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14

"모험하는 인간"

by 깨닫는마음씨




일단 이 말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인간은 부족하기에 성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하.기.에. 초.월.하.고. 싶.은. 것.이다.


이 말에는 실존상담의 핵심이 그대로 함축되어 있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다. 이것은 부족하다는 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당위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초월하고 싶은 자유로운 소망이 있을 뿐이다. 소망이란 표현을 욕망이란 표현으로 바꾸어 이해해도 된다.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인 욕망은 초월의 욕망이다. 절대적인 것을 향하고자 하는 그 욕망이다.


성장은 '상대적으로 낮은 것'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 되려는 일이다. 상대적 수평선 위에서의 일이다. 그러나 초월은 그 모든 상대성에서 박차고 올라 수직으로 비행하려는 일이다. 절대적인 것을 향해 자유롭게 날고 싶은 일이다. 조나단 갈매기의 해변으로 향하는 일이다.


왜 굳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이 되는 것보다 굳이 절대적인 것을 향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계산기를 돌려보자. 상대적인 것이란 언제나 그 반대편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조건에 따라 그 입장이 반복적으로 바뀔 뿐이며, 그 결과는 잘 봐줘야 제로섬게임이다. 우리에게는 무조건성이 필요하다.


힘의 문제로 이해해보자.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 우리의 힘의 크기가 변동되며, 동시에 정치판이 뒤집어지듯 문화적 맥락에 따라 강자가 갑자기 약자로 뒤바뀐다. 조건에 따라 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다. 상대적인 세계 속에서는 이처럼 조건에 종속되는 삶이 펼쳐진다. 그러나 우리가 조건에 좌우되지 않을 수 있다면? 돈이 많든 적든, 지식이 많든 적든, 인맥이 많든 적든,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우리가 늘 지속적인 힘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이것은 어떻겠는가?


여기에서 힘을 말하는 것은, 초.월.이. 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초월은 삐쩍 마른 모습으로 채식만 하며 입가에 여여한 미소를 짓다가 가끔씩 공중부양을 하는 일과는 전적으로 무관하다. 초월은 생명체로서 자신의 힘을 최대치로 발휘하게 되는 현상이다. 최.대.치.의. 힘.은. 최.대.치.의. 존.재.다. 그리고 우리는 있.는. 그.대.로. 존.재.할. 때. 최.대.치.로. 존.재.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는 사실 '초월된'의 의미다. 무엇을 초월하는가? 한계다. 한계란 어떤 것인가? '있는 그대로이지 않은 것'이다. 곧, 사실이 아닌 것이다. 사실이 우리의 한계가 아니라, 사실이 아닌 것이 한계다. 망상이 바로 한계다. 적어도 심리학적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갖는 가장 큰 한계, 즉 우리를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망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자.신.이. 약.한. 존.재.라.는. 망.상.이.다. 이 망상 속에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잡아 가둔다. 그렇게 자신을 상대적으로 낮은 자리에 둔 다음, 상대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 위한 성장의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아무리 성장해도 자신이 아직 약한 존재라는 망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가 타협도 한다. 인간이 원래 다 이렇게 약한 존재구나, 라며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한 태도로 인간의 운명을 위한 한 줄기의 눈물을 흘린다. 절대로 그렇지 않고, 자신만 약한 존재일 뿐이다. 아무리 해도 자신만 약한 것 같으니, 그러한 운명을 인간 모두에게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열렬하게 비트코인의 전도사가 되는 이유와 같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인간이 약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망상이다. 인간이 정말로 약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망상이 인간을 약하게 만든다. '한계'라는 표현을 '경계'로 바꾸어 이해하면 정확해진다. 인간이 유한하다는 의미는 인간은 사실적인 경계의 명확성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이다. 우리는 죽는다. 점점 노화한다. 우리가 갖고 태어난 이 몸으로 평생 살아간다. 이러한 것들이 경계다. 경계는 애초 좋고 나쁨의 소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기.정. 사.실.이다. 실존주의에서는 이것을 '실존의 소여성(所與性)'이라고 부른다.


레고블럭이 100개가 주어진 이가 있다. 자신에게 그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질 때 그는 창조한다. 100개의 블럭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 50개가 주어진 이는? 그 또한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다. 심지어는 단 1개라면? 그도 그 1개의 블럭 속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본다. 이러한 것이 경계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경계란 초월된 한계다."


