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영화(2021)

당신의 삶

by 깨닫는마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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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이제 소설을 쓰지 않는다.


작은 것 속에서 거대한 의미를 드러내는 섬세한 자신의 시선에 취해, 진실의 언어로 기만의 언어들을 걷어낸다는 예술적 의지에 취해, 소설가가 순수한 진리의 탐구자이자 증인이라는 그 특별한 감정에 취해, 정말로 자신도 그러한 사람인 척하는 일에 질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렇게 산다. 사소한 것에도 날카롭게 날이 선 눈빛으로 매사를 예민하게 대하고, 자신의 '정론'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상대의 말들을 봉쇄하며, 자신이 순수하다는 말을 들을 때 마냥 웃음짓는다. 자신은 이미 그러한 사람이다.


소설가는 이제 영화를 만들고 싶다.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로 감정을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모든 이야기는 반복과, 과장과, 정당화이다. 그래서 지루하고, 촌스러우며, 역겹다. 그래도 이야기를 쓸 것이란다. 아무 이야기나 상관없단다. 어떤 이야기라도, 제일 앞에 사람이 있을 것이기에 이야기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단다. 사람이 먼저 놓이기만 하면, 그 뒤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와도 괜찮단다. 그녀는 다만 그 속에서, 사람이 드러내는 그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제일 아끼는 색종이가 있다. 쓰기에도 아까운 그 색종이로 고이 접어 종이배를 만들었다. 그 종이배를 정말로 사랑하는 이는, 종이배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띄워져서 인류에게 거대한 감동이 선물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는 착한 소녀가 직접 만든 도시락을 들고 나온 작은 개울가에서 소녀가 끝내 전하지 못한 연애편지를 담아 띄워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무런 흐름이라도 좋다. 대충이어도 된다. 흐르다가 막혀도 좋다. 종이배에게 그저 흐름만 만들어주면 나머지는 종이배가 알아서 할 것이다. 소설가가 함께 띄워보내고자 하는 것은 통제에 대한 강박적 의지다. 종이배에 대한 서사를 포기해서라도, 그녀는 종이배의 실존을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의 실험이다. 하나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삶이 펼쳐질 수 있는 임의적인 환경을 만든 뒤, 삶이라는 것이 대체 어떻게 그 자신을 분연히 드러내는지를 그녀는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홍상수 감독은 정말로 만나고 싶은 것이다.


하이데거의 후기 작품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평생 모순에서 역설로의 전환을 말하며 살았던 하이데거는 소박한 시골의 현자이자, 동시에 나치의 부역자였다. 그도 모순을 전환하지 못했다. 언어로는 모순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경계가 분명하게 그어졌다. 그래서 말년의 하이데거는 의자에 앉아 고향의 숲을 바라보며 살았다. 진실된 언어에 대한 희구는 이어졌지만, 삶을 향한 내맡김의 태도가 가장 앞에 앉아 있었다.


선(禪)에서 언어를 두들겨부수기 위해 쓰는 것은 죽비만큼이나 언어다. (물론 비공식적으로는 주먹과 발차기다.) 언어보다 더 큰 것을 드러내기 위해 언어를 쓰는 이 일이, 서사보다 더 큰 것을 드러내기 위해 서사를 쓰는 영화 속 소설가의 일과 같다. 홍상수 감독이 여전히 영화로 영화를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다 갖고 와서 '홍상수의 영화'라는 것은 이런 것임을 지루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이제 지루함이다. 대사의 동일성과, 인물의 정형성과, 역할의 교차성과, 장면의 반복성까지, 매일밤 3백만 년간 계속해서 꾸어온 꿈과 같다. 인류라고 하는 꿈이다.


이 꿈속에서는 뻔한 모순들만이 지속된다. 내로남불의 위세와 관계역동의 세습은 일상이나, 적당한 망각을 그 동력으로,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진 척 시치미를 떼며 서걱서걱 돌아간다. 이제는 소설가가 쓰기 싫어지는 일이, 아니 우리가 살기 싫어지는 일이 당연하다. 술 한 잔이라도 마셔야 취기 속에서 명징하게 시(詩)라도 나온다. 그러나 그것도 나이가 들면 잘 안 서더라.


이 좋은 봄날에 이런 영화나 보고 있다가 나는 의미없이 죽겠구나, 이 번쩍임은 어여쁘지만, 장례식에는 왠지 모르게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싶다. 시시한 이야기들이 시시한 마지막을 향해 가는 시시한 장례식일수록 더 그러하다.


아마도 나는 인간의 마지막을, 또는 마지막 인간을 보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출구의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그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마지막 인간을 향해 환한 시선을 지금 비추고 있는 투명한 햇살을 나는 알아보았다. 영화의 마지막은 삶의 시작이 되었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영화관 밖을 비추고 싶었던 그 카메라였고, 카메라의 시선은 정확한 그 자리에 도달했다. 소설은 소설을 초월했고, 영화는 영화를 초월했다. 인간도 그렇게.


라이카시네마에서 봤으면 좋았을텐데, 그랬다면 어쩌면 옥상에서 당신을 만났을지도 모르는데.


이것은 첫 번째 감상이었고, 두 번째로는 이 영화가 홍상수 감독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더 많이 만들 수 있기를 바랐다.


영화감독은 이제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그는 이제 삶을 만들고 싶다.


영화는 언어다. 모순을 통합하기 위해 언어는 활용된다. 모순을 낱낱이 드러내어 폭로하는 방식도 모순통합의 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모순을 통합하지 않는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그 삶의 모습을 가장 앞에 놓는다. 그것만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만 있으면 어떠한 이야기라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 어떤 지루한 반복의 이야기 속에서라도, 사람이 반드시 그 자신의 생생한 색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승리하는 이 방식이 창조다. 삶을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더 창조하고 싶다. 반복되는 구질구질한 것들에 대한 폭로를 넘어, 순수함에 대한 그 강박을 넘어, 그는 인간을 향한 그의 가득한 사랑만큼 더 창조하고 싶다.


순수의 진리를 추구하던 구도자는, 혼돈의 인간을 사랑하던 고백자였다.


모순은 유일하게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설로 전환된다.


다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들, 별 것 아닌 이야기들이다. 이야기는 그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한 핑계들. 모든 언어는 그저 당신을 만나는 일에만 관심있는 별 의미없는 언어들.


이 영화는 더는 삶을 반영하는 언어가 아니라, 삶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 삶을 살아가는 당신이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당신에게 직접 체험하게 해주는 탈언어다.


사람인 척할 필요 없다. 당신이 이미 그 사람이다.


그래서 당신도 자신의 삶을 만들고 싶다.


'소설가의 영화'의 의미는 '당신의 삶'이다.


길 위에서 무엇이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렇기에 그 무엇으로도 빛날 수 있는 당신의 삶이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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