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1

"머리말"

by 깨닫는마음씨




대학원에서 가르치는 학생들과 상담을 배우는 수련생들로부터 실존상담 교과서를 쉽게 그러나 핵심적으로 써달라는 제안을 많이 받아왔다.


귀찮아서 하기 싫다는 말보다 더 정직한 말은 사실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고백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선은 범위가 너무 넓다. 실존상담을 언술화하려면 최소한 철학, 심리학, 종교학의 세 학문적 전통에서 온 개념들을 충분히 다루어야 한다. 대체 어느 정도만큼을 잘라내서 보여줘야 할지가 고민이 되는 일이다.


나아가 잘라낸 만큼의 굴절과 오해가 분명하게 발생한다. 조금 배웠다고 하는 이들에게서도 존재니 역설이니 하는 실존상담의 고유한 개념들이 참 개념없이 쓰이는 모습을 많이 목격한다. 이를테면 칼 융의 분석심리학이나 켄 윌버의 통합학 등의 목적론적 변증의 원리에서 제시되는 대극의 개념은 절대로 역설이 아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들을 통해 어떠한 실재가 묘사된다고 그것이 역설의 개념은 아닌 것이다. 존재에 대해서는 또 어떠할까? 실존상담의 대전제는 분명 이러하다.


"존재가 가장 먼저의 것이다."


인간이 하는 그 어떤 행위도 존재를 통제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 그러나 언어를 통해 존재를 성장시키거나, 변화시키거나, 초월시킬 수 있다는 마법적 진술들은 왜 이렇게 많은가. 존재의 특성에 대해 감을 잡게 하는 것만으로도 최소 밀도 높은 2학기분의 수업 분량이다. 존재를 조우하는 종교체험 내지 신비체험을 했다고 하는 이들조차도 존재에 대해서는 거칠고 투박하기만 하다. 그들의 체험을 곧바로 그들의 언어가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존재를 다시 언어로 환원시켜 언어적 체계 안에서 존재를 다루니 이미 존재는 은폐되고야 만다.


그래서 실존상담을 묘사하는 데 있어 그나마 유효했던 방식은, 무엇이 실존상담이 아닌가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형식을 잡아가면 상대적으로 수월해진다. 철학적 전통에서라면 결국은 헤겔적인 어떤 것이 실존상담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심리학적 전통 속에서 실존상담의 정반대에 있는 접근이라면 대개는 정신역동적 관점들이며, 특히 융과 융에게서 파생된 내면아이 등의 분아적 접근들은 가장 반대편에 있다. 윌버와는 전통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것이 또한 실존상담이다. 종교학적 전통에서는 인도의 브라만교적 관점과 모성숭배의 전통에서 비롯한 중세의 연금술적 신비주의가 그 반대편에 있다.


그리고 의미있게도, 헤겔, 융, 윌버, 분아적 접근, 브라만교적 사유, 모성숭배사상, 연금술적 신비주의는 같은 한 맥락 속에 있다. 보통 아트만(atman)이라고 부르는 자아를 중심으로 한 접근들이다. 자아가 그 자신의 노력으로 신적인 것에 이르러 합일하는 길에 대한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실존상담은 이러한 자아의 가능성 대신에 인간의 유한성을 강조한다. 경계를 명확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경계가 명확할 때 비로소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자유인 까닭이다.


이러한 실존상담의 관점을 무아(無我)적 관점이라 칭하는 일은 권장된다. 본문에서 후술할 것이지만 실제로 실존상담의 배다른 쌍둥이라고 불리는 접근은 선불교다. 무아는 소위 말하는 참나가 아니다. 즉, 자아에 대한 부모, 스승, 구원자, 용서해주는 이, 수호자 등의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아를 밖에서 바라보게 되는 메타인지의 관점 또한 무아가 아니다. 참나라는 개념이 보통 그 일을 한다. 참나는 자아가 창조한 것이다. 자기보다 높은 것을 창조해 자기가 구원받고자 하는 자아의 기획이다. '자력구원'이라고 쓰고 '자위'라고 읽는다. 엄마가 계속 필요한 이들이 심리적 모성을 창조해낸 뒤 그 품에 안겨 용서받고 구원받고자 하는 모습에 대한 묘사다.


