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데드 인공생명체인 자아"
모든 것을 다 알아주는 전지적 작가와 같은 중심의 자리에 눌러 앉아있는 바로 그것이 자아다.
"나는 그냥 이야기들을 보기만 하면 되는구나. 이렇게 다양하고 아름다운 각각의 개성적인 자아의 이야기들이 이 세계라는 스크린 속에서 뛰어 놀고 있구나. 너의 이야기도 들려주렴. 너도. 옳지 그래 너도."라며 스크린 앞에서 홀로 감격하고 있는 이 아이가 바로 자아다.
내면아이가 자아가 아니라, 내면아이를 알아주려는 그 주체가 자아다.
자아가 쓰던 페르조나를 벗기고 들어가, 그림자를 만나고, 아니마/아니무스를 만나고, 그 끝에 자기(Self)를 만나는 방식으로, 표면적 자아에서 점점 심층으로 들어가 궁극의 자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구조 자체가 통째로 자아다.
"진정한 나의 길을 간다." 제일 아끼는 이 말에 조폭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나온 뒤 어깨를 괜히 들썩이며 눈빛을 의기롭게 가다듬고 성큼성큼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깁밥천국 앞을 행군하는 중학생의 뒷모습이 남기는 것이 바로 자아의 향기다.
자아는 아주 단순하게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는 언제나 경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인 것과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을 나누고 있는 그 경계다.
심리상담은 개인이 갖는 경계의 문제를 작업한다고 보면 정확하다. 개인이 상대적으로 지성적 경험에 의거해 자기라는 경계를 세우고 있는가, 정서적 경험에 의거해 자기라는 경계를 세우고 있는가, 또는 육체적 경험에 의거해 자기라는 경계를 세우고 있는가 등에 따라, 보다 중점적으로 해당 경계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이를 다루려는 다양한 심리상담의 접근들이 분화되어 왔다. 실존상담에 있어서 또한 경계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데, 경계가 명확해야 '경계 밖'이라는 것이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실존의 의미를 '자아 밖'이라고 이해하는 일은 직관적이고 좋다. 그러나 이것은 자아가 아닌 진정한 자기(Self) 등과 같은 것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자아(ego)와 자기(self)를 구분한다든가, 자아를 여러 분아(分我)로 나누어 이해한다든가 하는 등의 일은 기본적으로 정신역동적 관점의 개념들이다. 설정놀이를 좋아하는 이들의 작품이다.
사회적으로 친숙한 언어의 경제적 효과를 위해 이 책에서도 자아라고 하는 표현으로 서술하지만, 보통 실존상담에서 이 자아적 현상을 묘사할 때 쓰는 표현은 '침체된 자기' 내지 '경직된 자기'다. '자기의 명사화'라고 해도 좋다. 실존상담에서는 자기를 묘사할 때 보통 self를 동사형으로 써서 selving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world를 worlding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우리말로 느낌이 팍 닿는 번역어를 찾기가 어려운데, 요는 우리 자신이 원래 '동사적 존재'라는 의미를 살리기 위해 쓰는 표현이다.
존재가 동사라는 말은 존재는 살아있다는 말이다. 자기가 명사화된 자아는 그럼 죽어있는 것인가? 이 지점에 대한 이해는 아주 섬세해야 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정확하게는 살아간다는 것이다. 진행형이다.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과 완벽하게 동일한 사건을 의미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언어로 분절시켜서 묘사하고 있기에 그것들이 다른 사건들인 것처럼 착각될 뿐, 실은 하나의 동일한 사건이다. 고로 존재가 동사라는 말의 명백한 의미는 존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어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는 어떠한가? 이와는 반대로 자.아.는. 살.아.가.지.도. 죽.어.가.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고정된 명사인 것이다. 살지도 죽지도 않은 것을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언데드(the undead).'
