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4

"존재의 심리학에 대한 이해"

by 깨닫는마음씨




실존상담은 존재의 심리학이다. 이것은 마음을 아스트랄한 소재가 아니라 존재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마음을 존재현상으로 보면 분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이 세계에서 존재현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며 우리가 임의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초연한 내맡김'이라는 표현을 쓴다. 존재를 마주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며, 곧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 요청되는 우리의 태도다. 이러한 태도는 존재에 대한 신뢰를 시사하며, 그 신뢰는 사랑을 근거로 한 것이다. 존재의 심리학에서 인간은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위상으로 등장한다.


존재하는 많은 것들 중에 인간이 가진 아주 특유한 입장이 있다. 그것은 '자신이 존재하면서 바로 그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을 다른 존재하는 것들과 변별시켜주는 아주 핵심적인 특성이다.


놀랍게도 인간의 핵심특성은 협력, 공감, 학습, 돌봄, 성장, 언어, 전승, 통합 등이 아니다. 그것들은 전부 다 본질적으로 곤충의 특성이다. 물론 인간의 DNA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지만, 그것들로 산다고 인간조건이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개미답게 사는 일을 가장 인간답다고 예찬하는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인간이 인간일 고유한 조건은 '존재를 향한 호기심'이다. 나아가서는 '존재를 향한 사랑'이다.


존재의 심리학은 이 지점을 아주 중요하게 다룬다. 한국의 한 선사는 이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마음을 만나는 자'


이것은 마음을 아이처럼 다루거나, 조종하거나, 임의대로 조작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에 대한 환원의 관점이 아니다. 반대되는 마음들을 유연하게 잘 다루면 삶이 윤택해진다는 식의 일종의 알고리즘 같은 공식으로 마음을 이해하는 관점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마음을 가장 거대한 것으로 드러내는 관점이다. 정확하게 키르케고르의 '신 앞에 선 단독자'의 또 다른 묘사다. 존재를 향해 질문할 수 있는 인간의 위상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무수하게 존재하는 것들 속에서 오직 인간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원래 가능한 일이 많은 경우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존재망각'에 의해서다. 존재는 아주 섬세해서 우리가 막 다루려고 하면 스스로를 숨긴다. 숨은 것은 잊힌다. 그래서 만날 수가 없게 된다. 망각한 존재를 다시 자각하는 일을 회복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존재를 눈앞에 다시 떠오르게 하는 회복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존재를 수줍어하는 아이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존재야, 이제는 내가 망각하지 않을게. 그동안 내가 널 몰라줘서 많이 섭섭했지. ㅠㅠ 미안해 존재야. 사랑한단다. 너를 이제 지켜줄거야. 너를 다시는 잊지 않을 거라구!" 이러면 존재가 아니라 발화의 당사자가 아주 많이 부끄러워진다. 어떻든 존재가 ISFP 유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사실 존재는 MBTI의 어떤 유형도 아니다. 존재에 대해 MBT 검사지를 내밀면 존재는 바로 숨어버린다. 왜일까? 아이들이 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아이들 노는 놀이터에서 섬세하게 뒤로 물러서 코끼리는 숲으로 들어가버린다. 그리고는 나무를 넘어뜨려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을 더욱 넓혀준다. 아이들은 신나서 자기가 마음을 알게 된 마법의 힘으로 미지의 숲을 개척했다고 하이파이브를 할 것이다. 코끼리는 그저 없이 있으며 미소짓고 있다.


실존상담은 이 코끼리를 발견하는 일이며, 코끼리가 바로 당신임을 자각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자신의 존재를 회복한 이들로부터 실존상담은 가능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인 것만 상대에게 전할 수 있는 까닭이다. 니체의 말이다. 내담자가 그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도록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상담자 자신의 존재뿐이다. 상담자 중의 상담자라고 불리는 사람중심상담의 칼 로저스는 이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는 실존주의에 대해 알지 못해도 존재의 상담을 했으며, 말년에 이르러 실존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그 자신 또한 실존상담자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말하곤 하였다.


실존상담은 존재고, 또 존재며, 그리고 존재다. 군더더기는 없다. 존재하면 끝이다. 존재를 망각하고 있는 만큼 별 희한한 잡설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체로 그 잡설들의 내용은 이러하다.


