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정성과 1분살이의 이상한 마음의 진화론"
좋다. 우리는 더 진실되어 보자.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당신은 그저 하루살이 대신에 1분만 살다가 죽는 1분살이라는 벌레를 상상해보면 된다.
당신이 아이스아메리카노(이하 '아아')를 들고 1분살이 앞에 서있다. 당신이 1분살이를 관찰하듯 1분살이도 당신을 관찰한다. 당신은 빨대를 입에 물고 아아를 5초간 들이키며, 10초간 입을 뗀다. 그리고 다시 5초간 흡입하며 그 다음 12초간 입을 뗀다. 또 한 번 당신은 빨대를 입에 물고 6초간 들이키고, 10초간 입을 뗀다. 그리고 5초간 들이키고, 9초간 입을 뗀다.
일련의 행위에 총 62초가 소요되었고, 1분살이는 2초 전에 죽었다. 그러나 눈을 감은 그 표정은 아주 만족스러우며 행복해보인다. 아마도 어떠한 진리를 발견한 듯한 선구자의 표정이다. 1분살이는 당신이 평균 5초 동안 빨대에 입을 붙이고, 평균 10초 동안 빨대에서 입을 뗀다는 모종의 규칙성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 뒤 2초 후에 이루어질 당신이 빨대에 입을 붙일 모습을 상상하며, 이 믿음직스러운 법칙에 의해 돌아가는 세상의 든든한 안정성에 안심하고 숨을 거두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반복되는 규칙성을 통해 1분살이는 모든 것이 영원한 섭리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구원을 얻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어떠한가? 당신은 본의 아니게도 1분살이의 믿음을 배신하고야 만다. 이제 더는 들이킬 음료가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실제로 일어난 일은 컵이 쓰레기통에 버려진 일이다. 이것은 반복이 아니었고, 특히나 영원한 반복은 더욱 아니었다. 즉, 이것은 아.무.런. 법.칙.도. 아.니.었.다.
제한된 1분만 사는 1분살이의 인식적 한계 속에서는 당신의 행위는 항구적 규칙성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영원히 반복되는 진리처럼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1분살이의 한계가 만든 착각일 뿐이다. 당신은 커피를 리필해 다시 반복처럼 보이는 흡입의 행위를 했을 수도 있고, 커피가 남았어도 당신을 추격하는 사채업자들 때문에 그냥 버리고 나갔을 수도 있으며, 커피에는 입도 대지 않은 채 아르바이트생에게 밤새워 쓴 연애편지를 건넸을 수도 있다. 모든 가능성이 거기에는 열려 있었으며, 이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자신의 한계 속에서 보게 된 일련의 규칙성 아닌 규칙성을 절대적 진리의 법칙이라고 착각하며 고집하는 일, 이것은 1분살이의 전매특허가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애용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우주가 138억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해보자. 그 시작점에서부터 하나의 선형적인 발전을 이루어온 것처럼, 그리고 그 발전의 그래프 속에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이 있었다고 하자. 그 반복에 의거하여 우리가 신뢰할 만한 법칙성이라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자. 우리가 만약 138억년살이라면, 이것은 정말로 반복이 맞을 것이며, 신뢰할 수 있는 법칙이 맞을 것인가? 이 질문은 모든 것이 환상이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관찰과 인식의 한계 속에서만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리스펙되는 이유는 그가 정직한 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도 정직하다. 과학에서 말하는 진리성은 언제나 가정이며 가설이다. 과학은 언제나 스스로의 한계를 전제하여 탐구를 전개한다. 과학적 소통방법인 논문도 그러하다. 논문을 처음 쓰는 이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설명해야 한다고 믿으며, 또 그럴 수 있는 자신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정직성 속에서 움직이면 소통이 어려워진다. 소통이 아니라 맹목적 신앙이 된다. 그 결과로 반드시 자유를 억압하게 된다.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맹목적 신앙의 한 형태는, 마음이 프로그램 법칙과 같다는 신앙이다. 마치 과학인 것처럼 보이려는 의도로 자연과학적인 냄새를 풍기는 언어들을 사용하지만, 이러한 접근들의 본질은 죄다 신앙교리서이다.
