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몸, 세계: 아하체험과 어우체험"
숲에 햇살이 들어온다. 땅에 튼튼하게 뿌리내려 있는 나무도, 그 아래 한들거리며 피어나 있는 들꽃들도 광합성을 하며 조직의 곳곳에 양분을 보내 숲의 푸르름을 더욱 싱그럽게 한다. 색이 짙고 기쁨이 충만하다. 바라보라. 이것은 태양, 땅, 나무, 들꽃이 '따로 또 같이'라는 슬로건 아래 이루는 조화로운 통합의 풍경인가? 각각의 요소들이 모여 참 아름답게도 전체의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실존적으로 본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부분이 조화롭게 모여 이루어낸 전체의 그림이 아니다. 콤바트라V 같은 변신합체로보트가 아니다. 처.음.부.터. 분.리.될. 수. 없.는. 통.짜.의. 하.나.였.다. 이 장면이 우리가 미술관에서 본 그림이었다고 해보자. 그림 자체가 우리의 시선에 통째로 들어온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그림이다.
아주 중요하게도 '그림을 보고 있는 관객의 시선까지도 포함해서 그 자체가 하나'다. 관객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관객의 시선까지 포함해서 그림이다. 이 의미를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라고 부른다. 붙임표(-)로 연결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정말로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온전하다는 것은 이러한 것을 의미한다. "그래도 괜찮아. 그도 온전했어."가 아니라, 원래 하나로서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을 지시하는 표현이 바로 온전성이다. 만약 그림과 관객의 시선이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온전성을 망각한 것이다.
온전성을 망각하면 무슨 일이 생겨나는가? 통합하려고 하게 된다. 그러나 통합하려 할수록 오히려 온전성은 더욱 숨어버린다. 여기에서 대표적으로 온전성의 감각으로 착각되는 것이, 통합하려는 주체가 분절된 것들을 자상하게 지켜봐주는 그 정서적 효과다. 엄마의 시선 속에서 놀이터의 아이들이 경험하는 그 정서감, 또는 작가적 주체의 시선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경험할 법한 신뢰감, 이것은 지복(bliss)이라고 불린다. 이 또한 안전감의 일종이지만, 온전성과는 다른 것이다. 이 지복은 근대적 인식론이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을 분리시킴으로써 획득하고자 하던 낭만적이며 낙관적인 결과물이다.
대체로 이러한 것을 추구하던 이들의 끝은 화다. 2차 세계대전은 실증적 증거다. 또한 현실에서 이러한 상태를 추구하던 상담자들은 대체로 자살로, 근무력증으로, 자가면역질환으로, 생을 마감했다. 자기는 이것인 신적인 상태로 믿고 싶기에 의식하려 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 대단히 화가 많이 나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화를 또 자기의 화가 아니라 상대의 화라고 생각하며, 자기는 대신 그 화를 받아 작업을 한다고 이들은 착각하곤 한다.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자신이 세계 밖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신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계속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다. 당연하다.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옆집 달용이는 애인을 만나 모텔도 매일 가곤 하는데, 자기는 그러한 옆집 달용이를 푸근하고 자상한 시선으로 지켜봐주는 '창문 밖 외부인'을 자처하고 있으니 화가 나지 않는 일이 이상하다.
하이데거는 자기가 창문 밖에 있다고 생각한 이들을 모조리 창문 안쪽으로 끌어다 앉히며 묻는다. 이 창문 안쪽에서의 자기 자신의 모습은 대체 어떠한지를 묘사하여 보고하게 한다. 실존분석과 현존재분석이라는 실존상담의 초기 형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실존상담은 그 시작부터, 분리된 것들이 온전성을 회복하게 하려는 뱡향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섬세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분리된 것들이 통합됨으로써 온전성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잘 들어보자. 가능하면 기억해보자. 분.리.가. 착.각.이.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온전성은 회복된다.
실존상담은 통째로 보는 법이다. 본다는 표현도 어쩔 수 없이 쓰는 것이지, 실은 보는 법도 아니다. 모험하는 법이라고 말해야 할까, 사는 법이라고 말해야 할까. 어떤 것을 보다가 "아하!"하는 '아하체험(aha experience)'이 실존상담은 아니다. 오히려 실존상담은 슈나이더가 말하듯 "어우!"하는 '어우체험(awe experience)'에 가깝다. 아하체험과 어우체험, 이 둘은 어떻게 다른가?
