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5

"역설: 죽어도 좋은 사랑법"

by 깨닫는마음씨




현재 동시대적으로 실존상담의 대가로 소개되는 대표적인 두 인물은 영국의 에미 반 두르젠과 미국의 커크 슈나이더다. 두르젠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슈나이더는 미국으로 건너간 폴 틸리히의 신학과 실용주의 철학 및 종교심리학의 창시자인 윌리엄 제임스의 영향권 아래 있다. 이 두 사람이 실존상담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역설'이다. 당연하다. 실존주의가 언제나 언어 너머에 있는 것을 묘사하고자 한다고 할 때 역설은 언어의 한계 속에서 언어가 쓰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역설(逆說)은 paradox의 번역어다. 한자어의 뜻은 표현 그대로 '설을 거스르는 것'이다. 설(說)이란 우리가 소위 '썰푼다'라고 할 때의 그 썰이다. 썰은 어떤 때 푸는가? 어떤 것을 진리라고 주장하고 싶을 때 푼다. 그래서 역설이란 것은 오히려 '진리를 거스른다'는 뜻을 갖게 된다. 어떤 것을 진리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전복시키는 것이다. 뒤집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은 역설의 철학이다. 자기초극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paradox의 어원적 의미를 살피면 이는 명확해진다.


paradox의 뜻은 '앎을 초월한 것'이다. para라고 하는 접두어가 가진 의미는 '초월'이다. 이는 다시 더욱 쉽게 '진리를 초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역설'과 가장 헷갈려하는 '모순'의 의미를 살피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모순은 진리를 말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반대되는 두 대극이 하나의 진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순은 언제나 통합의 목적을 갖는다. 역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역설은 반대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 둘 다를 날리는 것이다. 역설은 공멸이다. 나가르주나의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둘 다 아니다."의 묘사가 실은 역설에 대한 가장 정확한 뜻이다.


1도 아니고 2도 아니니까 그 둘의 대립과 갈등을 화해시키고 통합시킴으로써 창출되는 제3의 것이 진리구나, 이렇게 이해하는 방식이 바로 모순의 방식이다. 이런 것은 초월이 아니라 발달이라고 불린다. 발달곡선이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초월은 불연속적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통합되어 야누스나 모나리자, 그리고 아수라 백작과 같은 양성구유의 변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과 아무 상관없어지는 것이 초월이다.


진리를 거스르고, 뒤집고, 넘어서는 자리에는 그럼 무엇이 있는 것일까? 앎과 언어와 썰이 초월된 자리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바로 '의미'다. 진리를 넘어서 있는 가장 진짜의 것, 그것이 의미다.


"그래 그 장황하고 정교한 정보가 맞다고 치자. 그게 대체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신성하다. 이 목소리는 신성하다.


"음.... 그걸 알면 니가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어."


"됐고, 니가 내 삶에 대해 뭘 아는데?"


거룩하다. 이 목소리는 참으로 거룩하다.


역설이 왜 중요한가? 현대라고 하는 정보과잉의 시대에서, 그 모든 소설같은 개소리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책 따위도 진리를 초월하려는 역설로 사는 이에게는 꼼짝 못한다. 개소리하네, 이 모든 말들이 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라며 덮어버리면 애초 그러했듯이 빙하기 때의 불쏘시개가 유일한 가치인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역설! 그것은 모든 환상을 깨버리는 방법이다!


키르케고르에서부터,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마르셀, 베르쟈예프 등의 실존주의자들에서부터 현대의 실존상담자들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는 언제나 환상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운동이었으며, 그 방법론은 역설일 수밖에 없었다. 역설은 반대되는 것 사이를 묘사하는 알고리즘의 프로그램 언어가 아니라, 언어를 깨고자 하는 시(詩)적 방법론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한국상담학회에서 심리상담사법 발의를 제청하는 문자가 날아와 있다. 한국상담학회 국가자격법제화추진위원회에서 보낸 문자다. 이 문자에는 판타지를 도구로 쓰는 사이비심리학에 고통받던 심리상담사들의 외침이 담겨 있다. 원시인을 떠올려보라. 그가 사랑하는 것이 유린당하고 끝내는 사랑하는 것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원시인은 울부짖는다. 말로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가 그 아픔을 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야마시타 카즈미의 걸작 『불가사의한 소년』에서 묘사되듯이, 이것은 인류에게 있어 노래가 시작된 순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인간은 노래하기 시작했다. 노래가 시(詩)며, 바로 역설이다. 노래하며 사는 한 우리는 역설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언어 너머로 우리 자신을 계속 날리고 있는 것이다. 저 하늘을 향한 날개짓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향해 노래하는가? 반대로 어떠한 것이 노래처럼 보이지만 노래가 아닌가?


먼저 이러한 비유를 들어보자.


신(神)을 두 개로 나누어서 선한 신과 악한 신으로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선한 신만 추구해서 문제가 발생하니 악한 신의 온전함도 같이 살려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이 신을 임의대로 분열시키고 그 분열된 신을 다시 자신의 노력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 하는 일종의 정신병적 행위다.


마음에 대해 우리가 이와 같이 한다.


