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가는 일"
우리는 자신만의 세계를 갖고 싶어한다. 이것은 상담실을 찾는 모든 내담자의 소원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자기에게 트라우마를 제공한 엄마가 무릎꿇고 사과하며 위자료로 10억을 주게 만들어달라는 소원도, 자신의 남편을 상담실에 보내면 상담선생님이 공감하는 법을 호되게 가르쳐줘서 자기 말을 잘 듣게 만들어달라는 소원도, 그 어떤 관계 속에서도 쫄지 않고 당당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달라는 소원도, 전부 다 실은 자신만의 세계를 원한다는 소원이다.
1차적으로 자신만의 세계라는 표현은 '모든 것이 자신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라는 전능감의 어조를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해해보면, 이러한 세계에서는 자기의 전능감을 발휘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만 있는데 다른 이를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한 힘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결국 우리가 소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눈치채게 된다.
우리는 관계에서 정말로 떠나고 싶은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란. 관.계.하.지. 않.는. 세.계.다.
관계를 떠나고 싶은 내담자들이, 관계를 잘 하는 방법을 알고 싶어서 상담자를 찾아온다. 실존상담은 언제나 고객만족을 최우선의 덕목으로 놓는 까닭에, 진실로 관계를 잘 할 최고의 방법을 내담자에게 안내한다. 당신도 궁금할 것이다. 이제야 내가 듣고 싶던 마법의 비밀이 공개되는구나, 라는 그 기대에 부응하자면 "관계를 잘 하려면 관계를 떠나면 된다."
놀리는 말이 아니다. 중국집과 제일 관계를 잘 할 방법은 무엇일까? 짜장면을 먹고 계산을 치른 뒤 중국집을 떠나는 것이다. 음식은 다 먹어놓고도 차만 연신 주문하며 스포츠신문을 펴놓고 뭉그적거리면 좋은 관계가 어렵다.
관계라고 하는 것은 필요에 의해 임의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소비시장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관계라는 계약에 동의한 당사자들은 서로에게 기능적 용역서비스를 제공한다. 이것을 역할이라고 부른다. 관계는 이 '역할'과 '기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로간에 아무리 사랑과 우정이 넘친다 하더라도, 관계가 맺어지면 이 관계의 구성논리가 우선적으로 작동한다. 왜 그렇게 되는가?
관.계.가. 세.계.로. 착.각.되.고. 있.어.서.다.
'세계'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살. 곳.이다. 자신의 고유한 삶이 펼쳐지는 곳이 세계다. 실.존.하.는. 것.이. 곧. 세.계.하.는. 것.이.다. 간명하게 이해하자면 이것이 핵심이다. 그러니 세계를 벗어나거나 세계가 무너지면 우리는 죽는다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관계가 세계로 착각되어 있을 때, 관계 또한 이러한 두려움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자신의 역할과 기능을 잘 수행하며, 관계의 상대에게도 동등한 무게의 의무를 요구하게 되는 일은 필연이다.
세.계.라.고. 하.는. 것.을. 부.분.들.의. 총.합.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이. 착.각.이. 발.생.한.다. 이를테면 A와 B가 하나의 관계를 맺고 C와 D가 하나의 관계를 맺었을 때, 그 둘이 다시 또 모여 ABCD라는 공동체를 이루는 방식을 연쇄함으로써 세계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 그는 변신합체로보트의 왼발 2번째 발톱의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자신이 똑바로 하지 않으면 발톱이 아파 로보트가 집중을 못하고, 그 사이 사악한 악마괴물이 로보트를 파괴시킬지 모른다. 그러면 자신도 죽게 될 것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내가 무너지면 세계의 질서가 무너진다!"