여기에는 경외감(awe)의 문제가 있다. 경외감은 모험을 떠나는 이들이 만나게 되는 감각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비본래적이지 않고 본래적인 삶을 사는 이들이 체험하게 되는 것이 경외감이다. 경외감은 언제나 자기보다 거대한 것을 눈치채는 체험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장면과 같은 것이 경외감에 대한 핵심적인 비유다. 루돌프 오토는 경외감을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너무나 그리던 이상적인 연인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을 때의 상태와 유사하다. 사랑이 막 시작되기 전에, 그러나 이미 사랑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는 바로 그 상태다.
"참 평화롭고 여여하구나."
아니다. 경외감은 이것이 아니다.
"살아 있다. 살고 싶다. 사랑이 벅차오른다."
경외감은 이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가만히 욕조의 물을 보고 있다가 "유레카!"라고 소리지르며 뛰쳐나간 이것은 아주 대표적인 아하체험이다. 이것은 "알았다! 알았다!"의 감격이 그 핵심이 된다. 반면 어우체험은 이렇게 외친다. "살았다! 살았다!" 이것은 모험하는 삶의 감동이다. 니체가 삶에 대해 "그래 이것이 삶이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 번!"이라고 노래하던 아모르 파티(amor fati)의 감각이다. 보통 '운명을 향한 사랑'으로 번역되지만, 이 책에서는 이 의미를 '삶을 향한 사랑'이라고 강조하도록 할 것이다.
삶이야말로 우리의 운명이다. 태어난 순간 우리는 살도록 운명지어졌고 동시에 죽도록 운명지어졌다. 우리가 존재하는 근간인 삶과 죽음 자체가 애초에 분절되어 있지 않다. 똑같은 하나의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것임을 우리는 어떻게 실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삶과 죽음이 하나의 몸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사는 몸과 죽는 몸이 따로 있지 않다. 목 아래 부분은 죽어도, 뇌를 인터넷에 이식하면 영원히 살 수 있지 않다. 이러한 착각을 할 때, 우리는 뇌를 더 강화시키기 위해 무수한 정보들을 과잉되게 수집하려고 한다. 죽음이 두려운 이들이 대개 정보중독이 된다. 뇌가 분주하게 활성화되는 만큼, 뇌가 '사는 몸'으로서 영생하리라고 오해하는 것이다. 만약 SF소설처럼 뇌가 컴퓨터 안에 들어가 생존을 유지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전원선을 뽑아버리면 죽는다. 또는 인간의 영혼이 이야기 안에 담겨 불멸하게 된다는 식의 판타지를 고려해봐도, 그 또한 책을 찢어버리면 죽는다. 몸이 아닌 다른 저장매체에 자기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을 이식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죽을 자리가 바뀌는 것뿐이지 불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저장매체를 계속 옮겨 다니면 되지 않냐고? 그래, 그런 공상을 방구석에서 즐기는 동안 당신은 죽는다.
사는 몸과 죽는 몸은 언제나 동일하다. 하나의 몸이다. 하나의 몸이 하루 더 살아가는 일이 동시에 그 하나의 몸이 하루 더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이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당연한 말이다. 우리는 이 당연함을 존중하고 당연한 것 앞에 겸허해져야 한다. 실존상담의 실천적 기제인 현상학의 표어는 '현상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다. 이 겸허함은 반드시 경외감과 연결된다. 어우체험은 오직 겸허함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다.
이 정도쯤 읽었을 때 '몸'과 '겸허함'을 연결시키는 착상이 일어났다면 "유레카!"를 외치며 책을 덮고 뛰쳐 나가도 좋다. 바둑이와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돌다가 셀카도 찍어 SNS에 올리며 아하체험을 한 30분 정도 즐겨도 좋다. 그리고 다시 책 앞에 앉아 보라. 그리고 이 다음 말을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본 것처럼 읽어보면 된다.