실존상담이 지향하는 것이 이러한 '자위'가 아니라 '자유'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또 이 자유라는 개념만큼 가장 오해된 개념도 달리 없다. 그나마 견줄 만한 것은 사랑 정도가 있을까. 여기에서는 이 정도로만 자유를 말해보자.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자유롭기 위해서만 인간은 태어났다. 그러나 운명을 받아들여야 진정으로 자유로워진다는 식의 쉰내나는 영웅신화의 교훈은 잊는 것이 좋다. 사르트르는 운명과 자유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했는지.


"인간은 자유가 그의 운명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짧은 말 한 마디로 충격과 전율을 선사하는 데 능숙하다. 사실 실존주의자들의 사상서들 내지 문학작품들은 그 고유한 작법에 있어 본질적으로 시(詩)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궁극의, 아니 거의 유일한 글쓰기 방식으로 괜히 시를 제안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실존상담의 교과서를 집필하기란 더욱더 어려워진다. 시로 사상을 체계화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그래서 모든 실존상담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실존상담은 체계화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선(禪)에서의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에 의거해 세우지 않는다는 뜻)와 교외별전(敎外別傳: 언어로는 전할 수 없으니 따로 전한다는 뜻)의 의미가 여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실상 실존상담은 언어적 학습과 원리의 모방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특정한 체험을 하면 가능해지는 것 또한 아니다. 차라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살아야만 그렇게 상담할 수 있다."


실존상담은 상담원리가 아니라, 존재방식이다. 그렇게 살아 내는 삶의 향기다. 그래서 실존상담은 단지 하나의 상담방법론만이 아니다. 상담을 하거나 업으로 삼지 않는 일상인들도, 생활 전반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나갈 수 있는 자기변혁의 길인 셈이다.


다시 한 번 역설의 애기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는데, 우리 삶의 가장 근원적인 역설은 바로 삶과 죽음의 역설이다. 사실 이것만이 유일한 역설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죽음은 모든 실존주의자에게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현상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수사학적 효과를 위해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말을 인용해보자.


"우리는 사기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우리는 죽어가는 존재로서 우리 자신을 자각해야 한다."


아, 이쯤이면 '실존상담 뭐지? 조금 멋있는 건가?'라며 관심을 보이던 이들도 절반 이상이 책을 덮기 시작한다. 아직 머리말일 뿐이지만, 이 책의 내용은 이미 그 전모가 파악된 것만 같다.


"죽는다는 거 누가 몰라? '메멘토 모리' 식의 뻔한 이야기하며 삶을 소중히 여기라는 교훈을 주려는 거네. 실존상담이란 거 틀딱들이 좋아하는 꼰대심리학이구만."


대개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그 생물학적 연령과는 관계없이 꼰대인 경우가 압도적이다. 사실 젊게 산다는 것은 죽음을 더 가까이 실감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역설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한창 20대 초의 젊은이들에게는 죽음이 머지 않다. 보통 30세가 그 죽음의 경계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촉박하다. 30세라는 돌아올 수 없는 마(魔)의 강을 건너기 전에, 성공적인 모종의 성취를 이루고 싶은 까닭이다.


죽음을 지적으로 당연한 '기성정보'로 이해하고 있을 때, 그는 자연사박물관에 화석으로 전시된 꼰대다. 죽음을 아직 모르는 미지의 것으로 실감하며 사는 이만이 젊게 산다. 그리고 자유란 젊은 영혼만의 특권이다.


꼰대란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을 사실이 아닌 정보로 바꾸려 한다. 삶이 아닌 앎의 차원으로 굴절시키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봉쇄하는 만큼 함께 봉쇄되는 것이 바로 자유다. 자유를 잃어 자기 안에 갇힌 이들이 반드시 가게 되는 길은 '진정한 나의 길'이다. 자유를 자기 안에 항구적으로 가두기 위해서는 더 두꺼운 자기라는 정체성이 필요해지며, 그 정체성이 두터워진 만큼 그것은 이제 더는 상실할 수 없는 진정한 것이 되는 까닭이다. 이처럼 결코 자기라고 하는 것을 상실하려 하지 않는 자아는 필연적으로 무엇을 하게 될까?


약탈이다. 자아는 약탈로만 먹고 산다. 자기의 것을 잃지 않으려는 이는 반드시 타인의 것을 빼앗게 된다. 역사 속에서 실증적으로 한번 살펴보자.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인 것은 가장 자기의 죽음을 봉쇄하고 있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자기의 죽음을 봉쇄함으로써 자유를 봉쇄한 만큼 타자에게서도 자유를 가장 봉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제 타자가 자유 대신에 실현하도록 권장되는 것은 바로 학습이다.


