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9

"망치들고 상담하기: 영적우회와 니체활극"

by 깨닫는마음씨




실존상담은 가끔 망치를 든다. 영적우회가 그 앞에 있을 때 자연스럽게 망치가 실존상담자의 손으로 날아온다. 이것이 지금 필요하다고 삶이 전해주는 것이다.


'영적우회(spiritual bypass)'는 심리학의 4세력으로 성장한 자아초월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의 존재 가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리학과 영성의 결합을 표방한 자아초월심리학의 의의는 이 접근이 단지 영적 지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영성이라고 하는 소재를 심리학이라고 하는 과학의 영역으로 전격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영성의 탈신비화를 이룰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영적우회라는 개념은 이러한 자아초월심리학의 의의를 고밀도로 압축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실존주의적 경향성을 가진 임상가이자 연구자인 존 웰우드에게서 제안되었다. 그는 이것을 '심리적으로 불건강한 이들이 자신의 현실적 문제를 영적 개념을 통해 회피하고 기만하고자 하는 현상'으로 정의한다. 쉽게 말해, 영성만능설을 추종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포괄적으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더 진정한 것에 대한 '고급정보'로 간주된다. 그래서 영적우회는 고급정보의 앎으로 실.제.의. 자.기. 삶.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앎의 기만이다.


영적우회와 비슷한 개념으로는 자아초월심리학의 대표학자였던 켄 윌버가 제안한 '전초오류(pre/trans fallacy)'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도 중요하고 의미깊다. 아마도 켄 윌버가 심리학에 기여한 거의 유일한 업적일 수도 있다. 이 전초오류의 개념은 인간이 하는 체험의 양상을 이성작용의 여부에 따라 하위의 '전개인단계'와 상위의 '후개인단계'로 나눈다. 그리고 그 둘을 혼재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윌버에게 있어 건강한 영성이란 이성작용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지, 비이성적인 동물성으로 퇴행하는 등의 체험은 아직 개인 안에 통합되어 완수된 체험이 아니다.


윌버가 이 개념을 제안하게 된 이유는, 전개인단계의 체험에 고착된 이가 실은 하위단계에 위치하면서도 자신의 영적 발달수준이 높아진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일들을 많은 경우 목격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윌버는 자신이 융의 후예임을 강조하면서도, 융의 분석심리학은 근본적으로 전초오류를 내포한 접근이라는 비판을 가한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자아초월심리학자인 마이클 워시번은 정신역동적 관점의 입장에서 '역동적 터(dynamic ground)'라는 개념을 제안하면서, 개인은 인생의 초기에는 역동적 터에서 멀어져 발달되고자 하지만, 인생의 후기에는 역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역동적 터를 향해 초월되고자 한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실은 초월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 모습은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퇴행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윌버에게 재비판을 가한다.


요는 이러한 자아초월심리학 내부의 논쟁이 핵심이 아니라, 여기에 대해 실존상담이 갖고 있는 관점이 핵심이다. 윌버가 융을 전초오류라고 비판할 때, 실존상담은 윌버와 융이 영적우회라고 비판한다. 틸리히에게 영향받은 미국 실존심리학의 대부인 롤로 메이와 그에게 사사받은 커크 슈나이더가 이러한 비판을 제기한 대표적 심리학자들이다. 이것을 실존심리학 대 자아초월심리학의 대립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엄밀히는 실존심리학의 '무아적 존재론' 대 융과 윌버의 '영적 목적론'의 대립에 가깝다. 무엇보다 커크 슈나이더 본인도 실존주의적 영성을 말하는 자아초월심리학을 표방한다.


무아적 존재론과 영적 목적론의 대립은 거칠게 유비하기로는 불교와 힌두교의 대립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융이나 윌버나 힌두교적 사유를 바탕으로 자기의 이론을 전개한 이들이다. 힌두교적 사유의 변주가 또한 연금술이다. 그 핵심은 무엇일까? 인.간.이. 발.달.하.면. 신.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융이나 윌버의 사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둘의 애호가들은 흥분할 수도 있지만, 이 명제가 빠지면 더는 융이나 윌버가 아니다. 이것이 가장 핵심이다. 그리고 실존심리학과 불교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응, 아냐. 님 착각 좀 그만. ㅇㅇ"


슈나이더가 1980년대에 미국심리학회 학술지에서 윌버와 논쟁을 주고 받던 중, 참다참다 못해 한 말이 있다.


"와, 너 진짜 자기가 신인 줄 아는구나? 진짜 오만하다 야. 어떻게 자기의 무오류성(infallibility)을 주장할 수가 있냐. 너 진짜 학자 맞냐?"


