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커트 코베인들아
"우린 그냥 좆밥 개쓰레기야."
"우린 이미 재난 속에 있어."
취업도 안되고, 돈도 없으며, 사방이 유리벽으로 꽉 막힌 것만 같이 살아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 허름한 호프집에서 대학선배와 서로의 신세를 한탄하며 나누는 이 대화는, 25년 전에 죽은 우리의 한 자화상을 다시금 복기시킨다. 그리고 중첩시킨다.
자신이 너무나 비루하게 느껴져서, 어떻게든 자신이 여기에 살아 있다는 그 존귀함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리고 그 존귀함을 누구보다도 바로 자기 자신이 알고 싶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했다. 정말로 열심히 했다.
허름한 창고 안을 노래로 달리고, 허름한 창고 위를 운동화로 달렸다. 무대에서 뛰어내리고,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가느다란 기타줄에 온 몸을 맡기며, 가느다란 구명줄에 온 몸을 맡기며. 그렇게 더 높은 곳을 찾아, 악착같이 기어올라갔다. 오직 살기 위해, 자신이 자신으로서 살기 위해, 자신을 자신으로서 살게 해달라고 외치기 위해.
그리고 카메라는 우리를 포착했다. 숨을 헐떡이며 미친듯이 질주하는 우리의 뒤를 쫓았다. 우리의 표정 하나, 우리의 동작 하나가 그림이 되었다. 더 많은 카메라가 우리의 언동을 관심으로 주시했다. 송출된 화면을 지켜보는 모두가 우리와 함께 울고 웃었다. 우리가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올라가야 할 가장 높은 곳을 빛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응원했다. 우리의 편인 것 같았다.
마침내 우리는 가치를 창출해낸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절실하게 우리의 목숨을 걸며 필사적으로 노력한 끝에 비로소, 우리는 가치있는 존재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해낸 것이다. 살아남은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낸 것이다.
이 암울한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스파클라 불꽃처럼, 선연하게 타오르며 빛나는 유명인이 되어.
돈이 없어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느끼며 힘들어 했던 우리는, 이제 우리의 존재만으로 돈이 되는 현실을 성취했다. 당당한 교환가치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모든 관심은 우리에게 집중되고, 관심의 크기 그대로 힘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가장 높은 곳에서 얻게 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상상했던 바로 그대로다.
1990년대의 MTV 속에, 2010년대의 인터넷 미디어 속에, 그렇게 우리가 있었다.
쉼없이 달리는 청춘의 뜨거움으로, 그 숨가쁜 호흡으로, 끝내 짓고야 말 벅찬 미소로.
그리고 25년 전의 우리는 문득 눈치채고야 말았다.
우리를 답답하게 가두고 있던 사방의 유리벽을, 우리의 노력으로 뚫어내었다고 생각한 우리 자신이, 바로 모니터라는 유리벽에 여전히 갇혀 있다는 사실을.
유리벽을 깨는 데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했던 도구인 카메라가, 사실 그 무엇보다 가장 견고한 유리벽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말로 유리벽 밖으로의 출구(exit)를 찾았던 것일까? 그것은 정말로 출구였던 것일까?
이 이율배반적인 사실 앞에, 우리는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겨우 얻어낸 지금의 성공을 만들어준 카메라를 혐오하고, 또 카메라에 비친 자신을 혐오했다. 그리고 다시 카메라 앞에 서서 벅찬 미소로 웃었다.
우리는 이율배반을 살았다. 동시에 이율배반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순수했다.
그래서 1990년대의 어느날 우리는 엽총으로 자신을 겨냥했다.
이 모든 유리벽의 밖으로 향하는 출구를 꿈꾸며 엽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이 모든 유리벽의 밖으로 나가는 최종적인 출구였는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었기에, 우리는 여전히 2010년대를 모니터 속에서 살아간다.
