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13

"인생에 공략집이 없어 미안합니다"

by 깨닫는마음씨




사과하는 이유는 실존상담이 대표적으로 인생에 공략집이 없음을 알리는 접근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게임처럼 공략집이 있다고 믿는 환상을 해체하는 접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인생이 게임이라면 게임은 공략집 없이 할 때가 제일 재미있다. 영원히 추억에 남는다. 공략집을 보며 게임하는 일이 습관이 되면 머지않아 게임불감증이 된다. 조금 즐기다가 매번 새로운 게임만을 찾아다니게 된다. 이것은 게임 유저가 아니다. 컬렉터다. 그 게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지식컬렉터이며, 자신도 그 게임을 즐겨봤다는 경험컬렉터이다. 에리히 프롬은 이러한 것을 '소유양식'이라고 부른다. 소유는 나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지루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인생이 지루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지식과 경험을 가득 소유한 채, 자신이 소유한 것들로 자신의 공간을 가득 채워 결국 스스로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줄이고 있는 것이다. 답답한데 그 답답함 속에 눌러앉아 있을 때 우리는 지루하다. 한국에 한창 비디오게임이 보급되어 게이머들이 늘어날 당시, 하이텔, 나우누리 등의 통신동호회뿐만 아니라 다양한 게임잡지들에서 폭발적으로 쏟아져내던 게임에 대한 정보들을 소비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 게임을 해본 것처럼 학교에서 가서 자랑하던 기억들은 초창기의 한국게이머들에게는 익숙하다. 파이널판타지5에서 최강의 검은 사실 브레이브블레이드가 아니라 치킨나이프라고 말하며, 도망을 다니다보니 브레이브블레이드를 공격력이 감소한 채로 얻은 친구를 놀리던 이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에게 놀림받던 친구는 말한다.


"그래서 넌 슈퍼패미콤이나 있냐? 파이널판타지5 실제로 해보기나 했냐?"


수치심을 느끼며 얼굴이 빨개지던 이 기억을 자신이 조롱받았던 트라우마로 인식하면서, 자신이 돈이 없어 이러한 수모를 당했다며 나중에 갑부가 되어 이 모욕감을 되돌려주겠다고 열심히 노력의 불길을 지핀 이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심은 그에게는 분명 좋은 것이었다. 그 친구는 사실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그렇게 살지도 않으면서 왜 삶에 대해 아는 척해?"


이 말에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까지는 정직하다는 증거다.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공략집이 우리를 게임전문가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이 여기에서는 알려진다.


하물며 인생은 게임이 아니다. 공략집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다. 마음의 원리, 심리학의 비밀, 인생의 법칙 등과 같은 것을 마치 게임의 알고리즘처럼 말하며 또 그것을 익히고 따라하는 일은 나름 인생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렇게 즐긴다고 인생이 정말로 게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이렇게 살다가는 뒤통수를 맞는다. 우리가 놀리던 이에게 역으로 더 크게 무안을 당하는 일과 같다. 인생을 게임 취급하며 자기가 조작할 수 있는 노리개처럼 취급하는데, 인생이 폭발적인 역습을 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인생이 고전문학 같은 상위문화의 진중하게 폼잡는 소재라는 것도 아니다. 인생은 상위와 하위의 문제가 아니다. 인.생.은. 그.냥. 거.울.이.다. 인생을 갖고 놀면 자기가 갖고 놀려지게 되고, 인생을 바보취급하면 자기가 바보취급당하며, 인생을 폭력적으로 대하면 자기가 그 폭력을 받게 된다.


인생은 권선징악인가?


당연하다. 왜 수많은 종교의 창시자들이, 살인하지 말고, 사기치지 말고, 이웃의 것을 갈취하지 말라고 말하겠는가?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정의감이 넘치는 형이상학적 판사 같은 것이 있어서 우리에게 선고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가한 것이 거울에 반사되어 그대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이러한 말이 불편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 무슨 말을 한다고 또는 하지 않는다고 삶이 그 말대로 조작되지는 않는다. 인생은 원래 그러한 본래의 성질로 우리에게 드러날 뿐이다.


당신이 영적으로 이제 다른 차원에 서게 된 것처럼 행위해도, 삶은 차원을 넘어 당신을 따라온다. 당신이 어떤 차원과 수준이 되든 간에, 당신이 살아있는 한 삶은 어디 가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인.간.과. 분.리.될. 수.가. 없.다. 그래서 인생(人生)이다.


이것은 당신이 게임 속에서 하듯 다른 플레이어들을 배신하고, 괴롭히고, 학살한 뒤 로그아웃을 한다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당신의 웃는 얼굴만이 모니터에 남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승리감을 느끼며 뿌듯하게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 일어나 창문 밖을 봐보라. 당신과 현피를 뜨려고 전기톱과 광선검과 빠루를 들고 당신의 집앞에서 우글우글 저그처럼 기다리고 있는 가죽자켓의 형님들이 안보이는가?