윌버는 이렇게 대답한다.


"신은 지루하지. 너도 명상하고 신비체험하면 신보다 두 단계 높은 것이 될 거야. 나는 슈나이더 니가 명상을 좀 해봤으면 좋겠다. 그러면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잘 알텐데."


벌써 40년 전의 일이라 슈나이더와 윌버는 오늘날 각기 많이 변해 있지만, 이러한 문답이 여전히 유용한 것은 영적우회라고 하는 것이 대체 어떠한 색채를 갖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종교(또는 정치)에 광신적인 친구나 신비체험 같은 것을 한 뒤에 스승처럼 구는 친구를 만났을 때, 그 앞에서 "와 말이 안통하네. 이런 꼴통이 다 있냐."라고 하게 될 때는 거기에 반드시 영적우회가 있다. 영화 '밀양'에서 사람을 죽여놓고 자기는 셀프용서를 받았다고 상큼하게 웃으며 말하는 예는 정확하다. 실존상담은 이러한 영적우회를 다루는 일에 있어서는 거의 엑소시스트 같은 전문성을 갖고 있다. 엑소시즘의 핵심은 빙의된 악마의 이름을 아는 것이다. 영적우회 증상을 보이는 이에게는 어떠한 악마가 빙의되어 있는 것일까? 바로 열등감이다.


실증적인 현실의 예로 한번 풀어가보도록 하자. 영적우회자들은 전통적으로는 종교인, 예언자, 스승의 모습으로 활동했지만, 오늘날에는 특징적으로 마음의 장사꾼 내지 영적 장사꾼의 모습으로 활동한다. 효율이 더 좋아서다.


마음의 장사꾼 내지 영적 장사꾼 중에는 이렇게 해야 사람들에게 팔린다며 일부러 저질의 것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그 제조품을 좋아하고 소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는 지금 사람들을 대단히 얕잡아 보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자기와 사람들을 변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보편적 인간과는 다르게 특별한 존재로 세우려 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열등감이 많아서다. 니체에게 영향받은 아들러는 이를 아주 잘 설명한다. 이것은 열등감이 만들어낸 '병적 우월감'이다.


사실은 이러하다. 자기를 대단히 부족하며 못났다고 생각하는 이가 자기 자신을 보는 관점과 똑같이 사람들을 수준낮게 보면서, 그들에게 저질의 영적 상품을 파는 방식으로 어리석은 이들로부터 편의대로 자원을 획득가능하게 된 자신의 입장을 그 구매자들보다 우월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즉, 이들이 실제로 파는 것은 영성 상품이 아니라 열등감 교환권이다. 사람들은 돈을 주고 영적 장사꾼들로부터 열등감을 구매하며, 그 대신에 이 장사꾼들이 우월한 입장을 확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영적우회의 만연한 형태는 바로 이 영적 상품을 매개로 한 열등감 교환의 부당거래다.


보라. 인간이 이렇게 착하다. 마음이 제일 가난한 이에게 자원을 주고 자신이 대신 못나짐으로써 마음이 가난한 이를 배불리 먹게 해준다. 그러니 실은 마음이 가난한 이들만 깨달으면 된다. 자기가 놀라운 능력으로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공략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 자기가 우월감을 달라고 구걸을 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옛다 하고 우월감을 던져준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이들의 말처럼 사람들이 저질의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 자신이 저질의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수준인 것이다. 자신이 5세 아이들에게 말하기 위해 일부러 쉽게 말하고 있는 아인슈타인이라고 착각하면 안된다. 자신이 5세 아이로 뻐끔뻐끔하고 있어서 아인슈타인들이 까르륵 웃는 것이다.


영적우회는 언제나 이처럼 자신의 가난한 상태를 그 배경으로 한다. 영적 정보를 덧씌워 자신이 가난한 상태임을 회피하고 수준이 높은 존재인 것처럼 가장하려고 한다. '마음'이라는 용어, 이것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오늘날의 대표적인 영적 정보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직접적으로 쓰지 않는다고 그것이 영적 정보가 아닌 것이 아니다. 마음만큼 영적우회의 소재로 잘 쓰이고 있는 상품은 없다. 영적우회자들이 빈번하게 마음의 장사꾼의 형상을 취하는 이유다. 이것은 그저 단순히 마음에 대한 정보상품을 구매하게 되는 일이 아니라, 영적우회자들의 열등감도 같이 구매하게 되는 일이다. 그러한 일을 하려고 작동하는 것이 영적우회이기에 이는 필연이다.


