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트레이닝: 쉼"
실존상담이 결국 실존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그 감각으로 생활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정말로 감각의 문제다. 지식으로 개념을 이해해서 그것을 삶에 알고리즘처럼 적용해야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러한 모방과 학습의 기제로 사는 일은 사실 너무나 어려운 길이다. 인간이 로보트처럼 사는 일은 정말로 어렵다. 그러나 반면 감각만 살아나면 실존상담보다 쉬운 것이 없다.
감각을 잡아보기 위한 실천적 트레이닝들을 마련하는 일은 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트레이닝을 기계적으로 실천한다고 "와! 내가 우리집 짜파게티 요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유튜브를 보며, 알려주는 레시피에 따라 요리를 만들고, 드립커피 내리는 법을 배우고, 수제맥주를 제작해본다고, 우리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반찬가게에서 구매한 밀키트를 조리해놓고 자신이 마스터쉐프인 줄 알고, 남이 로스팅한 원두에 물만 부은 뒤 자신이 커피장인인 줄 알며, 누가 요약 및 정리해놓은 개념들을 짜깁어 자신이 어떤 학문분야의 전문가인 줄 아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 아주 훌륭한 실존트레이닝이다. 깜냥이 안되어도 자기를 어떤 전문가로 믿는 일이 허용되는 것은 소꿉놀이를 하는 영유아들에게일 뿐이다. 자신이 영유아라서 그런다면, 우쭈쭈, 잘 놀렴, 꼰대가 잘못했네.
정확하게 실.존.트.레.이.닝.은. 우.리.의. 정.직.성.을. 일.깨.우.는. 활.동.이다. 우리가 생활 전반에 깨워야 할 감각이란 정직성에 다름아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우리가 보기 싫은 어떤 기억이나 상황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약한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정직성은 언제나 그런 척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강.하.고. 멋.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방향성을 갖는다.
자기고문에 익숙한 이들이 실존상담을 일종의 강도높은 직면놀이인 것처럼 날조해낸다. 실존상담에 대한 가짜뉴스를 만들어낸다. 이들은 그저 고문받고 싶어하는 자기들의 희망사항을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들은 왜 이러한 소망을 갖게 되었는가? 삶이 지루하다고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극을 끝없이 만들어야 한다. 자극은 고통과 쾌락의 연합이다. 고통이 있는 곳에 반드시 쾌락이 함께 있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쉬.지. 못.하.는. 이.들.이. 끝.없.이. 자.극.을. 소.비.한.다.
우리 대부분은 쉬지 못한다. 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어? 나는 날백수라서 충분히 쉬고 있는데."라고 하는 이들도 사실 쉼에 대해 알지 못한다. 실증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쉬지 못하고 있을 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잠에 들어서도 계속 꿈꾸는 일을 하고, 깨어나 활동할 때에도 꿈꾸듯이 그 의식이 멍하다. 꿈속에서 맨날 용이나 때려잡고 있으며, 눈떠서는 마법에 걸린듯이 멍하니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경계가 무너져있을 때 우리는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아무 재미도 없는데 계속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고 있다. 남들에게는 재미있게 사는 척하며 채널을 추천한다. 이 또한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살 때 자리잡는 행동양식은 바로 비난이다. 비난을 세련되게 하는 방식은 시비털기다. 자신은 마치 옳고 그름을 가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냥 비난하고 싶은 것뿐이다. 왜 비난하는가? 싸우고 싶어서다. 상대가 자기를 건드려주기를 원해서다. 그러면 자극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고통과 쾌락이 함께 찾아와, 깨어서도 꿈꾸듯 멍한 상태로부터 자기를 구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국 자기가 정신차릴 수 있도록 자기를 혼내줄 대상을 찾아 구걸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다양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 관계의 수만큼 자신이 비난받을 수를 확보한다. 하루라도 비난받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이러할 때 우리를 비난하는 상대는 대개 이렇게 말한다.
"제발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 나도 이런 말 하는 거 정말 싫고 피곤하다니까. 왜 자꾸 나를 괴롭히니."
실제로 우리는 상대를 착취하며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상대에게 악역을 억지로 떠맡겨 우리를 비난해달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신의 SM취향을 억지로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과도 같다. 상대는 때리기 싫어하는데 그의 손에 억지로 채찍과 양초를 쥐어주며 우리는 미소짓는다. 조금 있으면 다가올 짜릿한 쾌락과 고통의 자극이 설레서다. 상대가 한사코 이 일을 거부하면 우리는 이렇게 경험한다. "인생 참 외롭고 허무하다."
그러나 우리는 외로움 또한 무엇인지 모른다. 지루하다는 말을 외롭다는 말로 바꾸어 말한다. 자극이 없으면 우리는 지루하고, 그 상태를 외롭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루할 때, 우리가 결국에는 하게 되는 그 일은 바로 '자기비난'이다.
