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10

"고통에 대한 실존상담의 관점"

by 깨닫는마음씨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라틴어로 쓰인 성경구절이다. 고통에 대한 한 관점이기도 하다.


반대로 이러한 문장도 있다.


"모든 정신병은 정당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한다(The foundation of all mental illness is the unwillingness to experience legitimate suffering)."


칼 융의 격언으로 곧잘 인용되곤 하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한번 선택해보자. 고통은 헛된 것인가, 정당한 것인가? 그런데 이 선택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이다.


"나를 파괴하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


실존상담의 한 갈래인 로고테라피의 빅터 프랭클도 자주 인용하던 말이다. 이 말은 마치 고통에 대한 예찬의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존주의자들에게 나오는 이러한 말은 대체 고통이 헛되다는 것인지 정당하다는 것인지를 고민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여하튼 실존주의자들은 선택했다. 인간에게 가해지는 그 어떤 고통도 정당하지 않다. 정당하게 경험해야 할 고통 따위란 없다. 고통, 그것은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여기에서 '부조리(不條理)'라고 하는 유명한 실존주의의 개념이 도출된다. 실존주의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고통'과 같은 말을 하는 이가 바로 정신병이다.


실존주의가 말하는 고통의 가장 비극적인 차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도무지 고.통.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무의미하다. 니체가 생리학을 말하는 이유다. 병에 걸려 고통받던 이가 그 병이 나았을 때 그는 단지 원래의 건강한 상태로 돌아온 것뿐이다. 그 고통이 그에게 더 가져다 준 것이란 없다. 고통 자체가 헛되고, 헛되고, 헛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을 싫어한다. 우리는 다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고통이 정말로 고통스러운 이유는 고통의 무의미성 때문이다. 그 사실이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다.


고통의 무의미성을 회피하려는 이들이 고통을 분류한다. 소위 '정당한 고통'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어, 우리가 고통을 통해 배우고, 발전하며, 진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고통의 가치라고 말한다. 신정론 같은 이야기다.


"저 하늘에 계신 양반 어르신께서 악과 고통을 허용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우리같은 무지렁이들이 그 큰 뜻을 어찌 감히 짐작하겠나. 다만 어르신께서 우리 하인들을 목적에 따라 잘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그것만을 신뢰하는 게지."


노예의 의존근성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고통을 정당화하고, 고통을 통해 더 크고 좋은 목적을 위한 일에 합류하게 된다고 믿으며, 고통의 가치를 찬미하고 전도하기까지 하는 고통예찬자들은 언제나 권위있는 것이 자기를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의존적 성향을 갖고 있다. 노예가 권위에 집착하는 이유다. 노예는 늘 권위의 대상을 만들어내고, 외부에 마땅한 대상이 없다면 자기 자신이 그러한 권위의 주체가 되려 한다. 그럼으로써 그 권위로 설정한 위대한 목적을 통해 고통을 합리화하려고 시도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들은, 고통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더 많은 고통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웅신화의 핵심적 장르공식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에는 목적이 큰 뜻으로 제공하는 무수한 고통들이 산재해있고, 영웅이란 목적에 따라 다가오는 정당한 고통들을 과제처럼 해결해가며 하루하루 목적에 더욱 가까워지는 행보를 보이는 이다. 이러한 신화적 목적론 내지 영적 목적론은 결국 고통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유착관계가 된다. 인간의 성장이란 필수적으로 고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당위적 믿음이 자리잡는다.


그래서, 아우슈비츠의 유태인들은 고통을 통해 성장했나? 가스실 안에서 종교체험을 하고, 깨닫고, 놀라운 영적 능력들을 갖게 되었나?


악질이 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최고는 고통을 예찬하는 것이다. 카뮈가 『페스트』에서, 또 카프카가 『심판』에서 절절하게 묘사해나간 그 핵심은 인간이 받는 고통의 전적인 부조리함이다. 고통을 정당화하려는 이들이 얼마나 유치한 정신상태에 있는지, 또 얼마나 괴물 같은 모습인지를 이들은 자신들의 작품 속에서 여실하게 보여준다. 『심판』의 마지막 구절은 심지어 이러하다.


