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8

"심리상담의 탈우상화"

by 깨닫는마음씨




실존주의 신학자인 불트만은 탈신화화를 외치며 종교의 우상화를 해체하려 하였고, 실존상담자인 스피넬리는 탈신비화를 외치며 심리상담의 우상화를 해체하려 하였다. 실존주의가 우상파괴를 통한 탈우상화의 전통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인간이 쌓아온 문화적 유산과 전통을 파괴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삶을 파괴하려는 일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삶을 파괴하려는 이는 꼭 자기 삶은 놓아두고 남의 삶을 파괴하려 하게 된다. 내로남불의 원형이다.


그래서 심리상담의 탈우상화는 상담자 자신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상담자윤리의 덕목이다. 상담자 자신이 심리상담을 탈우상화할 수 있어야 그는 심리상담자다. 심리상담자가 아니지만 대중적으로는 동일한 업종에 종사한다고 곧잘 인식되곤 하는 최면가들 중에는 이러한 말을 하는 이들이 많다.


"저는 어떤 사람이든 최면을 걸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대표적인 우상화의 징후다. "어떤 심리적 문제든 내 앞에 갖고 와. 다 해결해줄게." 이러한 이는 심리상담을 하면 안된다. 첫 번째로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두번째로는 이것이 마음을 도구적으로 다루는 환원적 기술자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자라는 직업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모델은 볼더 모델이라고 불리는 '과학자-실천가(scientist-practitioner)' 모델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직업윤리다. 과학자로서의 윤리와 실천가로서의 윤리가 교집합을 이루어 더 색이 짙어진다. 직업윤리의 핵심은 자신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심리상담이라고 하는 활동의 한계가 된다. 모.든. 윤.리.는. 인.간.이. 신.처.럼. 행.위.하.고.자. 하.는. 오.만.을. 경.계.하.는. 장.치.다.


현대적 사유들이 출범한 계기가 된 것은 인간소외의 현상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도구화되었기에 야기된 현상이다. 바벨탑의 신화적 비유에서 알려지듯이, 인간이 신을 자임하고자 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도구의 남용이 있다. 언어는 언제나 대표적인 우상화의 도구다.


그리고 심리학은 오늘날 분명히 이러한 우상화의 입장에 처해 있다. 특정한 심리학적 원리만 알면 모든 삶이 잘 풀린다는 식으로 심리학은 일종의 주술도구가 되어 있다. 성황당에 가서 정화수를 떠놓고 특정한 주문을 외우면 모든 삶이 잘 풀린다는 논리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특정한 도구를 통해 임의적으로 삶을 조작하겠다고 하는 발상에서 심리학이 그 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심리학은 그저 마법사의 요술지팡이가 되어 있는 것뿐이다. 이것이 심리학의 우상화다.


과거 종교가 점하던 위상을 오늘날 심리학이 대신 점하고 있다는 분석은 정확하다. 종교가 우상화의 함정에 자주 노출되어 왔듯이, 심리학 또한 동일한 함정에 노출되어 있다. 아니 실은 많은 경우 이미 그 함정에 빠져 있다. 보란듯이 심리학은 '분신사바(콧쿠리상)'나 '나홀로 숨바꼭질'처럼 대중적 주술도구다. 일종의 도시전설(urban legend)에 가깝다. 도시전설의 전승방식은 F.O.A.F(Friend of A Friend)라고 불린다. 표현 그대로 '친구의 친구에게서 유래된 이야기'다. 정확한 의미로는 '근거없는 이야기'다.


오늘날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이라는 허공을 떠도는 사다코 바이러스 같은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근거가 없다. 학(學; science)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도 학제적 근거가 없다. 다만 "내가 해봤는데 되더라. 너희들도 해봐."이다. 자기의 성공담으로 남의 인생을 망치는 무수한 자기계발분야의 자서전들과 그 특성이 완벽하게 동일하다. 학제적 탐구의 결실이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저자가 근거가 된다. 어떠한 주장을 하는 이가 방송에도 나오고, SNS의 인기인이고, 대중적으로 알려졌다는 그 이유만으로 저자의 주장은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인.기.가. 진.리.성.을. 구.성.한.다. 이것은 더는 과학이 아니다. 진실로 도시전설의 주술이다.


