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과 성"
상담에서 성(性)은 생각보다 중요한 주제이지만, 생각만큼 중요한 주제는 아니다. 그래서 이것은 프로이트와 푸코 사이의 어딘가이다. 프로이트는 성의 억압이 심리적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말했다. 그러나 푸코는 이에 대해 "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정말로 억압이었는가?"를 묻는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욕망을 다루는 특정한 방식에 대해 말하는 것이고, 푸코는 그 방식이 이루어지는 구조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프로이트에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에너지다. 생명력 그 자체다. 동시에 체험적으로 성은 '있는 그대로'라고 하는 의미를 우리가 실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는 모종의 추상적 정신상태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몸에 대해 걸리는 표현이다. 성행위 속에서 서로는 서로의 신체를 있는 그대로 체험하게 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의 신체 또한 있는 그대로 체험하게 된다. 성행위는 그 자체가 있는 그대로를 허용받는 경험이기도 하다.
물론 여기에서 성행위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몸을 활용하여 이루는 자위활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즉, 상대의 신체를 이미지로 소비하고 자신 또한 포르노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하는 소도구가 됨으로써, 성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행위를 연출하는 데서 오는 작가적 통제감에서 비롯한 만족을 경험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다.
이 지점이 이제 우리가 프로이트에게 동의하지 않게 될 수 있는 지점이다. 현대에 들어와 성은 점점 더 하나의 쇼가 되어왔다. 단지 성의 상품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신의 성적 취향과 성적 자의식을 일종의 장대한 유희처럼 다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에 대해 개인이 가진 견해를 공론화하는 일이 가능할수록 그러한 개인은 마치 깨어있는 의식을 가진 인물처럼 형상화되며, 소위 쿨하고 진보적인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는 성이 '진정한 정체성찾기 놀이'의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억압의 해방인가? 성을 금기가 아닌 것으로 말하게 된 만큼, 인간은 심리적으로 더욱 건강해진 것인가? 여기에는 자유가 있는가? 프로이트의 이론은 예상치 못한 현대인의 탁월한 정신적 성장을 더는 쫓아가지 못하게 된 것인가?
공은 푸코에게로 넘어간다. 푸코는 역사 속에서 애초 성이 억압되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억압처럼 보여도 그것은 오히려 성을 촉진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이것은 성의 해방도 아니었다. 성은 억압이나 해방이 아니라 그저 관리되어 왔을 뿐이다. 바로 권력에 의해서. 때문에 성에 대한 억압을 해지하고 성을 해방하자는 이야기들이 증가하는 일은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권력의 재생산이다. 권.력.은. 이.야.기.에. 붙.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이.야.기.는. 원.래. 권.력.적.이.다.
여기에서 권력은 '앎'의 권력이다. 이러한 앎의 권력은 삶의 통제를 위해 집행된다. 앎은 이처럼 삶을 통제하려는 의지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의 권력 속에 삶을 가두려고 하지만, 자기는 그 이야기 밖으로 쏙 빠지려고 한다. 이것은 권력이 은폐되는 방식이다. 하나의 장면 속에 모두의 삶은 통제되고 있지만, 그들을 통제하는 주체는 장면 속에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 줄 착각하며, 자신을 비난한다. "내가 병신처럼 그동안 나를 억압하며 살았어요. ㅜㅜ"라며 자신의 부족함과 깨어있지 못했음을 자책한다.
니체는 이러한 앎의 권력이 어떻게 은폐되어 있는지를 발견하는 숨바꼭질의 도사였다. 푸코도 계보학이라고 불리는 니체의 이 방법론을 이어받는다. 핵심은 이것이다. 앎의 권력은 삶의 도처에 숨어들어가 삶의 전반을 통제하려 하지만, 앎 자신은 결코 포획되려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자기는 남에게 하지만, 자기가 남에게는 당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자기만 깍두기이고 논외의 존재인 치사한 숨바꼭질이다. 물론 숨바꼭질의 도사들은 기어코 이 발암직한 녀석을 바람직하게 잡아내고야 말았다.
이것은 성행위의 형상을 띤 자위활동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그 핵심은 무엇인가? 자.신.은. 상.대.의. 신.체.를. 통.제.하.면.서. 정.작. 자.신.은. 통.제.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왜? 자신이 생명을 통제할 수 있는, 생명 밖의 신적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권력과 동일시된 주체의 모습이다. 이러한 주체를 '작가적 주체'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확산시키며, 그 이야기를 통해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앎의 권력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자신이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의 논리에 이야기의 창조주인 자신이 갇혀서는 안 되는 법이다. 작가적 주체는 진심으로 자신이 매트릭스 속의 네오와 같은 인물이라고 믿는다. 남들에게는 부끄러워 말하지 않겠지만, 자신에게는 분명 자기만 이야기 밖의 입장으로 빠져 집행할 수 있는 초월적 권력이 있다고 확신한다.
