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3

"어떻게 실존상담을 배우는 일은 가능한가?"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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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다는 것은 언제나 배로 배우는 것이다. 자신의 중심에서 체화된 것만이 배워진 것이다. 그렇다고 에니어그램 8번, 9번, 1번 장형들이 배움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 어떤 성격심리학적 조건과도 무관하게, 잘 배우는 법은 잘 듣는 것이며, 잘 듣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듣는 것이다. 맹신하라는 것이 아니며, 흡혈귀에게 집에 들어오라고 허가를 내려주라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위협적으로 침범하고자 하는 흡혈귀도 차라리 그냥 꼴딱 삼켜버리라는 것이다.


정보를 취득할 때의 소화는 머리가 하지만, 배움을 얻고자 할 때의 소화는 배가 한다. 머리로 배우고자 하면 반드시 체한다. 체하기 전에 배로 내려보내야 한다. 그리고는 당신의 배가 얼마나 잘 소화해내는지를 경험해봐야 한다. 이처럼 배운다는 것은 그 배움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실은 더 근본적으로 '배울 수 있는 당신의 능력을 배우는 것'이다. 모든 배움에는 당신이 대체 얼마만큼의 존재인지에 대한 그 확인이 동반된다. 내용이 당신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다. 내용은 그저 마중물이며 사다리일 뿐이다. 배울 수 있는 당신 자신에 대한 자각이 오직 배워야 할 전부다.


배에서 잘 소화된 것은 양분이 되어 뇌도 잘 가동시킨다. 배움의 내용들도 잘 기억된다. 머리에서 소화시켜 배로 내려 저장한다는 발상이 아니라, 그 반대로 배에서 소화시켜 머리로 양분을 올려 보낸다는 발상이 훨씬 효율적이다.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시자이자 실존상담자의 일군으로 분류되곤 하는 프릿츠 펄스가 직접 쓴 자서전명은 『통째로 버려라』이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한다. 통째로 먹어본 이만이 통째로 버릴 수 있다. 아니면 미련이 생겨 도무지 버리지를 못하게 된다. 배움에 있어 버린다는 의미는 남김없이 잘 쓴다는 것이다. 어디에? 바로 자신의 삶을 향해서다. 삶에 대해 투여되지 않은 배움은 잉여가 되고 독소가 되어 결국에는 자신을 썩게 한다. 삶에 쓰고 있지도 않은 정보의 축적이 무용한 정도를 넘어 실은 유해한 이유다.


실존상담이 부디 또 하나의 정보의 차원에서 당신의 몸을 좀먹는 원인이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열심히 암기해서 소유해야 할 정보도 아니고, 모르면 나만 뒤쳐지고 바보가 될 것만 같은 고대의 수상한 지혜도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대형서점의 가판대에 올라와 있는 모든 책들과 똑같이 그저 언어적 폐기물일 뿐이다. 빙하기가 빨리 와야 불쏘시개로서의 그 진가가 정말로 살아날 소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써서 배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당신의 귀가 열려 있고 당신의 소화능력이 왕성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로 그러하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 수 있도록 소화의 소재가 될 일종의 덩어리를 아무 생각없이 열심히만 쓰고 있는 것뿐이다.


당신의 배가 아주 우수하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신은 정보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당신의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생각짹짹이들에 덜 신경이 쓰이게 된다. 당신의 삶에 이런저런 간섭을 하는 이야기들이 더는 당신을 침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냥 한 입에 털어넣은 뒤, 맛이 없으면 퉤 뱉어내거나, 안에서 녹여버리면 그만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이 소화한 모든 것이 양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핵심은, 그 모든 정보, 생각, 이야기들보다 당신이 우위에 서있다는 그 확인이다.


이것은 실존상담이 무의식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그 이유다. 무의식을 점점 더 거대한 이야기로 만들어가며, 나아가서는 신적인 것으로까지 위치시키려는 심리학의 세력들도 있다. 한스 콘과 같은 실존상담자에게는 이러한 맥락에서 무의식을 강조하는 정신역동의 세력들을 비판하는 것이 그의 취미생활이다. 무의식을 아주 쉽게 말하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의식을 강조하는 이들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정말로 그러한가? 우리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연인과의 첫키스를 나누던 장면이 중요한가? 아니면 3살 때 엄마가 나를 때렸는지 안 때렸는지 가물가물한 그 장면이 중요한가? 대체 어떠한 것이 우리가 숨을 거둘 때도 돌아보며 미소짓게 될 그 장면인가?


대체로 연인과의 첫 키스의 경험을 갖지 못한 가엾은 이들이, 3살 때 엄마의 폭행에 집착하게 된다. 어떻게든 폭행의 흔적을 찾아내고자 퇴행최면을 받고, 내러티브를 구성하며, 끝내는 눈물을 쥐어 뽑는다. 눈물나는 일이다. 이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과거란 현재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현재에 500억을 얻게 된 이는 자신의 과거도 행복하게 기억하게 되며, 현재에 햄버거 세트를 시켰는데 케첩을 못 받은 이는 늘 소공녀처럼 불우했던 과거를 조직한다. '기억하는 것'이 거꾸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좌우하는 셈이다.