"진짜 개 같다."


다른 것이 악이 아니라, 고통을 정당화하고 예찬하는 일이 악이다. 고통의 전도사들이 악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 필요한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없으면 없을수록 좋은 것, 가장 없어야 가장 좋은 것, 그것이 고통이며 고통의 전도사들이다. 그러나 악마도 대극의 원리에 따라 온전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진짜 개 같은 소리를 실제로 하는 이들도 있다. 융이 그러했다. 그는 인간에게 악마가 필요하며 악마를 통해 인간은 진정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교회에 가서 신과 동등하게 악마를 신성한 것으로 함께 모셔야 한다고 논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많다. 그 각각의 관점들은 아마도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어떤 접근보다도 탈윤리적인 선불교에서는 선악에 대한 편견없이 이러한 관점을 가진 이를 정말로 존중하는 겸허한 행위로서 몽둥이로 매타작을 한다. 누군가가 "맞는 일은 좋다."라는 말을 진리로 주장했으니, 그 진리를 존중하며 지켜주기 위해 그에게 '맞는 일'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어떤 것이 헷갈릴 때는 인간의 유한성을 명확히 함으로써 인간의 출발점이 대체 어디인지를 보여준 칸트에게로 돌아가면 한결 쉬워진다. 자.기.가. 당.했.을. 때. 싫.은. 것.은. 남.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나 명백하지 않은가? 만약에 누군가가 융의 아이를 죽이고 그 앞에서 "나는 악마다. 위대한 목적에 따라 당신의 아이를 죽였다. 아이를 상실한 이 '정당한 고통'을 회피하지 마라. 이러한 내가 있어야 당신이 온전해진다."라고 말했다면, 융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세상에는 음이 있어야 양이 있고, 작용이 있으니까 반작용이 있고 하는 등의 머릿속의 추상적인 도식으로 사는 이들이, 사람들을 학살하고, 원자폭탄을 터뜨리며, 고통을 예찬한다. 상.상.력.이. 부.재.한. 결.과.다. 망상을 하고 있는 동안 인간은 상상을 하지 못하게 된다. 망상과 상상의 차이는 무엇인가? 망상은 현실을 떠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며, 상상은 현실에 발을 붙이고자 하는 의도를 갖는다. 그래서 상상력은 언제나 인간의 고통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발현된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은 윤리학에 대한 글이 아니라 생리학에 대한 글이다. 도덕적이지 않아서 악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양산하기에 그것은 악한 것이다. 악은 실재한다. 고통예찬자들이 실재하는 악이다. 보들레르는 "악마 최고의 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악마가 없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고통예찬자들은 대개 성장, 발달, 진화, 통합, 합일 등의 키워드들을 통해 밝고 긍정적인 목적으로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선지자인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한다. 그러나 그 실제의 내용은 고통을 경험하며 그 고통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이루자는 것이다. 고통받는 만큼 놀라운 능력이 생긴다는 것이다. 고통이 자기의 힘이라는 것이다. 보통 이런 것을 고행자의 삶이라고 말한다. 붓다가 결코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한 그 삶이다.


온전함은 선과 악이 하나가 된 것인가? 악한 것도 실은 약한 것이었고, 그만큼 실은 선을 갖고 있던, 그래서 결국 선과 악을 다 갖고 있던 그는 이미 온전했던 것인가? 배틀물 장르공식인 "저 녀석도 실은 좋은 녀석이었어."의 이야기다. 판타지소설에서 벗어나 이렇게 이해해보자. 온.전.함.은. 악.이. 없.는. 것.이.다. 틸리히는 아주 섬세하게, 악을 범한 '죄'라고 하는 것을 '소외'라는 이름으로 고쳐 말한다. 악은 온전함에서 소외된 것이다. 즉, 온전함을 잃은 것이 악이지, 악을 잃었기에 그 악의 여리고 고운 참모습을 다시 회복해야 하는 것이 온전함이 아니다. 악의 고백은 "사실은 나도 온전했어."가 아니라 "나는 온전하지 않다."가 되어야 경계가 명확해지고 온전함은 발견될 수 있다. 이것은 루시퍼의 비유다. 루시퍼는 고백하지 못한 이다. 가장 온전함에서 소외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온전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고통의 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눈치챌 수 있다.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 악을 작위적으로 다시 회복하려 할 때 필연적으로 거기에 생겨나는 것이 바로 고통이다. 그러니 고통예찬자들이 "네가 온전해지기 위해서는 너는 정당한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머릿속에서 레고처럼 끼워 맞추어 만들어낸 도식으로는 그것이 진리인 까닭이다.