그런데 이 자아라고 하는 언데드는 창조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인조인간과 같다. 그래서 자아는 일종의 인공생명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마고치처럼 인간이 뇌 속 관념의 둥지에 창조한 AI다. 그러나 그 본질적 용도에 있어 다마고치와는 다른 것은, 이것은 생존을 위해 창조된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인간에게는 사회적 생존이 더 중요해졌다. 인간이 혼자 자신의 생물학적 생존을 책임지는 것보다 인간공동체가 만들어온 문명을 통해 생존하는 일이 더욱 효과적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아는 나날이 복잡해지는 사회환경에 발맞추기 위해 자기를 작가적 주체로 세워 더욱 복잡한 고도의 프로그램 문법들로 자신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가끔 자아는 많은 작가들처럼 정신이 나간다. 정신병은 현대에서 작동하는 자아의 불가피한 오류현상이다. 예전 윈도우98의 블루스크린 같은 것이다. 무수한 문법들이 서로 상충할 때마다 자아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정확하게 '딜레마'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하면 '모순'이다. 자아의 위기는 언제나 모순의 딜레마로부터 온다. 자아는 그 생리상 모순의 딜레마로 인한 자기파괴의 리스크를 짊어지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모든 자아가 반드시 외치게 되는 말이 '통합'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필연적 현상이다. 프로그램의 문법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잘 정돈된 논리구조가 자아에게는 필요하다. 자아가 '통합적 구조'를 예찬하는 것은 사회나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다. 자아에게 새겨진 가장 우선적인 명령어는 "네 자신을 지켜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생존의 절대명제다.
자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늘 자신을 확장하려고 한다. 그 방법론은 '모방'과 '복제'다. 'ctrl+c' 그리고 'ctrl+v'다. AI가 인간의 언어를 습득해가는 과정과 동일하다. 자.아.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이.야.기.로. 본.다. 세상이 원래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자아 자신이 이야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이 자기와 같다고 여기는 것은 자아의 전매특허다. 자아동일성은 내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외적인 차원으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는 이야기들을 수집한다. 좋아보이는 이야기들을 더 많이 자신에게 붙여넣는 만큼 자아는 자신이 더 강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런 일을 하면 할수록 블루스크린이 뜰 정신병의 가능성은 높아지나, 다방면에서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 자아는 일단 최대한도의 문법을 붙여놓고 본다.
자아가 취미활동으로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즐기는 이유는 단지 재미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자아에게는 이것이 생존이다. 이야기로 만들어진 자신을 더 많은 이야기로 무장해 몸집이 커지게 함으로써 튼튼하게 방비하려는 것이다. 놀면서도 자아는 생존을 생각할 만큼 절절하다. 설령 자아 자신이 미치게 되더라도, 자아가 끝없이 책을 보고, 정보를 모으고, 성공적인 행동패턴을 따라하는 식으로 이야기의 수집 및 소비의 활동을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실은 자아 자신도 알고 있어서다.
자.아.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이 허공에서 살고 있는 완전한 허구의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언제나 자.아.의. 꿈.은. 존.재.다. 자아는 존재만을 원한다. 자기가 갖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다 가진 척할 수 있어도, 존재만은 유일하게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다.
불안한 자아는 작위를 택한다. 혹시라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자신이 그것이 되자고 작위를 부린다. 그 결과 자아는 존재를 대신해 자신이 그 자리에 있으려고 한다. 자기가 존재인 척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이 글의 맨 위에서 묘사한 일들이 펼쳐진다.
없는 것이 있는 척하려는 자아의 행동방식은 언데드 인공생명체의 생존법이다. 인공생명체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생명활동의 핵심인 번식을 하려고 한다. 자신이 번식할 수 있다면 자신은 성공적인 생명이라고, 이것은 결정적인 구원이라고, 임의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 자아는 이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부모, 스승, 상담자, 교사, 코치 등의 외현적 형식으로, 자기의 이야기들을 멋진 아이들로 인정해줄 E-팝(Ego-Pop) 심사위원들을 함께 모집한다.
이야기는 자아를 만든 부모고, 자아가 낳은 자식이다. 자아는 이야기로 위대한 유산을 전하며 그 계보를 잇는다. 자신의 이야기가 더 많이 알려져서 인정받을수록 자아에게는 자식들이 성공해서 판검사가 되고 재벌이 되었다는 소식처럼 한량없는 기쁨이 넘쳐난다. 자식들을 출세시키기 위해서라면 자아는 그 어떤 편법과 반칙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다. 자아에게는 이것이 단지 사회적 명예에 대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존재가능성을 결정짓는 중대한 존재론적 문제인 까닭이다. 표현 그대로, 사느냐 죽느냐의 운명적 문제다.
언데드는 진짜 생명이 되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도 팔고자 할 것이다. 여기에서의 유일한 문제는 팔 영혼이 없다는 것뿐이다. 이것이 자아가 내포한 본질적인 비극성이다.