권선징악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유치한 교훈적 소재가 아니라, 삶의 물리법칙이다.


보통 자기 엄마의 치마폭에 싸여 있을 때 권선징악은 무시되는 것처럼 경험된다. 많은 경우 엄마들이 자기 자식을 위해서라면 억지로 현상을 비틀어 자식이 징악되지 않게끔 만들고자 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식 대신에 자신들이 징악되는 것뿐이다.


엄마가 욕을 먹는 동안 당신은 다시 순진무구한 얼굴로 게임을 시동한다. 로딩화면을 바라보며 오늘은 누구를 배신하고 착취할까, 어떻게 나의 전능감을 증진해볼까, 아이처럼 순수하게 궁리하는 당신의 얼굴이 해맑고 곱다.


인생에 공략집이 없어서, 당신의 엄마에게 정말로 미안하다.


공략집이 있었다면 당신의 엄마가 당신을 이렇게 되지 않고 다르게 되도록 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엄마도 리셋버튼이 있었다면 얼마나 많이 누르고 싶었을까.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기며 엄마는 오늘도 당신 대신에 징악된다. 당신이 선량하게 웃고 있는 동안 엄마의 전과기록은 하나 더 그 이마에 깊은 줄로 새겨진다.


그래도 공략집이 없어서 다행인 것은 이 거울작용 말고는 아직 당신의 인생에는 아무 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의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 당신은 돌이킬 수 있다. 어떻게 돌이킬 수 있는가? 당신이 정말로 돌이키고 싶다는 전제하에 이 글을 쓴다.


이것을 당신의 생각처럼 게임이라고 해보자. 당신은 게임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게임은 심심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게.임.은. 함.께. 웃.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이길 때는 혼자 웃다가, 당신이 지게 되면 독립투사 같은 비장한 얼굴로, 불쌍한 아이 같은 표정으로, 마치 교훈을 배워간다는 식의 진중한 눈빛으로 다른 이들의 웃음은 봉쇄한다. 당신은 절대로 다른 이들의 놀림거리는 되지 않으려 한다. 자기는 다른 이들을 갖고 놀면서 자기만은 놀려지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게임이 아니다. 사기노름판이다. 사기노름판은 정신병이 싹트는 곳이다. 정.신.병.은. 자.기.를. 향.해. 웃.을. 수. 없.어.서. 생.겨.난.다. 자기를 향한 웃음을 봉쇄할 때 그것이 마음을 병들게 한다. 강제수용소에서 생환한 빅터 프랭클의 통찰이다. 인간이 자기를 초월할 때는 자기를 향해 웃을 때다. '웃음'은 인간이 가진 분명하고 거의 유일한 '자기초월의 능력'이다.


인간이 이 자기초월의 능력을 망각했을 때, 모든 것은 재앙처럼 경험된다. 자기만 덩그라니 이 세상에 떨어진 것 같고, 모든 것은 다 자기를 위협해오는 것만 같다. 어떻게든 혼자서 해내려고 이를 악물고 버티는 고집 속에, 앞은 더 캄캄해지고, 하늘은 노래지고, 몸은 허물어져만 간다. 그러다가 구원책이라고 발견한 것이 바로 약한 이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자는 '관계론'이다.


관계론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게임이다. 관계론은 '배신의 게임'이다. 서로가 상대로부터 최대치의 이득을 얻은 후 배신하는 것이 이 게임의 승리조건이다. 타이밍의 게임이다. 모.든. 관.계.는. 필.연.적.으.로. 배.신.을. 내.재.한.다. 이 배신의 게임의 전문가들은 "내가 당신을 도와줄게요."라는 친절한 말로 상대를 게임판에 앉히는 일에 능숙하다. 몇 번 이렇게 배신의 게임에 호구를 잡히다 보면 이제 우리는 관계를 경계하게 된다. 쉬이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러면서도 어딘가에는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진정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관계라고 하는 게임에 중독된 증상이다.


인간이 자신이 가진 자기초월의 능력을 망각했을 때, 인간은 관계 게임에 중독된다. 그러면서 관계라고 하는 게임을 잘할 수 있는 공략집을 찾아 더 깊이 게임양식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관.계.를. 잘.하.는. 만.큼.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생은 소외된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남들에게도 인생을 잘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자기 스스로도 자기의 인생에 대해 오늘 죽어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들이 스.스.로. 자.기.를. 즐.길. 줄. 안.다.는. 것.이다. 인생을 잘 사는 이들은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즐기며 산다. 그리고 자기를 향한 웃음이 자기를 즐기는 일의 원형이다.