이전 장에서 말했듯이, 진리의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인간은 의미를 희구했다. 인간은 묻는다.


"대체 이 고통이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


아무 의미가 없다. 당신이 고통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누구도 고통받지 말아야 한다. 고통받는 일을 정당화하는 악질적인 생각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고통이 우리의 성장과, 발전과, 영적 진보에 필수적이라는 사악한 전도를 그만 멈추어야 한다. 고통을 예찬하는 판타지소설은 그만 집필되어야 한다.


자기가 받는 고통이 너무 힘든 이는 그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판타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역으로 판타지를 더 크게 만들어 유지하기 위해 고통을 예찬하는 일은 아무래도 정신이 나간 일이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 '정당한 고통'에 대한 환상이 정신병이다.


실존주의와 불교는 고통에 대해 어떻게 안내하는가? 최대한 멀어지라고 권한다. 고통받지 않고 편안한 삶이 행복한 삶이다. "편안하게 살기 위해 지금은 고통을 감수해야죠!"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목적론의 폐해다. 편안함이 목적이 되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고통을 채택하고 있다면 여기에는 답이 없다. 목적론은 그 목적만이 유일한 정답으로 독재함으로써 다른 답의 가능성을 없앤다. 나아가 그러한 목적은 머릿속의 정답으로만 존재할 뿐 영원히 실현되지 못하는 것이다. 실증적으로, 나중에 편안해지기 위해 지금 고통받아야 한다고 하는 이들은 그 '나중'이 현재가 되었을 때도 거기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이것만 하고 쉬어야지. 이것만 하고 쉴 거야." 임종 때의 병원침상 위에서도 그들은 바쁘다.


고통받지 않는 편안함은 목적이 아니다. 숨쉬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이도 있는가?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지.금. 편.안.한. 이.는. 미.래.에.도. 편.안.하.다. 오늘 핀 벚꽃은 작년에도 피었던 벚꽃이다.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으로 사는 일을 실존주의와 불교는 권장한다. 이 두 관점들의 실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실존상담은 구체적으로 이 고통의 문제를 내담자의 직접적인 현실과 연결짓는다.


누군가가 뜨거움의 고통을 호소한다. 아마도 그가 3세 때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갔을 때 열탕에 몸을 넣었다가 깜짝 놀라 탕 밖으로 튕겨져 나가 바닥을 뒹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웃었기 때문인 것 같다. 여리고 약한 자신을 자상하게 돌봐주기는 커녕,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아버지가 자신을 비웃었다. 그 경험이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마도 내담자 자신이 여러 책들을 보며 이러한 마음을 깊게 공부하던 중 많은 통찰도 해왔기에, 자신이 아버지를 투사할 수 있는 사회적 권위자를 만나 수치스러운 일을 경험한 날이면 특히나 뜨거움의 고통이 찾아오는 것 같다고 그는 보고한다. 실존상담자는 대체로 졸립게 이야기들을 듣다가 내담자에게 묻는다.


"언제 경험하세요?"

"어디서 경험하세요?"

"어떻게 경험하세요?"


이것은 구체적인 현실의 양태를 묻는 질문이다. '누가?'라는 질문에는 '내담자'라는 대답이, '무엇을?'이라는 질문에는 '뜨거움'이라는 대답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다른 구체화의 질문들을 통해 실존상담자는 종국에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함께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담자는 질문들에 대답한다.


"보통 밤 10시쯤에 제 방에서 많이 경험합니다. 방 전체가 한순간 뜨거운 기운으로 덮이는 것처럼 경험해요."


실존상담자는 다시 묻는다.


"보일러는 몇 도로 맞춰 놓으세요?"


"어... 온돌 75도, 온수도 75도인데요."


"뜨겁겠군요."


