나는 기제입니다. 전술한 '밀양'에 나오는 목사 또한 이 장발장 콤플렉스의 경우입니다.


이들은 대개 머지않아 사이비교주가 됩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척하며 "너도 인간이다. 그것도 괜찮다. 인간이니 약해도 괜찮다."라는 식으로, 달달한 메시지를 통해 처지가 외로운 사람들을 공략하게 됩니다.


실존철학을 가장 잘 묘사한 만화인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무뢰전 가이』에서는 이러한 장발장 콤플렉스로 사이비교주가 된 이의 모습이 잘 묘사됩니다.








이처럼 장발장 콤플렉스에 빠진 이는 결국 자신이 미리엘 주교 같은 인물이 되어 사람들에게 구원과 용서의 권능을 집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욕망을 무엇이라고 말하냐면 바로 '독재욕'이라고 말합니다. 신성한 선의로 포장된 독재에 대한 욕망입니다.


놀랍게도, 이 장발장 콤플렉스가 반드시 이처럼 독재욕으로 흐르는 이유는, 이것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영적 우회의 버전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프로이트가 얼마나 천재였는지를, 또 상대적으로 프로이트를 평생 아버지로 보며 그를 부정하기 위해 산 융이 얼마나 열등감이 심했는지를, 자연스레 이해하게 됩니다.


장발장 콤플렉스는 일부러 사람들의 취약성을 과잉되게 강조하는 동시에, 그 취약성을 동일하게 취약한 조건을 가진 자신만이 온전하게 긍정하는 제스쳐를 취함으로써, 결국 사람들의 취약성에 자기를 기대어 효과적으로 기생하는 생존형태를 취합니다.


이는 엄마에게 의존해 사는 아동의 모습과 같습니다.


늘 모성적 여성성에 기생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주인공이 대표적인 그 인물상입니다.


이러한 이의 입장에서는 자기도 취약하고 남들도 취약하며, 그렇게 다 불쌍한 것들입니다. 가련하면서도 또 들꽃처럼 애틋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가진, 소위 '비극적 미학'의 대상들입니다.


『인간실격』의 주인공과 장발장의 차이는 단지 미리엘 주교라는 신적(神的) 성분이 있는가 없는가일 뿐입니다.


즉, 신적이라 쓰고 맹목적이라 읽는 그 모성이 다 덮어놓고 "너는 괜찮아. 그게 인간이야."라고 해주는가 안 해주는가의 그 차이입니다.


그렇게 맹목적 모성이 행하는 죄사함 속에서 장발장은 빵집아저씨에 대해서는 다 잊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맹목적 모성을 발현시켜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용서와 수용을 제공하는 거대한 엄마가 되어야겠다면서, 늘 필요 이상으로 사람들을 약하게 보는 방식으로 실은 사람들을 얕잡아보게 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장발장은 자기 자신을 인간에 대한 판정자 및 시혜자로 위치시킵니다.


바로 이것이 우상화입니다.


자기가 함부로 타인의 유한성을 판정하는 일이자, 동시에 같은 유한자인 자기가 그 유한성을 용서하는 입장에 서는 이 일이 자기우상화입니다.


타자철학자인 레비나스는 이러한 자아의 기만에 아주 염증을 느낍니다. 타자를 감히 안쓰럽게 보고 거기에 자신이 주동자가 되어 용서까지 하려는 이 일을 가장 오만한 자아가 하는 일로 봅니다.


"인간을, 인간을 사랑해야 하네. 그들에게 다정해야 하네. 모두가 약한 한계를 갖고 있지만, 그래서 강한 척도 해보지만, 실은 참 여리고 두려움 많은 인간의 그 날 것의 모습, 우리는 그 인간을 사랑해야 하네. 저마다 그렇게 아름답게 피어나있는 그 인간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야 하네."


실존철학자인 사르트르는 바로 이러한 언술에 구토합니다. 그의 소설 『구토』에서 소위 휴머니스트라는 이들이 자주 발화하곤 하는 말입니다. 사르트르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너에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네 머릿속의 이야기, 하나의 추상일 뿐이다. 외로운 너에게 체온이 필요하기에 인간에게 친절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 뿐, 너만큼 실제의 인간에게 관심이 없으며 인간을 도구로 대하는 이도 없다."


장발장 콤플렉스에 빠진 이들에게 인간에 대한 친절함이 제1계명으로 자리잡아 강박이 되는 이유는, 뉴에이지문학의 소비자들이 돌고래를 좋아하는 이유와 같습니다.


남근거세입니다.


억지로 이 모든 것을 부드럽고 친절하며 둥글둥글한 것처럼 왜곡시켜 자기가 쉬이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장발장은 언제나 이러합니다.


"강한 척하는 그도 인간이기에 실은 약했다."