야스퍼스와 같은 실존주의자는 '한계상황'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는 초월의 계기가 된다. 본래적 자기는 신처럼 전능한 자기가 아니라, 인간의 경계를 아는 정직한 자기다. 이러한 말들이 어렵다면 쉽게 붓다를 예로 들어보자. 붓다는 한계를 초월해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었다. 유한한 인간의 경계로 살았다. 그렇기에 초월적이었다.


유한하며 초월적인 삶을 사는 이들은 경계를 짓밟지 않고 경계를 존중한다. 경계를 존중하면 어떤 일이 가능해지는가? 경계와 경계 사이의 이동이 가능해진다. 이동이 불가능한 것은 자기가 만든 망상의 한계에 갇힌 이들이다. 한계가 고착되면 우리는 화석화되어 굳는다. 존재가 명사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왜 망상의 한계에 스스로 갇히는지의 이유도 분명하다. 존재를 움직일 수 없는 콘크리트처럼 굳히고 싶어서 우리는 망상을 소비한다. 여기에는 변화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도 늘 변화하고, 세계도 늘 변화한다. 고정된 명사는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동.사.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이동한다. 이것은 뻔하고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그 의미는 사실 심히 거대하다. 실시간으로 일본에서 이제 완결을 앞두고 있는 우오토 작가의 『치(チ)』라는 만화가 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사실로서 밝히고자 하는 위대한 탐구자들의 모험을 그린 작품이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위해 누군가는 인생을 바쳤고 목숨을 걸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중요했는가? 탐구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지구는 고정되어 있고 다른 별들만이 움직인다는 천동설은 저 조화로운 우주의 영광으로부터 우리만을 소외시켰다. 지구는 죄로 가득차 무저갱에 떨어진 우주의 중심일 뿐이었다. 지구는 한계지어진 저주의 별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지구가 움직인다. 사실은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살아있는 우주의 신비에 합류해 영광의 빛 속에서 함께하게 된 것이다. 더는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더는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다."


지동설은 단지 과학적 상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한계를 넘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철학적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 사.실.이. 인.간.을. 구.원.한.다. '있는 그대로의 것'은 실은 인간을 향한 엄청난 의미를 드러내고 있던 것이다.


한계 속에서 고정된 중심, 이것은 살아있는 것에 대한 분명한 저주다. 존재의 명사화는 가장 악마적인 저주다. 그것은 우리 자신만을 남겨둔 채 다른 모두는 행복한 낙원으로 향하는 모습을 마녀의 저주에 걸려 석상이 된 우리가 지켜봐야 하는 일과 같다. 심지어는 고정된 명사가 되도록 저주를 건 그 마녀가 바로 우리 자신이기까지 할 때, 이것은 우주의 대비극이다.


실존상담에서 우리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든 동사적 감수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언어를 조형하는 이유다. 슈나이더는 직접적으로 '유동하는 중심(the fluid center)'이라는 표현을 쓴다. 중심은 이동한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자유'다. 핀에 꽂혀 표본을 위한 박제가 될 때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비의 해방이다. 꽃들에게 희망이다. 동사로서 이동하는 일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 좋은 것이다.


이동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앞서 말했듯이, 경계를 가로지르는 횡단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경.계.가. 분.명.해.야. 이.동.이. 가.능.하.다. 다른 말로는, 경.계.가. 분.명.해.야. 자.유.가. 가.능.하.다. 이 말은 역설적이기도 한데, 자유롭게 이동해봐야 그것이 경계였음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게 된다. 경쾌하게 건너온 곳을 돌아보니 그곳이 까마득한 협곡이었던 것이다. 즉, 경계와 이동은 불가분의 순환적 구조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일은, 더욱 쉽게는 경계를 이동하는 일이다. 가보지 않았던 지평으로 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모험'이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 정확하게 실존상담은 모험가들의 접근이다. "삶은 모험이다."라고 슈나이더는 말한다. 실존주의 초정신의학의 토마스 호라도 "삶은 물에 자신을 던져 수영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모험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비유해주는 묘사다. 실.존.상.담.은. 삶.이. 모.험.이.라.는. 사.실. 속.에.서. 자.신.의. 모.험.을. 누.리.는. 방.식.이.다.


앞서 말했듯이, 모험이 성립되려면 먼저 자신의 망상을 해체하고, 한계를 격파하고, 모험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숙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모험을 떠나보면 알아서 망상이 해체되고, 한계가 초월되면, 모험을 통한 앎이 드러난다. 이러한 모험가들이 얻게 되는 최고의 보상은 바로 자신이 가진 힘의 자각이다. 강한 이들이 모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험하는 이가 강한 것이다.


