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실존상담인가?"
독재의 현실은 끝났는가? 특권계급만이 자원을 독점해오던 오랜 역사에서 벗어나 이제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게 자기의 기회를 실현할 수 있는 신세기를 맞이했는가?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
개인은 이제 더는 이 표어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이것은 진실에 가깝다. 돈이 있으면 누구라도 과거의 왕들이 누렸던 것 이상의 혜택들을 손쉽게 누릴 수 있다. 돈이 없다면? 돈을 만들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어떻게? 대다수의 인류의 운명처럼 불운하게도 우리에게는 자본이 없다. 대체 무엇을 팔아야 할까? 이 지점에서 개인은 불운하게도 알아채고야 만다.
"내 자신을 팔면 되는구나!"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외모와, 자신의 몸과, 자신의 이야기와,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노래와, 자신의 그림과, 자신의 글과, 자신의 재롱과, 자신의 불쌍한 처지와, 자신의 잘난 성취를 팔면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본일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챈 이들에게 이제 가장 중요해지는 소재는 인기가 된다. 인기는 진리고, 전문성이며, 권위고, 힘이며, 왕의 자격이다. 그렇다면 이 인기는 누가 제공하는가? 바로 대중이다. 대중의 간택이 누군가를 신적 권능을 가진 왕으로 만든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는 왕좌의 허가와 함께.
그리고 이제 왕과 대중 사이에서 밀당의 연애사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대중은 자신이 직접 선택해 세운 왕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고 싶어하고, 왕 또한 자신이 계속 왕이기 위해 효과적으로 대중을 조종하고자 한다. 상대에게 조종당하지는 않으면서 자신만은 조종할 수 있는 효과적인 가스라이팅의 전략을 궁리한다. 서로가 자신의 리스크는 최대한 없애면서 이득은 최대한 창출하려고 하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그래, 이것이 바로 관계다.
독재는 끝나지 않았다. 오늘날은 관계독재의 시대다. 관계가 모든 것을 지배하며, 힘을 얻고 싶어하는 이들이 더욱더 관계에 몰두한다. 관계중독이 오미크론보다 더 강력한 전염력으로 사람들 사이에 전파된다. 표면의 대사는 이렇다. "인간이란 관계를 통해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내심의 의도는 이렇다. "너는 나를 왕으로 떠올려줄 발판이야!" 조금 더 변태적인 이들은 먼저 나서서 자신이 남들보다 10cm 정도 높은 키높이 발판임을 홍보한다. 당신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최고의 발판으로 활용하라며 인기몰이를 한다. 조급한 이들이다. 이미 마음은 남들보다 10cm 정도 높은 키높이 옥좌에 앉아 있는 이들이다.
관계가 없으면 인기가 없고, 인기가 없으면 왕이 없다. 그런데 왕이 없는 현실을 가장 싫어하는 이는 누구일까? 노예들이다. 마음의 거지들이다. 노예는 자유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이 왕이 될 전복된 구조를 꿈꾼다. 그래서 왕이 없어지면 노예가 가장 슬퍼한다. 자신의 가능성이 닫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예는 누구보다도 열렬히 자신의 주인인 왕을 수호하려고 한다. 이것은 심리상담이 다루는 아주 오랜 딜레마다.
"사람들은 왜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을 오히려 지키려 하는가?"
술자리에서 매번 자신은 엄마 욕을 수없이 하다가, 친구 하나가 그 욕을 거들기라도 할라치면 갑자기 어벤져스로 돌변한다. 인류의 반을 죽인 대악마를 보는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며 치킨무를 찍어먹던 포크를 포세이돈의 삼지창처럼 들어 정의의 심판을 이루려는 순간, 친구들은 정해진 연극역할을 수행하듯이 격하게 말리는 제스쳐를 취하고, 말리는 만큼 어벤져스는 목소리를 높이며 술집이 떠나가라 발악을 한다. 보다못한 치킨집 사장님이 오셔서 한 말씀 거드실 것이다.
"내가 어쩌다보니 얘기 다 듣게 되었는데, 거기 친구 그러는 거 아니에요. 이 분이 자기 어머니를 참 많이 사랑하니까 그 속상함 때문에 푸념 좀 한 거를 가지고, 친구는 냉큼 좋아라 남의 어머니 욕하던데, 그게 친구로서 할 말인가요. 아니 친구 이전에 사람된 도리인가요. 진정한 친구면 이 친구가 얼마나 어머니를 사랑하는지 그 온전한 마음을 다시 확인시켜줘야지, 아까 잠깐 보니까 심리상담 배우는 친구들이던데, 그렇게 해서 심리상담할 수 있겠어요? 우리 친구, 내 아들이었으면 아주 호되게 혼났어요."