"몸이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도 몸이고, 우리가 겸허해져야 하는 것도 몸이고, 우리가 정성을 다해야 하는 것도 몸이다. 운명을 향한 사랑은, 곧 삶을 향한 사랑은, 결국에는 몸을 향한 사랑이다.
그러나 정말로 오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동서양을 망라하여 통합한 전인적 인간케어 시스템이나, 소우주적 육체관의 대체의학적 관점이나, 직접 재배한 유기농 채소와 현미밥을 꾸역꾸역 씹어먹는 고독한 미식가에 대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몸을 마치 착하지만 허약한 아이로 전제하며, 그 아이를 사랑으로 돌보고 지켜내는 류의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몸을 제일 거대한 것으로 봐보라. 몸을 경외감의 원천으로 봐보라. 경동시장에서 구매한 약재들로 고대의 비법서에 따라 만든 수상한 환약을 먹이고, 양전하 음전하가 어떻니 하며 이상한 전극을 붙여 실험대상으로 쓰고, 이상적 목적론의 의지에 입각해 철저한 관리에 따라 더 성장하고 발전해야 할 미숙한 제자로 다루는 식의, 자아 따위가 꿈꾸는 이 모든 이상한 일들이 감히 시도되어서는 안 되는 존귀한 것으로 몸을 한번 봐보라.
이것은 몸을 자아정체성이 소유한 노예처럼 아랫것으로 보며, 대상화하고, 다루고, 마치 자아 자신이 몸을 살리고 있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기각한다는 뜻이다. 마르셀은 분명하게 말한다.
"나는 몸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몸이다."
나아가 실존상담에서의 몸에 대한 관점은, 개체적 육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 몸이고, 그 몸은 또한 세계다. 마음-몸-세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한.덩.어.리.다. 때문에 몸이 현상이다. 현상이 육화된 것이 몸이다. 신체현상학자들 중 누군가는 세계를 강조하며, 그 세계의 육화가 몸임을 말한다. 또 다른 이는 삶을 강조하며, 그 삶의 육화가 몸임을 말한다. 무엇이라도 좋다. 우리는 이 몸으로 존재한다. 몸과 불가분이다. 몸과 하나의 것이다.
우리의 몸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작용이 세계에서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작용이다. 이것은 실존주의자들, 그리고 신체현상학자들에게서 지지받는 관점이다. 차라리 기후라고 이해하면 쉽다. 기후와 생태는 불가분의 것이다. 지구 전체에 빙하기가 찾아 왔을 때, "허허, 참 따듯하고 좋으네. 온후하니 여여하구나."라고 말하는 일은 정신분열의 징후다. 뇌 속에서 판타지의 초원을 달리고 있는 이만이, 그렇게 망상으로 현실도피를 하고 있는 이만이 이러한 말을 한다.
지구가 추우면 우리 자신의 몸도 춥다. 우리 자신의 몸이 추우니 마음도 춥다. 세계가 통제되어, 몸이 불편하니,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만 더 들고 우울해진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실증적으로 지난 3년간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경험하지 않았던가?
어려운 말이 아니라, 당연한 말이다. 마음-몸-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이다.
그러니 자신의 세계는 놓아둔 채, 눈앞의 현실은 놓아둔 채, 심층심리학의 원리 속에 숨겨진 놀라운 마음들과 참된 내 자신의 모습을 만나고 또 찾아야겠다고 하는 그 모든 활동이 얼마나 무의미한 활동인지는 명백해진다. 그것은 해리된 상태다. '사는 몸'과 '죽는 몸'이 따로 있다고 믿는 상태다. 마음이 몸과 다르고, 세계와도 다르다고 생각하는 상태다.
마음이라는 부분과 몸이라는 부분이 합쳐져 개인이 된다고 생각하며, 또 그 개인이라고 하는 부분들이 모여 세계를 이룬다고 생각할 때, 이것이 분절된 사유방식이다. 실존주의자들이 가장 해체하고자 한, 인간을 도구적으로 이해하는 거칠고 투박하며 무식한 방식이다.