자.신.이. 없.으.면. 세.계.가. 없.다.며, 이 왼발 2번째 발톱이 보이는 태도를 소영웅주의라고 한다. 자신은 아주 작은 부분으로서 관계에 헌신하고 있는 것처럼 겸손하게 행위하지만, 실은 자기의 중요성을 전체의 총합보다도 더 높게 놓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또한 관계의 논리는 중요하게 지켜져야 할 것으로 강렬히 지지된다. 관계라는 것이 소영웅주의적 주체가 영웅적 주인공이 될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무대처럼 간주되는 까닭이다. 이처럼 관계 속의 모든 이는 상대를 활용해 자기가 주인공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기를 기대하며 관계의 계약을 맺는다. 모든 계약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의 계약자 또한 자신이 상대보다 '조금 더'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를 벗어나면 바로 죽을 것 같고, 그 자리에 남아 있으면 인생의 영광을 얻을 좋은 기회도 생길 것 같고, 흡사 이것은 강제도박판에 끌려와 있는 이의 심정과도 같다. 그 심정의 한 축은 '두려움'이고 다른 한 축은 '매혹'이다. 종교연구가인 루돌프 오토가 말하기로 이것은 개인이 '신적인 것'을 조우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양가적 감정상태다. 이처럼 우.리.에.게. 관.계.는. 신.적.인. 것.이. 되.어. 있.다.
관계가 임의적 공산품이라는 말을 기억해보자. 실제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제일 많이 복제되어 팔려나간 대량생산품이 맞다. 이처럼 인간 자신이 만든 것을 인간이 신성한 것으로 숭배한다. 유한한 것이 만든 더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입지화한다. 이것을 '우상화'라고 부른다. 심지어는 흔하디 흔한 대량생산품에 '유일한 것'이라는 속성까지도 부여한다. 그렇게 이 관계라고 하는 우상은 절대적이며 유일한 것이 된다. 정말로 신의 지위다.
물론 관계라는 것이 절대로 이렇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증적으로 잘 안다.
"그 오빠 정말 나에게 유일한 사람이었어. 이런 사랑 다시는 할 수 없을 거야. ㅜㅜ 인생에서 딱 한 번 온다는 그 사랑 지금 먼저 했다고 생각하지 뭐. ^^ 이제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 ㅜㅜ 절대적이고 유일한, 그런 사랑 난 해봤으니까. ^^"
대체로 이런 실연담이 친구들에게 못 이기는 척 끌려간 헌팅포차에서 이루어지는 데는 효율적인 이유들이 있다. 취향이 아니다 싶은 남자가 접근해오면 친구들이 "지금 저희 그런 상황 아니거든요? 눈치없네 진짜."라며 원탁의 기사들처럼 용맹히 처리해줄 것이고, 쟤 좀 괜찮네 싶은 이와 멀찌감치 서로 눈치가 교환되면 담배 피우는 척 혼자 슥 나가 신비한 시한부인생의 마법소녀처럼 그를 환대할 시간을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참 좋은 사람이었구나. 네가 진심으로 사랑할 만한 그런 사람이었겠구나... 나는 거기에 비하면 다 부족해서 가진 것이 없지만... 형편없는 나란 놈이지만... 그 사람이 너한테 주지 못했던 그거 하나, 그거 하나만은 내가 꼭 줄 거야. 너, 다시는 울게 하지 않을 거야."
대충 이런 것이 관계다.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데미안 라이스가 The Blower's Daughter에서 "난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어요. 내 마음을 뗄 수가 없어요."라며 비애넘치게 노래하다가 가장 마지막 가사로 "새 사람을 찾을 때까지만."이라고 괜히 중얼거린 것이 아니다. 이 곡이 삽입된 명작 '클로저'의 주제 자체도 그러하다. 관계의 비극성은 그것이 끝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가. 근.본.적.으.로. 코.미.디. 같.은. 삼.류.연.극.이.라.는. 데.에. 있.다. 웃프다, 웃퍼.
그런데 이것이 세계라면? 이러한 세계에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죽어도 떠나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서 죽은 것처럼 살거나, 상담소를 찾게 될 것이다. 만약 우연히 찍어 걸린 곳이 실존상담소였다면, 조상님을 잘 두었거나, 전생에 운석충돌을 두 번 정도 막아내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마도 이것이 더 정확한데, 세.계.가. 지.금. 당.신.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실존상담은 '관계를 잘 하는 법'보다는, '세계를 잘 사는 법'을 안내한다. 우리는 상담소에 정말로 왜 가는가? 고작해야 몇몇의 기술적 관계를 잘 해보려고 비싼 돈을 지불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낭비다. 상.담.은. 잘. 살.려.고. 받.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잘 사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전환해보기 위해 상담을 신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를 잘 하는 일과 우리가 잘 사는 일에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 관계와 세계의 동일시를 먼저 해지함으로써 이 '잘 사는 법'에 대한 탐구는 가능해진다.