영적우회는 진실로 특이한 사례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오늘날 마음상품을 거래하는 정보시장에서 너무나 만연한 일이다. 그래서 문제가 된다. 구매자는 자신이 대체 무엇을 구매하는지도 모른 채, 구매하면 할수록 판매자는 더 대단해지고 구매자인 자신은 더 위축되는 이상한 상황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중에 상황을 벗어나 뒤돌아보면 분명해진다. 애.초.에. 구.매.하.지. 않.았.던. 때.가. 훨.씬. 더. 심.리.적.으.로. 건.강.했.다.는. 것.을.


돈도 버리고, 시간도 버리고, 멀쩡하던 상태는 허약체질이 되어 버렸다. 열등감을 많이 구매하게 되어서 그렇다. 구매자들 또한 가끔 열등감에서 비롯한 병적 우월감을 느끼며, 자신이 마치 놀라운 정보를 얻어 신이라도 된 것처럼 도취되는 경험도 하곤 한다. 대체로 자기 방 안에서 30분 정도의 도취경험이 이어진다. 그리고 급우울해진다. 그래도 자신은 이러한 위대한 정보도 모르고 평범하게 살고 있는 남들보다는 더 좋은 것을 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언젠가 마음에 대해 더 잘 알고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신이 되면 모든 것이 다 좋아지리라는 생각을 하며 잠에 빠져 든다. 좋은 꿈 꾸기를.


그런데 방문을 부수고 뛰어 들어오는 이가 있다.


화들짝 놀라서 당황해하는 동안, 그가 묻는다.


"이 동네 마음고수들이 모인다는 영성노름판이 어디냐?"


"네?"


"니가 돈을 잃고 온 데가 어디냐고?!"


주소를 알려주니 그가 들어온 문으로 지체없이 성큼 뛰쳐 나간다.


아직도 어리둥절한 속에서, 뚫린 문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4월의 꽃향기다. 벌써 이런 계절이 되었구나. 까마득히 다 잊고 살고 있었네. 고향에서 소 팔아 대학등록금이라고 보내주신 돈을, 매트릭스의 트리니티가 되는 진정한 마음의 법칙을 배우기 위해 모두 쏟아부은 시간이 스쳐 흐른다. 개새끼들. 별똥별처럼 눈물도 휑하니 떨어진다. 내일밤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녀의 밤차 유리창에는 분명 "사랑해요."라고 쓰일 것이지만, 오늘밤은 망치의 시간이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하나의 다이너마이트다."


메가톤급의 살아있는 다이너마이트가 밤거리를 질주한다. 소녀의 눈물이 도화선을 지핀 유성이 도시의 밤을 쏴올린다. 눈.뜨.고. 다. 일.어.나.라. 짜라투스트라가 이렇게 외친다. 니체가 철학을 하기 위해 손에 든 것은 펜이 아니라 분명 망치였다. 이러한 니체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사기만 쳐대는 마법의 펜을 놀리는 손을 한 팔로 턱 붙잡고는 눈을 부릅뜨고 말한다.


"예림이 그 펜 봐봐."


다른 한 팔에는 이미 망치가 높게 들려있다.


포스트모던의 사상가들이 너나할 것 없이 자기 사상의 원류로 니체를 꼽았던 것은 사기노름판을 끝내고 싶어서였다. 망치는 펜보다 강한 정도가 아니라, 영적 교주 같은 작가들이 만들어낸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이 시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망치로 펜대를 분질러버린 자리는 통속적 망상이 만든 선입견처럼 남산 중앙정보부의 취조실이 아니라,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는 영적 교주들의 연단 위다.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의 명구를 인용해 변주하자면, 드워프처럼 무성한 콧수염을 휘날리며, 망치를 들고 돌격하는 행복한 니체의 모습을 우리는 마음속에 그려봐야 한다.


실존상담은 가끔 망치를 든다. 실존상담자들도 니체의 후예들이기 때문이다. 망치를 드는 일에는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사람을 향해서가 아니다. 영적우회를 향해, 마법사의 펜을 향해, 인간의 열등감을 향해, 삶이 내리치라고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없어서 저것이 없다. 병적 우월감을 박살내면 열등감이 같이 박살난다. 인간이 열등하다는 것이 전적인 착각이었음이 드러난다. 니체의 철학을 한 마디로 하자면 이러할 것이다.


"인간 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온나 강해."


