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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닫는마음씨 Aug 02. 2019

무시받는 그대에게

"소망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대여, 나는 지금 궁서체다.


  굵음와 기울임 옵션까지도 먹일 수 있다. 그대가 정말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그대여, 눈 딱 감고 한번 여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그대는 무시하기 때문에 무시받는다.


  그대는 분명 억울하다. 그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그대는 무시받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이 세상에서 그대가 결코 하지 않으려 했던 일이 누군가를 무시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여, 나는 분명하게 무시받았다.


  금요일 저녁, 스터디 카페에서 나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그대는 친구와 함께 수험서를 펼쳐놓고 애플망고 빙수를 티스푼으로 깨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펼쳐진 수험서는 2시간 동안 단 한 페이지도 넘어가지 않았고, 그대와 친구의 성량은 일요일 오전부터 건너편 골목 공사현장에서 들려오는 굴착기의 소리에 결코 지지 않을 데시벨로 측정되었다.


  사실은 성량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대와 친구의 대화는 웃음과 활기로 가득찬 외연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불만족과 짜증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그 불만족과 짜증이 끝없이 나의 몸을 강타했고, 나 또한 불만족과 짜증 속에서 2시간 동안 문장 하나를 완성하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그대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의 시공간은 무시되었다.


  결국 나는 그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로 이동을 한 후에야, 내가 무엇을 써야 할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대와 친구의 대화에서 들려온 말로 짐작하건대, 그대는 중요한 시험을 한차례 끝낸 상황 같았다. 시험의 결과까지야 알 수 없지만, 그대는 어떻든 높은 산봉우리 하나를 등반한 뒤 내려온 것이다.


  그러한 그대는 금요일 저녁을, 유난히도 무더운 이 금요일 저녁을, 왜 스터디 카페에 앉아서 보내고 있었던 것일까?


  그대는 시험을 끝낸 것을 자축하며, 친구와 함께 시원한 치맥을 즐길 수도, 영화관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완된 시간을 누릴 수도, 또는 피곤에 지친 몸을 쉬어주며 못 다한 수면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대는 스터디 카페에 앉아, 보지도 않을 수험서를 펼쳐두고, 먹지도 않을 빙수를 깨작거리며, 소통되지도 않을 대화를 소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대는 바로 그대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대는 자신을 무시하며, 지금껏 남들의 가치에 따라 자신을 희생하고 있었고, 그 결과로서 남들로부터 주어질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대가 희생한 만큼,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 보상이 좀처럼 가시적으로 확연하게 주어지지 않을 때, 그대는 소소한 보상의 시간을 어떻게 해서든지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것이 그대의 권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열심히 희생한 그대인데, 평소보다 조금 더 우렁찬 수다 정도는 세상이 좀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그대는 군대에서 희생된 시간을 보상받기 위해, 후배들에게 그대에 대한 존경심을 종용하는 우렁찬 복학생과도 같았다. 우렁찬 과잉만큼 그렇게 그대는 그저 소소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대는 결코 만족되지 않았다. 매사에 짜증이 감돌았다. 금새라도 터질 것 같은 욕구불만의 상태였다.


  그리고 그대 자신을 무시한 까닭에 야기된 그 불만족과 짜증으로 말미암아, 그대는 결과적으로 남들을 무시하게 되었다. 무시받은 남들은, 이제 그대를 정말로 개념없는 종자로 보며 무시하게 되었다.


  그대여, 그대는 이처럼 무시하기 때문에 무시받는다. 그대는 그대 자신을 무시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무시받는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을 무시될 만큼 소소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그대여, 그대는 왜 그리 소소한가?


  그대는 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미명하에 소확행이라는 기치를 걸고, 실제로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며 그 피해로 인해 결국 자신도 피해를 입게 되는 현실을 만들어내는가?


  그대는 왜 그대 자신을 그토록 작은 존재로 상상하는가?


  그대가 불만족과 짜증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느끼는 답답함만큼 그대 자신이 작게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답답한 모든 현실은, 그 속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답답해진다.


  그대여, 소망과 욕망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는가?


  소망은 그대 자신을 거친 욕망이다. 즉, 조금 어렵게 표현하자면, 그대 자신이라는 유한성을 발판으로 딛고서 펼쳐지는 욕망이 바로 소망이다. 그에 비해 욕망은 그대 자신이라는 유한성을 관통하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욕망은 언제나 그대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이며, 언제나 남과 비교하여 그대를 더 작게 만드는 것이다.


  소망은 언제나 그대 자신의 것이다.


  그리고 소망은 언제나 그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더 커다란 현실을 향한 것이다.


  때문에 소망하는 그대는 결코 소소할 수 없다. 소망은 반드시 유한한 그대가 그 유한성으로 말미암아 꿈꾸어내는 더 커다란 현실을 향한다.


  무시받은 나는 통감했다. 그대를 때릴 수도 없고, 글쓰기를 포기할 수도 없이, 그저 무력하기만 한 나의 유한성을 통감했다. 그래서 나는 굴착기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보다 큰 현실을 소망했다.


  욕망은 우리가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소망은 우리를 새로운 현실로 단순히 이동시킨다.


  그렇게 나는 소망을 따라, 공사현장에서 자연휴양림으로 단순하게 이동했다. 동일한 카페 공간이지만, 분명 새로운 현실이었다. 무시받아 가엾어진 유한한 내 자신을 위해, 소망은 새로운 현실을 개방해주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현실은, 더 커다란 현실이었고, 더 커다란 현실 속에서 자연스레 나는 더 커다란 자신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그대가 밉지 않다.