중2병 판타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선한 신의 독재에서 인간들을 해방하고자 악한 신의 슬픔을 이해하며, 선신과 악신이 다시 합쳐져 하나의 온전한 신으로 회복될 수 있도록 선신에 대항하여 싸우고자 하는 어둠의 귀공자의 서사시다. 이 중2병의 서사시는 노래처럼 보이지만 노래가 아니다. 망상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만 하면 그것이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노래에는 자아를 실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초월하려는 의지가 담겨야 한다. 초월이란 언제나 자기보다 더 큰 것을 향한 운동이다. 중2병 탈출은 지능순이 아니라, 더 큰 것을 향해 엎드리고자 하는 이 의도로 가능해진다. 사쿠라이 노리오가 한창 연재하고 있는 러브코미디물의 전설적인 마스터피스가 될 『내 마음의 위험한 녀석』에서는 중2병 탈출의 과정을 귀엽고도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중2병 소년이 그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엎드리고 있는 더 큰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사랑, 사랑이다. 사랑이 그 열쇠다. 역설은 사랑으로 사는 방식을 일컫는다.


진리를 말하며 그 진리로 모든 모순을 자기가 통합해내겠다는 자아의 중2병에 걸려 있다는 것은 지금 거기에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뿐이다. 내 삶에 의미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우리 자신보다 언제나 큰 것, 그것을 얻을 수 있다면 언제라도 우리가 그 앞에 엎드릴 수 있는 것, 사랑밖에는 없다. 모든 노래는 사랑을 향한다. 사랑을 향하는 것만이 노래다. 초월은 반드시 사랑을 향한 초월이다. 사랑이 초월의 운동을 이끈다. 실존주의자들 중에 노골적으로 사랑을 말하는 인물인 가브리엘 마르셀은 분명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당신이여 영원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죽음을 초월해 영원을 향하고자 하는 노래가 분명 사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이 자각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른 장에서 말할 주제이지만, 죽음은 실존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사건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만큼, 죽어갈 것들을 인식하는 만큼, 사랑은 그 자리에서 시작될 수 있는 까닭이다.


중2병은 아직 죽음을 모르는 상태다. 자신과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상태다. 죽음이 추상인 이만이 망상을 소비한다. 망상을 통해 죽음을 망각하려는 동안 그는 사랑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된 중2병은 무엇을 꿈꿀까? 사랑이 더 큰 것을 향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 사랑 대신에 중2병이 시작하는 것은 더 작은 것을 향한 애착이다. 그래서 애착은 언제나 자기가 위에 있을 때 발휘되는 동정심을 내포한다. 중2병들이 늘 자기 방의 침대 위에서 매일밤 이 더러운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는 저 순수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이유다.


어떠한 것을 작고 약하게 만들어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동정은, 자기가 동정을 내려줌으로써 동정받는 대상이 그러한 자기를 사랑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를 동정할테니 너는 나를 사랑해줘."


선신과 악신 양쪽에서 다 사랑받고 싶은 이가 어둠의 귀공자가 된다.


엄마와 아빠 둘 다에게 사랑받고 싶은 이가 팔뚝의 흑염룡의 기운으로 키보드를 치며 모순을 통합하려고 한다.


흑염룡은 용맹하게 밤하늘을 날아서, 대립과 갈등을 우아하게 통합해가며, 일진들의 학원폭력물 웹툰을 별자리처럼 그려간다. 무협지가 원래 다 깡패들 이야기다. 중2병의 끝은 반드시, 목욕값을 주면 살려는 드린다는 느와르 영화다.


이제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은 "이렇게 살면 안된다."가 아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텐가?"이다. 대체 언제까지 사랑으로부터 소외되어 겉만 화려하지 실은 불우하게 살 것인가? 이미 몰락한 사각형 박스 속에서 그것을 진리의 세계라고 보며 "이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내가 구원해내겠어."라고 다짐하는 매트릭스의 네오 놀이는 말 그대로 놀이일 뿐이다. 말놀이다. 썰로 하는 놀이다.


썰을 초월하는 것, 그것은 진짜 현실을 사는 것이다.


눈.앞.의. 현.실.을. 사.는. 것.이. 초.월.이.다.


역설은 현실에 마법을 부리는 일이 아니다. 역설은 현실의 변화의 기제라고 착각하고 있는 원리들을 모조리 다 날린 다음에 눈앞의 현실만을 남기는 것이다. 눈앞에서 앵앵거리고 있는 빨간 모기와 파란 모기를 다 쫓아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눈앞의 현실이 선명하게 들어온다. 바로 그 현실을 사는 일이 역설을 산다고 하는 것이다.


사랑? 사랑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자아 자신을 넘어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 현실을 사랑해보고자 노래하는 것이다. 의미는 저기 밑에 있는 심층심리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에서 온다. 이것은 『슬램덩크』에서의 강백호의 고백과 같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이 현실에서 죽어도 좋은, 현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일이 실존상담이다. 이 실존상담의 사랑법은 역설이라고 불린다. 이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당신이 사랑을 찾았다는데, 의미가 없으면 또 어떠랴. 당신이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말고는 대체 무엇이 중요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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