심리학 논문 한 편 쓰지 않은 이가 심리학의 전문가를 자칭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이 도시전설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백일몽의 구조다. 자기 방의 침대 위에 멍하니 누워 어느날 갑자기 심리학 전문가로 짜잔 칭송받는 백일몽을 꾸던 이가, 자기와 똑같은 조건으로 심리학 전문가라고 외치고 다니는 다른 이를 보게 될 때, 이것은 소망이 대리실현된 쾌감을 낳는다. 인스타그램의 이미지 소비와 동일한 현상이다. 우상이란 원래 이미지 소비의 현상이다.


이미지는 패션이다. 우상은 패션이다. 패션(fashion)이며 패션(passion)이다. 유행과 열광이다. 물론 여기에서 심리학이 시작되어도 좋다. 이미지가 관심을 유발했으면, 그 관심에 뛰어들면 된다. 그러나 멋있어 보이는 남을 다 적당히 흉내낸 옷만 주워 입으면서 자신이 우기명 같은 패션왕인 것처럼 굴 때, 이것이 다시 한 번 우상화다.


비지니스의 교과서라고도 불릴 정도로 사회문화에 대한 현실적 통찰이 깊게 깔린 작품인 『라멘요리왕』에서는 이러한 명대사가 나온다.


"장르에는 귀천이 없지만, 장르 안에는 귀천이 있다."


대중문학과 고전소설 사이에는 귀천이 없지만, 1급의 대중문학과 3급의 대중문학은, 또 1급의 고전소설과 3급의 고전소설은 분명하게 변별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도시전설의 주술은 이 모든 것을 뭉뚱그린다. 이미지만 더해감으로써 카레와 설사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라멘요리왕』에서는 지적한다.


"자기가 깨어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먹는다."


이것이 주술의 본질이다. 현실을 가상의 정보로 가려 눈뜬 장님이 되게 만든 후 "자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라고 하는 일이다. 해결되었는가? 아니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심리학이 가스라이팅의 주술도구가 되어 있다면, 심지어는 심리상담자를 자칭하고 있는 이들 역시도 그러한 도구의 남용에 동의하고 있다면, 우리가 심리상담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다르게 살아야 한다. 다르게 산다는 것은 언제나 정확하게 사실을 이해하며 산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남다른 일이다. 인간은 우상의 동물이라고 말하는 만큼 우상에서 벗어나는 일은 분명 남다르다.


심리학으로 삶을 임의대로 움직이는 일이 가능한가? 삶에서 원하는 것들을 편의대로 얻는 일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심리학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보름달의 정기를 받은 보검이나 새벽이슬로 단련시킨 거울 등의 주술도구를 팔러 다니는 주술상인들이나 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도구를 팔러 다니는 이들의 모습을 한번 봐보라. 그 주술도구들이 그토록 영험하다면 그는 왜 이런 것들이나 팔러 다니고 있는가? 심리학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얻게 해주는 마법이라면, 그 마법 왜 자기에게는 쓰지 않고 있는가? 주술상인들의 단골멘트인 "제 자신에게 쓰면 천지신명이 사욕을 위해 쓴다고 노하십니다."라는 말도 심리학이라는 학문적 입장에는 적용되지 않을텐데.


원래 어떤 말의 진위는 그 말의 내부적 논리구조에서가 아니라, 그 말을 한 이의 행위와 모습에서 판정되는 법이다. 이것은 인기와 같이 외적으로 그럴듯한 결과를 내면 그것이 진실이 된다는 말이 아니라, 행위와 모습이 그 말과 일치되지 않는 부조리함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


너무나 단순한 예가 있다.