정신역동적 관점과 실존상담의 관점을 비교해보면 세계에 대한 이해는 조금 더 선명해질 수 있다.
정신역동에서 '무의식'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실존상담에서는 '세계'라고 표현한다고 말하면 아주 거칠지는 않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실제로 펼쳐지고 있는 그 현황'에 대한 묘사다. 그러나 이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각각 다르다.
- 무의식은 자기가 주체로서 삶을 펼쳐내지만, 세계는 인간이 삶으로써 펼쳐진다.
- 무의식은 인간 안에 있지만, 인간은 세계 안에 있다.
- 무의식은 '안으로'의 방향성을 갖고, 세계는 '밖으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 무의식은 그 자체가 독립적인 생물 같지만, 세계는 인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 무의식은 관계[구조]이지만, 세계는 실존이다.
- 무의식은 인간에게 '먼저' 작동하지만, 세계는 인간을 앞서지 않는다.
- 무의식은 알아야 하는 것이지만, 세계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세계를 부분들의 총합 내지 관계들의 총합으로 보는 방식은 대개 정신역동적 이해에서 나온다. 프로이트의 자아구조, 융의 집단무의식적 원형론, 이로부터 영향받은 내면아이의 개념과 분아적 접근 등은 대표적으로 총합의 양상을 띠고 있다. 총합을 내기 위한 방법론이 바로 통합이다. 이것은 더 많은 부분의 요소들을 찾아내 더해가는 것이다. 더 크게 가정된 총합일수록 덧셈의 과정은 길어진다. 그러니 정신역동의 접근들에서는 평생 분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이 당연해지는 것이다.
이것을 '보물찾기'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의식은 보물로 상정된다. 더 많은 보물을 찾을수록 개인의 부가 증대된다. 중세판타지게임의 구도와도 유사하다. 서로 역할과 기능을 잘 분담한 파티가 깊은 던젼 안으로 들어가 몬스터와 싸우면서 보물을 획득해 돌아온다. 게임을 좋아하는 이들이 무의식의 개념을 좋아하는 이유다. 꿈분석? 이것은 거의 에로스의 요소가 더해진 TRPG다. 카우치에 누워 신나는 모험도 즐기고 섹스판타지도 관음적으로 만끽한다. 최면? 이것은 좀 더 나아간다. 카우치에 누워 아예 최면가랑 섹스를 한다. "당신이 제가 찾던 그 보물이었군요!" 데미안 라이스는 이미 공연할 준비를 마쳤다. 물론 우스갯소리다. 진담은 아주 조금만 섞였다.
리니지로 돈을 벌듯, 내면의 게임만 즐기고 있으면 님도 보고 뽕도 딴다니 더할 나위가 없다. '유희'와 '생존'이라는 문화의 두 요소가 한 번에 보장되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특히 이 무의식의 개념이 특유의 무속적 지향과 맞물려 여전히 블루오션이다. 무의식만 잘 알면 원하던 모든 것을 다 이루고 세계도 정복할 수 있을 것 같다. 헌팅포차 앞에서 마법소녀의 주문을 듣고는 "너에게 내 인생을 다 바치겠어!"라고 곱게 맹세했던 그 열정처럼, 무의식은 마법주문이 되어 소비자를 뜨겁게 이끈다.
'이상한 것'에 잘 열광하게 되는 이 특질도 유전적일까? 문화적 유전자의 영향일까?
엄밀하게 현대에 들어와 무의식의 개념이 중요성을 크게 잃게 된 이유는 바로 생물학의 발전 덕분이다. DNA로 더 쉽고 간명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집단무의식과 같은 개념을 끌고와 더 어렵고 복잡하게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성향을 보일 때 "너는 네 안의 아니무스가 통합되지 않아 그래. 서울숲공원을 산책하며 다이몬의 도움을 충분히 받지 못해 그럴 수 있어."라는 설명보다는 "네가 가진 유전적 소인이 네가 사는 환경 속에서 그렇게 드러나나보다."라는 설명이 더욱 진실되어 보인다.