공략집이 없는 인생은 게임이 아닌 삶이며, 게임을 즐기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즐길 수 있는 삶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무엇을 즐기는가?


책임을 즐긴다.


이것은 정말이다.


우리가 어릴 때 엄마가 늘 데려다주던 초등학교 통학길의 여정을 어느날 엄마가 바빠서 우리 혼자 나서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용사처럼 벅차올랐던지는 실증적 경험이다. 더 어렸을 때는 어떠했는가? 우리가 땅바닥을 기어다니다가 처음으로 우리의 두 발로 우뚝 일어섰다. 자신에게 작용하는 중력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을 책임지고 있었으며, 곧 우리 자신의 몸을 즐기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자신의 힘이 감동이었다.


책임이 힘이다. 책임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힘이 대체 어느만큼인지를 실감시켜준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힘을 확인하는 이 일을 아주 즐긴다. 동시에 자신이 이러한 책임의 즐거움 속에 있을 때, 게임은 필요하지도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힘차게 나아가는 자신의 얼굴은 이미 웃고 있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함께 웃고 있다. 심지어는 넘어져도, 물리적 아픔 때문에 잠시 울지언정 금방 또 다시 웃는다. 넘어지는 과정 자체도 웃음으로 변한다. 우리가 커서는 그렇지 않은가? 스키나 보드를 타다가 넘어지면 우리는 같이 웃는다. 재미있고 상쾌하다. 가벼워서 좋다.


자기를 즐기는 이는 자기를 책임지고 있기에, 그 웃음에 모두가 아무 부담없이 함께 웃을 수 있게 된다. 저도 모르게 웃었다가, 그 비장한 얼굴에, 불쌍한 표정에, 심각한 눈빛에, 자신의 '웃은 죄'를 괜히 짊어져야 할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인생에는 공략집이 없어서 성공이든 실패든 전부 다 웃을 수 있는 기회다. 성공했으면 그 성공의 결실을 나누면 모두가 같이 웃는다. 실패했더라도 그 경험은 실패했던 그 순간의 자신보다 지금 그것을 실패라고 인식한 이 순간의 자신이 더 큰 자신이라는 사실 위에서 접수된다.


그때는 순심이랑 헤어져서 절망하고 좌절한 인생 최악의 실패였지만, 그 비극의 대서사시를 최후의 인류에게 전하기 위해 비장하게 기록한 싸이월드 일기장을 나중에 봤을 때, 3일 낮 3일 밤을 이불킥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 자신은 까먹은 채 방치되어 있던 그 일기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웃으며 지나갔을까. 어쩌면 아카이브에 박제까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심지어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불킥은 좀처럼 잦아들 줄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돌이키는 법은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다.


"제가 그놈입니다."


루리웹 베스트 유머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캡쳐본에 리플을 단다. 난리가 난다. "우와 진짜가 나타났다." "성지순례 다녀갑니다." "대학 합격하게 해주세요." 500플이 넘어간다.


공허한 허공이 함께 웃는 공간이 되어 그 허무함이 채워진다. 직접 접촉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두는 안다. 이것이 인간의 온기라는 것을.


이제 미안할 일은 없다. 권선될 일도, 징악될 이도 없다. 당신이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신을 향해 웃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생도 당신을 향해 웃는다. 아무 걱정 없다는 듯이.


공략집은 없어도, 인생에게는 당신이 있다. 공략집 없는 인생을 당신이 든든히 책임지고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책임이라고 하는 것을 도덕적 의무와 같은 무거운 짐으로 묘사하며, 그 태산 같은 짐들을 당신이 더 많이 지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실존상담은 더 많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어.떻.게. 이.미. 책.임.지.고. 있.었.는.가.에 대한 탐구다. 그래서 실존상담은 당신의 인생 속에서의 웃음 포인트를 발견하고자 한다. 희극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바로 그 웃음이 있는 자리가, 당신이 늠름하게 책임지고 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쳇말로 "병신 같은데 멋있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혹시 이 책도 뭔가 병신 같은데 조금 멋있는가? 그렇다면 책을 통해 당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실존상담의 감수성이 조금이라도 전해진 것 같아 행복하다. 이 행복이 바로 인간의 행복이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초월할 수 있다. 이 말이 바로 "병신 같은데 멋있다."이다. 여기에는 늘 자유의 공기가 감돈다. 인.간.이. 책.임.질. 때. 그.는. 자.유.롭.다. 인간이 그 자신을 웃음으로 즐길 수 있을 때, 그는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이다. 펄 잼이 노래하듯 인간은 자유롭게 날도록 태어난(Given to Fly) 존재다. 인생은 공략집이 필요없이 당신이 당신 자신의 본성으로 날아오를 당신의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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