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다보면 배워지는 한국형 실존상담 교과서 #15

"코로나 이후의 심리상담"

by 깨닫는마음씨




코로나19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은 이미 우리에게는 지겹도록 지겨운 이야기일 것이다. 이것이 특히 지겨운 이유는 우리가 망각하고 싶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 『느림』에서 실존수학을 말한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망각하고 싶은 정도와, 그 자리를 벗어나려는 발걸음의 속도는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왜 이토록 분주한가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성찰이다.


분주한 것은 반복되며, 반복되기에 그것은 지겹다. 분명 망각에의 의도가 낳은 지겨움이다. 이는 심리상담에서도 실증적이다. 대다수의 내담자들은 특정한 기억을 계속 반복한다. 지겹다고 말하면서 반복을 멈추지 않는다. 반추하고 또 반추하며, 상기하고 또 상기한다. 왜일까? 그가 그 기억을 잊고 싶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억의 역설'이다. 잊.고. 싶.어.서. 더. 기.억.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과거에 잊고 싶었던 상태를 현재에 다시 재현해낸다. 곧, 자신이 제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상태를 끊임없이 실시간적인 상태로 만들게 된다. 이것은 무슨 상태일까?


무.력.함.이다.


과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무력한 상태를 우리는 가장 망각하고 싶어하며, 그 결과 기억의 역설을 통해 현재에도 그 무력한 상태를 자신의 것으로서 계속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무력함은 우리가 정말로 배워야 했던 것이다. 코로나가 우리에게는 왜 그토록 힘들었는가? 거기에 대해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적으로 무력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상태가 너무나도 싫었다. 무력한 우리 자신에게 극도로 화가 났다. 정치인이나 사회적 문제에 대신 그 화를 집행하든가, 그도 아니면 우리 자신을 비난하는 우울증의 형태로 화는 소비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무력해졌을까? 이것이 우리가 무력함에 대해 정말로 배워야 할 것이다. 이제 말해보자.


우.리.는.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해.졌.다.


우리가 자신보다 힘있다고 간주하는 어떤 것에 의존하는 만큼, 실은 우리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을 잃어가게 된다. 무력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국가, 시스템, 사회제도, 정치, 정보, 집단지성, 여론, 관계 등의 '공동체적 원리'에 우리 자신을 의존시켜 왔다. 그것들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중 어떤 것도 효과적이지 않았다. 우리가 자신의 힘을 양도해 공동체적 원리를 더욱 힘있게 만들어주었던 이유는 오직 우리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였는데, 이 원리는 우리가 힘을 제공할 만한 정도로 유용하지 않았고, 또 심지어는 역기능적으로 우리 자신을 위협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현대사회가 근본적으로 내재한 특성이다. 평준화, 계량화, 보편화라고 하는 대량생산의 기술논법이 인간의 삶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이다. 코로나19는 운과 때가 맞지 않아 재수없게 걸린 특이사례가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에게 내린 이러한 운명의 보편적 불가피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필연적 사건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코로나19는 정치의 문제가 아니지만, 정치의 문제다. 말장난이 아니다. 코로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일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떠한 정치세력의 논리에 따라 대응했어도 대응 자체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코로나에 대해서는 그 어떤 정치세력도 잘못한 일이 없다. 물론 잘한 일도 없다. 애초 잘못하거나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때문에 코로나는 정치의 문제다. 정치라고 하는 공동체적 원리가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정치신화의 우상성으로부터 우리가 깨어나야 하는 문제다.