현재가 불만족스러운 이들이 자꾸만 과거의 이야기에 집착한다. 자신이 살아온 과거에 놀라운 보물상자가 숨겨져 있다고 가정하면서 어떻게든 그 위치가 표시된 지도의 소재를 기억해내려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의 과거를 낭만적인 신화처럼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보물은 늘 현재에만 있다. 당연하다. 보물은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지금 이 현재를 보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를 보물로 만드는 법이 바로 배움이다. 배로 잘 소화하는 것이다. 소화한다는 것은 그것과 친해진다는 것이다. 호박과 가지, 버섯, 굴 등과 같은 저주받은 소재들과도 친하고자 하는 용기를 낼 수 있는 용사들은 해당의 소재들을 잘 소화해낸다. 민트초코와 파인애플피자는 마족들에게도 처음에는 용기가 필요했을 마계의 친밀재들이다. 이처럼 친해진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어린왕자처럼 배워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워간 그 결과로 인해 배워진 것이 우정의 보물로 만들어진다. 현재를 배우게 된 이에게 현재는 보물로 실현된다.


현재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현상이다. 앞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상담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현상과 친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상학이다. 실존상담의 실천적 기제다. 누군가와 친해지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자신의 편견을 자각하게 된다. 그 친구의 외모나 성격, 그리고 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부모님의 직업은 판검사 이상인지, 친구네 집에 가서 훔쳐와도 티가 나지 않을 귀중품은 어떤 종류가 있는지 등등을 우리는 편견으로 작동시킨다. 그리고 그 편견들과 아무 상관없이, 우리는 그 친구와 가까이 시간을 보내면서 통째로 친구의 존재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때가 그 친구가 정말로 친구라고 불리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우리가 통째로 받아들인 것과만 친구가 될 수 있다. 선별적으로 47%만 친구인 것은 없다. 지혜롭게 그 단점은 버리고 강점을 살려 통합해내어야 할 친구도 없다. 현상이란 것이 그러하다. 현상은 분별과 통합의 소재가 아니다. 나아가 현상으로 구성되는 현실이란 것도 그러하다. 우리가 우리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하고 또 중요한 문제가 된다.


우리가 현실의 잡다한 정보의 구성체로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에게는 이 일이 어려워진다. 뇌가 우리를 속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마치 언어적 논리의 이야기로 구성된 것처럼, 따라서 그 논법을 파악하면 현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처럼 뇌는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게 더 자극이 되기 때문이다. 뇌는 자극이 양분이며, 늘 더 많은 자극을 필요로 한다. 단순한 것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뇌다. 친구를 고작해야 유희의 대상으로 삼는 이러한 방식으로는 친해질 수가 없다.


배움을 배로 하듯이, 친구도 배로 사귀는 것이다. 야한 말이 아니라, 배에 힘을 팍 주고 "야, 우리 친구하자."하는 말이다. 머리로 다양한 대사들을 만들어내 어떤 선택지를 택해야 효과적일까 궁리하는 것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나 하는 일이다. 나아가 앞에 앉은 이가 왼쪽 어깨를 만지면 자신도 똑같이 왼쪽 어깨를 만지고, 그 이가 쓰는 말의 어미를 흉내내 반복하는 것은 말레이시아의 원숭이나 하는 일이다.


현재와, 현상과, 현실과 친해진다. 그것을 통째로 받아들인다. 정보 차원에서의 머리로 하는 마인드게임을 그만 한다. 이를 정통적인 실존주의의 표현으로 옮기자면 이러하다.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에게 실존주의는 아주 큰 빚을 지고 있다. 이 표현은 실존주의의 알파와 오메가다. 배로 배우는 일에 대한 세련된 묘사다. 우리의 현재 속에서 이 묘사는 다시 이렇게도 표현될 수 있다.


"당신이 이 책에 우선한다."


이 책의 그 어떤 말이라도 당신에게 먹혀야 할 소재지, 당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그 어떤 힘이 없다. 정 마음에 안들면 빙하기를 기다리며 라면냄비 받침으로 쓰면 된다. 베개로 자주 쓰이는 체 게바라 평전처럼 두껍지 않아 높이가 적절할 것이다. 원한다면 앞뒤 커버에 방열코팅을 입힐 수도 있다.


요는 이 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당신에게 요해지는 것은 이 책 앞에서 당신이 실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실존상담이라는 것은 바로 그렇게밖에 배울 수 없다. 이것은 실존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당신이 실존하는 기회를 창출하고자 하는 매개다.


소화가 전신운동이라는 것을 당신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나 온몸으로 현실 앞에 서있는 것이다. 당신은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당신의 몸을 뒤편에서 조종하고 있는 뇌가 아니며, 초월적 메타인지도 아니다. 현실을 소화해가고 배워가면서 당신의 감각들은 깨어날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는 방법으로 권장되는 것은 아무 데나 펼쳐 그냥 거기에서부터 읽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에게 경험되는 감각들을 의식해라. 그것이 당신의 현재다. 그 감각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아라. 그만큼 당신의 현재와 친해진 것이다. 이해가 가지 않아도 좋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좋다. 그것이 바로 당신이다. 가끔씩은 당신의 마음에 쏙 드는 멋있는 말이 나오면 책을 덮고 더욱더 당신의 것으로 가져라. 언어가 아닌 바로 그 감각을 당신의 것으로 실감해라. 완전히 거꾸로 이해해보라. 이 책이 당신을 자극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로 그러한 감각을 다시 찾고 싶어서 이 책을 매개로 쓴 것이다. 이 책은 분명하게 실존상담의 내용을 당신에게 숙지시키기 위한 학습서가 아니라, 당신을 다시 찾아가는 그 여정을 그린 모험서다. 주인공은 당신이다. 실존상담은 바로 그렇게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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