그러나 유.전.자.는. 무.의.식.보.다. 마.법.적.이.지. 않.다! 그러니 마법을 원하는 무의식의 팬덤은 지속된다. 물론 재미를 위해서다. 실용을 위해서라면 실험심리학의 통계적 결과로부터 제안된, 소위 무슨무슨 심리적 효과라고 하는 개념들이나, 인지과학이 연구하는 인간행동에 대한 이해들, 조직심리학의 행동주의적 관리론 등이 더욱 효과적이다.
만약에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자신의 영토를 축소하고 축소해 단지 인간이 보이는 '문화적 패턴의 세습과 반복'에 대한 설명으로만 남는다고 할지라도, 이는 사실 철학이 훨씬 잘해온 일이다. 미학은 신속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것은 심리학만의 분야가 아니다. 모든 인문과학의 공통된 주제다. 이러한 의미를 담은 밈(meme)의 개념을 벌써 50년 전에 말했던 도킨스는 심지어 생물학자다.
무의식의 생존은 과학의 영역에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그래서 단지 재미만이 아니라 무의식이라고 하는 소재를 통해 생존까지도 보장받고 싶은 무의식 팬덤은 무대를 옮겨간다. 그 무대는 바로 '종교'다.
여전히 뭔가 조금 '이상한 것'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영역은 종교다. 물론 이 종교조차도 이미 그 영토가 대다수 소실되고 남은 것은 몇 줌 되지 않는다. 그 작은 영토에 붙어 무의식의 몇몇 원리들은 자기도 종교인 척한다. 이것은 심리학과 영성의 결합을 지향하는 자아초월심리학의 발전과는 다른 이야기다. 오히려 오컬트시장의 현황에 대한 이야기다.
무의식은 '숨겨진 것'이다. 이미 오컬트의 뜻 그대로다. 그러니 오컬트의 소재들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에 적극 기생하여 정말로 이상한 저주의 나무 같은 구조를 만들어내왔다. 아무리 이상한 일을 하더라도 "무의식의 지혜입니다."라는 말로 다 떠넘기기에 수월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나 융 같은 이를 인용해서 말하면 그 모든 오컬트상품이 마.치.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효.과.까지도 생겨난다. 잠정적 고객의 신뢰도는 증가한다.
이것은 무의식이라는 개념의 '태생적 특성'과 그 '굴절된 적용'이 맞물려 이루어진 현실이다. 이 현실 속에서 분명하게, 무.의.식.은. 유.사.종.교.가. 되.었.다. 무의식을 추앙하는 이들의 성향이 교조적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이 정말로 종교현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오컬트가 그러하듯이 이는 '주술적 원시종교'의 성질을 갖는다. 신기해보이는 몇 가지 도식들을 익히고 반복적으로 실천하면, 우리가 잘 살게 된다는 것이 주술의 논리다. 숨겨져 있어서 소수의 마법사들만 아는 그 신비한 '앎'의 힘으로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발상의 뿌리가 정말로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 논의해왔다. 그러나 실용주의의 관점을 채택하자면, 모든 것은 그 '뿌리가 아니라 열매로 드러나는 것'이다. 삶으로 그 결과가 얻어진다면 아무리 '이상한 것'이라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은 종교적인 것들에 대한 윌리엄 제임스의 관점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의 오컬트'는 정말로 우리를 잘 살게 만들어주는가? 이 말의 정확한 뜻은 이러하다. 그.것.이. 정.말.로. 우.리.를. 의.미.있.게. 만.들.어.주.는.가?
우리는 이제 '의미'의 문제를 말해야 한다. 삶.은. 의.미.의. 문.제.다. 그리고 종교라는 것은 언제나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방법론이었다. 오늘날 제도종교가 몰락하고 무종교성이 범람하게 된 핵심적인 이유는, 종교가 의미를 향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교의 주술화 또는 종교의 우상화로 인해 종교가 오히려 삶을 통제하려 함으로써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역기능을 낳은 것이다. 우리는 왜 군대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매우 자주 무의미하다고 느끼는가? 자.신.의. 삶.이.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삶 그 자체이기에, 삶이 통제되는 곳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못한다.