비단 정치뿐이 아니다. 개인이 자신보다 큰 것이라고 여기며 의탁했던 가족, 혈족, 민족, 국가, 이익집단, 인터넷여론, 온라인 커뮤티니 등의 그 어떤 공동체적 관계도 개인을 코로나로부터 구원할 수 있었던 역사가 없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돌이켜볼 수 있는 역사다. 이 역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공동체적 원리도 실은 개인보다 위에 서있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은 환상으로 발각되었다. 확연히 노출되어 더는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무너져내리지 않기 위해 공동체적 원리의 지지자들은 집단주의의 정신을 발휘하여 이런 때일수록 더 뭉쳐야 한다고 마당놀이판을 준비하겠지만, 우리는 이미 목격했다. 우.리.는. 공.동.체.가. 더.는. 개.인.을. 지.켜.줄. 수. 없.다.는. 역.사.의. 산.증.인.이.다. 분명 역사의 한자락에서는 공동체가 힘을 발휘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더는 아니다. 왜 그런가? 공동체적 원리는 이제 세상의 변화를 따라갈 수가 없다. 언제나 몇 걸음 뒤쳐진다. 가속이 붙은 눈덩이를 통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구르는 눈덩이를 뒤에서 허겁지겁 쫓아가며 뭐라도 해보려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이것은 컬링경기가 아니다. 쫓는 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눈덩이를 쫓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자신을 겨우 추스르며 멋쩍게 웃는 일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코로나를 통해 공.동.체.의. 패.배.를 목격하고 있던 것이다. 물론 공동체의 패배가 공동체의 무용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동체의 '용도'가 명확하면, 그것은 유용하게 기능한다. 공동체는 원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임의적 도구가 개인 위에 올라서 신성한 위격을 갖게 될 때 그것이 공동체의 우상화다. 공동체의 패배란 바로 이 우상의 패배다.


필요한 것은 쉽게 구성될 수 있고, 필요없는 것은 쉽게 폐기될 수 있는 것이 자유다. 민주주의란 이 자유의 정신을 근간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필요없는 공동체도 유지하려 한다. 그것이 신적인 것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 의리, 순종, 신앙, 맹목 등이 작동할 때, 그것은 신주단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 길거리의 커피자판기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모습이다.


분명하게 말하자. 공.동.체.는. 우.리.의. 아.빠.가. 아.니.며. 우.리.의. 엄.마.도. 아.니.다. 공동체에 충성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공동체에 해야 하는 것은 협조다. 자신의 필요를 이루기 위해 협조하는 것이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공동체가 그 필요를 채워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부적절성이지 우리 자신의 부적절성이 아니다. 단순하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밀크커피 버튼을 눌렀는데 자판기가 율무차를 내보내며 씨익 웃고 있는 것은 자판기의 문제다. 우리가 인간다운 도의와 충성심으로 율무차도 좋다고 마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코로나를 통해 경험하던 무력함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이 무력함은 공동체가 경험하는 무력함이지, 우리 자신의 무력함이 아니다. 우.리.는. 무.력.하.지. 않.다. 공동체는 실패했을 때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비극의 집단정서를 경험할 수 있지만, 개인에게는 그것이 단지 시행착오의 과정일 뿐이다. 다음에 다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자기도 모르게 공동체를 신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을 때만, 공동체의 무력함은 우리 자신의 무력함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무력했는가? 정직해보자. 이 질문 하나를 더 생각하면 우리가 정직해지는 일에 도움이 된다. 우리가 만약 무력함을 경험했다면, 그 무력함의 원인은 코로나에서 비롯한 것인가, 아니면 코로나에 대한 우리의 특정한 태도를 요구하는 공동체의 원리에서 비롯한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설령 코로나가 개인을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그 무력함을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더욱 배가시킨 것은 공동체의 원리다. 이것을 억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필요로 만든 도구가 역으로 우리를 억압하게 된 현실을 또한 '인간소외'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인간소외는 앞서 말한 것처럼, 또 무수한 연구자들이 지적하듯이, 현대사회가 근본적으로 내재한 대표적인 역기능의 현상이다.