1) A가 B보다 더 존재한다.

2) A와 B가 통합된 C가 더 나은 존재다.

3) A와 B의 대립이 발전된 존재를 만든다.

4) 존재는 성장해간다.

5) 존재를 잘 돌봐야 한다.


이렇게 바꾸어 이해해보자.


1) 형이 동생보다 더 존재한다.

2) 형의 장점과 동생의 장점을 통합한 사이보그 소년 C가 더 나은 아이다.

3) 형과 동생의 대립이 발전된 가족사를 만든다.

4) 아이는 성장해간다.

5) 아이를 잘 돌봐야 한다.


존재를 아이로 보는 이 일이 만연한 존재망각의 주원인이다. 이렇게 보고 싶어하는 것은 자아다. 자아가 가장 즐겨하는 놀이는 부모놀이다. 부모를 모방해 소꿉놀이를 계속하는 만큼 자아는 자기가 부모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아에게는 부모가 신이기 때문에, 결국 자아는 신이 되기를 꿈꾸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가 이처럼 개념없이 굴 때 존재가 스스로를 은폐하는 것은, 역으로 존재가 자신을 신적인 것으로 정확하게 알리는 일이기도 하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먹고 싶었어? 너 다 가져."라며 그 자리를 훌훌 떠나는 이가 존재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이다.


그런데 자아는 또 이러한 존재의 면모를 흉내내기도 한다. 놀이터에 있는 아이들에게 자기의 것을 양보해가며, 그들이 싸울 때는 평화롭게 중재도 하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면서 참 인간이라는 것이 아름답구나 홀로 눈물도 훔친다. 이것이 대장자아놀이다. 부모놀이의 변주된 형태다. 이 대장자아들이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숲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사실 이는 대장자아가 대장을 하려는 거의 유일한 이유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자신은 숲에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숲에 들어가는 일이 당위는 아니다. 그러나 관심이 간다. 숲에서 아주 고요하고 친근한 숨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은 발자국도 발견한다. 크지만 위협적이지 않고 오히려 든든하다. 또 어떤 아이들은, 특히 놀이터의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홀로 있는 시간이 많은 아이들이, 가끔씩 자신을 온화하게 지켜봐주는 시선을 숲의 그늘 사이로 발견하기도 한다. 뭐지 싶어서 조심스럽게 다가가보면 아무 것도 없다. 향기만 남아 있다. 왠지 모르게 그리움이 물씬 일어나는 좋고 오래된 향기다.


그래서 결국에는 몇몇의 아이들은 숨소리를 따라, 발자국을 따라, 또 향기를 따라 숲으로 들어간다. 자아의 경계 밖으로 이동해 미지를 향한다. 그리고 그들은 머지않아 마주치고야 만다. 아주 커다란 코끼리를, 이 숲의 주인을, 그리고 그들 자신의 진짜 모습을.


게임의 끝이며, 삶의 시작이다.


자아라고 하는 곤충으로 사는 일의 끝이며, 존재를 사랑하는 인간으로 사는 일의 시작이다.


개미가 인간이라고 착각하는 개미들이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법을 놀이터에서 논하고 있던 것이 게임이다. 마인드게임이다. 이러한 마인드게임 속에서는 존재는 늘 오컬트적 실체가 되며, 수상한 형이상학적 소재가 된다. 그렇게 한번 조리돌림을 당한 뒤에, 환원되고 해체되어 냉장고 안에 넣어진다. 더는 코끼리가 아닌 것이 된다. 소꿉놀이를 하는 자아가 건강한 저녁식탁을 준비하는 현명한 유기농 엄마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활용될 소도구로 전락한다. 물론 실제의 코끼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놀이지만, 이런 놀이에 심취해 있는 동안 코끼리의 모습은 더욱 숨겨진다. 코끼리가 냉장고 안에 있는 줄만 알고 진짜 코끼리를 만나러 갈 생각을 아무도 안하게 되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왜 이토록 냉장고에 넣고 싶어할까? 동결은 변화를 정지시킨다. 존재가 변화하는 일을 멈추기 위해 자아는 존재를 동결시키고자 하는 꿈을 꾸는 것이다.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는 피터팬의 꿈이며,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는 개미의 꿈이다. 그러나 이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망상이다. 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변화다. 성장과 변화는 다르다. 존재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다이세츠 스즈키 선사는 이러한 존재의 본성을 멋지게 묘사한다.