달리고, 또 달린다. 맛집을 찾아, 흉가를 찾아, 루머를 찾아, 소화력의 끝을 찾아, 희소정보를 찾아, 돈 냄새를 찾아, 망각을 찾아, 우리는 숨가쁘게 달린다. 살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살려달라는 절규를 누군가가 듣게 하기 위해.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순수하다.
모든 노력을 다해 스스로 열심히 달리면서, 동시에 "우린 그냥 좆밥 개쓰레기야."라며 스스로 열심히 비난한다.
이 끝없는 이율배반의 악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고통을, 그저 누군가가 알아보고 우리를 구해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정치인에게 바라고, 스승에게 바라고, 지도자에게 바라고, 가족에게 바라고, 연인에게 바라고, 연예인에게 바라고, 인터넷 명사에게 바라고, 비평가에게 바라고, 관객에게 바라고, 청자에게 바라고, 대중에게 바라고, 절대자에게 바란다.
그리고 우리를 구해주기를 바랐던 그 모든 것이 정확히 우리에게 유리벽이 된다.
우리가 오직 출구만을 찾아, 성실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 그 출구로 나가기만 하면 생존이 담보되고, 모든 것이 마법적으로 다 해결되며, 행복한 삶이 궁극적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좇아 살아가는 한, 이는 필연일 것이다.
exit와 exist라는 두 단어의 변별은 고작 한 글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exit는 '밖으로 나가다'의 어원적 의미를 담고 있고, exist는 '밖에 서다'의 어원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전자는 본질의 원리며, 후자는 실존의 원리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는 이유는, 밖에 더 진정한 본질적 현실이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밖으로 나가야만 그 본질적 현실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우리를 무시했던 이들이 우리를 달리 보고, 우리 자신이 늘 부족한 모습만 보여 미안했던 가족들과 화해하며,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알아봄으로써 세상이 우리를 가치있게 대하는 현실이, 바로 우리가 출구 밖으로 나가면 존재할 것이라고 믿었던 현실이다. 동굴 밖에 존재하는 이데아의 현실이다.
즉,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진리처럼 마땅히 우리가 얻어야만 한다고 간주하는 당위적 본질을 얻으러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밖에 선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무시했던 이들이 우리를 달리 보고, 우리 자신이 늘 부족한 모습만 보여 미안했던 가족들과 화해하며,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알아봄으로써 세상이 우리를 가치있게 대하는 현실'이, 바로 남들이 우리에게 주입한 환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즉,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며 추구하고 있는 본질이, 결코 우리가 마땅히 따르며 살아야 할 진리가 아니라, 그저 남이 만든 가치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exist는 본질이 아닌 실존의 원리다.
실존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원리로 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밖에 서는 것이다. 밖의 원리로 사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유리벽을 열심히 뚫어내려 노력하고, 결국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다시 유리벽을 체감하게 되는 이유는, 유리벽 밖에서도 똑같은 유리벽 안의 원리로 살기 때문이다. 유리벽 밖에서도, 유리벽 안에서 진리로 추구했던 것들을 똑같이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율배반의 이유다. 모든 이율배반은 밀면서 당기는 일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관성이 작동한다. 밖으로 나가더라도, 곧바로 안으로 끌려들어온다.
결국, 우리는 이율배반을 경험할 만큼 순수한 것이다. 너무나 순수하기 때문에, 본질이라는 환상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마땅히 살아야 할 본질적인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 남의 말을, 너무나 순수하게 그대로 믿으며 따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좆밥 개쓰레기'로 스스로를 비난하게 되었을까?
남의 말에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동일한 남의 기준에 따라, 우리는 '좆밥 개쓰레기'의 밖으로 나가려고 열심히 달린다. 그렇게 달림으로써 우리가 남의 기준에 맞추려 하는 최선의 성실성을 증명하면, 그 기준을 세운 남은 이제 우리를 인정해준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며 살려주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남이 만든, 진정한 우리 자신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누더기처럼 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좆밥 개쓰레기'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회의적인 의문을 던지는 이는, 아마도 실존철학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시작된 그 신성한 의심의 후예들은, 바로 이러한 달리기의 구조가 사기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남의 말에 따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달리기보다는, 그저 그 남의 말의 밖에 서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다.