당연히 완벽한 착각이다. 이러한 작가적 주체야말로 가장 앎의 권력이 활용하기 좋아하는 장기말이다. 자신이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는 가장 이야기의 노예다. 삶을 통제하려는 앎의 권력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충실한 하인이다.
정신역동적 관점에 대한 비판은 이 지점에서 출현하게 된다. 정신분석이나 분석심리학과 같은 정신역동에 속하는 접근들은 어쩔 수 없이 무의식을 관리하는 작가적 주체를 상정하게 된다. 라캉에 이르면 더 노골적이다. 이것은 작.가.적. 주.체.가. 발.휘.하.는. 권.위.의. 언.어.로. 양.떼.같.은. 언.어.들.을. 통.제.하.려.는. 기.획.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양육의 음모'다.
오늘날 트위터 등지에서 범람하는 SM의 성문화는 실제로는 무엇을 보여주는가? 양육의 현실이다. SM은 결코 충동에 사로잡혀 이루어지는 무절제한 통제의 폭력이 아니다. 주인에 의해 고도로 세련되게 집행되는 통제의 기술이다. '양육의 기술'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브랫이니 펫이니 하는 분류들이 있지만 그 핵심적 구조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다. 주인은 양육하는 자며, 노예는 양육받는 자다. 작가적 주체로 활동하는 주인의 다정하고 세심한 통제에 따라 노예는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해방시켜가며, 자신이 자유롭게 성을 즐길 수 있는 주체적 존재로 거듭난다고 간주한다. 이것은 결국 건강한 양육을 통해 인간해방의 현실이 가능하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나 이 '양육을 통한 해방'이란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말.이. 안.되.는. 말.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앎의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의 명백한 예다. 억압이나 해방이나 똑같이, 앎의 권력이 삶을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이처럼 앎의 권력은 분명하게 양육의 문제다. 권.력.은. 인.간.을. 양.육.한.다. '주인과 노예'라는 일견 폭력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언어 대신에, '목자와 어린양'이라는 친밀감 드는 언어로 양육의 관계를 설정한다.
"당신의 이야기를 하세요! 제가 들어드릴게요! 모두가 SNS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소망들을 풀어내세요!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앎의 권력이 친밀감의 탈을 쓰고 교묘하게 작동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양육적 이야기'를 통해 실은 더욱 효과적으로 인간은 통제되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해방의 이야기를 이념화하여 실천하고자 하는 대안학교나 대안공동체들에서 늘 생겨나는 권위의 모순이다. 이 모순은 사람들을 통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허용하는 척하는 방식으로 가장 통제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효과적인 통제의 전략이 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작가적 주체들은 자신이 심리치료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와 같은 수용적 양육의 방식이 오히려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부드러운 권위'가 되기에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력에 빙의된 이들의 모습이다. 쉽게 말해, 권력중독자들이다. 그리고 중독자는 누구보다도 그 중독재의 노예다.
자신이 억압받던 어린양들을, 아니 더 노골적으로 말해보자. 작가적 주체인 자신이 소외받던 가엾은 마음들을 해방시켜주는 마음의 구원자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 마음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함으로써,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친히 자신이 허용함으로써, 이 모든 해방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그는 마음들을 부당하게 찍어 누른 독재자와 같은 '나쁜 권력'에 자기가 맞서 싸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인가?
완.벽.한. 거.짓.이.다. 착각 중의 착각이며, 가장 못쓴 판타지 문학이다.
이것이 현대의 사상가들이 비판하는 근대성의 핵심이다. 앎의 권력이 스스로를 인간의 해방자로 자칭하여, 자유라는 이름으로 실은 개인을 더욱 권력의 품속에 밀어넣고 그 충실한 노예로 양육시켜가는 일, 심지어는 개인이 이 모든 것을 진취적인 자유의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발적 노예가 되게 하는 일, 세뇌에 다름아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이가 진짜 독재자다.