전인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인간이 지성, 감성, 영성, 사회성, 예술성, 운동성, 육체성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각각의 요소들이 균형있게 고루 발전할 수 있도록 돌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판타지소설 장르 중 영지물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영토 경영에 대한 이야기다. 세계를 영토라고 착각하니 이러한 발상이 칼 융과 융을 이어받은 켄 윌버 같은 이 등에게서 통합적 전인성이라는 개념으로 창작되어 나온다. 세계를 자신이 경영해야 할 영토라고 생각하는 이는 '이고깽(이세계에 가서 고등학생들이 깽판치는 이야기)'의 주인공뿐이다.
그냥 더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차라리 지구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생각해보자. 지구를 경영한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지구야 미안해. 너의 온전함을 알아주지 못했어. 내가 북반구만 알아줬어. 그 대극인 남반구도 온전했는데. 얼마나 속상했을까. ㅜㅜ"라는 대사가 성립이 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구가 갑자기 변덕을 부려 북극과 남극이 바뀌는 극점프라도 일어나면 순식간에 다 멸종할 이들이, 마치 자기가 지구보다 높은 위상인 것처럼 지구를 불쌍한 아이로 보며 돌보려 하는 것이 정말로 온당한 관점이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이 코미디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몸에 대해 하고 있는 것도 똑같은 코미디임을 이해해야 한다.
'몸님'께서 우리를 살려주고 계신 것이지, 우리가 몸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위대한 스승처럼 행세하며 "허허, 몸 인석아. 대극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고 내 말했을 터인데. 너 편한 것만 하지 말고, 진리의 법칙을 늘 지키며 살도록 하여라."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애초 아니다.
인지과학 분야에서 몸에 대한 연구의 동시대적 권위자인 마크 존슨은 말한다.
"몸이 스스로 가장 온전하게 알아서 한다."
몸이 스스로 가장 잘 작동하고 있을 때, 가장 조화로울 때 경험되는 느낌이 바로 편안함이다. 몸은 당연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편하고자 한다. 우리가 게을러서 몸이 편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편한 상태가 원래 몸이 스스로 향하고자 하는 가장 좋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몸이 편해야 마음이 편하고 세계가 편하다. 그래서 어떤 치료자들은 고객의 몸을 편하게 카우치에 눕혀 이완되게 한 뒤 마음을 작업하려고 하기도 한다. 대체 왜? 그렇게 해서 몸이 편해질 수 있으면 이미 마음의 문제가 없다. 카우치에 누워 고객이 낮잠을 즐기는 그 사용비만 받으면 된다. 그 자체로 힐링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심리상담의 많은 문제들은 내담자의 몸이 충분히 쉬기만 하면 해소되는 문제들이다. 몸이 스스로 쉬고자 하는 방향성으로 움직이고자 할 때, 자아가 똘똘이 스머프처럼 잘난 체하며 몸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되는 문제들이다. 그래서 심리상담의 결과는 결국 내담자가 몸에 대해 겸허해지게 되는 일과 같다.
이 지점에서 어우체험은 살아있는 몸에 대한 체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매일 아침 이끌고 세면대 앞으로 데리고 가 양치질을 시작하는 뻔하고 성가신 아이처럼 인식하는 개체의 육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한 생생한 생명성 자체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존재의 활동에 대한 체험이다. 그래서 어우체험은 흡사 지금 이 몸의 한 호흡이 자각되는 순간 그것이 우주의 호흡으로 실감된다. "내가 웃을 때, 우주가 같이 웃는다." 이러한 말들이 정말로 사실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통속적인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완.벽.한. 어.떤. 기.적.이. 통.째.로.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목격자인 우리 자신도 그 기적의 장관 속에 있다. 우리 자신까지 가장 완벽한 어떤 광경의 실황이다. 어마어마한 것이다.
"내가 세계다!"
자아의 오만하고 쪼잔한 전체주의의 냄새는 확 빠진 채, 언젠가 당신은 가장 겸허하고 웅대한 어조로 이렇게 외치게 될까? 그러고 싶어서 우리는 실존상담을 배우고, 실존상담을 하고, 실존상담을 받고, 또 실존상담을 잊는다.
어우, 당신이 바로 이 하나인데, 다른 잉여의 것이 필요하겠는가? 어우체험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체험함으로써, 당신 자신이 대체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몸을 편하게 하고, 저 커다란 우주 속 당신의 숨소리가 들려오게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