축구중계를 보다가 더 재미있는 남의 집 싸움구경에 몰입하던 관람객들도 막 박수를 보내고, 누군가는 벌써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을 한 다음 '치킨집 사장님의 참교육'이란 제목으로 SNS에 업로드도 마쳤을 것이다. "거기 치킨집 어디죠? 사장님 아주 돈쭐을 내드려야겠네 ^^"라는 댓글들이 3000개, 그렇게 권태와 우울 속에서 표류하다가 이제 자신도 의미있는 일에 동참하게 된 듯한 도취감으로 잠깐 구원을 얻게 된 인생도 3000개, 아름다운 사람들의 힘이 모여 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제대로 돌아간다는 환상을 창조하기 위한 그 희생양으로서 3000만큼 바보가 된 인간만이 1명 남아,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비애감으로 고개를 떨구며 얼굴을 붉힌다. 이것이 관계의 비극적 코미디다.
늘 인기콘텐츠의 산 제물이 되기를 강요받아야 하는 이 전황이 당신에게는 대체 어떻게 느껴질까?
마치 영화 '트루먼쇼'의 세상처럼, 인기를 얻기 위한 의지로만 작동하는 이 관계중독의 현실이 정말로 당신에게는 어떠한 느낌으로 다가올까?
숨이 막히는가?
나도 그렇다.
우리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실존주의자들은 다 한때는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방독면이라도 없으면 관계중독의 가스 속에서 질식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보았는가? 주인공인 로캉탱은 가스를 흡입할 때마다 아예 토해버린다.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인간을 멋대로 규정하고, 그 인간들이 이루는 관계를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며, 나아가 관계라고 하는 것을 인간의 절대적인 본질로서 위치시키고자 하는 소위 휴머니스트들에 대해 로캉탱은 처참함을 경험한다. 그 기만을 목격한 감정은 언어를 넘어도 한참 넘어서 있는 것이었기에, 사르트르는 단지 이렇게만 말한다.
"역겨운 새끼들."
치킨집의 바보가 뛰쳐 나가며 내뱉지 못한 그 말이다. 나갔으면 뫼르소이다. 『이방인』의 2부가 시작된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남은 닭의 목뼈가 눈이 부셔 나는 총으로 쏘았다." 대체로 호아킨 피닉스가 열연한 2019년판의 '조커'는 실존주의 문학으로 충분히 분류될 만하다. 딕셔너리닷컴이 선정한 2019년 '올해의 단어'는 '실존주의적(existential)'이었다는 사실은 의미깊다. 딕셔너리닷컴은 "이 단어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문자 그대로든 비유적으로든 세계와 사랑하는 사람들, 삶의 방식의 존속을 두고 고심한 느낌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라며 선정의 이유를 밝혔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실 훨씬 더 깊게 이미 실존주의적인 것을 소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관계중독으로부터의 회복은 정확하게 실존으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관계라고 하는 것의 다른 말은 구조다. 그리고 구조의 정확한 사상적 대립어가 바로 실존이다. 구조라는 것은 그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계(system)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그 어떤 계도 단 하나의 실존에 의해 붕괴된다. 계의 구성원리는 연역법이며, 연역법은 단 하나의 예외라도 있으면 그 정당성이 바로 깨지는 까닭이다. 그러니 구조에게 있어 실존은 늘 위협적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실존을 늘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이 구조다. 실존만 없으면 모두가 행복한 치킨집의 역사가 이루어질텐데, 꼭 반동분자 같은 실존종자들이 순응하지 않고 반역한다.
실존주의는 반역자(the rebel)의 철학인가? 그렇다고 저 놀라운 전설적 문화비평서인 『아웃사이더』를 집필한 콜린 윌슨은 말한다. 반역은 언제나 모든 것을 자기의 얼굴과 똑같은 얼굴로 만들려 하는 독재에 대해 이루어지는 것이며, 실존주의의 반역은 관계독재를 겨냥한다. 그렇다면 관계독재의 무엇이 그토록 문제가 되는 것일까? 이것은 조금 더 진지한 성찰로 우리를 접어들게 한다.
놀라지 말고 들어야 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굳이 놀라는 연기를 할 필요도 없다.
"국가, 제도, 사회, 가정, 공동체 등의 그 어떤 구조도 이제는 개인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관계에 순종하면 할수록 개인은 오히려 자신을 보호할 근원적인 힘을 잃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다. 재난심리학에서 분석하기로, 재난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는 개인의 특성은 분명하게 반역적이다. 국가의 지시를 듣지 않고, 사회적 상식에 자기의 안위를 위탁하지 않으며, 가정에서 익힌 훈육의 원칙들을 신주단지로 모시지 않는 개인들만이 더욱 잘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제도권 밖으로 나가야 우리가 잘 살 수 있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의 실제적인 제도권은 개인미디어이고, SNS이며, 비트코인이다. 중앙집권을 거부하며 서로의 연대로 서로를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추상적 그물망 구조가 이 시대의 진짜 제도권이 되어 있다. 정말로 반역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다. 인기를 얻기 위해서라면 편법과 반칙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줄 힘이 될 관계를 구성해야 한다고 하는 이 의지가 바로 관계독재의 의지다. 이처럼 오늘날 벗어나야 할 제도권은 고전적인 중앙집권적 계급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탈중심을 주장하며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어!"라고 노래하는 개체주의적 예능사회다.