여기에 모험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효과적인 예화가 있다. 이것은 한국상담계의 대원로인 윤호균 선생님의 경험담이다. 세부사항들이 조금 다를 수는 있지만 그 의미는 명백할 것이다.


윤호균 선생님이 학회참석을 위해 지방에 내려갔을 때, 다른 동료교수 두 분과 숙소에 묵게 되었다.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이상한 느낌에 윤호균 선생님이 깨어나보니 방안에 연기가 가득하고 타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숙소에 불이 난 것이다. 그래서 윤효균 선생님이 바로 옆방에 묵고 있는 동료교수분에게 달려갔더니, 그분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으으.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네. 나를 좀 도와주게."


그러자 윤호균 선생님은 말했다.


"아니 건장한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지금 아래층에 있는 저 선생님은 어떻겠나?!"


그랬더니 갑자기 정신을 못차리고 누워있던 동료교수분이 눈을 번쩍 뜨고 벌떡 일어나더니,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내려가 다른 교수분이 있는 방의 문을 부수고 돌입했다. 그리고는 그 분을 냉큼 들쳐업고는 숙소 밖으로 달려나갔다.


윤호균 선생님은 이러한 일화를 통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커다란 배움을 얻었다며, 심리상담이라는 것이 내담자를 대체 어떠한 현실로 안내해야 하는지를 학생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우리가 힘차고 즐겁게 또 의미있게 모험하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떠한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해야 하는가? 또는 초월해야 하는가? 모든 모험에는 이 정체성의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망상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한계가 바로 정체성이다.


"나는 남들보다 못났어."

"나는 남들보다 약해."

"나는 남들보다 부족해."


이것은 또 이렇게 변주된다.


"나는 나보다 못난 것이 있어야 잘나질 수 있어."

"나는 나보다 약한 것이 있어야 강해질 수 있어."

"나는 나보다 부족한 것이 있어야 충만해질 수 있어."


그러나 모험의 힘은 이러한 망상들과 아무 상관없이, 눈앞의 명확한 현실의 경계를 확인함으로써 바로 발현된다. 우리를 자신으로 만드는 것은, 자.신.이.라.고. 하.는. 정.체.성.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그것만 정확히 보면 모험은 즉각적이다.


우리는 정체성이라는 한계 안에서 늘 상대적인 것만을 향하며, 상대적인 성장만을 추구한다. 그러나 아무리 성장해도 그것은 동일한 한계 안이다.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기는 성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성질이 늘 똑같다. 오히려 더 답답해지기만 한다.


중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수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함께 자기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고등수학을 아무리 공부해도, 자신이 가르치는 대상은 늘 동일한 중학생들이기에 그 역량을 발휘할 수 없어 답답해지는 것과 같다. 그런데 만약에 이러한 이가 수학전공의 대학원에 진학한다면? 자신의 정체성이 선생에서 학생으로 이동된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하루하루가 즐겁다. 매일이 모험의 삶이 된다. 그가 사는 장도 바뀌게 된다. 중심은 이동했다.


"나는 내가 정말로 뭘 좋아하는지를 모르겠어. 그래서 모험을 못하는 거야. 나도 좋아하는 것만 찾으면 바로 모험할 수 있어."


삼겹살을 쌈에 싸 우걱우걱 밀어넣고는 소주 한 잔을 흘려넘기며 우리가 술자리에서 매번 반복하곤 하는 말이다. 이것은 정확하지 않다.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경계를 모르는 것이다. 경계를 모르니 반복되며, 이동하지 못하게 된다. 경계를 알면 자신이 어떠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가 바로 드러난다.


유한성을 공간적 의미뿐만 아니라 시간적 의미로 이해해도 경계의 문제는 분명하다. 우리가 유한하다는 것은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의미다. 바로 1시간 뒤에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의미다. 이것이 경계를 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난 무조건 이거지."

"그렇다면 난 절대적으로 이거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그 삶이 맞다. 모험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으.로. 당.신.이. 사.랑.하.는. 바.로. 그. 삶.을 살러 가는 것이다.


언제나 사.랑.은. 초.월.의. 일.상.어.며, 모.험.은. 사.랑.의. 실.천.어.다. 그래서 모험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인간을 '모험하는 인간(homo adventus)'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인간은 누구인가? 모험(adventure)의 어원인 adventus의 뜻은 '나타나다' '다가오다' '드러나다'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 다시 살아 돌아오는 예수의 재림을 뜻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의 분명한 경계를 넘어, 지금 오고 있는 것이 있다. 모험하고 있는 것이 있다.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게 당신이다.





작가의 이전글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