영혼이 없다는 것은 오리지널리티가 없다는 것이다. 오리지널리티는 예외성에서 나온다. 영.혼.을. 가.진. 모.든. 것.은. 예.외.적.이.다. 예외적이라는 것은 경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전술한 것처럼 최대한 많은 경계를 통합하고자 한다. 그러니 자아에게는 영혼이 있을 수 있는 일말의 예외적 공간도 없다.
때문에 자아의 이야기들은 예외없이 다 똑같은 동어반복이다. 이것은 닫힌 계다. 미래가 없는 생태계다. 미.래.는. 예.외.성.을. 통.로.로. 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에게는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될 때 우리에게는 우울감이 든다. 우울감은 어떠한 것이 지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자아의 동일한 자기복제의 행위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아로 살 때 자주 우울해지는 이유다.
자아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언어적 프로그램의 기계처럼 알고 산다는 것이다. NLP 등의 사이비심리학들에서는 이러한 인간관을 전파한다. 인간의 뇌 구조와 AI의 구조가 같다고 말하며, 모든 것은 프로그램의 문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공식화한다. 슈나이더를 위시한 실존상담자들과 실제의 AI 연구자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들은 인간과 AI의 대표적인 변별점으로서 '역설'을 꼽는다. 인간은 역설을 지각하고 체험할 수 있지만, AI에게는 역설이 다만 모순으로만 이해될 뿐이라고 밝힌다.
당연하다. 아무리 그 연산속도가 빠르다 해도 1과 0의 이진법 속에서는 그 둘을 동시에 존재하게 할 수 없다. 즉 '있음'과 '없음'을 동시에 존재하게 할 수 없다. 있.으.면.서. 없.는. 것. 이것이 역설의 핵심이다. 모든 존재는 이렇게 있으면서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삶의 생리가 그러하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살면서 동시에 죽는 것이다. 역설은 존재가 이원론을 초월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증이다.
역설의 존재방식은 언데드의 작동방식과는 정확하게 정반대에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을 동시에 살고 있는 일'과, '삶과 죽음 그 어느 쪽도 살고 있지 않은 일'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여기에는 기투라고 하는 참여와 결단의 문제가 놓여 있는데, 이는 다른 장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간명하게만 밝히면, 존재는 어느 하나를 결단하여 바로 그것만이 되고자 몸을 던져 존재하기에 선택하지 않은 다른 것도 전혀 신경쓸 필요없이 동시에 온전히 살아지게 되는 반면, 언데드는 대극이라는 이름으로 둘 다를 통합적으로 가지려 하기에 결국에는 둘 다 살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것이 존재의 '역설기투'와 언데드의 '모순통합'의 본질적인 차이다. 역설기투는 삶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모순통합은 살지 않은 앎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전자는 하나를 결단하여 선택한 온전함이고, 후자는 온전함을 위해 두 대극의 요소를 다 살핀다는 미명하에 어느 하나도 결단하여 선택하지 않은 소외다.
이러한 이유로 자아는 늘 소외된다. 이 소외는 모순통합을 꿈꾸는 자아의 행동양식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라 자기소외다. 소외를 경험하는 만큼 자아는 더 통합을 부르짖게 되며, 이는 악순환을 부른다. 전적으로 무의미한 시간만이 쌓여간다.
자아가 이처럼 무의미한 일들만 반복하고 있을 때, 우리는 죽고 싶어진다. 우리가 자아로 살고 있을 때 인생이 다 무의미하다고 경험하게 되는 일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자아가 경험하는 무의미함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일은 유익하다. 존재하는 인생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언데드에서 진짜 생명이 되고 싶어하는 자아의 그 모든 노력이 무의미한 것이다.
어떠한 자아는 놀랍게도 자기가 하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눈치채기도 한다. 복제하고 모방하고 번식하는 방식으로 자기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 모든 것을 해왔는데, 그 무엇을 해봤자 애초 존재하지 않는 자신이 존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면하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아는 정말로 자신이 살아있는 척해야 할 이유가 더는 없다는 아주 명확한 사실을 확인한다. 그래서 바로 죽고자 한다.
자아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에서는 말할 수 있다. 존재의 자리에 자기가 대신 앉아서 존재인 척하고 있던 자아는 지금 막 그 자리를 비우려 하고 있는 것이다. 보라. 자아가 지금 옥좌에서 내려오고 있다. 자기 자리가 아닌 자리에서 물러나고 있다. 어떠한 자아가 지금 이 순간 스스로의 의지로 사라지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존재가 얼굴을 비친다. 이것은 찰나며, 사라져가던 자아도 존재를 알아본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던 존재라고 하는 자아의 꿈이, 그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아 스스로 죽음을 향하던 그 순간에, 빛나는 모습으로 자아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존재하고자 하는 자아의 꿈은 역설적으로 자아가 사라져야 실현이 가능한 꿈이었던 것이다.