심리상담사들과 정신과의사들에게 빈번하게 일어나는 성의 문제들은 왜 생겨나는가? 자신들이 내담자의 성을 해방시켜주는 친절한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다. 자신에게 목자된 권위를 부여해 어린양과 같은 내담자를 향한 권력으로 집행하고 있기에 이러한 일은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 앎의 권력과 동일시된 작가적 주체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
어떠한 상황 속에서 누군가가 작가적 주체가 되려 하는 그 의도는 언제나 동일하다. 하.나.의. 상.황.이. 자.신.에.게. 아.주. 성.가.신. 문.제.가. 되.어. 있.을. 때. 작.가.적. 주.체.를. 꿈.꾸.게. 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자기의 성적 에너지를 문제로 경험하는 이가 성에 대한 앎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는 앎의 권력을 통해 성을 통제하고자 한다. 통제하는 방식은 자신이 목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양육을 시도하는 것이다. 양육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필연적으로 아이가 된다. 그렇다면 아이는 어떤 존재인가? 성.이. 미.발.달.된. 존.재.다. 이처럼 자기의 성 에너지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는, 다른 이들을 심리적 아이로 만들어 성을 거세시킨 뒤, 자기는 또한 그 아이들을 정성스럽게 양육하느라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는 목자를 자임함으로써, 성이라는 것 자체를 자신의 생태계에서 추방시키려 한다. 마치 성욕이 넘쳐 그 해소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아이를 우선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척하는 모습과도 같다.
작가적 주체들이 자기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다 불쌍한 아이처럼 보고 싶어하는 이유다. 이러한 이들은 자신을 곤란하게 하는 성이라는 불순한 소재를 없애기 위해, 이 모든 세상을 피터팬이 경영하는 '건강한' 양육의 장으로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다.
참 발칙한 지옥이다. 자기에게 성이 문제가 된다고 모든 이에게서 성을 굴절시키려 하는 이 도발적인 기획은, 놀랍게도 심리상담사를 자칭하는 아주 많은 이들에게서도 실천된다. 이들은 성을 아주 축소하거나 또는 아주 과장한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 앞에서의 두 태도다. 성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성.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들.에.게.는. 문.제.가. 된.다. 아무리 자신이 유능한 양육자로 권위를 쌓아 왔어도, 성의 에너지가 자신을 언제라도 바닥으로 추락하게 만들 것만 같다. 그 정도로 자신의 성에 대한 욕구가 크게만 느껴진다.
그러니 이야기가 만들어지며 권력에 대한 추구가 생겨난다. 이들의 부모가 "성은 나쁜 것이다."라고 말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이 그것을 억압으로 경험하며 순종했든, 그 반대로 성의 해방자처럼 저항하려 했든, 그 모든 이야기를 이들이 통째로 권력화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문제가 된다. 이로 인해, 상담자라고 하는 것은 성에 대한 앎의 권력을 가진 인물인 것처럼 형상화된다. 실제로는 상담자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마치 통제할 수 있는 양 양육이 시도되며 이 양육의 행위는 상담자의 기만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상담자가 이제 작가적 주체의 고유기술인 메타인지를 통해 자신의 기만을 돌아보며 반성함으로써, 다시금 앎의 권력은 강화된다. 이것은 이처럼 빠져나갈 곳이 없는 두더지잡기와 같은 게임이다. 권력만이 성대하다.
푸코가 의미하고자 하는 권력의 개념이, 융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의 실제적 작용이라는 사실을 눈치채는 일은 상큼하다. 융이 헤겔처럼 게르만식의 낭만적 신화에 빠져 집단무의식을 신성한 것으로 노래했을 때, 푸코는 그 집단무의식이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비판한 것과 같다. 물론 융도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사로잡히면 개인에게 파괴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원형을 체험해 '알면' 그 속박에서 벗어나 오히려 개인이 자유롭게 원형의 힘을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융은 말했다. 푸코는 이에 대해 "응, 그게 바로 집단무의식에 가장 노예로 사로잡혀 있는 모습임. ㅇㅇ"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통제하려 할수록, 양육하려 할수록, 알려 할수록, 그리고 자신이 이제는 뭘 좀 아는 권위자로 행세하려 할수록, 또 "자유롭게 나의 이야기를 시작할 거야!"라는 연예인 유망주가 될수록, 우리는 권력의 봉사자로 심화된다. 이것은 우리가 막을 수 없는 일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결코 통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그리고 상담자에게는 정말로 어떠한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 책이 실존상담 교과서이니 만큼, 우리에게는 그래도 실존이 가능하다고 말하면 좋을 것이지만, 이것도 권력에 잡아먹힐 것이다. 대체로 '구조'를 강조하는 사상가들은 "실존? 쇼하네. 너도 구조 안."이라는 취급을 한다. 다행인 것은 포스트모던의 사상가들과 실존주의가 '해체'의 전통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니체로 대동단결이다.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실천적으로 가능한 것은 바로 몰.라.지.는. 일.이다. '모름'이 왜 중요한가?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앎의 앎'으로 쌓아진 근대성은 '삶의 모름'으로 해체된다. 그런데 이것도 권력이 곧잘 낚아채는 먹이감이다.