오컬트가 기각되는 이유는 그것의 뿌리가 부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본질적으로 통제의 기제이기에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이다. '숨겨진 것'을 아무리 알아봤자 그 앎이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대해 오컬트업의 종사자들은 "알게 된 것을 천천히 조금씩 자신의 리듬으로 실천해나가면 됩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또 하나의 통제의 논리일 뿐이다. 이것은 자기가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말이다. 자기가 대사를 하지 않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정지해서 자기를 기다려줄 것이라는 깜찍한 발상이다. 게임에서는 선택지를 고르는 동안 화면이 통제되어 정지해있겠지만, 이 우주는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다.
심지어는 게임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정.말.로. 안.다.면. 선택지는 즉각적으로 응답된다. 자기가 누워있는 침대의 발치에 불이 났는지, 자기의 착각인지, 아니면 꿈속인지를 모르고 있기에, 불난 침대 위에서 뭉그적거리며 '천천히 나만의 리듬으로 진정하게 살아보자.'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콜록콜록, 요즘에는 환상의 연기가 아주 리얼하네, 라며 유튜브를 켜고 오컬트 채널을 감상해서 "아하! 뜨거울 때는 그 대극인 차가움을 경험해주면 다 온전해지는 거구나!"라는 '깨달음'을 얻은 뒤, 자신의 몸에서 가장 차가운 손을 꼭 움켜쥐며 "그래 네가 이렇게 차가웠니. 너, 그렇게 외로움 속에 홀로 방치되어 있었던 거야?! ㅜㅜ"라며 성대한 불길 속에서 감격한다. 소방관 아저씨가 와서 창문을 부수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도 돌아오는 대답은 이러하다. "아 좀. 저 온전함 느끼고 있는데, 제가 얼마나 괜찮은 존재였는지를 체험하고 있는데 방해하지 마세요."
모든 오컬트 소비의 결과다. 지난한 노력을 통해 겨우 찾은 '숨겨진 보물'에 대한 통제권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여기기에 이러한 결과가 늘 만들어진다. 이 '숨겨진 보물'을 또한 자기 삶의 '의미'라고까지 착각하기에 이것은 더욱 집착된다. 이처럼 오컬트는 그 결과에 있어 의미로운 삶은 커녕, 오히려 우리가 더욱더 의미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현실을 낳는다.
의미는 보물과 같이 숨겨진 앎을 더욱 많이 수집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삶을 살아야 발견되는 것이다. 즉, 의미는 무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것이다. 그러니 의.미.는. 세.계.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어로 진리를 뜻하는 aletheia라는 표현은 '망각의 강'인 lethe에 반대의 의미를 나타내는 접두사 a를 붙여 만든 표현이다. 상기된 것으로서의 그 뜻은 '드러남'이다. 드러난 것은 무엇인가? 숨.겨.져. 있.지 않.은. 것.이다. 진리라고 하는 개념의 화석화를 해체하기 위해 진리 대신에 실존주의자들이 자주 채택하는 용어가 의미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제 활짝 도약해서 이렇게 목록을 추가할 수 있다.
- 무의식은 '숨겨진 보물'이지만, 세계는 '숨겨져 있지 않은 기적'이다.
너무 도약했는가? 그러나 이렇게 말해야 감각적으로 더 잘 전할 수 있다. 지동설을 소재로 한 걸작만화인 『치(チ)』에서는 이러한 대사가 나온다.
"당신은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기적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옛날의 당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걸 알고 있었죠. 그러나 경험, 기억, 과거, 슬픔 등과 맞바꾸어 기적을 잃었어요. 기적은, 당신이 사는 곳이었는데."
우리는 기적과 관계맺지 않는다. 거래하지 않는다. 기적을 수단으로 다른 것을 이루지도, 다른 것을 수단으로 기적을 이루지도 않는다. 기적과 우리는 아무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기.적.을. 만.난.다.
'만남'은 '관계'의 반대어다. 관계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만.남.이. 바.로. 삶.이.다.