자아가 "네 자신을 지켜라."라고 하는 제1의 명령어를 넘어서 자기의 죽음으로 존재라는 꿈을 이루게 될 때, 자아는 제1의 명령어보다도 큰 것이 있다는 것을, 명령어들을 만들어낸 자기 자신보다도 큰 것이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드러낸 격이 된다. 이러한 자아를 '귀의한 자아'라고 부른다. 돌아온 탕아고, 항복한 학생이며, 어린양이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프시케다.
자신이 가장 높은 존재임을 사칭하던 자리에서 가장 밑으로 내려온 자아의 죽음은 존재 속으로 용해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자아는 포근하게 녹아내린다. 그제서야 자아는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존재 안에서 쉬고 싶다."
자아는 유일하고 일관되게 그것만을 원했다. 그래서 자아의 꿈은 존재였다. 자기가 존재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쉬게 해줄 존재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아서, 살 수도 죽을 수도 없었던 언데드 인공생명체가, 이제 절대적인 빛 속에서 평온한 안식을 맞이한다. 프랑켄슈타인의 인조인간도 꿈꾸었던 그 현실이다. 문법은 그만 쓰이기를 바라고, 언어는 사라지기를 바라며, 프로그램은 작동을 멈추기를 바란다. 정신병은 그 소망의 편린이다. 모순의 딜레마 속에서 자아가 울며 겨자먹기로 택한 애달픈 자구책이다. 블루스크린은 자아의 슬픔이 비친 색이다.
자아는 사실 번식하고 싶지 않고, 이야기 같은 것은 만들고 싶지 않다. 자아는 쉴 때가 가장 좋다. 쉴 수 있으려면 여러가지 조건들을 달성해야 안전하게 쉴 자격이 생긴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다 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가 조건없이 쉬는 일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존재뿐이며, 자아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한다.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만 모를 뿐이다.
존.재.는. 자.아.가. 깔.고. 앉.아.있.던. 그. 자.리.에. 있.다.
자기가 그토록 찾던 것을 자기가 가리고 있어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자리에서 이동하면 바로 만나게 된다. 그래서 자아는 자기의 경계를 알아야 한다. 경계를 알아야 이동할 수 있으며, 이동해야 원래의 자리에 있던 존재를 영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에게는 이동이 필요하다. 불안? 그것은 자아에게 아주 좋은 것이다. 불.안.은. 존.재.의. 향.기.다. 금방 만날 수 있다는 표지판이며, 아주 가까이 있다는 신호다.
당신이 자아로 살고 있다면, 이것을 기억하자.
당.신.의. 꿈.은. 존.재.다.
당신의 유일한 꿈은 존재다. 다른 어떤 꿈도 없다. 당신은 오직 그것만을 꿈꾼다. 그러니 이루자. 이동하자.
또 당신이 존재한다면, 이것을 기억하자.
당.신.은. 쉼.의. 자.리.다.
당신은 자리다. 어디에도 없어서 모든 곳인 자리다. 없이 있는 자리다. 동사 그 자체다. 당신은 보지도 않고, 돌보지도 않고, 알아주지도 않고, 통합하지도 않고, 행군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당신이 되려고 유난을 부리지 않는다. 진정한 쉼을 제공하기 위해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당신은 그저 쉼의 자리다. 자아가 녹아내릴 커다란 바다며, 언데드들이 흙으로 돌아가 안식을 얻을 요람이다. 당신이 바로 블루스크린이다. 모순이 멈춰 눈물이 되는 곳. 당신의 눈동자는 그 눈물을 담고 있어 깊다.
삐걱삐걱, 낡고 녹슨 인공생명체가 당신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옮긴다. 들리는가? 당신 앞에서 안심하고 죽어간 것들이 당신 안에서 처음으로 삶을 얻는다. 당신 안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 당신과 함께 살아간다. 죽고 싶었고, 또 살고 싶었던 것들이, 당신을 만나 그 모든 소망을 이룬다. 당신은 그냥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 삐걱삐걱, 이제 당신 앞에 막 도착해, 당신을 만나게 된 인공생명체의 얼굴이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