  그대가 여전히 3시간을 넘기며, 이미 곤죽이 된 빙수와, 상형문자 점토판처럼 고대의 유물이 된 수험서를 앞에 두고 이어가는 무의미한 대화 속에서, 나는 그대 눈빛의 서러움을 본다. 이해받고 싶으나, 이해받지 못해 억지를 부리며 혼자 애쓰고 있는 서글픔을 본다. 그대의 유한성을 본다.


  그러한 그대를 위해 나는 글을 쓴다.


  그대만을 위해 궁서체가 된다.


  유한한 그대 자신만을 위해 소망은 작동한다.


  이처럼 소망은 나에서 출발해 남을 향한다. 함께 나눌 수 있는 더 커다란 현실을 비추어낸다. 반면, 욕망은 남에서 출발해 나를 폐쇄한다. 나 혼자 답답한 현실 속에 갇히게 만든다.


  그대여, 그대 자신(自身)을 무시하지 말라. 그대의 몸을 무시하지 말라.


  모든 소망은 그대의 몸을 향한 것이다. 그대의 몸이 자유로울 수 있는 더 커다란 공간을 향한 것이다. 그 커다란 공간 속에서 자연스레 자라날 더 커다란 그대를 향한 것이다.


  그대가 이루어야 할 남의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노래해야 할 자신의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대가 그처럼 자신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소망으로 살아갈 때, 그 소망은 그대로 남을 향해서도 흘러넘치는 소망이 된다. 그대가 경험한 그대 자신의 유한성과 똑같은 남의 유한성에도 응답하게 되는 공유재가 된다.


  그러한 그대는 결코 무시받지 않는다. 무시될 수 없다.


  목마른 모두를 향해 흘러넘치는 샘물을 파낸 어여쁜 이는 결코 무시받지 않는다. 무시될 수 없다.


  그대 자신이 그 샘물이다.


  그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현실 속 가장 커다란 그대 자신이 바로 그 샘물이다.


  그대에게 과연 시끄러운 굴착 공사가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높은 건물을 올리려는 모든 굴착 공사는 그 시끄러움만큼이나 소소한 일이다.


  욕망은 이처럼 소소한 높이의 문제다. 반면 소망은 장대한 깊이의 문제다.


  그대는 더 장대하게 그대 자신이라는 샘물을 깊이 파내려간다. 가장 깊어서 가장 고요하다. 가장 고요해서 가장 가볍다. 가장 가벼워서 가장 자유롭다.


  그대는 샘물처럼 자유롭게 흐른다. 자유롭게 이동한다.


  그대에게는 이동의 자유가 있다. 이 유난히도 무더운 금요일 저녁, 호프집에도, 영화관에도, 스터디 카페에도, 공원에도, 강변에도, 그대의 방에도, 그 어느 공간에서라도 그대는 썩 잘 어울린다. 어디든지 그대가 있을 수 있는 곳이다. 어디에도 그대가 무시받을 곳은 없다. 어디라도 그대 자신을 위한 곳이다.


  그대여, 목이 말라서 깊이를 소망하는 그대 자신이 있다. 목이 마른데도 높이를 추구해서 더 물로부터 소외된 그대 자신이 있다. 아름답고 가엾은 이것이 바로 유한성이다. 그래서 유한성은 어여쁜 것이다.


  이 어여쁜 그대 자신에게서 펼쳐져 나온 소망을 타고 이동하라. 그 소망이 언제나 그대를 자유롭게 하리라.






Radiohead - High and Dry
Two jumps in a week
한 주만에 두 번의 도약
I bet you think that's pretty clever
스스로가 꽤 잘났다고 생각하겠죠
don't you boy?
그렇죠?
Flying on your motorcycle
오토바이를 타고 높이 날아 올라
Watching all the ground beneath you drop
당신의 밑으로 땅을 내려다보는 일 말이에요
Kill yourself for recognition
관심받으려고 당신 자신을 죽이며
Kill yourself to never ever stop
결코 그 일을 멈추지 않으려고 당신 자신을 죽이죠
You broke another mirror
당신은 또 다른 거울을 깨버렸고
You're turning into something you are not
더는 당신답지도 않게 되었어요
Don't leave me high
저를 버려두지 마세요
Don't leave me dry
저를 말라버리게 하지 마세요
Drying up in conversation
할 말이 메마르고
You will be the one who cannot talk
당신은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All your insides fall to pieces
당신 안의 모든 것은 무너지고
You just sit there wishing you could still make love
당신은 그냥 거기 앉아서 사랑할 수 있기만을 바라죠
They're the ones who'll hate you
사람들은 당신을 싫어할 거예요
When you think you've got the world all sussed out
당신이 세상을 다 알았다고 생각할 때
They're the ones who'll spit at you
사람들은 당신에게 침을 뱉겠죠
You'll be the one screaming out
당신은 이렇게 소리지를 거예요
Don't leave me high
제발 저를 버려두지 마세요
Don't leave me dry
저를 말라버리게 하지 마세요
Oh, it's the best thing that you ever had
그게 당신이 경험한 최고의 것이었죠
The best thing that you ever, ever had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최고의 것
It's the best thing that you ever had
당신이 경험한 최고의 것
The best thing you have is gone away
그 최고의 것은 이미 떠나갔어요
Don't leave me high
저를 버려두지 마세요
Don't leave me dry
저를 말라버리게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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