세계라는 기적을 우리는 어떻게 만나는가? 세계와 관계하지 않고 세계를 살아야 한다. 기억해보자. 세계는 당.신.이. 살.러. 나.가.는. 곳.이다. 그런데 그 세계는 미리 당신 앞에 깔려있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는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아직 세계가 아니다. 당신이 걸어나갈 때야 그것은 세계가 된다. 당신이 걷는 만큼만 세계는 당신에게 열려간다. 당신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세계는 세계로 펼쳐진다.
당신이 걸어나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바.로. 그. 방.식.인. 당.신.의. 실.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다른 조건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 가진 그 조건을 통해 당.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소설가라고 말하면서 소설을 쓰며 살지 않는다면 당신은 소설가가 아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카페에 앉아 소설을 쓰고 있다면, 당신은 소설가로 실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누군가는 같은 공간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 그는 지금 바리스타로 실존하는 것이다. 당신의 세계는 소설가의 세계이지만, 그의 세계는 바리스타의 세계다. 같은 사물들을 경험더라도 당신들은 서로 다르게 경험할 것이다.
개.인.이. 실.존.하.는. 방.식.의. 수.만.큼. 세.계.의. 수.가. 있.다. 개인들에게는 저마다 자기의 세계가 있다. 그래서 만남은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것이다. 그 세계가 존.재.함.을. 만.나.는. 것.이다. 만남은 이처럼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과의 만남이다.
당신이 실존한다는 것은, 당신이 세계한다는 것이며, 당신이 지금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기적을. 다들 존재하고 있었구나, 라는 말도 안되는 기적을. 너무나 당연한데도 조금도 당연하지 않은 것만 같은 이 존재함의 기적을.
만남이 이루어졌을 때 반드시 생겨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감동'이다. 감동은 의미현상이다. 의미는 감동을 통해 알려진다. 당.신.의. 세.계.가. 온.전.하.게. 존.재.해.도. 된.다.는. 그. 의.미.에 당신은 늘 감동받는다.
숨겨져 있는 것이 없다. 당신만이 당신의 가장 큰 소원을 위해 한 걸음을 떼어놓지 않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당신은 세계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당신을 위한 세계가 아직 오지 않았다며, 세계가 준비되면 과감하게 뛰어들겠다고 몸을 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관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게 맞춤형으로 모든 것을 제공해줄 것 같은 신적인 대상과의 관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세계는 준비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열어나가는 것이다.
진실로 아무 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 당신이 문 밖으로 나가지 않고 솜사탕 같은 앎이나 끌어안고서 자위를 하고 있기에,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마치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것처럼 착각되는 것이다. 당신이 태어나서 완전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 현실은 당신의 무의식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안에 있다.
앞서 말한 『치(チ)』를 완결짓는 가장 마지막의 맺음말은 이러하다.
"감동이 인간을 움직였고, 인간은 지구를 움직였다."
이것이 의미로운 삶이다. 감동을 따라 당신이 움직일 때 당신의 세계도 함께 움직인다. 감동이라는 의미현상을 통해, 당신은 당신으로 처음 태어나고, 당신의 세계도 처음 태어난다. 생물학적으로는 태어나 있었기에, 이것은 두 번째의 탄생이다.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 이 말은 아주 멋있다. 모든 내담자도 이 두 번째의 생일을 얻고 싶어서 상담실에 찾아온다. 우리가 안내할 수 있는 방향은 바로 감동이 흐르는 방향이다.
감동은 고유한 것이다. 남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 아니며, 남이 만든 메뉴얼에 따라 가능한 것도 아니다. 남들은 다 평양냉면이 걸레 헹군 물맛이라고 할 때, 우리 자신은 정자 위에서 청학이 물어다준 감로수의 맛을 느낄 수도 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로 자신을 키우시던 아버지가 직장에서 퇴근해 집안일도 다 마친 뒤 식탁에 앉아 홀로 들이키시던 동치미 국물이 이러한 맛이었겠구나, 우리는 평양냉면 속에서 아버지를 다시 발견할 수도 있다.