자.기.비.난.은. 자.존.감.이. 낮.아.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지루해서 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비난은 자기가 자기에게 제공할 수 있는 '셀프자극'이다. 자위의 일종이다. 그래서 자기비난이라는 이름의 셀프자극은 반드시 '셀프용서'와 연결된다. 자기를 막 비난하며 놀다가 "이런 나도 괜찮았던 거야. 온전했던 거야. 약해서 그랬던 거야. ㅠㅠ"라며 셀프용서를 이룬다. 이런 이를 옆에서 보고 있으면 대단히 웃긴다. 마치 고양이가 자기 꼬리를 쫓으며 물어뜯으려고 하다가, 잠시 후에는 할짝할짝 자기 꼬리를 핥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꼬리쫓기와 꼬리핥기의 과정을 아무리 반복한다고 고양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인 우리는 이러한 자.기.비.난.과. 자.기.용.서.를. 반.복.할.수.록. 자.신.이. 성.장.한.다.고. 착.각.한.다. 이제는 자신이 마음을 너그럽게 품을 수 있는 더 커다란 존재가 되었다며 판타지소설을 쓴다. 중학생들이 자위를 많이 할수록 자기는 무식한 중세국가에 민주주의를 실현할 이세계의 대현자가 된다고 말하는 일이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대단히 웃긴다.
이제 우리는 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감각을 잡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쉼'은 '웃음'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분명히 웃음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실.은. 누.구.에.게.도. 치.유.가. 필.요.치. 않.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웃음일 뿐이다. 혹여 상처가 있었다 할지라도, 웃음 속에서 상처는 녹아내린다. 웃지 못하기에 상처가 계속 아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왜인가? 우리가 웃지 못할 때 거기에는 반드시 꽁꽁 은폐된 것이 있다. 상처를 은폐하면 상처가 낫지 못한다. 그러니 이것은 악순환이 된다. 셀프자극을 통해 상처를 만들고 셀프용서를 통해 치유된 척하지만, 이렇게 긴장과 이완의 마찰운동을 반복하는 동안 실제로 우리의 몸은 닳는다. 정신적으로 치유된 척해도, 실은 몸은 계속 갈려간다. SM놀이 속에서 주인님에게 혼나다가 주인님이 따듯하게 안아주는 그 과정을 통해 정신은 개운해진 것 같아도, 몸은 멍투성이다. 예전의 멍이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멍이 얹어간다.
우리가 가장 빨리 멈추어야 하는 것은 자기비난이다. 자기비난을 멈추는 방법은 이 셀프자극의 결과로서 두근두근 기대되는 셀프용서를 정말로 웃긴 일로서 바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다락방에서 거울을 보며 자기를 사정없이 비난하다가 지쳐 나가 떨어진 뒤, 조금 후에 다시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괜찮다고 자기를 토토로처럼 토닥토닥해주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봐주는 정직한 친구가 있다면 도움이 된다.
"병신아 지금 뭐해?"
그런데 보통 셀프용서에 맛들린 이들은 자기 주변에 정직한 친구를 절대로 두려 하지 않기에 아마도 친구의 도움을 받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자.발.성.을. 확.인.해.야. 한.다.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비난과 용서의 과정이 전부 다 셀프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즉, 전부 자신이 만들어낸 자극이다. 이 이해는 엄청나게 중요하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이. 자.극.에. 끌.려.다.니.는. 수.동.적. 존.재.라.고. 착.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당신이 자극의 주인이다. 당신이 자극의 주인으로서 쾌락과 고통의 위에 서야 한다.
이것은 자극과 싸우라는 말이 아니다. 모든 중독자는 자극과 싸운다. 싸워 이김으로써 주인이 되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이 주인임을 망각하고 똑같은 노예들의 싸움판에 함께 엉키는 것이다. 이겨봤자 대장노예가 될 뿐 주인은 요원하다. 노예들이 싸울 때 주인은 무엇을 하는가? 생각해보라. 노예들이 싸우고 있어 집안이 개판이다. 밥도 안차려져 있고, 빨래도 안되어있고, 쓰레기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남의 집 일인가? 이.것.은. 주.인.의. 집.이.다. 주인은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쓰레기를 치워라. 아무 생각없이 그 일을 해라. 자신이 있는 이 공간에서, 공간을 지키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그 일을 해라. 눈앞의 현실을 위한 일을 해라. 이것이 주인됨이다. 누가 이 공간의 주인인지를 당신은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 어떤 자극도 요청하지 않고 자극 위에서 당신은 자신이 자극의 주인임을 알린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자연스레 '쉼의 주인'이 된다. 자극에 수동적으로 치인 끝에 맞이하게 되는 자극의 여백이 아니다. 주인의 일이 끝나 주인의 쉼을 당신이 누리는 것이다. 쉼은 자극과 자극 사이의 휴지기가 아니다. 퀭한 눈으로 새로운 자극이 언제 찾아올까 마약중독자처럼 두리번거리고 있는 아편굴에서의 일이 아니다. 당신은 자발적으로 쉼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온전한 것으로 쉼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쉼은 창조의 근원이 된다.