"아버지께서 사내대장부는 추운 골방에서 골골대며 빈티나게 지내지 말고 가스비 팍팍 쓰라고 하셔서..."


"아버지를 좋아하시는구나. 보일러를 10도 내리면 아버지에게 거절당할 것 같으세요?"


"제가 아버지를 거절하는 것 같은데요."


"세상이 -75도가 되어도 아버지를 좋아하실 거잖아요."


내담자들은 자.신.의. 자.유.를. 되.찾.게. 되.었.을. 때. 눈.물.을. 흘.린.다. 자유란 언제나 사랑할 자유다. 사랑은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이다.


니체는 정말로 심리학의 천재였는데, 그는 사람들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기에 자꾸만 이상한 일들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보일러의 온도가 원인이 되어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성취가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원인과 결과가 혼동될 때 결과가 목적이 되는 목적론이 출현하다. 실제의 원인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보일러의 높은 온도가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내담자는 자신이 열심히 목적하던 것을, 이미 시작부터 얻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더는 목적할 이유가 없어진다.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게 보일러의 온도로부터 그는 자유로워진다. 온도와 아무 상관없이, 그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다. 이미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그 어떤 조건과도 관계없이 사랑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면모를 실감한다. 그는 고통의 노예가 아니다. 그는 사랑의 주인이다.


노예만이 고통받는다. 그럼으로써 고통의 예찬자가 되며, 나아가 고통의 전도사가 된다. 실존상담에 대한 가장 큰 편견 중의 하나는, 실존상담이 고통과 맞서 싸우며, 더 많은 '정당한 고통'을 경험해가는 가운데 스스로를 강하게 단련시키며, 종국에는 무슨 고통이 닥쳐와도 "고통? 드루와, 드루와!"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적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는 환상이다. 이것은 화산에 집을 짓고 사는 이의 태도다. 그의 일과는 매일 화산의 분화구에 가까이 내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뜨거운 열을 더 많이 경험하는 만큼 그는 자신이 종국에는 어떠한 열로도 굴복되지 않을 위대한 강인함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은 '경험중독'이라고 불린다. 역설적으로 '경험중독'은 '경험회피'다. 자기의 실제 현실을 경험하지 않으려고 회피하는 이가 망상 속으로 들어가 가상 현실을 경험하는 일에 중독된다. 실제의 현실은 왜 회피하려 하는가? 그것이 고통스러워서? 아니다. 지루하기 때문이다. 자극이 없어서 심심하기 때문이다. 고통도 쾌락도 똑같은 자극이다. 고통예찬자들은 자극예찬자들이다. 자극에 중독된 이는 외부의 자극이 없으면 스스로 자극을 만들어낸다. 산에 들어가 아무 할 일 없는 이들이 귀신도 보고, 부처도 보고, 돌아가신 인자한 어머니도 보고 하는 이유다. 자극을 위해 다 자기가 만든 것들이다. 그것이 필요하다고 하니 의식이 영사기처럼 투영해준 것뿐이다.


고통예찬자들은 왜 실제의 현실을 지루하다고 느끼는가? 인간이 위대해서다. 그들이 직접 사냥감을 잡아, 살생하고, 손질하고, 음식을 만들며 생존의 벅찬 일거리들을 쉴 틈 없이 해나가지 않아도 되게끔, 인간이 사회와 제도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라고 하는 거대한 존재의 어깨 위에 침대를 올려 놓고 그들은 그 침대에 누워 스스로에게 자극을 제공할 백일몽을 꾼다. 정신병의 종류가 현대에 들어와 많아진 이유는 진단체계가 발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DSM-5(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5th Edition: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5판)가 제약회사들의 이익 확장을 위해 사람들이 더 많은 정신질환자로 진단되게끔 구성되었다는 음모론도 있지만, 그보다는 현대의 문명적 혜택과 정신병의 유관성을 고찰하는 일이 더 유익하다.


프로이트와 융의 시대에도 경제력이 있으면서 카우치에 누워 어젯밤에 무슨 꿈을 꾸었으며, 그 꿈속에서 헤라클레스와 섹스를 하고 땅 속 깊은 동굴로 내려가 용을 퇴치했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을 만큼 팔자가 좋은 이들이 내담자가 되어 심리치료를 발전시켰다. 현대에는 대부분 이렇게 팔자가 좋아진 것이다.