공동체라는 것은 결국 무엇인가? 바로 '관계'다. 지금껏 관계를 신적으로 것으로 보며 그 관계에 의존해 우리는 자신의 현실의 안전과 번영을 꿈꾸어왔다. 그 꿈이 깨지고, 우리는 알았다. 관계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임의적인 것이고, 관계에 바탕한 현실은 언제라도 붕괴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우리가 관계에 의존해온 만큼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을 취약한 모습으로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코로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실존의 여건을 조성했다. 자신의 실존을 자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계기를 정말로 기회로 살릴 수 있다. 우리가 정말로 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심리상담은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거대한 흐름과 개인의 마음이 조화롭게 일치하도록 돕는 일이다. 시대정신은 미디어가 만든 여론이 아니다. 정치세력이 선전하는 특정한 이념이 아니다. 대중들의 인기에 의해 선출되는 소재가 아니다. 시대정신은 그 모든 것보다 더 근원적이고 동시에 실제적인 것이다.


시.대.정.신.은. 지.금. 인.간.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결코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에 대한 집착과 의존이 너무나 과잉되었다고 말한다. 그럼으로써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실.존.을. 말.한.다.


코로나 후의 심리상담은 분명하게 개인의 실존을 조력하는 방향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것이 표현 그대로 필요이기 때문이다.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잘 사는 법'이라고 말하면 어떨까?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일 아니던가?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지만, 가능하다면 그렇게 살고 싶은 그 삶이 아니던가?


실존상담은 직접적으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접근이다. 실존상담이 일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공동체의 웃음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웃음이다. 관계의 신적 권위에 갇혀 지옥처럼 살아가는 당신의 찡그린 얼굴이 아니라, 관계가 단지 필요의 문제임을 이해하여 관계 밖에 우뚝선 당신의 개운한 얼굴을 마주하고자 한다.


부연할 필요도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며, 당신은 민주시민이다. 이 말은 무엇인가? 당신이 애초 관계 밖에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누구나 다 관계 밖에 있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는 카스트 제도다. '평등한 관계'란 말은 환상 중의 환상이다. 관계는 위계적으로만 성립된다. 모든 관계는 본질적으로 갑을관계다.


왜? 자.연.의. 질.서.를. 모.방.해. 만.든. 것.이. 관.계.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자연이면 나은데 이것이 자연의 모방이기 때문에 곤란해진다. 관계는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인위적 역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톱니바퀴의 '역할론'이다. 개미나 벌과 같은 곤충의 생태를 작위적으로 구조화시킨 인공물이다. 이미 인간이 기계곤충으로 소외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이 소외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자리를 찾기 위해 시도된 외침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평등하다."라는 말은 사실 이렇게 쓰여야 정확하다.


"관계 밖에서 인간은 누구나 다 평등하다."


모든 인간이 절대적으로 평등한 이 인간의 자리가 바로 관계 밖에 있다는 사실을 민주주의는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관계 안에서는 어떤 인간도 평등할 수 없다. 주인도 노예도 다 똑같은 '관계의 노예'일 뿐이다. 인.간.은. 관.계. 밖.에.서.만. 그. 자.신.의.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다. 즉, 실존함으로써만이 개인은 민주시민으로서 그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다.


물론 공동체의 원리와 위계적 관계의 질서에 친화적인 한국사회에서는 이 일이 조금 어렵다. 한국은 진실로 실존의 불모지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없는 심리상담의 접근이라면 독보적으로 실존상담이다. 얼핏 관계론처럼 보이는 정신역동적 관점들, 융의 분석심리학, 애착이론, 내면아이, 가족치료, 대상관계이론 등이 스테디셀러다. 물론 이러한 접근들도 깊이 들어가면 결국 인간이 관계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그 필요성을 다룬다. 그러니 깊이 들어가지 않고 피상에만 머물고자 한다. 심리학 및 심리상담이 그저 대중에게 인기있을 법한 표면적 이해 속에서만 현재 머무르고 있는 이유다. 익숙하게 지속되어 온 관계론을 위협하는 것은 대부분 듣고 싶지 않아 하는 까닭이다.