게슈탈트 심리치료를 일종의 자아쇼로 소비하는 이들이 무대에 올라가 암내 나는 겨드랑이를 크게 벌려 실은 포옹을 원치않는 타인을 끌어안으며 "너도 인간이잖아! 우리 다 같이 약한 인간이야! 그래도 우리는 서로에게 다정할 수 있어! 이렇게 너와, 나, 바로 우리가 있잖아. 이게 전부라고! 우리는 따듯한 인간이야!"라며 마치 엄마의 자궁 속으로 함께 합일해가자는 듯이 권유하는 그 모습입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인간을 임의적으로 약체화하려는 것일까요?


두렵기 때문입니다.


두려우니 다 약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하향평준화입니다.


이 하향평준화를 이루는 도구가 친절함입니다.


이처럼 두렵기 때문에 친절함에의 강박은 생겨나며, 이 강박은 반드시 또 다른 폭력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인간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렌즈로 굴절시키고, 그러한 거푸집에 넣어 조형하고자 하는 심각한 폭력입니다.


다른 것이 폭력이 아니라, 생명을 억압하는 것이 폭력입니다.


그리고 생명은 '친절한 선의'에 의해 가장 억압됩니다. 니체의 빛나는 통찰입니다.


이와 같은 선의의 폭력 아래서, 그것을 엄마의 자상한 애정이라고 믿고 자란 이가 반항의 기질을 갖습니다. 그러나 노골적인 반항이 아닙니다. 엄마에게 억압되어 있기에 그 반항의 성분을 직접적으로 표출하지는 못합니다. 다만 뒤에서 배신할 뿐입니다. 그것도 엄마가 아닌 아빠를.


겉으로는 친절하게 웃으며 뒤로는 늘 배신하는 이 특성이 결국 장발장 콤플렉스의 특성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을 도구로 늘 농락하면서도, 자신은 피해자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리고는 그 피해자인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아줄 미리엘 주교가 언제 등장할지를 늘 손꼽아 기다립니다. 신의 은총이 하늘에서 내려와 자신이 그 은총의 빛에 감싸여 가면을 벗은 맨 얼굴로 구원될 수 있기를 학수고대합니다.


쇼도 좋고, 반복상연도 좋은데, 그런데 빵집아저씨는?


그 모든 정성과 노력이 착취되고, 약탈되며, 농락당한 빵집아저씨는?


미리엘 주교가 만약 "우리 애는 인간이라구욧! 빼액!"이라며 용서놀이로 용사놀이를 하는 맘이 아니라, 상식적이고 사려깊은 우리의 실제 엄마였다면, 가서 빵집아저씨에게 제대로 사과하고 오라고 했을 것입니다.


어설픈 용서를 내려주는 대신에, 형기를 마쳤다고 책임을 진 것은 아니니, 자기가 정말로 타자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를 이해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가서 은촛대를 그 빵집아저씨에게 전하며 용서를 구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아주 잘 안내한, 글의 처음에 상기한 선사의 삽화가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아주 인상적인 구원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인간구원이라고 하면 언제나 가장 원형적인 이미지로 떠오르던 생생한 기억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옆집 아이와 자주 놀았는데, 하루는 서로 작은 돌을 던지며 전쟁놀이를 했습니다. 서로 웃으며 돌을 던지던 중에 그가 던진 조금 큰 돌이 아주 우연히도 옆집 아이의 정수리를 강타하여, 옆집 아이는 "으아아악!"라는 커다란 비명과 함께 뒤로 쓰러졌습니다.


그는 집으로 도망쳐 연탄을 쌓아놓은 광으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그 옆집 아이가 죽었다는 생각에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 왔습니다. 밖에서는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언제라도 광문을 열고 경찰아저씨들이 자신을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숨이 막힐 정도였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조용히 광문이 열리며 하얗고 부드러운 햇살이 광 안으로 스며 들어왔습니다.


눈이 부신 그가 문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더니 거기에는, 글쎄, 바로 그의 어머니가 서계셨습니다.


아주 인자한 미소를 띤 채, 연탄더미 속에 숨어있는 그를 향해 손짓을 하셨습니다.


"괜찮아. 내가 옆집 아이도 치료해주고 그 집 엄마에게 사과도 했단다. 이리 오렴. 어린 것이 혼자서 깜깜한 이 안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꼬. 다 괜찮단다 이제."


그는 눈물을 쏟으며 달려나가 어머니의 치마폭에 안겼습니다. 한없이, 한없이, 눈물은 흘러내렸습니다. 그 사랑이 참 따듯하고 다정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그는 너무 아름다운 구원의 이야기로서, 이 이야기가 평생 자신을 지켜주었다며, 감동으로 눈시울을 붉힌 채 한 선사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감동없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옆집 아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네?"


"옆집 아이는 죽었어요? 왜 몰라요?"


"........"


"옆집 아이는 그럼 30년째 거기 쓰러져 있구나."


그의 몸은 덜덜덜 떨렸습니다. 휘청거리며 무너집니다. 숨이 가쁩니다.


이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던가를, 그리고 엄마의 치마폭에 안겨 얼마나 그 사실을 긴 시간 동안 망각해왔던가를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그 아이에게 가고 싶어요."


"가서 뭐라고 하고 싶어요?"


"가서.... 가서.... 미안하다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장난하다 그랬다고... 내가 이제야 와서 너무 미안하다고....."