그렇다면 심리상담은 허업(虛業)인가? 문명발전의 그늘이 낳은 잉여의 일인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며 피해가서는 안될 질문이다. 정직하게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심리상담이라고 하는 일이 아예 없어진 세상이 건강한 세상이다. 개인이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의지하여 살아갈 때, 그러한 개인에게는 심리상담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렇게 살아가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자기의 심층적인 무의식을 배워 나가야만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말은, 아무리 그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개인이라 하더라도 무협지를 많이 읽어야 더 좋은 삶을 살게 된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실증적이다. 자기의 삶이 스스로 즐거운 이는 유튜브와 넷플릭스에 빠져 살지 않는다. 오늘도 벚나무들 피어난 초등학교 앞 통학로를 산책하며 그는 행복하다. 오늘 죽어도 좋을 정도로 여한이 없다. 다 이루었다. 매일매일 그는 다 이루어간다.


이러한 이는 왜 고통이 없어 보이는 것일까? 물론 노화에 따른, 또 질병에 따른 생물학적 고통은 그에게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정신적 고통은 없을지 모른다. 경험에 중독되지 않았고, 자극에 중독되지 않았고, 또 이 모든 경험과 자극의 소재가 되는 '관계'에 중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핵심에 접근해 있다. 관계가 고통의 근본적인 이유다.


'실존'의 개념적 반대어가 '관계'라고 이 책에서는 누차 말한다. 우리가 '정당한 고통'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거의 전부 다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감수해야 한다고 믿는 고통이다. 이러한 고통을 경험하지 않으면 정신병이 생긴다고 말하는 융은 결국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면 정신병에 걸린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대의 정신병은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생긴다. 심리상담의 그 무수한 주제들은 다 관계다.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워. 미.치.겠.다.는. 것.이.다. 관계 때문에 실제로 사람이 미친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정말로 실증적이다.


우리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관계를 왜 악착같이 유지하려 할까?


우리는 관.계.가. 자.기.를. 보.장.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오는 자극의 경험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시켜준다고 간주된다. 그러니 집에 혼자 있으면 우리는 마치 자기가 없어질 것처럼 생각한다. 자기를 확인시켜주는 관계의 시선이 없으면 어딘가 우주 저편으로 실종될 것처럼 두려움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자아의 두려움이다. 자아는 이러한 두려움을 가질 만하다. 자.아.는. 관.계.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인가?


우.리.는. 자.아.가. 아.니.라. 실.존.이.다.


실존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는 법은 단순하게 '자아 밖'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실존은 자아 밖을 향하는 운동이다. 즉, 초월의 운동이다. 실존 자체가 초월이다. 밖을 향하는 것은 언제나 더 거대한 것이다. 우리는 실존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자아보다 거대한 것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더. 큰. 것.이. 더. 작.은. 것. 안.에. 갇.혀. 있.을. 때. 고.통.받.는.다.


이것은 고통의 공간학이며, 사실이다. 우리가 더 큰 실존임을 망각하고 더 작은 자아 안에 갇혀 있을 때 우리는 고통받는다. 자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은 관계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관계가 고통이 되는 것이다. 관계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더 작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관계라는 감옥의 구조가 유지되어서다. 감옥 안에 계속 있다보면 사람이 미치는 일은 당연하다. 관계는 정말로 우리를 미치게 만든다. 관계 속에 있으면 점점 더 하찮고 무력한 존재가 되는 것 같은데 그 관계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을 것만 같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양가적인 감정이 분열을 만든다. 고통을 합리화하는 '정당한 고통'이란 말만큼이나, 관계중독을 합리화하는 '정당한 관계'라는 말도 정신병의 징후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해에 따라 니체의 말을 다시 살펴보자.


"나를 파괴하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


관계는 나를 작은 것으로 만들어 파괴하려고 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나를 눕혀 잘라내거나 늘리는 방식으로 나의 온전성을 난도질하려고 한다. 그러나 파괴할 수 없다. 나는 파괴될 수 없다. 고통과 쾌락이라고 하는 관계의 그 어떤 자극도 나의 존재의 면모를 소외시킬 수 없다. 나의 존재는 나를 파괴하려고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으로 드러난다.