"모르고 있으면, 정말로 알게 됩니다. ㅎㅎ"
모.름.을. 수.단.으.로. 삼.아. 앎.을. 목.적.하.고.자. 하.는. 수.작.질.에 신속히 편승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몰라지는 일이란 것은 가능한 것인가? 고작해야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작동하고 있는 선입견만을 확인하는 일이 최선이지 않을 것인가? 계속해서 앎에 대해 고착되고자 하는 자신의 편향만을 점검해볼 수 있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것이 아닐 것인가?
이것은 거의 순수성에 대한 강박에 가깝다. 마음챙김을 1분 1초 필사적으로 하는 이들이 보이는 모습과 유사하다. 모름을 수단으로 알려고 하는 가식만큼이나, 자신이 얼마나 모를 수 없는지를 점검하는 이 일도 매우 깜찍하고 피곤한 일이다.
우리는 실존의 영토로 돌아가보자. 우리가 실존적인 모름을 논한다면 어떠한 말이 형상화될 수 있을까?
"남에게 신경꺼라."
한결 좋다. 실존주의의 악명은 나날이 깊어진다. '자기만 아는 반사회적 쓰레기들' '공감무능력자들' '공동체적 진리에 대한 탐구를 포기한 비겁자들' 등등, 끝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실존주의가 보일 수 있는 가장 겸허한 태도다. 타자에 대해 감히 무엇을 안다고 설치겠는가. 또한 "모른다고, 아는 것을 포기하면 그게 사람이냐?!"라는 의도가 어떻게 앎의 권력에 봉사하게 되는지를 우리는 앞에서 길게 살펴봐왔다.
실존주의의 방향성은 이것이다. 게슈탈트의 기도문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아니고 푸코가 아니다. 우리는 '절대주관'을 향한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선(禪)과 만날 것이다.
'절대'는 대상을 제하는 것이고, '주관'은 평가를 제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남을까? 잘 알려진 스즈키 선사의 말은 이러하다.
"선(禪)은 느낌이다."
"아하! 모른 채로 가만히 느낌을 좌악 느껴주면, '응 그래, 느낌들아 와주렴. 내가 다 받아줄 거야. ㅜㅜ'라고 하고 있으면 결국 알게 된다는 말이군요!" 제발 이러지 마라. 이것은 자.신.의. 느.낌.을. 살.라.는. 말.이다. "아하!"하고 있지 말고 제발 가서 살으라. 느낌을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대상에 붙이고 있지 말고, 먼저 자신이 살으라.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 때. 느.낌.은. 대.상.을. 통.해. 우.리.에.게. 경.험.된.다.
그것은 그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이었다.
매일같이 소의 앞에 서서 "아하!"를 연발하며 소를 알아가는 이가 있다. 그렇게 소의 정보를 획득해가며 자신이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낀 그는 어느날 소의 등에 올라타보기도 할 것이다. "아하!" 그의 체험이 더 깊은 정보를 알려준다. 이제는 앎과 삶이 일치된 경지에 이른 것만 같다. '이제 소의 힘을 내가 쓸 수 있겠구나.' 지난 2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감격스럽다. 그는 2년간 소의 노예였다.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소를 본다. 소가 다른 소와 교미를 하고 있다. 푸르르 침을 흘리며 눈동자를 굴리는 격정의 모습이 웅장하다. 뒤이어 '참 추하다. 저렇게까지 살아야 되나.'라는 생각이 자꾸 올라오지만, 이미 느껴버렸다. 어떡하지?
대상을 제한 절대는 '그것이 나의 일'이라는 것이다.
평가를 제한 주관은 '그것이 해도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절.대.주.관.은. 내.가. 해.도. 되.는. 일.이.다. 무엇을? 느낌을.
당.신.은. 느.껴.도. 된.다.
섹시한 진동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것이 성이다.
느낀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이.라.고. 하.는. 몸.을. 느.끼.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느끼는 일에 남을 신경써야 하는가? 남에게 신경꺼라. 그것은 오롯한 당신의 느낌이며, 그것이 오롯한 당신 자신이다.