니체의 철학은 분명하게 강자를 예찬하는 철학이다. 그 강자의 이름이 인간이다. 강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다. 강한 자신이 될래, 약한 자신이 될래, 라고 물으면 후자를 선택하는 이는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유는 원래 누구나 다 강하기 때문이다. 한밤의 다이너마이트도 강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소녀도 강하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 정.직.한. 것.이. 강.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만은 속일 수가 없는데, 자기 자신만은 모를 수가 없어서다. 정직성은 다이너마이트의 기폭제다.


약한 인간은 없다. 우리는 실제로 약한 것이 아니라 약한 척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약한 척해야 그에 따른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을 하면 할수록 열등감과 병적 우월감의 역사만 깊어진다. 인간이 온전하다는 것은 인간이 열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이 절대적으로 강하다는 의미다. 존재가 강한데, 그 존재의 보배인 인간이 약할리가 만무하다.


영적우회란 존재를 속이고자 하는 두 번의 기만이다. 멀쩡한데 열등한 척하며, 거기에 다시 우월한 척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기노름판의 주역들처럼 속이 배배 꼬인 것이다. 망치는 고작해야 우주의 변두리에 사는 늙은 외계인 농부를 전신레깅스 입은 일진 친구들과 같이 혼내주러 갈 때 쓰는 도구가 아니라, 이 모든 미친 짓을 끝내기 위해 쓰는 것이다.


그래서 실존상담자는 가끔 망치를 든다. 망치는 마음 내지 영성이라는 이름이 실은 마법을 지시하기 위해 쓰일 때, 그 안티마법으로서 준비된 도구다. 소년점프에서 현재 연재 중인 『마슐』이라는 만화에서는, 영적우회의 우월감으로 살아가는 마법사들을 맨몸으로 두들겨패서 갱생시키는 주인공의 모습이 묘사된다. 그도 니체의 후예다. 마법사들의 밤에 지친 이들이 인간의 여명을 소원하며 불러낸 또 하나의 망치다.


새벽을 불러보자. 태양을 불러보자. 마법이 필요할까? 아니다. 고백이 필요하다. 우리가 태양의 자식이라는 고백이 필요하다. 태양신 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과학이며 생리학이다. 모든 생명체는 다 태양의 자식이다. 빛의 아이들이다. 빛이 있어 그림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어 그림자가 없다. 자기가 빛에서 소외되었다고 착각하여 생긴 그늘진 열등감이 없다. 내면의 비밀을 간직한 슬픈 어둠의 마법사 같은 유치한 게임캐릭터처럼 굴며 설정놀이를 하지 않으면, 그런 것은 요즘 핫한 엘든링에서나 해라, 태양은 떠오른다. 태양은 늘 떠오르고 있었다. 영적우회의 설정놀이에 빠져 눈을 뜨고 보지 못했을 뿐이다.


빛이 망치다. 우리를 깨운다. 우리는 빛의 아이로서, 빛을 그 가슴에 품고 태어났다. 망치 하나씩은 다들 자기의 가슴에 안고 태어났다. 내면의 빛, 이것을 다시 양심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거울이다. 우리가 늘 거울을 보며 하게 되는 말이 있다. "와 깬다." 그러나 이것은 당신에게 좋다. 거울 속에 비친 그것은 신이 아니라, 한계로 가득한 인간이지만, 그 정확한 한계의 경계선에 따라 고객맞춤형으로 손길이 일어날 때, 그 인간은 멋쟁이가 된다. 복식의 핵심은 자기 몸을 잘 알고 그 몸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이다. 이 정도면 어떠한가. 한낮의 태양빛 아래서 이제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는 빛의 아이의 면모다. 미국의 루츠락밴드 카운팅 크로우즈가 'A Murder of One'을 노래한다.


아름다운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게 어떻겠어요?

행복한 이들 중의 하나가 되는 게 어떻겠어요?

태양빛 아래 속해보는 게 어떻겠어요?


눈을 뜨세요

당신은 당신이 살지 못해 낭비된 삶의

불꽃을 볼 수 있어요

지난 시간이 부끄러울지 몰라요

당신은 이제 더는 당신의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가끔 망치를 들어보자. 뿅망치로 몇 번 뿅뿅하면 노래가 흘러 나온다. 이것은 당신에게 좋다. 귀에도 좋으며, 당신이 주인공인 실존활극의 주제가다. 우회로(bypass)를 지름길로 착각하며 비루하게 가지 마라. 주인공은 지름길이 필요없다. 한낮의 대로가 당신이 행진할 장소다. 당신을 주인공으로 다시 찾아줄 망치가 있어 행복한 당신의 모습을 당신은 마음속에 그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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