니체에게 있어 존재의 본성은 힘의 증진이다. 커다란 존재는 강한 힘으로 그 자신을 활력있게 드러낸다. 이처럼 니체는 관계로 인한 그 어떤 고통도 우리 자신의 존재를 파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던 것이다. 우리는 실존하여 우리 자신을 가두고 있던 자아-관계의 밖으로 뛰쳐 나간다. 더 강하고 더 큰 모습으로 우리 자신의 면모를 다시 알린다. 이것은 우리가 고통을 통해 성장한 것이 아니다. 고통이 결코 작게 만들 수 없었던 우리 자신의 존재의 크기가 언제나 그 이상이라는 것을 존재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니체의 말을 다시 표현해봐도 좋을 것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를 파괴하지 못한 자아는 나라고 하는 존재를 더 크게 드러나게 한다."


이 책은 영성서적이 아니지만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 고통의 이유다. 자아는 자기가 유지되기 위해 관계를 필요로 하며, 관계도 그 구조가 유지되기 위해 자아를 필요로 한다. 자아와 관계가 둘만의 골방에서 하는 이 정신병 같은 애착놀이에 우리가 상관할 그 어떤 의미도 없다.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이것은 단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감옥일 뿐이다. 우리는 나가야 한다. 우리는 밖을 향해야 한다. 고통이 없는 현실로 이동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도 가능하다. 사랑은 자유가 전제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관계할 때와 사랑할 때는 동일한 상대를 향한다 해도 그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


자.아.에.게.는. 관.계.인. 것.이. 실.존.에.게.는. 사.랑.이.다.


사랑은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없애는 것이다. 자아-관계의 감옥에서 벗어날 이 사랑의 힘을 집행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진실로 진실로, 실존이다. 실존주의가 자아의 독재와 관계의 광기로부터 개인의 존재를 자유롭게 해방하고자 한 운동이었다고 할 때, 실존상담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 바로 그 존재의 용사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접근이다.


당.신.만.이. 힘.차.게. 당.신.을. 구.원.할. 수. 있.다.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의 세계에는 그 어떤 용사도 찾아오지 않는다. 무의식의 지혜가 당신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믿는가? 어젯밤 당신이 꾼 꿈속에 당신을 구원해줄 위대한 진리가 담겨 있었다고 믿는가? 혹은 마음의 법칙들을 공부해나가다 보면 그 노력의 성과를 통해 당신이 언젠가는 용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당신이 편안해야 하는 것도 지금 이순간이고, 당신이 용사로 일어서는 것도 지금 이순간이어야만 하리라. 당신은 지금 이순간 존재하기 때문이다.


헛되고, 헛되고, 다 헛되도다. 당신이 고통받는 만큼 그 고통을 알아줄 용사가 강림하리라고 믿는 그 환상은 헛되고, 헛되고, 다 헛되나니.


당신이 아니면 그 누구도 아니며, 지금이 아니면 그 언제도 아니다.


당신이 경험해야 하는 것은 이것 하나다. 당신은 당신의 '정당한 행복'을 감옥 밖에서 경험해야 한다. 무엇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가? 당신은 언제 행복한가? 어디서 행복한가? 어떻게 행복한가?


가자. 밖으로 가자. 당신이 행복한 그 자리로 가자. 지금 바로 가자. 책을 덮고 가자. 가다가 쓰레기통에 넣고 가도 좋다. 알래스카로 간다면 땔감으로 챙겨라. 꽃향기를 따라, 따듯한 봄바람을 따라, 당신만의 시간을 따라, 당신이 그리워 설레는 곳으로 가자. 한시도 지체없이 가자. 가다가 잠깐 밤하늘을 돌아봐도 좋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이 생각날 것이다.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고통없는 곳을 향해 떠나는 당신의 뒷모습이 이토록 알차구나. 열매를 맺었구나. 허(虛)한 자아-관계를 벗어나 이것이 실존(實存)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된 속에서, 당신만이 실한 알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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