반실존적인 꼰대들의 행동강령은 언제나 이처럼 계몽주의다. 이 계몽주의는 단지 근대의 유물이 아니라, 현대적 학문의 전통 속에서도 늘 살아나 새로운 언어로 다시금 그 위세를 떨친다. 단적인 예로 오늘날 심리학은 아주 대표적인 계몽주의의 도구가 되어 있는 소재다. 유튜브만 켜고 SNS에만 로그인하면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훌륭한 심리학적 계몽의 가르침들이 보험영업사원처럼 우리에게 방실방실 웃으며 찾아든다. 마음의 원리 등에 대한 소설같은 이야기들이 인터넷이라는 허공을 가득 메운다.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는 이들이 (남들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멋드러진 주장을 한다. 이러한 계몽주의가 낳는 진짜 폐해는 언제나 우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물음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이 물음이 명확하게 실감되어야, 우리는 저 앞에서 전술한 자유의 문제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이들은 실존상담에 대해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라고 말할 수 있는 잠정적 내담자들이다. 실존상담은 이러한 근본적인 삶의 문제에 대해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인지에 대한 답은 남의 정보가 가르쳐 준대로 자기가 다 정해놓고, 상담자에게는 엄마 같은 공감자와 아빠 같은 해결사 역할만을 종용하는 이들에게 실존상담은 분명 좋은 선택이 아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한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을 확고히 내려놓고 있는 이 놀라운 사태 앞에 실존상담자는 대체로 할 말이 없다. 상담비를 많이 준다면야 가난한 대다수의 실존상담자들은 상담을 시작하기는 하겠지만, 상담자에게 있어서나 내담자에게 있어서나 모험이 되지 않는 상담은 실존상담자에게는 반가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보통 이런 유형의 내담자들은 상담에 돈을 쓰는 일을 아까워한다!


머리말이 길어지는 것은 용두사미가 아니라, 원래 대두인 티라노사우루스이기 때문이다. 몸통은 더욱 크며, 허벅지는 그 힘이 폭발적이고, 꼬리는 우아하게 탄력있다. 티라노사우루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일이었다. 자유였다. 자유로운 것이 섹시하고 육질이 좋다. 먹는 맛이 있어야 살도 잘 붙는다. 그래서 이 책의 경쟁자는 KXC, BBX, 교X치킨, X네치킨, 푸라X이다. 경쟁자들보다 더 맛있는 티라노사우루스의 꿈을 실현해내고자 한다. 차마 그 꿈에 닿지 못해 멸종된 것들의 한도 함께 풀릴 것이다.


쓰기 힘든 것이 써지게 될 때는, 핵심을 잡고 있을 때다. 그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의도는 웃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보자.


"실존상담은 웃음이 있는 대화다."


긍정심리학과 웃음테라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웃음이란 개기름 가득한 얼굴로 근육훈련을 통해 한마 바키처럼 만들어진 인위적 가공물이 아니다. 웃고 싶지 않은데도 터져 나오는 웃음이다. 전문용어로, 쪽팔린데 동시에 그게 너무 행복한 안도의 웃음이다. 이제 안심할 수 있는 자유의 웃음이다. 이것을 실존상담자인 빅터 프랭클은 '자기초월의 웃음'이라고 말한다.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나가는 강제수용소 속에서도 자신을 결국 끝까지 생존할 수 있게 한 것은 웃음이었다고 고백한 양반이 하는 말이다. 프랭클에 대한 애정을 담아 이 책의 제목은 구성되었다.



# 웃다보면


웃음은 하나의 경계가 넘어가진 증거다. 그렇게 웃음에는 반드시 하나의 죽음이 동반된다. 한계까지 이른 어떤 것이 그 한계를 넘어 다른 경계로 이동하게 되었을 때, 세관에서 지불하게 되는 것이 바로 웃음이다. 무엇이 죽었는지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더 많이 웃을수록,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고, 자유롭게 모험하고 있는 것이다. 진짜로 살고 있는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는 말한다.


"웃음이 신이다."


하이데거에게 동의하는 이들이 결국 조심스럽게 하게 되는 말은 이와 유사하다.


"존재는 신비다."