"늘 그렇지는 않다."


원래 동사인 존재를 명사처럼 바꾸어 그 움직임을 멈추게 하기 위해 자아는 기술적 언어를 동원한다. 바구니에 넣어 분류하고, 멀쩡한 것을 사과처럼 둘로 쪼개고, 유튜브용 3분 잼으로 만들어 냉장고에 저장하려 한다. 아이들이 허공을 붙잡으며 그러한 놀이를 하는 동안, 코끼리는 그냥 있을 뿐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은 끄떡하지 않는다. 그 어떤 변화가 생겨도 당신이 변화의 제왕이라서다.


대홍수가 일어나면 당신은 고래가 되어 헤엄치고, 지진이 일어나면 당신은 알바트로스가 되어 날아오른다. 크기가 한정된 것도 아니다. 개미도 가능하다. 만약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지면 당신은 작은 개미가 되어 땅으로 파고들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변화의 모습이라도 당신의 존재의 밀도는 숲속의 커다란 코끼리다. 선명하게 그곳에 있다. 심지어는 아예 사라진 속에서 오히려 있을 때보다 더 생생하기까지 하다. 없음의 형태로도 존재는 존재한다.


우리가 그 무엇으로 존재하든, 거기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이 있다. 그 사실이 무엇보다 우선한다. 그렇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사실적인 존재함이다. 우리의 실존이다. 그 무엇이었어도 자신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우리의 중심은 회복된다. 인간이라는 입장이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이것은 인간이 그토록 마주하고 싶어 묻고 있던 존재가 늘 인간과 함께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사랑하고 싶었던 이가 이미 우리는 연인이었다고 말해주는 그 장면과도 같다. 존재를 자각한다는 것은 무려 이 정도의 것이다.


자신이 지금 무엇인지를 정직하게 아는 한 이 신비의 존재감은 이어진다. 공부를 못하는 이는 공부를 잘하는 이보다 그 존재의 밀도가 결코 낮지 않다. 공부를 못하는 이로 드러나 있는 자신의 현재를 부정하기에 존재가 망각되는 것뿐이다. 심지어는 자신이 도둑일 때 이것이 도둑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살인자일 때 이것이 살인자라는 것을 알며, 자신이 사기꾼일 때 이것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면 거기에서도 코끼리는 발견된다.


존재가 망각되어 있을 때 도둑은 늘 도둑이고, 살인자는 늘 살인자며, 사기꾼은 늘 사기꾼이다. 이들이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나은 존재로 성장한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둑과 살인자와 사기꾼과 같은 나쁜 존재들을 죄다 동결감옥에 가두어 영원히 봉쇄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했듯이 코끼리는 선명하게 그저 그곳에 있다. 그때는 몰랐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지 않냐며 자신을 알리고 있다.


도둑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도둑질을 하고, 살인자가 무엇인지를 몰라서 살인을 하며, 사기꾼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사기를 친다. 자신이 존재했던 방식이 정말로 그것이었다는 것을 알 때 그 일들은 멈춘다. 그 일들이 계속된다면 아직 모르는 것이며,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는 정말로 몰랐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압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때, 기나긴 자기부정의 역사는 끝이 난다. 정말로 아는 일이 구원이며, 존재가 언제나 구원의 열쇠다.


이것이 실존상담자가 가장 먼저 이루어야 하는 일이다. 존재의 심리학은 존재를 마음대로 합리화하는 일이 아니라, 존재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더 쉽게는 존재를 정말로 아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회복이란 자신이 무엇이었는지를 정말로 아는 일이다. 그것은 깊은 무의식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환하게 드러나 있다. 현재의 모습으로도 확연하게 알려져 있다. 코끼리 냉장고에 넣기 게임을 하며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실제의 코끼리는 양심으로 그 자리에 서있다.


존재가 스스로를 알리는 이 고유한 현상은 분명 기능적으로 양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는 존재의 기능인 양심이 계속 작동한다. 양심은 사회적 도덕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직성에 대한 것이다.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다. 실존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있어 이 양심의 상징이다. 코끼리처럼 서있다. 용서도 아니고 위로도 아니다. 내담자도 그렇게 설 수 있다고 사실적 희망을 전하는 힘차고 고운 눈이다.