의미는 분명 상기하는 작용이지만, 그것은 무의식이라고 하는 기억의 저장소를 뒤져 찾아야 하는 보물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세계 안에 있으며, 곧 자신의 실존을 통해 드러나 있다. 상담은 하나하나 파내야 하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통째로 드러난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이러한 비유로 이해해도 좋다. 우리는 전생을 알아야 하는가? 지금의 자신을 만든 그 뿌리인 전생을 알아야 현생에서 제대로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무용하다. 의미없는 일이다. 전생이 있다면, 그것의 속성은 이미 현생에 다 드러나 있다. 이것은 실존주의와 불교의 시간관이다. 과거도 미래도 다 현재 속에만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현재밖에는 없다.
무의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과거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기억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커다랗게 1이라고 써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다. 숫자 1을 좋아해서 애착인형도 1의 모양이고, 사발면도 1분만 익힌다. 방안에 온통 1의 형상만이 가득하다. 그러한 우리는 문제를 열심히 풀고 있다. 분명 언젠가는 한 번 풀었던 문제 같다. 왜 이렇게 생각이 안나지, 라며 데이터베이스를 열심히 뒤진다. 자기는 이 정도는 풀 수 있는 경험과 능력을 가진 사람인데 체면을 망치면 안된다며 무의식 검색엔진에 다양한 검색어들을 입력해본다. 어젯밤 꾸었던 꿈도 대입해본다. 가만히 모르는 채로 있으면 느낌이 와서 답을 알려줄 거야, 라며 기다려보기도 한다. '930294902902920940909209110383927 - 930294902902920940909209110383926'라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다.
1이다. 너무 단순해서 이것이 답일까 싶지만, 이것이 정말로 답이다. 실존상담을 경험한 내담자들이 가장 많이 보고하는 소감이다.
"이렇게 당연하고 쉬운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게 신기해요. 그걸 오히려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는 게 더 신기해요."
당신의 실존에 이미 답은 다 써있다. 당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이미 당신이 경험하는 그 모든 것에 대한 답이다. 당신을 알기 위해서는 무의식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다. 당신이 나가서 사는 일(1)만이 필요할 뿐이다. 당.신.에.게.는. 오.직. 세.계.만.이. 필.요.하.다.
당신만의 감동이 흐르는 당신만의 세계가, 당신에게는 정말로 필요하다.
우리는 원래 자각하지 못했을 때도, 언어적인 형태로만은 제대로 된 말들을 하곤 한다. 동일한 말들은 나중에 층위가 다르게 다시 이해된다.
'모든 것이 자신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꿈꾸던 이는 정확하게 꿈꾼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꿈꾸는지만 착각했을 뿐이다. 세계라는 것은 원래 '모든 것이 자신의 의미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자신이 없으면 세계가 없다.'고 말하던 이는 정확하게 말한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만 오해했을 뿐이다. 자신이 자신으로 실존하지 않으면 세계는 원래 펼쳐지지도 않는다.
당신의 세계는 당신만의 세계다. 당신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며, 세계가 아니면 당신은 아무 것도 없다. 당신이 살러 나가서 그것은 세계이며, 당신은 그 안에 존재하는 당신 자신을 동시에 발견한다.
자신만의 세계를 소원하던 당신은, 결코 대.체.할. 수. 없.는. 당.신. 자.신.으.로. 살.고. 싶.다.고 소원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소원이다. 당신은 인간이 소원하던 그것이다. 인간은 지금 바로 그 모양 그 꼴인 구체적인 당신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이 구체적인 당신의 실존을 살면, 당신은 바로 인간을 사는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이.는. 인.간.을. 다. 가.진. 것.이.다.
이것은 위대한 역설이다. 당신이 인간에게 기여하고 싶다면, 당신은 인간과 관계맺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그저 구체적인 조건으로 드러나 있는 당신 자신을 살아야 한다. 그러한 삶이 바로 인간과의 만남이며, 인간과의 하나됨이다. 곧 '인간됨'이다. 당신이 개인일 때, 당신은 누구보다도 인간이다. 그 감동이 진하다. 그러한 당신은 지렛대가 없어도 분명, 지구를 움직일 것이다.
이것이 자신만의 세계를 살아가는 일이다. 숨겨져 있었는가? 아무 것도 숨겨져 있지 않았다. 당.신.은. 인.간.이.었.다. 이 우주의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인간, 그것이 '자신만의 세계'의 다른 이름이었다. 당신은 인간을 살며, 당신은 기적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