당신이 한 번이라도 쉼의 주인이 된다면 흥미로운 일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당신이 일을 하고 있을 때나, 운동을 하고 있을 때나, 대화를 하고 있을 때나, 그 언제라도 이 쉼이라는 것이 늘 당신의 감각 속에 위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하면서도 쉬는 감각이고, 운동을 하면서도 쉬는 감각이고, 대화를 하면서도 쉬는 감각이다. 생활의 전반에서 주인됨의 향기가 당신에게 흘러나온다. 이처럼 '쉼의 주인'은 곧 당신을 '삶의 주인'으로까지 안내한다.
그러면 당신은 살게 된다. 정.말.로. 살.게. 된.다.
당신이 쉼의 주인으로 온전하게 쉼을 가지듯이, 당신은 삶의 주인으로 온전하게 삶을 갖게 된다.
꿈꾸듯 몽롱한 상태로, 하이데거는 이것을 '비본래적인 삶'이라고 한다, 그저 하루를 연명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당신의 한 호흡 한 호흡이 선명해진다. 색이 짙어진다. 의식도 명료하다. 일도 집중이 잘된다.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중심이 있는 사람처럼 남들에게도 보인다. 당신이 지루할 수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마법처럼 느껴진다. 당신은 지금 세계를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일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당신은 분명 '세계의 주인'이다.
당신에게 아주 거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커다란 일이 아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눈앞의 아주 작은 일을 그 눈앞의 공간의 주인으로서 하게 될 때, 그 일이 당신을 세계의 주인이 되게끔 만든다. 그러면 세계는 당신에게 쉴 만한 곳이 된다. 모든 곳이 당신의 일터며, 동시에 모든 곳이 당신의 쉼터다.
이러한 당신은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아주 작은 일을 그저 자발적으로 하는 것만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아주 작은 공간의 주인이 되는 것만으로, 당신 눈앞의 현실에 당신이 주인됨의 책임을 다하는 것만으로, 이 모든 역사가 새롭게 쓰인다. 사는 일이 이렇게 좋다. 왜 사냐건 당신은 그냥 웃을 것이다.
참, 이것은 트레이닝을 위한 실천론이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실천적 활동을 순서도로 만들어보자
1) 100L 종량제봉투를 구매한다.
2) 책상서랍과, 옷장과, 침대 밑과, 비밀상자 안에 있는 것들을 봉투 안에 가득 채워넣는다.
3) 통째로 버린다.
4) 당신이 직접 만든 공간을 보라.
5) 쉰다. 간헐적으로 웃는다.
누울 자리가 있어야 발을 뻗는다. 쉼.은.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공간을 만든 이가 그 공간의 주인이다.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당신이 만든 공간이다. 보기 싫은 것을 억지로 직면하여 꺼내 보는 일이 아니다. 꼴보기 싫은 것을 들출 필요없이 통째로 쓰레기봉투에 넣고 버려라. 진담으로 말하건대, 100L 봉투를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당신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힘찬지를 당신은 느낄 수 있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당차고 멋지게 느껴질지는 당신의 감각이 이미 알려준다.
당신은 잘라 끊을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실존주의에서는 '결단'이라고 부른다. 공.간.은. 결.단.을. 통.해. 생.겨.난.다. 결단하는 이가 주인이다. 그리고 언.제.나. 주.인.만.이. 쉴.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당신이 지금껏 쉬지 못했던 이유를 알겠는가? 당신이 결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정직하기만 하면 당신은 늘 주인이 된다.
"어, 이거 필요없는데? 이 상처 이제 필요없는데? 이 SM도구 이제 필요없는데? 자기비난도 이제 필요없는데? 그러니 셀프용서도 필요없는데? 오! 다 필요없구나!"
버려라. 비난과 용서를 동시에 버려라. 상처와 치유를 같이 다 버려라. 소꿉놀이 도구를 '통째로 버려라.' 이것은 게슈탈트 심리학의 창시자이자 말년에 선사(禪師)가 된 프릿츠 펄스의 자서전 제목이다. 아무 쓸모가 없는데, 즉 아무 의미가 없는데 당신이 신주단지로 모시던 것들을 버려야 당신을 위한 당신의 공간이 생겨난다. 그래야 쉼도 당신을 위한 당신의 쉼이 된다.
진심으로 기억하자. 우리가 쉬지 못하던 것은 우리가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다. 결단할 수 있는 주인이다. 통째로 버릴 수 있는 주인이다. 통째로 버린 만큼 세계를 통째로 가질 수 있는 당신이다. 웃음은 당신이 웃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가 웃음으로 당신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감각이 쉰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