대체로 실존상담을 하는 이들은 인생이 박복해서 못난 짓이란 못난 짓은 한번쯤 다 해본 이들이 많다. 자기만 잘났다고 설치기도 하고, 남들을 착취하면서도 자기가 선량한 희생자인 것처럼 굴기도 하며,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이상적인 인물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존상담자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정직성 때문이다. 정말로 알게 된 것을 아는 대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실존상담자들보다 더 고귀하고 훌륭한 인생을 살아온 내담자들이 못할 것은 없다. 인생의 밑바닥도 저렇게 행복해 보이는데, 상담이라는 언뜻 보기에 사기처럼 수상해보일 수도 있는 일에 돈을 지불할 정도로 절실하고 열정적인 내담자들에게 불가능할 것은 없다.


실존상담자들은 자신이 훔친 빵의 무게를 정확하게 알게 된 장발장과 같다. 장발장이 평생 경험한 무거운 일은 자베르 경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훔친 빵의 무게를 그가 정확하게 알아야 했기 때문에 생겨난 존재현상이다. 장발장이 훔친 빵은 빵을 만든 자에게는 그 정도의 무게였던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도망칠 때, 빵의 무게는 빵을 훔친 자가 경험하는 인생의 무게가 된다. 이는 죄책감의 무게다. 자신이 정말로 알아야 할 것으로부터 도망칠 때 생기는 것이 죄책감이다. 이것은 '실존적 죄책감'이라고 불린다. 이 실존적 죄책감은 아무리 선량하게 도덕적인 선행을 많이 하며 타인에게 친절한 인생을 산다고 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 것들과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실존의 무게를 도덕의 무게로 바꾸어 자베르 경감에게 대신 떠넘겨 그를 죽게 한다고 이 희생양봉헌의 행위로 실존적 죄책감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파리의 지하수로에도 코끼리는 서있다. 그 모든 일을 지켜보면서.


실존적 죄책감은 인간이기에 경험하는 인간만의 고유한 현상이다. 이와는 대비되게 도덕적 죄책감은 반복적인 훈습과 처벌의 결과다. 근본적으로는 파블로프의 개와 같은 현상이다. 도덕적 죄책감이란 잘못하면 혼날 것 같은 예감일 뿐이다. 그러나 실존적 죄책감은 그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실존적 죄책감이 드는 이유는 인간 자신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막 대했구나."


이것은 무슨 말일까? 존재를 함부로 대해서 그 존재가 숨게 된, 그럼으로써 존재망각이 일어나게 된 그 상황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 실존적 죄책감이라는 말이다. 도덕적 죄책감은 자아 자신을 향해 드는 것이지만, 실존적 죄책감은 타자를 향해 드는 것이다. 그 타자로 알려지는 존재를 향해 드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적 죄책감은 자아가 이루는 존재망각으로부터 인간이 깨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기회다. 인간이 존재를 다시 찾고 싶어서 생겨난 것이 바로 실존적 죄책감이다.


코끼리는 당신을 혼내기 위해 거기에 서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지금도 가능하다고, 숲으로 함께 돌아가자고, 당신에 대한 한결같은 믿음으로 선명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실존상담자는 이 코끼리의 세력과 무엇보다 친한 이들이다. 조금 더 먼저 친해진 이들이다. 코끼리와 친해지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 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도 실존적 죄책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망각의 인생을 한참 살아왔고, 그 끝에서 결국 코끼리를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담자에게도, 당신에게도, 불가능하지 않다. 대체로 인생막장극의 3류 주인공이었던 불우한 실존상담자들보다 더 좋은 조건과 행운을 가진 당신이기 때문이다. 특히 당신의 행운은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코끼리가 코로 쓴 책은 흔하지 않다. 아프기만 하던, 그러나 아픈 줄도 모르던 그 시절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나는 코끼리 아저씨에게 부탁해 이 책을 쓴다. 그 큰 귀로 시공을 날아 책을 전하며, 그가 많이 서럽던 그 자리에도 코끼리는 함께 있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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