그러니 이러한 한국사회의 문화적 배경은 심리상담의 도전이자 기회가 된다. 한국에서 심리학 및 심리상담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과정이다.


거듭해서 말하지만, 이것은 관계가 죄악이라는 것이 아니다. 관계는 신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라는 것이다. 관계는 그저 필요의 문제다. 짜장면을 먹으면 잘못인 것이 아니라, 짜장면을 먹지 않으면 민족과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배신이라고 말하는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특정한 정치세력을 지지하면 공동체를 위하는 정의고,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폐라고 부르는 일이 한국에서는 일상화되어 있다. 그 반대편에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결국 이것은 세력 사이의 담론게임이 아니라, 그 자체가 통째로 공동체를 진리화하려는 하나의 절대적 진리담론의 문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 말과 동급의 말은 분명 이러하다.


"나는 공동체가 싫어요."


이러한 말을 하는 이는 역사의 대죄인이며 민족의 반역자다. 좋게 봐줘서 '아직 성장하지 못한 철없는 어린아이'다. 이것은 얼마나 폭력적인가? 누군가가 길가에 있는 자판기를 싫어한다고 말하면 그 순간 생각없는 무식한 우민이 되고, 선동당한 저능아가 되며, 도덕적 문제아가 되고, 사악한 사이코패스가 된다. 아, 이것은 정말로 얼마나 폭력적인가?


심.리.상.담.은. 이.것.이. 폭.력.임.을. 말.해.야. 한.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드러냈듯이, 심리상담은 '서울의 김팔복씨'를 드러내야 한다. 이 '폭력의 평범성'을 알려야 한다. 심리상담이 이 일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이야말로 시대정신에 대한 배신이다.


실존상담은 조금 더 실천적이다. 이러한 것들을 새롭게 이해해보자고 청한다.



# 관계의 진실


코로나를 통해 우리는 불가피하게 관계에서 철수해 홀로 있는 시간을 아주 많이 갖게 되었고, 우.리.는. 죽.지. 않.았.다. 관계의 구속력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착각했지만 그것은 여실한 착각으로 드러났다. 오히려 상상했던 것보다 더 행복하기까지 했다. 관계에 자신을 지나치게 의존해왔던 이들은 힘들기도 했지만, 관계가 문제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던 이들은 관계로부터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체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관계라는 것은 정말로 우리가 그 앞에 벌벌 떠는 일이 당연해야만 했던 신적인 권위의 소재였는가?



# 공동체적 원리의 역기능성


정직하게 우리는 이제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다. 국가가 운영하는 제도 및 시스템이 더는 개인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침착하게 가만히 앉아 있으세요."라는 말이 들리면 우리는 즉시 그 장소를 벗어나야 한다고 커다란 아픔을 통해 다시 배웠다. 이것은 관리를 집행하는 특정한 주체 및 특정한 세력의 성격적 특성 및 기능적 적합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메뉴얼의 성공적인 집행 여부가 아니라 "메뉴얼대로만 하면 문제가 없다."라고 하는 이 발상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다.


공동체는 개인의 정신이 고도로 개화된 오늘날 더는 개인의 정신과 협응하는 시대정신을 따라가지 못한다. 아무리 개정해도 본질적으로 낡은 메뉴얼을 들고 그래도 이것이 최선이라며 어린양들을 인도하려 해봤자, 목자가 지금 돌보려고 하는 것이 실은 티라노사우루스라는 것을 목자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공동체의 원리는 공동체의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작동한다. 그 울타리보다 개인이 커진 순간, 울타리 안에서의 모든 원리는 억압이 될 뿐이다.


득보다 실이 많아졌다. 역기능은 분명하고, 오만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공동체적 원리는 정말로 우리에게 여전히 효과적인 것인가?