분석심리학의 칼 융과, 융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은 통합적 심리학의 켄 윌버가 대표적으로 이러한 신앙교리서를 다수 집필해온 이들이다. 여기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켄 윌버가 그의 통합적 심리학을 구성하는 데 큰 영향을 받은 이 중 하나가 하워드 가드너이다. 다중지능 이론을 우리에게 제안한 연구자다. 가드너의 이론에 착안하여 윌버는 자신의 통합적 영성지도를 만들고 또 그 감사를 가드너에게 돌렸지만, 가드너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윌버가 저보다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것 같아 그가 제 이론을 가져다가 통합해 활용한 결과물에 대해 어떤 부분을 비판해야 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윌버가 아무리 완벽하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저는 윌버가 만든 세상에서는 결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이것은 핵심이다. 왜 살고 싶지 않은가? 그러한 세상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자기가 가장 자유를 봉쇄하는 독재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이가 마치 자유의 독립투사인 것처럼 스스로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대해 융이 그러했고, 기성의 심리학에 대해 윌버가 그러했다. 프로이트와 기성의 심리학이 마치 자기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처럼 생각하며, 이들은 모두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영토를 자신들이 만들겠다는 기획을 가졌다. 그러나 심리학의 역사 속에서 이들에 비견될 만한 독재자는 없다. 왜 그런가? 이들이 언어를 신격화하며 그 언어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심리체험 및 영성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언어에 고착되어 있으면 그 체험들은 다 언어에 의해 환원된다. 고작해야 자신의 언어적 체계를 강화시켜줄 부품으로 몰락할 뿐이다.
1분살이가 자신의 관찰의 정직성과, 그 관찰을 묘사해낸 자신의 언어의 정밀성을 아무리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 언어로 구성된 법칙성은 사실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 속에서는 진리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니다. 결국 1분살이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때 이것은 그저 1분살이 자신의 언어만 붙잡으며 그 언어로 말해진 것은 진리라고 주장하는 모양새가 된다. 이를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표현하면 이러하다.
"이것은 진리라고! 왜? 내 말은 진리니까!"
니체는 언어를 통해 세운 진리라고 하는 것으로 1분살이들이 다 이 지랄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섬세하게 꿰뚫어본 이다. 1분살이들은 사실 진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소설들을 쓰고 있으며 자기의 소설을 다만 진리로 우기고 있다는 사실을 니체는 고발했다. 그가 선택한 고발의 접수처는 약 100년 뒤의 우리였다. 100년 뒤의 인간이라면 이 사실을 알아주리라고 그는 기대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이해하는가? "형이랑 누나가 보니까 1분살이가 잘못했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기가 아직 곤란하다면, 우리는 1분살이로부터 얻어 먹은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대체로 1분살이들이 1톤 트럭에 실어 우리에게 보낸 사과박스에 담겨 있던 것, 그것의 이름은 '마음의 진화론'이라고 불린다.
'마음의 진화론'의 핵심을 아주 쉽게 묘사하자면 곧 '영적 목적론'이다. 마음을 깊게 파고 들어갈수록 영적 진화가 이루어져 결국에는 인간이 신이 될 것이며, 인간은 그렇게 목적지어졌다는 것이 영적 목적론이다. 이 영적 목적론을 그 핵심으로 둔 사상을 대표적으로 전개한 이들이 상기한 융과 윌버다. 융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융 사상의 구조는 프로이트가 쌓아놓은 심리학적 토대의 제일 꼭대기에 연금술이라고 하는 영적 원리를 왕좌로 올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프로이트의 결정론적 인과론에 영적 목적론을 입힌 것이다. 인과론과 목적론의 결합은 1분살이들이 애정해 마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1분살이들에게는 마치 뒤에서는 조상들과 부모님들이 응원을 하며 밀어주고, 앞에서는 하나님이 힘차게 미소지으며 이끌어주는 그림이다. 그렇게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실상은 인과론이라고 하는 과거의 깡패와 목적론이라고 하는 미래의 깡패 사이에서의 고난이다.
융도 인과론을 깡패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정할 수는 없었다. 프로이트에 대한 융의 분열된 양가감정과 같았다. 그래서 융에게는 자신의 정신분열을 치유할 기제가 필요했고, 그가 빛으로 발견한 것이 바로 연금술이라고 하는 영적 목적론이다. 인과론은 목적론을 통해 구원될 수 있다고 융은 믿었다. 미래의 깡패가 과거의 깡패를 해치워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융에게 그것을 깡패가 아닌 어벤져스로 보이게끔 만들었다. 프로이트의 결정론이 자신의 목적론에 의해 구원받는다면, 이는 융 자신이 프로이트에게 승리하게 되는 역사와도 같았다. 그렇게 자신이 프로이트보다 더 훌륭하고 힘센 깡패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영적 목적론은 채택되었다.
이와 같이 영적 목적론은 자신이 부당하게 억압받는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곧잘 신앙하게 되는 소재다. 자신의 인생이 목적이 이끄는 바에 따라 억압세력에 대한 전적인 승리를 거두고 구원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영적 목적론의 신앙인들에게 목적이란 언제나 자기가 대장이 되도록 작동하는 위대한 섭리의 계획인 셈이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은 없다. 인생에 목적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실존주의 선언이다. 모든 목적론은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이루어진 잘못된 인식과 잘못된 관찰의 결과가 만들어낸 망상의 소설에서 기인한다. 니체는 문헌학자로서 목적론적 진리들의 기원을 살폈다. 그리고는 이것들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진리가 아니라 그냥 소설이었다. 그래서 니체는 진리를 주장하는 소설작가들의 의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누가 당신에게 진리를 묻는다면, 진리를 묻고 있는 그가 대체 어떠한 자인지를 되물어라."