성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성에 너무나 많은 것이 덕지덕지 붙어버렸다. 그럼으로써 성.이. 자.기. 자.신.보.다. 큰. 것.이. 되.어.버.렸.다. 성은 자신만큼 중요하지만, 자신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성적 취향과 정체성, 기호, 문화양식을 알아야 자신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살면 성을 살게 된다. 성은 자신의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이 왜 문제가 되는지도 분명해진다. 성을 아주 성가신 문제로 경험하는 이는 자기 자신이 성가신 문제인 것이다. 왜 성가신가? 자기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서다. 그래야 어린양을 대상으로 취해 잘 키워 잡아먹을 수 있다. 그 원대한 계획에 따라 나.중.에. 느.껴.야. 할. 것.을. 지.금. 느.끼.고. 있.는. 자.신.은. 아.주. 방.해.가. 된.다. 이것은 성적 오르가즘의 초장기적 지연의 계획이다. 참다참다 나중에 대박으로 느끼면 바로 승천해서 발할라에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든다. 비루한 현실과도 안녕이다.
이처럼 자기의 신체를 떠나고 싶은 이들이 성의 문제를 호소한다. 이들에게는 자신이라고 하는 몸이 너무나 큰 문제인 것처럼 경험되며, 그만큼 성도 동일한 크기의 문제로 경험된다. 물리적인 크기와 관계없이 이들은 자.신.의. 신.체.에. 크.게. 압.도.되.어. 있.다. 때문에 이 '커다란 몸뚱이'를 어떻게든 잘 양육해서 잡아먹어 없애야, 자신은 진정한 해방감 속에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고된 목자의 삶이 보상받는 순간이다. 신체를 떠나 바야흐로 신이 되는 영광의 성취다.
이것은 쾌락의 극대화이기도 하고, 금욕의 극대화이기도 하다. 그 둘은 동일한 현상이다. 이 경우 자신이라고 하는 몸은 쾌락의 도구며 동시에 금욕의 도구다. 이렇게 몸을 도구로 잘 갈아넣어 신을 이루고자 한다. 신(身)과 신(神)의 바꿔치기며, 성(性)과 성(聖)의 바꿔치기다. 그 '신성(神聖)'이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에 '몸의 성질(身性)'은 문제가 된다. 자신이 잘 느낀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느낌을 양육하는 일에 실패하면 신성을 얻을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쾌락주의나 금욕주의나 느낌을 임의로 통제함으로써 신이 되고자 하는 일들이다.
인간이 두려워 신을 꿈꾼다. 성이 두려워 성스러운 것을 꿈꾼다. 두려우니 이야기를 만들어내 억압하려 하고 또 해방하려 한다. 어떻게든 그것을 '다룰 수 있는' 권력의 입장에 서고자 한다. 그럴수록 오히려 권력의 노예가 된다.
그런데 이것은 재미있다!
인간이 왜 두려웠을까? 성이 왜 두려웠을까?
인간을 신으로 보고 있었고, 성을 성스러운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진 것이다. 그렇게 인간을 모르고, 성을 몰라서 두려워진 것이다.
마치 자기 말고는 다 신처럼 대단한 존재 같고, 자기 말고는 다 성스러운 경험을 즐기며 제대로 사는 것 같아서, 자기 혼자 위축되었던 것이다. 모르기에 자기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더욱 두려움이 커진 것이다.
그러니 남에게 정말로 신경꺼라. 신에게도 신경꺼라.
그러면 이 자리에는 당신밖에 없다. 당신은 신인가? 성스러운 것인가? 그냥 인간이다. 여.기.에.는. 인.간.밖.에. 없.다. 억압도 해방도 필요없다. 목자도 어린양도 필요없다. 금욕도 쾌락도 필요없다. 이야기 따위가 가장 필요없다. 다 신경꺼라.
당신이 다 필요없이 그냥 인간으로 존재하겠다는 일에, 다들 신경끄라고 해라.
당신이 느껴도 된다는 것은 당신이 인간이어도 된다는 것이다.
당.신.도. 안.심.하.고. 인.간.이.어.도. 된.다.
이 말은 섹시한가? 그렇다면 당신은 섹시하다. 당신은 이제 막 인간을 몰라졌고, 동시에 그 모르는 인간을 향해 막 이동하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모르는데 왠지 매력적이며 근접거리에 있기까지 한 것이 원래 가장 섹시하다. 성은, 모르는 인간을 향한 실존의 정말 아름다운 느낌이다.