물론 벗어나는 것은 당위가 아니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오늘날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있는 것은, 그것도 자발적인 노예로 입지화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관계독재가 이끄는 예능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지구촌적인 현상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쇼로 볼거리를 제공하는 이들이 권력을 얻는다. 인기는 그의 힘이다. 뒤집어 말하면 아무리 힘이 없는 이라도 자신을 팔아 쇼의 소재가 되면 왕이 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창부의 논리와 같다. 전술했듯이, 이렇게 이루어진 왕은 그저 노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노예는 자신을 변혁한 것이 아니다. 왕이라는 이름의 노예가 된 것뿐이다. 끝없는 노예생활의 연장이다. 이것이 싫은 이들만이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자유의 힘을 행사할 수 있다.
노예란 무엇인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힘을 잃은 이다. 주인에게 힘을 위탁했기 때문에 그의 처우는 전적으로 주인에게만 달려 있다. 즉, 노예란 가장 생존에 무력한 이다. 그러니 노예는 자기를 왕으로 만들어준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관계의 말은 신의 말과 같다. 관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노예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이다. 그렇게 노예는 관계에 묶여, 침몰하는 타이타닉 안에, 불을 내뿜는 폼페이 화산 밑에, 자신을 향해 그르렁거리는 티라노사우루스 앞에 자신을 방치하게 된다. 움직일 수가 없다. 움직이면 관계가 깨지니 움직이지 말라고, 늘 그 모습 그대로 있으라고 관계가 명령했기 때문이다. 자기 말만 잘 들으면 영원히 지켜주겠다고 천사 같은 엄마처럼 관계가 훈육했기 때문이다.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이들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숨이 가쁘며,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다. 차라리 쓰러지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쓰러질 수 없어 악착같이 버텨낸다. 이들은 지금 두려워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타이타닉의 침몰이, 화산의 분화가, 티라노사우루스의 포효가 두렵다고, 이들은 어렴풋이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이들을 두렵게 하는 것은 시선이다. 바로 관계의 시선이다.
노예는 언제나 주인의 시선을 뒤통수에 걸고 산다. 그 시선에 따라 자기의 행위를 규율한다. 자기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주인의 시선에 의해서만 방향성을 잡고 동력을 얻는다. 그 시선에 따라 움직이는 것도 어떤 때는 굴욕적이고 짜증이 나지만, 시선이 사라지는 것은 절대적으로 끔찍하기만 하다. 있어도 두렵고 없어도 두렵다. 관계가 드러내는 남의 시선이라는 것이 그러한 소재다.
공황은 노예의 만성적 증세다. 남의 시선으로 살아갈 때 생겨나는 일이다. 남의 시선으로 살아가니 늘 두려움 속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숨이 막힌다. 관계중독의 근본적 문제? 바로 이것이다. 관계에서의 인기를 통해 얻은 힘으로 자신이 이제 대단한 존재가 된 것처럼 착각되지만, 실은 더 무력해져 있고, 나날이 자신이 실종되어 남의 노예로 영원히 종속된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남의 시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 사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이 실존하는 삶이다. 스스로 사유하는 일, 이것을 철학적 태도라고 부른다. 실존상담이 철학적 심리학인 이유다.
실존상담은 남이 만든 체계적 이론을 학습하여 적용하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A와 not A로 보며 그것들이 이루는 기계적 역동을 알고리즘처럼 이해하는 일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다 관계의 논리다. 인기를 얻어 왕이라는 이름의 노예가 되고자 하는 남사당패 춤사위다.
우리에게는 정말로 무엇이 필요한가?
숨쉬는 일이 필요하다. 깊게 안심의 숨을 들이키고 또 내쉬는 일이 필요하다. 관계중독의 가스에 취한 이들에게도, 방독면을 쓰고 있는 이들에게도 필요한 것은 단지 청정한 공기일 뿐이다. 공기는 좋은 은유다. 그것은 언제나 영혼의 은유다. 우리에게는 영혼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의 맑은 영혼이 필요하다. 우리 자신으로 살 기회가 필요하다. 우리가 영혼을 되찾았다는 증거는 가벼움이다. 공기는 가볍다. 노예의 쇠고랑을 차고 있지 않으니 몸이 사뿐 가볍다. 당신 자신의 몸임을 실감한다. 당신이 이제 돌아온 것이다.
실존상담은 이처럼 왕이 되기 위해 떠났다가 관계의 노예선에 팔려 실종된 당신을 찾아 이 자리에 앉히는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힘있고 스스로 안심할 수 있는, 누구도 침범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바로 당신의 자리에.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숨쉬는 것만으로 좋고 행복하구나."
숨쉰다는 것, 바로 삶을 사랑하는 가장 근원적인 감수성이 당신에게 회복된 것이다. 분명하다. 실존상담은 이 회복을 목적으로 한다. 왜 실존상담인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이라고 하는 인간이 안심하며 자유롭게 숨쉴 수 있기를 그 무엇보다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당신의 기도를 폐색하고 있는 관계라고 하는 반투명 비닐을 걷어내기에 가장 최적화된 실용품이 실존이다. 이것은 필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