니체에게 이것은 분명했다. 권력을 얻고 싶어하는 의도의 소설작가들이 진리성을 사칭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 소설작가들이 창작해낸 판타지에 굽신거리며 그 의도에 노예처럼 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펼쳐지게 될 니체활극은 우리가 다른 장에서 웅장하고 깜찍하게 다루게 될 것이다.
요지는 다만 이것이다.
"이 우주는 영적 목적을 가진 마음의 진화론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이 결국 신이 될 것이라는 그러한 진화는 없다. 그러한 목적은 없다. 진화는 원래 청사진처럼 주어진 특정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진화는 목적론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환경에 적응하려는 그 결과로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적.응.의. 결.과.이.지. 누가 설계도를 정해놓고 우리를 임의적으로 이렇게 되도록 이끈 것이 아니다.
마음의 진화론은 우주에는 목적이 있다고 하는 말과도 같다. 그러한 법칙성이 발견된다고 그 숭배자들은 말한다. 이를 목적론적 논증이라고 한다. 이에 대한 반박은 철학과 1년생들이 읽는 개론서에 나온다. 실존상담과 태도적 가치를 핵심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회의주의 학파의 대부격인 흄은 니체만큼이나 판타지 해체의 전문가인데 그의 말을 아주 부드럽게 옮기면 이러할 것이다.
"우리 꼬마친구가 아주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자라나는 1분살이 꿈나무들이 상상력을 풍부하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우주가 불확정적이기 때문이다. 선형적인 인과론도 목적론도 아니다. 불확정성이다. 이상한 마음의 진화론 대신에 이것이 더 신비하기까지 하다.
아무 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고, 아무 것도 목적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한 번 더 반복한다고 해도 이보다 더 잘할 수가 있을까. 무수한 별들 사이에서 이 구석의 촌동네에 생명이 태어나 인간이 되어 이제 그 빛나는 눈으로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우와, 아름답다."라고 감탄을 자아낸다. 바로 그 모습에 감탄이 나온다. 별들이 인간을 향해 감탄을 보낸다.
"우와, 아름답다. 저 작은 눈동자에 우리 모두가 다 담겨 있어!"
이.것.은. 기.적.이.다.
'위대한 목적'이 아니다. 불확정성 속에서 불확정성과 하나된 '위대한 적응'의 결과로 여기에 인간이 있다. 불확정성의 심리적 표현은 바로 불안이다. 애초 의지할 만한 확고한 규칙성이 없는 불안 속에서도, 인간은 해냈다. 인간이 불안을 자유로 바로 알아 살았던 까닭이다. 불확정성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로 불안 또한 불가능하지 않다는 의미다. 불안을 느끼는 이는 지금 자신의 자유로운 가능성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말이다.
인간이기에 한계 속에서도 가능하다. 언어로 만든 자폐의 성벽을 뚫고 그 밖으로 나가 불확정성과 하나가 되는 일이 가능하다. 불안이 자유로 살아지는 일이 가능하다. 초월이 가능하다. 당신이 지금 살아있어서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불확정성의 우주 속에서 인간이 가능한 존재였기에, 해낼 수 있는 존재였기에, 그 '위대한 결과'로 당신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영적 목적론이나 마음의 진화론 따위의 조잡한 군더더기는 필요하지도 않았다. 불확정성 자체가 바로 당신의 힘이었다. 당신은 불확정적 존재며, 지금껏 성공만 연쇄해온 절.대.적. 가.능.성.의 존재다. 단 한 번씩의 기회에도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확률적으로는 거의 말도 안되는 존재다. 우리는 더욱 진실에 근접해 왔다.
'목적'의 반대말이 '기적'이다.
이 모든 것은 분명하게, 목적하지 않았던 당신의 기적적 승리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이 사실만으로 이것은 승전보다. 당신이 신뢰해야 할 것도 이것이다. 법칙이나 이론이나 진리가 아니다. 당신이 인간이라는 이 기적만을 당신은 신뢰해야 한다. 당신이 인간이기에, 당신에게는 사실 아무 걱정이 없다. 불확정적으로 확률을 초월해 우주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해냈던 당신 자신을 한번 믿어봐라. 그것은 당신의 역사였다.
실존상담은 그렇게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고하는 실시간의 기록이다. 당신의 말이 아니라 당신의 진실을 직접 보고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