웃음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표현이며, 그것은 가장 신적인 것이다. 자아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하는 광대같은 바보짓이 신적인 것으로서의 존재를 웃게 한다. 웃으면 웃을수록 우리는 자신의 위상을 거대한 신비로 거듭해서 실감하게 되며, 아, 태어나서 진짜 좋았던 것이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이라면 자신이 애정하는 반려동물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있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감각 속에 위치하게 된다. 우리가 인간인 스스로를 향해 웃을 수 있는 현실, 그럼으로써 인간을 향한 사랑이 저도 모르게 흘러 넘치게 되는 현실, 이것은 분명 실존상담의 목표다. 웃다보면 가능해진다.



# 배워지는


실존상담의 실천형식은 분명 현상학이다. 이것은 보는 법이며, 곧 아는 법이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유튜브 검색창에 키워드를 치면 정보가 나오는가? 우리 삶에 대해서도 그러한가? 우리가 삶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삶 앞에 스스로 서야 한다. 키르케고르의 단독자가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삶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불하면, 돈이 없는 경우 삶이 시키는 대로 무수한 영웅신화들처럼 몸으로 때우면, 또는 삶의 멱살이라도 잡으며 내놓으라고 하면 삶에 대해 알게 될까? 결코 그렇지 않다. 현상학은 알려주는 대로 아는 법이다. 삶이 자신을 알려주기 위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그것을 영접하는 것이다. 이 경우 "삶은 타자다."라는 표현은 아주 유용하다.


차라리 이렇게 비유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신다. 오늘밤 묵어가도 되냐고 청하신다. 또는 붓다께서 밥그릇을 들고 문앞에 서계신다.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레비나스에게서는 '환대'라는 개념이 제안된다. 삶을 환대하는 것이다. 그러면 삶이 스스로를 드러내보인다. 그만큼 우리는 스스로를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배움이란 실은 상호작용의 결과다. 배우는 것이 아니라 배워지는 것이다. 함께 배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배울 때 그 배움이 우리에게 육화된다. 우리의 살이 된다. 날개의 조직도 형성될 것이다.



# 한국형


이것은 중요하다. 이 책은 한국형이어야만 한다. 실존은 구체적인 것이다. 씨앗이 어디에 떨어졌는가? 던져진 그 풍토가 어떠한지에 따라 씨앗은 고유한 실존의 생태를 형성한다. 실존주의도 선불교도 한국의 것이 아니지만, 실존은 한국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그 실존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는 전혀 아니다. 신토불이 실존불이 같은 민족적 대서사시의 출범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한국이라는 문화적 조건이 얼마나 실존의 씨앗에 대해 척박한 토양이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씨앗이 응답해왔는지 그 존재방식을 되새기는 의미가 될 것이다. 틸리히의 묘사에 따르자면, 이것은 상대적인 문화와 절대적인 종교성이 관계맺는 방식이다. 한국형이라는 것은 한국이라는 문화에 대해 절대적인 것이 응답한 바로 그 방식에 대한 묘사다.


드라마와 쇼, 연극을 좋아하며 각종 이야기들에 탐닉해온 이 실존의 불모지에서도 실존은 가능하다.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희망이다.



# 실존상담


이 책의 주제는 실존상담이다.


'자연스럽게 깨달아 사는 법'이라고 손가락이 근질거려서 결국 그렇게 쓰고 만다. 이 문장으로 인해 500부 정도가 덜 팔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총 510부 초판 인쇄 중에, 남은 10명이 기적이다. 10명의 현자만 있어도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으리라고 창조주께서는 말씀하셨다.



# 교과서


학지사나 시그마프레스와 같은 심리학교재 전문출판사에 출판을 의뢰하기 위해 꼭 붙여야 하는 이름이다. 아마 안 될 것 같지만, 그래도 되었으면 좋겠지만, 이제 슬슬 책 하나 내야 하지 않냐며 예쁘게 만들어 드리겠다던 학지사의 김진환 사장님을 믿는다. 한국 심리학의 발전을 선도한 세계적 대출판사의 창조주님을 믿는다.



그리고 이 책의 제목에서 빠져 있는 여백은, 그렇게 여백으로 존재함으로써 더욱 그 존재감을 명확하게 하는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다.


이 책은 실종된 당신을 찾고자 하는 그 모험을 담은 책이다.


당신을 다시 만나 함께 큰웃음 짓고자 하는 우리의 비망록이다.


단 한 문장도 당신에 대한 책이며,

온전하게 당신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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