본질을 찾아 유리벽 밖으로 나가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멋대로 규정해놓은 그 남의 말의 밖에 서는 것이 핵심이다. 곧, 진정한 자신을 찾아 유리벽 밖으로 나가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멋대로 규정해놓은 그 남의 말의 밖에 서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본질을 당위적으로 추구하는 근본주의적 사조들이 너무나 많다. 유교주의, 가족주의, 집단주의 등이 바로 그러하다. 우리가 애초에 부족하고, 못나고, 열등한 '좆밥 개쓰레기'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들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남의 말을 진정한 본질로 섬길 것에 대한 우리의 충성심을 요구하며, 우리를 본질이라는 단어의 무게로 심판함으로써 통제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재난의 정체다. 남의 말이 진짜 재난의 정체다. 우리는 이미 이 재난 속에 있다.
우리가 이 근본주의의 원리들에 동의하고 있는 한, 즉 우리가 이 근본주의적 원리들을 추구하며 그것을 성공한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한, 우리는 늘 유리벽 속에 갇힌다. 남의 말에 따라 사는 이가, 남의 말에 갇히는 것은 필연이다. 그리고 그것이 남의 말인 까닭에, 우리는 그 속에서 늘 우리 자신을 잃고 비루해진다.
이처럼 비루해진 우리를 위해 붓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우리에게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고 전했다. 다른 것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우리가 기억해주기를 소망했다.
우리 자신으로 사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이것은 실존의 의미다.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라는 말의 미명하에 남의 기준과 동일한 성공을 바라는 또 하나의 사기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실존이 말하는 정직성(authenticity)의 의미다.
그것은 남이 정해놓은 본질과 맞지 않을지라도, 그럼으로써 남이 그 본질에 복속되지 않는 우리를 싫어하게 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길을 정직하게 가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진정하게 비추어줄 남의 등불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등불로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의 등불로 비추어진 우리 자신은, 결코 '좆밥 개쓰레기'일 수 없다.
그저 대견하게 살아 있을 뿐이다.
매일같이 우리를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부족하다고 말하는, 무수한 남의 말의 재난 속에서도, 이토록 대견하게 살아 있을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이미 '좆밥 개쓰레기'가 아닐 때, '좆밥 개쓰레기'의 밖으로 나갈 출구도 필요없어진다. 출구로 향하기 위한 격렬한 질주도 필요없어진다. 우리를 구원해줄 남들의 시선을 바라는 처절한 구걸도 필요없어진다.
우리는 이미 밖에 서 있다. 재난의 밖에, 남의 말의 밖에, 본질의 밖에.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자신을 여전히 '좆밥 개쓰레기'로 알며 재난 속에 갇혀 죽어가는 또 다른 시간대의 우리에게, 바로 이 사실을 전하기 위해 다시금 안을 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등불로 환상의 유리벽을 깨트리며 우리는 반드시 전하게 될 것이다.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도망가야 할 출구는 어디에도 없다고.
우리가 서 있는 그 모든 자리는 바로 입구라고. 우리가 서 있는 그 모든 자리는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안으로 향해야 할 입구라고.
남의 말의 밖에 선다는 것은, 이처럼 곧 우리 자신의 안을 향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자신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2010년대의 오늘 우리는 관심으로 자신을 겨냥한다.
오직 우리 자신의 안으로 향하는 입구를 실감하며 관심의 방아쇠를 당긴다.
환상이 깨어진다. 악몽에서 깨어난다.
우리는, 우리는 단지 살아남은 것 그 이상이다.
살아 있어서 좋다. 그저 대견한 우리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