로또당첨되는 법을 알려주겠다는 이가 있다고 하자. 그는 왜 그 방법을 파는가? 매주 그 방법을 써서 자기가 당첨되는 것이 그 방법을 남들에게 파는 것보다 더욱 남는 장사다. 바로 그 방법이 허구이기 때문이다. 허구이기에 자신은 실제적으로 쓸 수 없고 남들에게 팔 때만이 그 용도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물질적 이득뿐 아니라 정신적 이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돈을 받지 않고 좋은 심리학 이론을 통해 행복해지는 법을 알려주려 한다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냥 자신이 그 이론을 통해 스스로 행복해지면 안 되나? 왜 꼭 그것을 들어줄 남들이 있어야 하는가? 그 말은 자기의 말을 들어줄 이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심리학 이론을 굳이 그에게서 들어야 할 이유란 무엇인가? 그는 지금 아무리 좋은 심리학 이론을 알아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없다면 행복하지 않다고 그 자신의 온몸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자기가 말하는 심리학 이론으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외로워서 이러고 살아요. 이 말은 정직하다. 마음의 전문가를 자임하지만 외로운 마음 하나 이해하지 못한다. 밑천은 드러난다. 이미지는 NFT로도 지켜줄 수 없이 흩어지고, 도시전설은 허물어진다. 심리상담자가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내담자를 불러 남용하고 있었다. 해결사처럼 유능하게 내담자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명목으로 자기의 외로움을 채우고 있었다. 이것은 심리상담이 아니다.


심리상담이 우상화되어 있을 때, 직업윤리의 문제는 두드러진다. 혹시 이러한 이야기가 갑갑한가? 그럴 수 있다. 심리상담자라고 하는 것을 심리학의 연예인 같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면, 이것은 분명 갑갑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그냥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러 가면 된다. 아무도 연예인이 되려는 이를 막지 않는다. 그 끼와 재능을 유감없이 세계에 알려라. 천계영님의 고전 『언플러그드 보이』의 명대사처럼, 슬플 땐 힙합을 춰라. 외로울 땐 뽕짝을 불러라. 절절하다. 전세계 1%의 특별한 소수만이 누린다는 행복에 대한 비밀의 법칙을 힙합처럼 추고, 이것만 하고 살면 원하는 것을 다 얻고 온전해질 수 있다는 마법의 심리학을 뽕짝처럼 불러라. 아주 그냥 아련하다. 코끝이 짠하다. 빙하기인 것 같다.


그런데 혹시 재능이 없어서 아이돌이 되지 못해, 연탄소년단이 되지 못해, 연탄처럼 눈밭을 구르고 구르다 결국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유감이라고 하겠다. 심리상담은 오히려 아이돌(idol: 우상)을 해체하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눈덩이가 잘못 굴러온 것인지, 아니면 사실은 자기 자신도 우상을 해체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정말로 알고는 싶다. 당신도 당신을 알고 싶다. 당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맨얼굴을 가리고 있는 석고가면을 깨트리는 것이다. 연탄을 덮고 있는 하얀 마법의 눈을 치우는 것이다. 우상 안에 갇혀 있던 당신이 우상을 깨트리고 그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당신이 인터넷의 허공을 포류하며 빙의할 숙주를 찾던 도시전설의 사다코가 아니라, 허우대만 멀쩡한 커다란 석고상 같은 팔척귀신이 아니라, 남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출장전문해결사인 콧쿠리상이 아니라, 당신은 당신의 삶에서 남다른 실존상담자였으면 좋겠다. 자신이 우상을 깨트리고 나온 만큼, 인간을 갑갑하게 만드는 실제의 원인인 우상의 이야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다른 이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 만나지 않은 당신을 위해 나는 이 책을 쓴다. 석고상이 깨지는 소리를 멀리서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눈이 흩어지는 기척을 느낀다. 빙하기가 와도 우리에게는 이제 연탄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제 당신이 있다. 아무 걱정이 없다. 당신이 당신을 찾았으니 이 세계에는 아무런 걱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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