진짜 눈물이 터져나옵니다.


"그 아이가 뭐라고 그럴 거 같아요?"


"지금이라도.... 기억해줘서 고맙다고....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바닥에 쓰러져 통곡합니다.


선사는 그저 시큰둥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며 담배연기를 태워올릴 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상냥한 엄마의 품 안에서 구원받은 척하는 책임회피자들은 언제나 똑같은 것만을 반복합니다.


장발장의 이야기만을 반복합니다.


장발장이 하듯이, 자기가 빵을 훔쳤다는 사실은 잊거나 축소시킨 다음, 자베르 경감 같은 대상을 창조해 그에게 압박받는 형태로 상황을 만들어낸 뒤, 내면의 모성, 즉 내면의 미리엘 주교에게 용서받는 경험으로 엔딩을 이끕니다. 이에 따라 자기는 이제 냉혹한 자베르 경감보다 인간을 사랑할 줄 아는 훌륭한 존재가 되었다고 간주합니다.


그리고는 내면의 미리엘 주교의 말대로 인간에게 친절하고 자상해야 하며, 약해도 그 약함을 통해 소중한 자신의 이야기를 써가고 있는 이 어여쁜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와 동시에 자기를 보호해줄 실제의 모성적 대상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재롱잔치 학예회를 펼칩니다. "우리 귀여운 강아지가 이렇게 똑똑하면서도 예의바르고 따듯한 마음을 갖고 있네. 우리 강아지 내가 지켜줘야겠다."라며 모성적 대상들이 흡사 『인간실격』의 주인공에게 모성애를 발휘하듯, 이 장발장의 친위대가 조직됩니다.


평생 프로이트를 무섭게 여겼던 융이 늘 자기 주변에 복수의 모성적 대상들을 두고서 그 치마폭에 싸여 보호받으려 했던 모습과 같습니다.


즉,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를 통해, 그의 내면적 엄마를 통해 구원을 얻은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를.


그에게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자베르를.


아버지로부터 도망가 모성적 소재의 품에 안겨 "나는 세상을 엄마처럼 상냥하게 대할 거야. 그러니 세상도 나를 엄마처럼 상냥하게 대해줘, 짹짹짹."이라고 하고 있는 모습이 장발장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장발장은 언제나 죄책감을 느낍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만큼 두려워지고, 그 두려움은 마치 주변에서 자기를 향해 침투되는 듯한 화로 경험됩니다. 그러한 속에서 장발장은 자신이 저 가련한 인간의 화를 대신 받아 그 역시도 온전한 인간이었음을 발견하겠다며, 무슨 거룩한 사명이라도 띤 양 행위하며 자기의 죄책감을 망각하고자 열심히 노력합니다.


대단히 복잡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냥 죄책감입니다.


우선은 자기의 아버지가 빵집아저씨처럼 정성을 다해 이룬 것을 자기가 배신했다는 죄책감이며, 그 다음으로는 자기가 배신한 그 빵집아버지를 심지어 사악한 자베르처럼 만들고 있었다는 그 죄책감입니다.


이 역동은 장발장에게 늘 반복됩니다.


그는 여러 빵집들을 돌아다니며, 자기 아버지에게 했듯이 무수한 빵집아저씨들을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으며, 영문도 모르게 농락당한 빵집아저씨들이 그에게 성토할 때면, 그것을 마치 자베르의 위협처럼 만들어 그에 대해 저항하는 정의의 피해자인 양 굴며, 끝내는 그 악독한 자베르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미리엘 주교 엄마를 자기 내면에서 만들어냅니다.


그리고는 미리엘 주교 엄마가 했던 언어의 신성한 활용법을 따라, 이제는 자기가 언어의 마법으로 약한 사람들을 지켜주는 언어의 히어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일만을 장발장은 까마득한 과거에도, 지루한 현재에도, 저 먼 미래에도, 늘 똑같이 반복합니다.


어떤 때는 장발장[죄지은 아이]이 되었다가, 또 어떤 때는 미리엘 주교[상냥한 엄마]가 되었다가 하는 식으로, 역할만을 바꾸어가며 끝없는 쇼를 반복합니다.


근본적으로는, 늘 똑같은 대사와 늘 똑같은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때마다 무엇인가 새롭고 놀라운 것을 얻게 된 것처럼 사람들에게 교훈담으로 알리려는 늘 똑같은 연극을 엄마의 치마폭 안에서 반복하기만 하는 자아도취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책임이 두려워 늘 책임을 회피하려는 아이가 장발장의 이야기와 동일시되어 그 이야기만을 반복하며 늘 애꿎은 빵집아저씨에게 폭력을 가하는, 장발장 콤플렉스의 전모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전국의 빵집아저씨들을 위해 쓴 글입니다.


성실하게 모든 것을 다하여 오직 외길로만 사람을 먹일 빵을 굽고 있는 모든 빵집아저씨들의 눈빛이, 조금 슬픈 그 선사의 눈빛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쓴 글입니다.


그것은 칼에 많이 찔린 이가 짓던 그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옆집 아이의 얼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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