# 자신을 즐기는 현실


관계는 놀이의 필요이기도 하다. 놀이터다. 그러나 역으로 놀이터가 없다면 우리는 놀 수 없는가? 나아가 놀이터에 갔더니 전부 다 비장하고 심각하게 의무적 일을 하고 있는데 그러한 놀이터에 계속 놀러가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실.존.한.다.는. 것.은. 자.신.을. 즐.길. 줄. 안.다.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행.복.할. 줄. 안.다.는. 것.이.다. 모든 '즐거움'의 원형은 '친해짐'이다. 자신과 친해질수록 우리는 자신이 즐겁다. 자신을 잊으려 할 때 우리는 대신 관계와 친해지려 한다. 관계가 자신을 즐겁게 해주리라고 기대하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한 상태로 남는다. 그러니 그 어떤 관계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해체되고 난 후에는, 우리는 영 바보가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사는 일이 다 재미없기만 하다. 마약을 공급받지 못하는 마약중독자의 상태와 같다. 관계중독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자신을 즐기지 못하는 이가 중독재에 중독된다. 관.계.는. 엄.연.한. 중.독.재.다. 관계를 마치 자연발생적으로 하늘이 내려준 신성한 소재인 것처럼 여기는 착각을 멈추고, 모든 관계가 다 인위적 공산품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우리는 자신을 즐길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하게 된다.


이것은 질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현실에서 살고 싶은가? 일단은 "나는 담배 없이는 못 살아."라고 말하는 현실인가, 아니면 "나는 담배를 즐기고 있어."라고 말하는 현실인가? 후자라면 희망적이다. 담배를 즐기는 이는, 실은 담배가 아니라 담배를 소비할 때 야기되는 모종의 자신의 상태를 즐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태는, 놀랍게도, 담배가 없어도 얼마든지 우리가 창조할 수 있는 상태다. 이에 대해서는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 철학을 말하는 다른 장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이다. 요는, 이 모든 것을 실용의 문제로 이해해보자. 실용에는 언제든 그 대체품이 있다. 당신이 도구를 의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당신의 도구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만 명확하면, 당신은 그 모든 도구로 자신을 즐길 수 있는 존재다.


#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의미는 반드시 존재한다


코로나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억했다. 사람은 정말로 죽으며,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게 언제라도 이상하지 않다. 어떠한 진리담론을 따른다고 죽지 않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것을 따랐을 때 더 빨리 죽기까지도 한다. 그러니 당신은 이제 이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진.리.가. 아.니.라. 의.미.다.


당신이 따라야 할 것이 진리가 아니라, 당신에게 드러나는 것이 의미다. 당신은 따르지 말고, 당신에게 드러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진.리.는. 과.거.에.서. 오.며. 의.미.는. 미.래.에.서. 온.다.


이것은 무슨 말일까? 의미는 당신의 삶을 미래로 연결시켜준다는 말이다. 의미는 신선들이 장기나 두며 논하는 추상적 소재가 절대로 아니다. 의.미.는. 당.신.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다.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죽게 될 것이지만, 의미는 당신이 죽지 않아도 될 순간에 죽는 일을 막아준다. 당신의 삶을 지켜준다. 그리고 그 삶이 의미 속에서 충만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당신의 등불이 되어준다.


당신의 생명이 다해도, 당신의 등불은 이 자리에 남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등불을 발견할 수 있도록, 또 하나의 의미가 되어준다. 당신은 반드시 존재했고, 당신의 삶은 의미있었다.



심리상담은 이제 이러한 이해들을 더욱 말하고 나누어야 한다. 심리상담은 더욱 실존적이어야 한다. 개인이 자기가 무력한 존재라는 그 모든 착각에서 벗어나, 착각을 만들어내는 그 모든 구조에서 해방되어, 그 자신의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 일을 조력하기 위해, 심리상담자는 하나의 등불로서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심리상담자로 살기를 선택한 개인들에게 들려오는 시대정신의 부름이다. 들으라. 이것이 지금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줄 가장 좋은 것이다. 등불을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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